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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연보19:1894.1.11-1894.8.29(附예천방문1,497)
작성자장병창 @ 2017.12.11 06:15:47

  예천의 연보 19 : 1894(고종 31).1.11-1894(고종 31).8.29(附 예천방문 1,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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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高宗 31) : 예천지역, 칠곡 가실 본당 설정으로 그 소속이 됨. 가실 초대 본당주임 하 가밀로 신부가 청호리공소, 허리띠공소, 도경공소를 방문함. 1 11일 서양 선교사들이 예천 산달(山達)고개에 와서 설교를 하는데 오는 사람들에게 모두 음식을 대접한다 하여 이 때문에 무식한 부녀자들이 몰려가서 신자가 된다고 함. 3 26일 돌림병이 퍼졌음. 1834년의 돌림병과 그 증상이 비슷함. 4 5일 예천군의 결세(結稅, 토지세)는 최근 해마다 늘어나서 6냥하던 것이 10냥으로 뛰어 올랐음. 거기다 금년에는 지난 3년 간의 조세를 한꺼번에 추가 징세하여 도합 20냥이나 되며, 유포(儒布)라는 세금도 낼 예정임. 5 15일 예천군수가 자기 집에 갔다가 돌아왔다는데, 동학교도 때문에 관아에서 드러누워 있을 뿐 집무하지 않는다고 함(저상일월). 6월 지방행정구역(地方行政區域)8도제(八道制)로 시행할 때 경상도 예천군(慶尙道醴泉郡)이 됨

 

1894(高宗 31, 개국 503) 7 : 5일 동학교도(東學敎徒) 10, 예천읍내에 내침하여 대지주 이유태(李裕泰, 楊州大監 李裕寅의 同生)를 두들겨 거의 죽도록 하고, 돈과 재물을 약취(掠取)해 감. 7일 동학교도, 읍내에 침입하여 읍리 황준대(邑吏黃俊大)의 동생 무덤을 도굴함. 9일 동학 교도, 읍내에 와서 읍리 김병운(邑吏金炳運)을 매우 두들기고, 그의 아버지 무덤을 도굴함. ᄋ 용문면 대제리, 동학군을 방어하기 위한 동회(洞會)를 열어 동약(洞約) 을 정함. 14일 왜병들이 대구 달성을 점거하였다는 소문이 들리자 예천, 낙동, 상주, 문경, 관문(關門) 밖 등지의 주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피난간다고 함. 15일 우음동(호명산합) 동학접주 박래헌이 이끄는 동학교도 수 10여 명이 경진가점에서 안동 부사의 행차를 습격함. 15일 대제리(용문면), 집집마다 창()을 준비하여 동학(東學)을 방어하도록 계책을 세움. 16일 용문면 대제리 마을의 창검(槍劍)을 모두 점검함. 대제리, 산제(山祭)를 지냄. 19일 동학군(東學軍)이 창의(倡義) 척왜(斥倭)를 부르짖으며 강 건너 예천의 동로소면(冬老所面)까지 쳐들어 옴. 이들은 마을의 채권자(債權者)와 토호(土豪)들을 찾아내어 군량(軍糧)을 내놓으라고 독촉하였다는 것이며, 무뢰한들이 동학군에 가담하기를 마치 바람에 초목 날리 듯 함. 어떤 노비는 상전을 핍박하여 의리를 저버리고 평소 약간의 원한이 있다 해서 남을 중상모략하기를 서슴치 않음. 기강이 이같이 무너졌으니 장차 이 세상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음. 21일 동학군이 이 영장(李營將)과 곽 도사(郭都事)를 붙잡아 놓고 5백금()을 내놓으면 풀어 주겠다고 함. 동학군이 와서 용문면 큰맛찔 가점(街店)에 모였는데 이웃 마을인 작은마찔 소제동 경숙(小渚洞景淑)의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수모를 당함.

 

  ᄋ 22일 동학군이 전 경주(前慶州) 부사 조씨(趙氏) 를 불러 다 놓고 돈 1백 꾸러미를 내놓으면 풀어주겠다고 협박하였다 함. 23일 큰 비가 내림. 가뭄 50일만에 비로소 시냇물 소리가 들림. 동학군이 동쪽으로 향하여 떠남. 24일 읍민들 객관(客館)에 모여 동학 내침의 대책 마련함. 26일 군리 정대일(郡吏鄭戴一)의 주도로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함. 집강소의 임원은 다음과 같음. 집강 장문건 황송해 박인문(執綱張文健黃松海朴仁文), 검독 황돈일(檢督 黃敦一) 김시규(金時圭), 양향도감 김신근(糧餉都監金藎根) 박승덕(朴勝德) 반재원(潘在元) 배영진(裵永鎭), 양향유사 박래익(糧餉有司朴來翊) 김정한(金貞漢), 참모 장민해(參謨 張玟海) 황세하(黃世河), 별장 권기연(別將權琪淵), 문부유사 장경현(文簿有司張敬顯) 장돈우(張敦愚) 황택조(黃宅祚) 황돈해(黃敦海) 황돈세(黃敦世), 서사 황돈익(書寫黃敦益) 장남찬(張南燦) 박덕소(朴德韶) 황경해(黃敬海) 황정삼(黃鼎三), 집례 배남직(執禮裵南稷) 김창동(金昌東), 출령유사 황육증(出令有司黃六曾) 황덕기(黃德基) 박갑득(朴甲得) 장오봉(張五奉) 황효준(黃孝濬) 장태룡(張泰龍) 배삼규(裵三奎) 박주양(朴周陽) 황삼복(黃三福) 황복해(黃福海) 황주식(黃周植) 장영진(張永辰), 양향장부 박덕곤(糧餉掌簿朴德坤) 황철해(黃徹海) 황승해(黃承海), 정제유사 장윤직(整齊有司張允稷) 장치준(張致俊) 황우극(黃又極) 장도룡(張道龍) 김동근(金東根) 황이극(黃利克) 최재항(崔在恒) 장윤학(張允學), 별유사 김수학(別有司金守學) 이만성(李晩成) 장성익(張成益) 박부흥(朴夫興), 후망 최봉길(侯望崔奉吉) 황정현(黃鼎鉉) 김원수(金元守) 황윤해(黃允海), 초탐 양만필(哨探梁萬弼) 김병찬(金秉贊) 안종봉(安宗奉) 구길수(具吉守) 이팽동(李彭東) 장성욱(張成旭) 이석구(李石九), 포장 이순곤(砲將李順坤) 이수룡(李守龍) 김학세(金學世) 조재인(趙在仁), 집사 백재봉(執事白在鳳) 배태산(裵太山) 김태운(金太云), 훈도 이선옥(訓導李先玉) 우도문(禹道文), 군기도감 박제후(軍器都監朴齊厚), 군기감관 김성균(軍器監官金成均) 백제술(白悌述), 군기수선유사 김광제(軍器修繕有司金光堤) 임성필(林聖弼), 예천군 좌수 박의진(醴泉郡座首朴義鎭), 별감 권성해(別監權聖海) 이보우(李甫雨), 수교 황정화(首校黃鼎和) 김창인(金昌仁) 등임. 집강소가 관아를 대신하여 치안 유지의 기능을 맡음. 부병(部兵)에게 무장시킴. 다시 이유태의 집을 침범한 동도(東徒) 7명을 체포함 ᄋ 28일 동학군이 용문면 큰마찔 가점(街店)에 다시 옴. 마을에서 소를 빼앗긴 자가 종종 있음. 동학군들은 부정부패를 일소한다는 세구색반이란 문자를 내어걸음. 29일 예천 곳곳에 동학이 크게 일어나서 도소(都所)를 설치하였는데 서로 보일 정도로 가까이 배치되어 있음. 대개 동학도가 일어난 것은 그 명분이 뚜렷하다 하겠음. 그러나 지난 날 국침(國侵)을 당하고 사소한 원한을 가진 자가 보복할 뜻을 품고 상전(上典)을 위협하고 무뢰한이 사대부(士大夫)에게 호령하는 것이 안타까움(渚上日月)

 

1894(高宗 31) 8: 1일 동학도(東學徒)가 개미떼처럼 몰려들어 왔다가 벌떼처럼 흩어지니 길거리가 연락 두절임. 2일 동학도가 용문면 대제리의 여리(閭里)를 돌아다니면서 좌충우돌하므로 동민들은 조동(鳥洞) 방축 위로 피신하였다가 깊은 산골짜기로 숨어 도시락을 먹음. 3일 동학도들은 용문면 상금곡의 유계소(儒契所)를 점거하고 그들의 접소(接所)를 설치하여 그 위세가 매우 당당하다는 것이며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산골짜기나 숲 속으로 피신했다고 함. 4일 인동(仁洞, 예천)의 장 판서(張 判書)가 동학도의 핍박을 받아 예안(禮安)으로 피신했으나 결국 수 만 냥의 재산을 빼앗겼다고 함(저상일월). 5일 금곡(金谷, 용문면 상금곡)의 동학군 50여 명이 용문면 대제리 고갯길을 넘어가는데, 말을 탄 4명이 앞장을 섬. 6일 금곡의 동학군이 사통문을 가지고 대제리로 와서 돈 백 꿰미씩을 접소에 바치라고 함. 밤이 되자 그들은 횃불을 들고 "명성을 구하라."라고 외침. 대제리 온 마을 사람들이 놀라서 달아남. 8일 예천군 동로소면 적성(赤城, 현 문경동로) 동학접주 권경함(東學接主權景咸), 제곡면 금곡동에 설접하여 권순문을 접주로 삼고, 보수집강소(保守執綱所)에게 예천읍 지주(醴泉邑地主) 4명을 지명하여 기송(起送)을 요구함. 퇴치(退致, 유천매산) 접주 박현성(接主朴顯聲), 보수집강소(保守執綱所)에게 체포된 유천 동도(柳川東徒) 7인의 방송(放送)을 요구함.

 

  ᄋ 9일 금곡 동도(金谷東徒) 10, 북부 구산(龜山)에 내침함. 집강소가 그 중 11명을 체포하여 화적죄(火賊罪)로 한천(漢川) 가에서 매장함. 영남 동학 38접소(接所)가 용궁(龍宮)의 군기(軍器)를 탈취하여 예천읍을 습격하여 온다는 소문이 돔. 9일 이 날부터 예천읍의 경비가 삼엄해졌는데, 관민이 모두 흰 머리띠를 두르고 총을 들었는데 3천 명에 이르렀다고 함. 9일 상공접(尙功接, 尙州 功城接) 소속의 동도(東徒)인 남부 청복정민(南部淸福亭民) 최용학(崔用鶴), 안국진(安國辰) 7명이 부민(部民)으로서 동도(東徒)가 되었다 하여 집강소(執綱所)에서 그들을 체포하고, 집을 파괴함. 9일 유천 접주(柳川接主) 조성길(趙成吉), 보수집강소에게 유천 동도(柳川東徒) 7인을 방송(放送)하지 않으면 소야 접주(蘇野接主)에게 알린다고 통고함. 보수집강소, 금곡포덕소(金谷布德所)에게 보수집강소의 병비(兵備)는 간어폭객 공제생민(稈禦暴客共濟生民)의 뜻으로 만들었다고 밝히고 지주(地主) 4인의 기송(起送)을 거절함. 10일 안동 신양(安東新陽) 등지의 동학군이 크게 일어나 밤에 금계(金溪)에 들어왔다고 함. 10일 금곡포덕소(金谷布德所), 보수집강소에게 화적죄(火敵罪)로 체포(逮捕)11인의 방견(放遣)을 청함. 보수집강소(保守執綱所), 금곡포덕소에게 체포한 화적(火敵) 11인은 순영문(巡營門)의 화당쇄명지감근(火黨쇄滅之甘筋)에 따라 거주 성명(居住姓名)도 묻지 않고 즉시 매살(埋殺)했다고 회답(回答). 11일 동학군이 예천읍군(醴泉邑軍)에 생매장을 당한 이후 노략질을 멈추었으나, 인심이 흉흉하다고 함. 11일 소야 수접주 최맹순(蘇野首接主崔孟淳), 보수집강소에게 유천접주 조성길(柳川接主趙成吉)을 압송하고 죄안(罪案)을 녹송(錄送)함을 알렸고, 금곡포덕소도, 보수집강소에게 접() 중 견궐자(見闕者)5인인데, 대조를 위해 봉초시(捧招時) 초기(草記) 성명(姓名)한 것을 알려 달라고 청함. 보수집강소, 금곡포덕소에 화적의 거주 성명(居住姓名)을 묻지 않았다고 다시 회답함. 13일 각처의 동학도가 금곡(金谷, 용문면 상금곡) 마을에 총집결했다고 함. 14일 소야 수접주 최맹순(蘇野首接主崔孟淳), 보수집강소에게 청복정 도인 재수자(淸福亭道人在囚者)를 즉시 방송(放送)하라고 강력히 요구함. 15일 소야 수접주 최맹순, 보수집강소에게 살인 주창자(殺人主唱者)는 상명지율(償命之律)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통고하고 보수집강소를 설치한 사실을 추궁함. 상동(商東, 尙州東接) 접주(接主), 보수집강소에게 청복정 도인(淸福亭道人) 18인은 상공접(商功接, 尙州功城接) 소속임을 밝히고 다시는 침범하지 말라고 강경한 언사(言辭)로 위협함. 보수집강소, 소야 수접주(蘇野首接主)에게 죄의 유죄를 따지지 않고 매살(埋殺)했다는 추궁에 반박하고 상함룡(尙咸龍) 및 충주 농민군(忠州農民軍) 5천여 명의 산양 취회(山陽聚會)를 말한 다음 읍내 병비(邑內兵備)의 정당함을 주장함. 또한 보수집강소, 상주 동접(尙州東接)에 청복정 접인(淸福亭接人)의 징치(懲治)는 보수집강소의 약조(約條)에 따른 것이라고 변명함.

 

  ᄋ 19일 금곡포덕소, 보수집강소에게 보국 안민(輔國安民)이 농민군(農民軍)의 제일 선무(先務)라고 말하고 추무(秋務)를 위한 부리(簿吏)의 간평(看坪)은 공정히 하라고 요구함. 19일 보수집강소, 금곡포덕소에 우국제민지도(憂國濟民之道)는 유도(儒道) 이상의 것이 없고, 농민군이 각처에 반거(盤據)하여 수 개월 소요가 계속되어 읍리(邑吏)가 출면(出面)하여 공무(公務)를 못 보고 있다고 회신(回信). 21일 예천의 동학군, 금곡으로 속속 모여들어 읍군(邑軍)과의 일전(一戰)을 준비하고 있었음. 21일 관동 대접주(關東大接主) 13접주(接主), 보수집강소에게 11인 매살(埋殺)에 책임있는 거괴(渠魁) 몇 명을 압송하지 않으면 읍내를 공격하겠다고 정식 통고함. 보수집강소, 13접 도회중(都會中)에게 화적의 처형은 조정의 명령에 따른 것이니, 도적을 위해 설원(雪怨)한다면 '수사무회(雖死無悔)'라고 답신함. 23일 부병(部兵, 邑內 4部의 兵) 300여 명이 읍내를 나와 유천면 화지1리 밖까지 거짓 진격하여 동도군을 읍내쪽으로 유인함. 24일 화지 도회(花枝都會), 보수집강소에게 화지에 부병(部兵) 수 백 명이 침범한 것을 패만(悖慢)한 언사로 책망함. 25일 보수집강소, 소야 접주(蘇野接主)에게 지난 21일 소야(蘇野)로 간 사자(使者)가 돌아오지 않았으니, 방송(放送)해 달라고 청하고 각 접()이 화지(花枝)에 도회(都會)하는 것을 우려함. 26일 용궁 공형(公兄)이 급보를 보내 어제 동도가 군고(郡庫)의 무기를 탈취해 갔다고 함. 금곡의 동학군, 예천읍을 기습함. 27일 금곡의 동학군들이 대오(隊伍)를 짜고 금곡을 향해 행진하여

 

  돌아가는데 검창(劒槍)이 삼엄하고 포성(砲聲)이 진동함. 읍민 중에 재산을 외촌(外村)에 옮겨놓고 도망치려는 자가 줄을 이어서 집강소가 단속함. 현산 방곡(峴山旁谷)에 포병(砲兵) 100 여 명을 잠복시킴. 26일 작일(昨日) 일본 특명 전권공사 대조규개(大鳥圭介)가 자기 나라 주부산총영사(駐釜山總領事) 실전의문(室田義文)의 전보에 따라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에게 공문을 보내어 동학교도 약 3,000명이 안동에 운집하여 태봉(台封)에 있는 일본군 병참부를 습격코자 하기 때문에 그 병참부 소속 죽내 대위(竹內大尉) 외 병정(兵丁) 2명을 시켜 정탐케 하였던 바 동학교도들에 의하여 죽내 대위와 병정 1명이 용궁 지방에서 피납되었다 하고 속히 경상도관찰사에게 조회(照會)하여 동학교도들을 토벌케 하는 한편 이 대위 등의 생사를 조사하여 밝히고, 보호하여 줄 것을 요청해 온 바 있음. 이 날 외무대신 김윤식은 친군(親軍) 300명을 동원하여 이 동학교도들을 토벌하여 붙잡힌 일병을 구해내도록 영남 감영에 전칙(電飭)한 것으로 대조규개에게 조복(照覆)(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日記 高宗 31, 舊韓國外交文書 3日案 3161號 高宗 31 826, 3162號 高宗 318 27, 3163-4號 高宗 31, 駐韓日本公使館記錄 明治 27, 東學黨ニ關スル件附巡査派遣ノ件 第177號 明治 27).

 

  ᄋ 27일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 일본 공사 요청으로 친위군 300명을 용궁에 파견함. 동학농민군에 피납된 일본군을 구출하기 위함임(高宗時代史3 605). 27일 일본 <시사신문(時事新聞)>에 의하면, 함창(咸昌)의 태봉(胎封)에 주둔한 일본 병참부(兵站部)는 동도(東徒)의 형세를 파악하려고 죽내 대위(竹內大尉)와 병정(兵丁) 2명을 보냈는데, 그들이 동도 집결지 부근을 배회하다가 용궁 근처에서 동도에게 발각 포위되어 죽내(竹內) 대위는 피살되고 병정 2명은 할지 탈총(割脂脫銃) 당하고 간신히 귀대하였다고 함. 27일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 일본 공사의 요청으로 친군 300명을 용궁에 파견하여 동학교도에게 피납된 일군(日軍, 竹內 大尉와 兵丁 1)을 구출케 함(고종시대사 3 605). 827일 용궁에서 동학농민군에 피납된 일본군(장교와 병정)을 구출케 하려고 친군 300명이 파견됨.28일 유천 화지 주둔 동도군 5-6천 명이 유정(柳汀) 숲에 포진하고, 부병은 한천 장제(長堤)와 현산(峴山, 西本)에 포진함. 몇 시간의 전투에서 부병이 승리함. 용문 금곡 주둔 동도군도 밤에 내침하여 양천에서 격퇴 당함. 28일 화지 도회(都會), 보수집강소에게 읍내 공격 직전 척왜(斥倭)에 합세하기를 촉구하고, 읍내에서 농민군이 도회(都會)한다고 선언함. ᄋ 보수집강소, 화지 도회(花枝都會)에 척왜(斥倭)는 조가(朝家)에 관계된 일이니 보수집강소에서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이고, 작죄(作罪) 2인은 보낼 수 없다고 거절함. 29일 태봉 병참부(胎封兵站部)를 지원하기 위해 급파(急派)된 충주 주둔 일본군 공병대(工兵隊) 소속의 후등 공병 소위(後藤工兵少尉)가 지휘하는 공병(工兵) 25명과 일본 인부 12명은 석문리(石門里)에서 600여 명의 동도군(東徒軍)을 격퇴하고 각종 군수품을 탈취함. 29일 안동 구원병 3,031, 후군(後軍)과 액외수종(額外隨從) 500여 명, 일본군 53, 선무사 이중하(宣撫使李重夏) 등이 읍내로 내원(來援). 왜군은 동학군에 의해 동료 1명이 피살되자, 이의 보복을 위해 예천읍으로 기습해 와 동학군과 접전하였다고 함. 그리고 동학군이 강했던 예천군 각 면에서도 수 10명이 예천읍을 구조하기 위해 왔다고 하는데, 그들 중에는 상민(常民)들도 있었다고 함. 부병과 안동병 13천 명, 용문면 유계소(儒契所)의 금곡접(金谷接)을 공격하여 동도의 거점을 빼앗고, 동학교도 30- 40호를 소각함. 이로 인해 유문(柳門) 마을은 잿더미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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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1,497

 

  용궁역(테마觀光 商品으로 地域 觀光活性化 이바지하는 '慶北나드리列車' 龍宮驛 찾아...) [記事] : 기차여행과 특색 있는 지역관광자원을 결합한 테마관광상품으로 경상북도와 시.군 관광 활성화에 이바지하고 있는 경북나드리열차 시승객 환영행사가 용궁역에서 열려 이용객들의 큰 관심과 호응을 얻었다. 2017129일 오전 841190여 명의 시승객을 태우고 동대구역을 출발한 열차는 오전 1046분에 예천 용궁역에 도착, 경북나드리열차 운행 개시를 축하하는 시승객 환영행사를 가졌다. 시승객들은 정차한 열차에서 내려 역 광장에 준비된 용궁순대와 토끼간빵 등을 시식하고 주변 경관을 둘러본 후 다음 정차역인 영주역으로 향했다. 특히, 이번 열차 시승객들은 경상북도와 코레일 대구(경북)본부가 초청한 SNS기자단과 새터민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예천 지역 관광 자원 알리기에 톡톡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군 관계자는 "특히 정차역인 용궁역 인근은 물론 회룡포, 삼강주막 및 석송령 등 예천의 대표적인 관광지들과 연계함으로써 관광 활성화를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경북나드리열차는 경상북도의 풍부한 관광자원과 철도 인프라를 활용하여 외래 관광객 유치 및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한 관광상품으로 지난 1일부터 매주 토, 일요일 1회씩 운행되고 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7-12-09 오전 1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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