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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연보 21 : 1896(고종 33).1.14-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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ᄋ 1896년 1월 14일 호좌 의병소(湖左義兵所)에서 예천에 격문을 보냈는데, 의병을 일으키라는 내용이라 함. ᄋ 16일 박주학(朴周學, 周大의 동생, 자는 敬可), 예천 의병부장(義兵副將)으로서 향회(鄕會)에 나감. ᄋ 17일 예천 의병들이 군청에서 조련(組練)하는데 앞에서 수검(手劍)으로 지휘하고 총포(銃砲)를 가진 군졸 천여 명과 삼지창(三枝槍)을 가진 자 4백-5백 명이 질서 정연함. ᄋ 19일 산달(山達)에 살고 있는 박주상(朴周庠)이 예천 의병장으로 천거되었다 함. 예천 의병 부장(副將)인 장문건(張文健)이 호서의병소(湖西義兵所)로 차출되었는데 1894년(甲午年)에 동학군(東學軍)을 토벌할 때 명성이 높았기 때문임. ᄋ 20일 예천의병대장 박주상이 자리에 나와 등단함. 애통하는 윤음(綸音, 효유문)이 호서의병소로부터 예천읍에 전달되었는데, 읽는 이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함. 윤음에는 왕애왈(王哀曰)이란 글을 썼고, 또 짐(朕)이라 하지 않고 나(余)라고 칭하면서 김병시(金炳始)를 체찰사(體察使)로 삼고 계국량(桂國樑)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는다 하였으며 감사, 목사, 수령으로 하여금 모두 구제(舊制)를 따르라 지시하였다고 함. ᄋ 21일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이 용궁군수 이주의(李周儀)의 부정으로 인한 면직건(安東府觀察使 金奭中의 報告에 依하면 李周儀가 因訟納賂하고 派任捧債해서 吏辱이 交加하고 民怨이 취至하다 하기에 그 免官하는 件을 閣議에 提出함)을 내각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에게 체출함. ㅇ 21일 정해팔, 용궁군수에 임명됨. ᄋ 22일 안동부 제2사판위원(安東府第二査辦委員) 정희환(鄭憙煥),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정병하(鄭秉夏)에게 예천군에서 훈령(訓令) 여러 조(條)를 일일이 조사 기록하고, 수산역(守山驛), 통명역(通明驛)의 마위전답(馬位田畓)을 수정 양안(修正量案)하여 보고함. ᄋ 22일 관동의병(關東義兵)이 70군(軍)을 거느리고 관해(關海)로부터 풍기(豊基)를 거쳐 예천읍을 향해 오고 있다고 함. ᄋ 23일 안동의병장이 포군을 모집하여 예천읍에 당도하자 군민들이 총포를 가지고 몰려 들었는데, 병호 모순(屛虎矛盾, 柳成龍의 위패를 모신 屛山書院과 金誠一의 위패를 모신 虎溪書院의 儒林 간의 갈등)이 다시 일어남. ᄋ 24일 안동부 제2 사판위원 정희환, 농상공부대신 정병하에게 용궁군에서 훈령을 조사한 후 기록하고 용궁군 소재 두 역의 전답을 수정 양안하여 상송(本委員이 1월 22일에 용궁군에 가서 훈령들을 일일히 採探하여 別紙에 開錄하옵고 本郡 소재 大隱 知保 兩驛의 전답을 함께 修正하오니 살펴보시길 바람)함(驛土所關査員保存당01 奎17896 農商工部篇). ㅇ 1월 24일 안동부 제2사판위원 정희환(鄭憙煥)이 농상공부대신에게 보고하기를, “이 달 14일에 예천군에서 들은 바, 예안군 도산서원에서 김흥락(金興洛) 등이 의병을 일으켜 사판관(査辦官)이 오면 축출한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함. ᄋ 27일 상리(上里, 상리면)에서 포군(砲軍) 3명이 의병에 응소(應召)하였다 함. ᄋ 27일 안동부 제2사판위원(安東府第二査辦委員) 정희환(鄭憙煥),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정병하(鄭秉夏)에게 용궁군 참(站) 중 척박한 전답 도전(賭錢)을 감하여 일부는 사음비(舍音費)로 책정하고 일부는 상납함을 보고함. ᄋ 28일 예천의병소에도 전통적인 향읍 모순(鄕邑矛盾, 邑民과 鄕民 간의 갈등)이 드러남
1896(高宗 33) 2월 : 1일 예천읍 의병소의 의병들이 훈련을 함. ᄋ 2일 예천의병소에서 의병을 점호하는데, 각 마을에서 삼지창(三枝槍)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모두 의병으로 응소(應召)하였다 함. ᄋ 3일 제천의병장 서상열(堤川義兵將徐相烈)의 공문이 안동을 거쳐 예천에 전달됨. 서상열은 영호남(嶺湖南)의 도소모장(都召募將)임. ᄋ 3일 궁내부(宮內府), 사면 복권된 선조(先祖)의 토지를 자손에게 출급(出給)해 주는 건을 각의(閣議)에 제출(廉宗秀家菲를 辛酉籍沒하고 罪名은 甲子蕩滌인즉 所收財莊은 法當還給이라 今有其孫之 呈訴하여 願推厥祖之遺物하니, 豊基郡 殷豊面 所在 55斗落을 依渠願還出給이 無碍於典式故로 閣議에 提出함)함(宮內府來公文綴7 奎17882 宮內府篇). ᄋ 5일 향교(鄕校)와 서당(書堂), 그리고 문중(門中)에서 의병군 자금을 분담해서 거두었는데 모두 7천4백 냥이나 됨. 이 돈으로 병막(兵幕)과 군포(軍布), 그리고 군량미(軍糧米)를 산다고 함. 금곡(金谷, 용문 상금) 의 함양 박씨 문중에서는 80냥을 내고, 또 제곡(渚谷) 함양 박씨 문중에서도 40냥을 내는 등 향인(鄕人)들의 협조가 많았음.
ᄋ 9일 예천 의병이 출진(出陣)하였는데 마을마다 말을 징발함. ᄋ 10일 안동진(安東鎭)의 중군(中軍) 권중팔, 예천의 박주상(朴周庠), 임영창(林永昌), 이정기(李鼎基) 및 예안, 풍기, 순흥, 영천(榮川), 봉화 등 각 고을의 의병 장령(將令)들이 예천에 모여 서상열(徐相烈)을 맹주(盟主, 醴泉會盟)로 뽑고, 예천진(醴泉陣)의 부장(副將)으로 장문근(張文根, 노상인)을 뽑음. 이 때 흰 말을 잡아 피를 마시며 맹서함. 이 때 맹약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음. 1) 역적의 편이 되지 말 것. 2) 중화제도(中華制度)를 변경하지 말 것. 3) 죽고 사는 것으로 하여 마음을 바꾸지 말 것. 4) 적의 동정을 보며 나가지 않는 일이 없을 것. 무릇 우리들 같이 맹서한 여러 진은 맹서가 끝난 후에는 서로 좋은 말을 하며, 한결같이 약속을 준수하여 써 춘추의 대의를 밝히며, 써 사람과 짐승의 큰 구별을 갈라서 나라 안을 깨끗이하고, 왕실을 튼튼하게 한다. 이 맹서를 변하면, 신(神)과 함께 사람이 그를 베인다. 이상의 맹서가 있은 뒤에는 수령 중에서 왜의 편이 된다고 인정되는 예천군수 유인형(柳寅衡)을 목에 칼을 씌우고 수감함. ᄋ 11일 저녁에 예천군수 유인형이 타지에서 온 의병진에 의해 죽음을 당함. 서상열 의병장은 예천 군수의 죄를 의아하게 생각하여 가벼운 벌을 주려고 하였으나 불가항력으로 그를 구하지 못함. 타지의 의병들이 예천 군수를 처단하게 된 것은 그가 서울에서 의병을 토벌하러 예천에 온 경군(京軍)을 접대하였기 때문임. 그러나 경군은 왕의 조칙(詔勅)을 받들고 내려온 국군(國軍)으므로 지방관은 당연히 예(禮)에 따라 그들을 접대하여야 함. 그리고 예천 사람 가운데 전에 유 군수에게 송사를 제기했다가 패소한 사건이 있었는데 원한을 품고 있다가 의병진이 예천읍에 집결하자 타읍의 의병진에 그를 모함한 것도 죽게 한 원인임. 그리고 용궁군수 정해팔(鄭海八) 등을 참형(斬刑)함. ᄋ 12일(반재원의 척사록에는 15일(양 3월 28일)) 예천대회맹(醴泉大會盟)의 일곱 진 의병들은 예천읍을 출발하여 용궁을 거쳐 산양(山陽)에 도착함. ᄋ 13일(양 3월 29일) 예천회맹의 여러 진의 의병들이 모두 상주군 함창의 태봉(胎峰)을 향하여 진격하여 거의 승리 직전에 이르렀는데, 막판에 7진이 허경분방(虛警奔放)하고 말았음. 단지 서상열의 호좌 의진만이 예천 의진과 합류하여 적을 교대로 공격하기로 했으나 안동 의진이 크게 패하여 권 중군(權中軍)의 마음이 초조하여 결국 먼저 달아나 버려서 실패하고, 부득이 예천 방면으로 집결하여 다시 싸울 것을 계획함. 예천의병진에는 별포군 130명, 읍포군 70명이 포함됨. 용문면 대제리 함양 박씨는 100냥을 예천의병소에 군수금으로 냄. ᄋ 14일 예천군수, 유인형 후임으로 홍필주(洪弼周)가 부임함.
ᄋ 15일 예천 의병의 부장 장문근은 예천군 동로소면(冬老所面, 現 聞慶郡東魯面) 적성(赤城)에서 실의에 빠져 유진(留陣)하고 있는데, 문경의 이강년이 도움을 청하여도 도와 줄 수 없는 형편임. ᄋ 17일 7읍 의군은 별처럼 흩어져 군계(郡界)를 넘어 들어왔고, 예천의 진만이 서상열 의진과 적성(赤城)에서 합진함. 부읍(府邑)의 피난 보따리가 사방으로 나감. ᄋ 18일 예천 의병이 철평(鐵坪)마을에 유진(留陣)하고 있고, 태봉 병참(胎峰兵站)의 왜병(倭兵)이 용궁(龍宮)으로 향하여 오고 있음. 그들의 목적지는 예천과 안동임. ᄋ 19일 오후에 왜병이 예천읍에 들어옴. 의병소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다만 대장 한 사람만 의연하게 앉아 있고, 적성에서 예천 의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음. 이윽고 본진(本陣)이 돌아온다는 성화(星火)가 용문면 대제리를 지나가고, 의병 본진은 예천읍의 외곽지인 생천(生川)까지 옴. 이 때 왜병은 이미 예천읍에 방화(放火)하여 부장(副將) 형제의 집과 연계당(蓮桂堂), 그리고 의병의 집 5채가 소각됨. 한편 예천 의병은 야음(夜陰)을 이용하여 읍(邑)에 들어와 매복하였는데, 왜병들은 이미 읍에서 철수한 뒤였음. ᄋ 20일 첫닭이 울 무렵 왜병이 안동 쪽으로 이동하였음. 예천 의병은 왜군을 쫓아 통양(通讓)까지 갔다가 되돌아 옴. 상부장(上副將)이 읍내에 다시 의병소를 설치함. ᄋ 21일 예천 읍민들의 기강이 해이해졌으므로 의병장이 영(令)을 내려 독려함. ᄋ 23일 안동의 하회마을과 금계(金溪)마을 사람들이 명봉(鳴鳳) 마을(上里面)의 서상렬 소모(召募)를 찾아가 두 마을의 시비(是非)를 가렸는데, 두 마을에서 주장하는 바가 서로 다름. 서 장군은 관찰사 은익죄로 하회 마을의 유씨(柳氏)를 잡아들여 극형에 처하려 했으나 중단함. ᄋ 25일 서상렬이 명봉에 오래 머물고 있는 동안 많은 병사들이 모여들었다고 함. 예천읍 사창미(社倉米) 8백여 석(石)을 의병 군량미(軍糧米, 매 석당 12兩)로 전환시킴. ᄋ 26일 서상렬이 의병을 이끌고 명봉을 떠나 부포(芙浦, 하리면 부초리) 남 진사(南進士) 집에서 점심을 먹음. 안동관찰사 이남규(安東觀察使李南珪)는 부임지인 안동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하회(河回)에 머물다가 용궁(龍宮)으로 떠남. ᄋ 27일 서상렬의 의진이 부포에 유진하면서 예천포(醴泉布) 50필로 군복을 만들고 소를 잡아서 의병들을 먹인 후 안동읍으로 들어감. 그 때 정언 권경덕(正言權景德)이 나와 그를 맞이하였고, 박주학(朴周學)은 읍까지 환송하였다. 그러나 서상렬은 부포를 떠날 때 남 진사의 막내동생을 말머리에 세워놓고 군수전(軍需錢) 5백 냥을 바치게 하고, 그것으로 흡족하지 않았던지 죄를 물어 남 진사를 잡아들였음. 아무려면 며칠 씩이나 서 장군에게 대접한 사람인데,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문죄까지 하다니 두려운 일임(저상일월). 이는 서 장군이 다급하여 일일이 예의를 갖출 여유가 없었고, 한시 바삐 병력을 모아 충주의 유인석 본진을 도와야 했기 때문임. ᄋ 29일 서상렬의 의진이 신은(信隱)마을에 당도함. 그 마을 전 영덕군수 장모(張某)를 잡아들였다고 함. 서 진영이 신은마을을 떠나 예천읍에 당도함. 충주의 호좌 의진(湖左義陣) 유인석 부대가 왜병을 공격하기 위해 예천읍에 청병(請兵) 하러 온 것이라 함. ᄋ 30일 서상렬이 40명과 예천 본진 60명이 문경에 출전함. 그러나 각 읍의 의병진이 서로 반목하여 동실상공(同室相攻)함
1896(高宗 33) 3월 : 13일 내부(內部)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예천군수 유인형(柳寅衡)이 그 지방 군민이 소요할 때 피살되었습니다."라고 함(日省錄, 高宗實錄, 官報). ㅇ 20일 서상열, 예천에서 회맹함. ㅇ 29일 유생 서상열, 예천에서 연합의병부대(醴泉會盟)를 편성하여 상주 태봉(胎封)에서 일본군과 교전함. ᄋ 30일 경군(京軍)이 의병 진압을 위해 영남(嶺南)에 파병되었을 때 진주, 의성, 예천이 유독 심한 화를 입음. 예천의 피해가 많은 이유는 서상렬이 관찰사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임.
1896(高宗 33) 4월 :3일(四月初三日戊戌) 醴泉守 柳寅衡 等 被殺 : 晴佳, 往省齋洞兄主, 見加平李室書, 聞醴泉守 柳寅衡 爲暴徒所害, 寧海․盈德守亦皆遇害云。ㅇ13일 <독립신문(獨立新聞)>에 의하면, "안동관찰사(安東觀察使) 이남규가 4월 6일 군부(軍部)에 보고하기를, "참 의병(義兵)은 고종(高宗) 임금께서 선유한 치교(勅敎)를 보고 안돈(安頓)하였지만, 거짓 의병은 지금 많이 모여 행패가 무수한데, 의병 괴수 서상열(徐相烈)이 8골 의병을 모집한 것이 3,000여 명이라 본골에 웅거(雄據)하여 야료할 때, 도망하면 순검(巡檢)들이 여염 집에 들어가 무례한 행실을 하니, 부인들이 자기 젖통과 손을 베고 죽은 이가 무수한지라, 서상열이 3,000여 명 의병을 함창 태봉(咸昌胎峰)으로 보내어 일본 병정(日本兵丁)과 싸을 때 일시에 의병들이 사면(四面)으로 흩어져 서상열이 크게 패하여 예천과 풍기(豊基)로 들어갔고, 노략하고 도망하였던 순검(巡檢) 수 10인이 일본 병정과 함께 본골에 불을 놓아 수 천호가 탈 때 나라 재물과 사사 재물이 다 타고 관부(官府)는 다행히 면하였습니다."라고 함. ᄋ 19일 예천읍에 있었던 경군(京軍)이 풍기(豊基)를 향해 떠났다 하여 의병들은 포성(砲聲)을 듣고 흩어짐. ㅇ 23일(二十三日戊子) 龍宮郡守 被殺 : 半陰半晴, 寒食不見花, 昨夜俄館失火, 旋卽救滅, 燒翼室草房一間云, 龍宮守亦爲被害云。(續陰晴史 卷八 開國五百五年建陽元年 四月). ㅇ 25일 내부(內部)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예천군수 유인형(柳寅衡)이 이 지방 백성(의병)이 소요를 일으킬 때 피살되었습니다.”라고 함. ᄋ 26일 예천 의병들, 각자 본업(本業)으로 돌아감. ᄋ 26일 외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이 일본공사 소촌수태랑(小村壽太郞)에게 알리기를, "앞서 예천 등지의 의병이 함창의 일본 병참과 접전하여 패귀(敗歸)한 며칠 후 일병(日兵) 50여 명이 안동부에 들어가서 의병이 유접(留接)하던 민가 1,000여 호를 불질렀다."함(舊韓國外交文書 第3卷 日案 4033號 1896.4.27, 外記). ㅇ 27일 예천 등지의 의병, 함창의 일본 병참과 교전하여 패하여 돌아옴. ㅇ 28일 예천군수 유인형, 민중의 소요에 피살되어 면직됨(독립신문 한글판 1896.4.30). ㅇ 30일 안동관찰사 이남규가 이 달 24일에 군부에 보고를 하였는데, 참 의병은 대군주 폐하께서 선유하옵신 칙교를 보고 안돈하였거니와, 거짓 의병은 지금 많이 모여 행패가 무수한데, 비도 괴수 서상열이 여덟 고을 비도를 모집한 것이 3천여 명이라. 본 고을에 웅거하여 야료할 때 그 때 도망하던 순검들이 여염 집에 들어가 무례한 행실을 하되, 부인들이 자기 젖통과 손을 베고 죽은 이가 무수한 지라. 서상열이 3천여 명 비도를 함창 태봉에 가서 일본 병정과 싸울 때 일시에 비도들이 사면으로 흩어져 서상일이 크게 패하여 예천과 풍기로 들어가 노략하고 도망하였던 순검 수 10인이 일본 병정과 함께 본 고을에 불을 놓아 수 천 호가 탈 때 나라 재물과 사사 재물이 다 타고 관부는 다행히 면하였다고 함(독립신문 한글판)ㅇ 30일 김근연, 예천 군수에 임명됨.
1896(고종 33) 5월 : ㅇ 2일 예천군수 김근연, 의원 면직함(독립신문 한글판 1896.5.5).
1896(高宗 33) 6월 : 6일 <독립신문>에 의하면, "시골에 나아간 장관(長官)들이 군부(軍部)에 보고하기를, '예천 등의 의병들은 다 평정되었다'라고 한다." 함. ᄋ 6일 지방에 출정(出征)한 장령(將領)들의 보고에 의하면, "예천 등의 의병은 다 평정되었고, 여주의 의병만이 아직 많다."라고 함(獨立新聞). ᄋ 13일 용문에 이강년 의병이 들어옴. ᄋ 20일 <독립신문>에 의하면, 이 달에 시골에서 의병을 잡은 일로 군부(軍部)에 보고가 왔는데, 안동에서는 130여 명을 잡고, 의성(義城)에서는 12명을 잡고, 예안(禮安)과 예천에서는 흩어지고, 풍기(豊基)에서는 10여 명을 잡고 군기(軍器)와 양식을 많이 얻고, 문경 의병은 쫓고 잡힌 자가 수 10명이라고 함. ㅇ 20일 이 달에 시골에서 비도를 잡은 일로 군부에 보고가 왔는데, “예천은 흩어지고...”라고 함(독립신문 한글판). ᄋ 7월 26일 용궁군수 정해팔(鄭海八), 장수군수(長水郡守, 奏任官 6等)에 임명됨.
1896(高宗 33) 8월 : 4일 칙령 제36호로 13도제(道制) 시행에 따라 경상북도(慶尙北道) 예천군(醴泉郡), 용궁군(龍宮郡)이 됨. 각 군(郡)은 그 영역의 대소에 따라 5등으로 나누었는데, 예천은 3등 군(郡), 용궁(龍宮)은 4등 군이 됨. 대구에 관찰사(觀察使)를 둠(內部請議書4 奎17721 內閣편록과篇). ᄋ <독립신문> 1896년 8월 8일 자에 의하면, "경상북도 41군은 상주, 대구, 안동, 예천, 청송, 칠곡, 하양, 진보, 연일, 지례, 경산, 고령, 경주, 성주, 김산, 인동, 풍기, 영천(榮川), 군위, 예안, 함창, 자인, 장기, 의성, 선산, 영해, 영덕, 봉화, 의흥, 개령, 영양, 비안, 영천(永川), 청도, 순흥, 용궁, 청하, 신령, 문경, 흥해, 현풍이다."라고 하였음. ᄋ 8월 13일 통명역 마름 박윤백(朴允伯), 역인(驛人)들의 무고로 투옥되었다고 탄원서를 냄. ㅇ 14일 예천군 통명역(通明驛) 마름(舍音)인 김제경(金濟景)이 농상공부대신에게 소작료 납부 거부를 조처해 달라는 소장을 보냄. ㅇ 15일 농상공부 대신이 경상북도관찰사 이성열(李聖烈)에게 예천군의 수산역(水山驛)과 전(前) 통명역(通明驛) 작인(作人)들의 역도전(驛賭錢) 납부 저항 관련 훈령을 내림. ᄋ 15일 예천 수산역(守山驛) 마름(舍音) 김영현(金寧鉉), 농상공부대신에게 소작료 납부 거부를 조치해 달라고 진정서를 보냄(驛土所關訴題存당1 奎17895 農商工部農務局篇). ᄋ 26일 <독립신문(1896.8.20)>에 의하면, "7월 16일(陽曆 8月 24日)에 안동관찰사가 군부(軍部)에 보고하기를, 용궁군(龍宮郡)에서 의병 5명을 포살(捕殺)하였다."라고 함. ᄋ 27일 법부령(法部令) 제5호로 개정되어 경상북도 재판소 41군 중에 예천군, 용궁군이 있음(官報).
1896(高宗 33) 9월 : 정인창(鄭寅昶), 양오정(養吾亭, 豊壤憂忘)을 창건함. ᄋ 응봉 대사(應峰大師), 장안사 산령각(長安寺山靈閣)을 중수함. ᄋ 17일 탁지부, 예천군에 원래 정한 결호전수(結戶錢數)인 매 결당(每結堂) 20냥씩 외에 더 징수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함(公文編案34 奎18154 度支部篇). ᄋ 18일 용궁군수 권병직(權秉稷), 부임함. ᄋ 20일 농상공부 대신 서리 정(鄭), 유동참(幽洞站) 복호결(復戶結)에 대하여 안동부관찰사 김석중(金奭中)에게 훈령을 내림(訓令 內容 : 昌樂驛丞의 報告書에 依하면, 이 驛 所關 幽洞站의 復戶 36結을 前부터 每年 129냥씩 安東府에 還納하더니 今年에 318냥으로 出秩하고 公須位를 없앤다. 通明驛의 位土를 醴泉郡에서 定賭 督捧하여 應役하던 驛掌 등이 將至凍鳩因을 調査한 즉 復戶의 陞總과 公須에 革罷 與否는 이미 卓支部 公文에 依헤 出給이 可하고 至若 馬位土 秋收의 自邑 定賭는 事涉徑庭이다. 이에 訓令하니 各 該當 驛의 秋收는 付之驛民하고 結稅는 隨其結役하여 驛民에게 推捧함이 可하다.)(驛土所關文牒去案1 奎17898의2 農商工部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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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