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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연보25:1907.8.-1910.2.27(祝김기석/예천방문1,498)
작성자장병창 @ 2017.12.16 06:18:31

  예천의 연보 25 : 1907(융희1).8-1910.2.27(附 예천읍 출신 고 김기석, 17일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됨...고문 후유증으로 30(1936)에 타계함. 축하합니다/예천방문 1,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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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ᄋ 8월 이강년(李康秊), 권용일(權用佾, 右先鋒 및 都先鋒), 백남규(白南珪, 左先鋒), 김도곡(金道谷, 義兵將), 홍대후(洪大厚, 遊擊將), 김상철(金相喆, 坐從事) 등을 거느리고, 민긍호(閔肯鎬) 부대와 함께 예천, 용궁 지방을 습격하여 일본인 민가(民家)에 불을 지르고 재산을 빼앗고, 일본헌병분견소(日本憲兵分遣所)를 파괴함. 그 후 문경에 방어공사(防禦工事)를 하여 그 세력이 충천함. 8월 백남규(白南珪, 龍宮人), 이강년(李康秊)에게 자진하여 거액의 재정을 원조함. 8월 장윤덕(張胤德, 醴泉路上) 등의 의병, 예천우편취급소(醴泉郵便取扱所)를 습격하여 파괴하고 일본인을 살해함. 8 1일 예천고을에 충재(蟲災)가 매우 심한데 누에 같은 검은 벌레가 발은 12, 길이는 두어 치가 되어서 보리와 화곡(禾穀)은 물론이고 먹어서 여지가 없으며 인심이 대단히 흉흉하다고 예천군수 김병기가 내부에 보고하였다고 함(대한매일신보). 8 3일 일본 헌병이 예천읍내에다 병참(兵站)을 설치하고, 감히 예천향교 명륜당(醴泉鄕校明倫堂)에서 군사 훈련을 함. 8 26일 일본 헌병의 보조병을 읍헌병(邑憲兵)이라 부르는데, 이들의 기세가 일인보다 더 심하여 향중(鄕中) 사람들이 그들에게 많이 봉변을 당함. 827일 풍기읍 헌병(豊基邑憲兵)이 은풍현(殷豊縣, 上下里面)에 와서 머물고 있으면서, 조총(鳥銃)을 색출하고 재전(財錢) 을 토색하는 폐단이 일인(日人)보다 더 심함. 9월 일본군(日本軍), 14연대 및 제47연대의 대부분과 기병(騎兵) 반 소대(半小隊), 산포병(山砲兵) 1소대, 공병(工兵) 약간의 병력을 투입하여 문경 방면에 대한 대포위 작전(大包圍作戰)을 전개함. 5개의 종대(縱隊) 중 제2종대가 대구-안동-봉화-풍기-예천으로 진출하여 포위망을 압축하고 신돌석(申乭石), 이강년(李康秊), 장윤덕(張胤德) 의병 부대를 뿌리 뽑으려고 함. 그러나 악간의 피해 이외에는 민중의 비호를 받아 주력들은 거의 포위망에서 탈출함. 이강년은 소백산을 타고 예천에 이르러 일본 순사(巡査) 3명과 순검(巡檢) 2명을 살해(殺害). 9월 장윤덕(張胤德), 이강년(李康秊) 양 부대가 합류하여 문경 갈평(葛坪)에서 일본 군경(軍警)을 섬멸하고, 장윤덕(張胤德) 부대는 대구를 향해 진격하다가 도중 상주읍에서 자위단(自衛團)을 포위 공격함. 이 때 대구수비대(大邱守備隊) 1중대와 맞부딪히게 되어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의진(義陣)은 무너지고 장윤덕(張胤德)은 적에게 체포됨. 9월 김규철(金奎喆), 예천 등지에서 의병을 계속 규합하여 의병대장이 됨. 96일 용궁군수 김병기 등은 사직 청원하였는데, 내부에서 상주하고 의면되었다 함(대한매일신보). 9 13일 의병 80, 예천군을 습격하여 분파소와 일본인의 집에 돌입하여 재산을 탈취한 후에 부지 거처하므로 그 고을 사람들이 다 피난하여 읍내가 비었다 함(대한매일신보). 9 16일 의병대장 장윤덕(張胤德), 상주군 함창면 구향리(尙州郡咸昌面舊鄕里) 뒷산에서 일본 군경에게 총살 당함.

 

  ㅇ 9 19일 지난 14일 저녁에 문경군 북면 적성에서는 서원 중위가 거느린 일본군이 이강년의 의병 50명을 만나 접전하다가 일병 20여 명이 사상 당하였고, 예천군 지방에 200명 의병이 있다는 보고가 있어서 일본 군대가 정탐을 하는데, 안동과 구보중 두 보좌원은 예천군 의병에게 에워싸여 도주하다가 쫓겨서 습격 당하여 죽었다고 함(대한매일신보). 9 29일 안동군 진위대 부위 백남규는 군대해산 조칙에 대하여 불평하는 마음이 있어 대장 김귀현의 방어함을 불계하고 병졸을 선동할 뿐 아니라 탄약을 대장에게 억지로 청하여 가지고 본월 11일에 예천군으로 오다가 안동군 장사 사람을 만나 말하기를, “나는 병졸을 거느리고 의병을 모집할 터인데. 대구로 향하여 해산병을 거느릴 계획이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날 이렇게 됨은 김 정위와 안동 일진회장 송병전의 소치라 이 놈들을 살해한다.”하며, 본월 19일에 문경군 적성동에서 일본 보좌관의 일행을 퇴격하고, 이강년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함(대한매일신보). 10 13일 영천(榮川, 現 榮州)군에서 일병이 예천군에 사는 농부 2명을 그 고을 객사 대청 후면에서 포살함(대한매일신보 1907.10.31). 10 23일 예천군에 출장한 순검은 풍기군으로 가고, 일병(日兵)은 안동군으로 갔다고 예천 군수의 보고가 왔다고 함(대한매일신보). 10 18일 대룡산(大龍山)의 안 진사(安進士, 字는 養善)가 제곡면장(諸谷面長)이 됨. ()으로부터 삭발령이 있자, 다른 면장들은 모두 숨어 머리를 깎이지 않았는데, 안 진사만 머리를 깎고 집에 돌아감. 그러자 안 진사의 아내가 아연실색을 하여 말하기를, "나는 안 진사의 아내입니다. 안 진사는 이미 죽어서 없습니다. 저는 맹세코 왜인의 아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면서 며칠 간이나 단식을 한 끝에 죽어버림. 11월 의병대장 이강년(義兵大將李康秊), 신돌석(申乭石) 등이 이끄는 의병은 일월산(日月山) 부근에서 예천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활동을 함. 115일 예천군에 있는 수비대 병정 13명과 순검 1명과 통사 1명과 고을 사령 1명이 단양군에 나갔다가 7일에 돌아오는데, 수비대 병정 1명이 탄환에 맞아 상하였기에 대구 병원으로 보내고 사령 1명은 종적을 알지 못함(대한매일신보 1907.11.15). 116일 앞서 11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의병장 이강년, 신돌석의 의병이 경상북도 일월산(日月山) 부근에서 예천에 걸쳐 맹렬히 활동을 전개함(朝鮮獨立運動). 11 6일 이강년의 의병 300, 단양에서 일본군 예천수비대원을 맹렬히 공격하여 이를 예천으로 도주케 함(朝鮮獨立運動 1907.11.13, 高宗時代史). 11 6일 이강년(李康秊) 의병 300, 단양에서 일본군 예천수비대원(日軍醴泉守備隊員)을 맹렬히 공격하여 이를 예천으로 도주케 함. 11 26일 용궁군과 예천군의 내장전 역둔토 수조를 탁지부에 위탁함(訓令存案 14, 19144, 내장원편, 1114). 12 8일 운강 이강년 의병진, 예천에서 풍기 묘적령을 거쳐 단양 사동으로 옮김. 12 14일 예천군수에 이익채(李益采)가 임명됨. 12 25일 내부에서 군수 33명을 주본(奏本)하니, 임금께서 결재하였다고 하는데, 그 주본에 참여한 인명을 들어보니, 용궁 유봉환, 예천 이익채였다고 함(대한매일신보)

 

1908(隆熙 2) : 의병의 出沒地域 : 이때 의병의 出沒 地域은 경기 지방은 朔寧, 漣川, 坡州 등이었고, 관동 지방은 平昌襄陽 등이며 해서 지방은 延安, 白川, 平山 등이었다. 그리고 水原, 廣州, 楊州, 江華, 加平, 竹山, 陽城, 開城, 春川, 高陽 등지에는 100명 내지 10명이 떼를 지어 동서로 출몰하였다. 安州, 孟山, 平壤, 陽德, 永興, 安邊, 遂安, 載寧, 天安, 牙山, 鎭川, 洪州, 海美, 瑞山, 新昌, 靑陽, 泰安, 忠州, 丹陽, 鴻山, 林川, 連山, 淳昌, 興德, 高敞, 醴泉, 奉化, 盈德, 河東, 安義 등지에 출물하였다. 그리고 智異山 碧松菴에서 대회를 열고 또 長城, 潭陽, 綾州, 靈山, 羅州, 靈巖, 長興, 寶城, 谷城, 順天, 咸平, 明川, 端川, 長津 등지에도 출몰하였으며, 鏡城에는 崔德俊의 병대가 있었음.(梅泉野錄 第6).1월 죽포 김순흠(竹圃金舜欽), 성품이 본래 고집스럽고 지조가 강하여 몸에 양목(洋木) 등은 전혀 걸치지 않음. 그래서 이웃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정도임. 그런데 그의 아들이 주사(主事, 日人들의 앞잡이)가 되어 돌어와서 봉양하려 하자, 이를 단호히 물리쳤으며 마치 귀머거리처럼 세상 일을 들으려 하지 않음. 어느 날 어떤 이웃 사람이 다가와서, "우리나라 토지가 모두 일인들의 판적(版籍)에 오르고 거둬가는 국세도 오로지 일인들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간다."라고 말해 주자, 마침내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죽기를 맹세함. 며느리가 숟가락으로 음식을 들기를 간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23일 간 단식(斷食) 끝에 숨을 거둠. 그는 유언하기를, "내가 죽더라도 국권이 회복되기 전에는 일제 땅에서 나는 곡식과 채소를 내 제삿상에 올려 놓지 말라."라고 당부함. 그래서 며느리는 유언에 따라 평소 시아버지가 산전(山田)에다 파종한 곡식과 산에 나는 산나물만 캐다가 제삿상을 올렸다 함. 임종하면서 채미가(採薇歌)를 지었음. ᄋ 만강정(晩岡亭, 知保所華), 이의(李誼)를 위해 후손에 의해 세워짐. ᄋ 사정(思亭, 普門澗芳), 안수인(安壽仁)을 위해 후손이 중건(重建). ᄋ 의병대장 이강년(義兵大將李康秊), 예천(醴泉) 용궁(龍宮) 지방의 일본인과 싸움. 13일 예천 북쪽 1.2km 지점에서 신돌석(申乭石), 이성운(李聖雲, 金聖雲), 유시영(柳時榮, 柳時淵) 등의 의병 100여 명 중 35명이 순국함. 1 3일 의병 100여 명, 예천 북방 지역에서 일본군과 접전함(援護處 獨立運動史).

 

  ᄋ 1 3일 의병 50여 명, 감천면에서 일본 헌병 30명과 교전함(皇城新聞 1908.1.19, 義兵抗爭史). 1 3일 감천면 지역에서 북방으로 20리 되는 땅에 의병이 군기를 가지고 매복하였다 함을 일병이 탐지하고 순사 3명과 통변 1인과 순검 1명이 급히 가서 접전하였다 함(대한매일신보 1908.1.12). 14일 의병, 감천면 지점(芝店) 북방에 잠복 중 일본군과 교전함(황성신문 1908.1.12.).

 

  ㅇ 1 14일 군수 주본(奏本)이 이제야 비로소 주하(奏下)가 되었는데, 예천은 이익채, 용궁은 유봉환이 서임됨(대한매일신보). 1 31일 경북 각 군에 일인 소유 가옥을 조사하여 내부에 보고하였는데, 예천에서는 집 8호임(대한매일신보). 3월 의병 20여 명, 풍기군(現 醴泉郡) 하리면에 출현함(韓國獨立運動史資料 1067). 3 18일 의병 김달반(金達飯)과 그의 아들 김낙영(金洛榮), 하리면 우곡리 정자촌(亭子村)에서 일군 영천(榮川)수비대에 피체됨(韓國獨立運動史資料 1066). 3 24일 의병장 이강년(李康秊) 휘하 460여 명, 풍기군 (現 醴泉郡) 상리면 백석리 백동(白洞)을 습격함(皇城新聞 1908.4.3, 韓國獨立運動史資料 11387). 4 24일 이강년 의병대 400여 명, 풍기군(現 醴泉郡) 상리면 석묘리 백동(白洞)을 습격함(韓國獨立運動史資料 11214). 5 10<대한매일신보>의 기사에서 기록하기를, “용문사는 예천군 용문산에 있는데, 신라 말에 두운이라는 도승이 이 산속에 암자를 짓고 공부를 하더니, 고려 태조가 두운의 이름을 듣고 찾아보려 하여 그 산 동구로 들어서니 암자는 간 데 없고 큰 용 한 마리가 바위 위에서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지라. 태조가 두운의 도술에 감동되어 크게 절 하나를 짓고 산 이름을 용문이라 하며, 절 이름도 용문이라 하였더니 고려 명종 때에 태자(22代 康宗)의 태를 그 절 뒤 봉우리에 묻고 그 절 이름을 다시 고쳐서 창기사라 하였는데, 지금도 구름이 항상 그 봉우리에 둘러있으며 용의 소리가 들린다고 함”(대한매일신보). 6 7일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 150, 봉화군 천평리(川坪里)에서 예천영천(榮川)수비대와 교전하여 의병 48명 전사하고 총기 54정 등이 피탈됨(韓國獨立運動史資料). 6 15일 의병 30, 충북 단양 부근에서 일본군 예천수비대와 교전하여 의병 4명이 전사함(韓國獨立運動史資料). 7 19일 의병 8, 충북 단양 남방 약 30리 지점에서 일본군 예천 현촌분견대(醴泉縣村分遣隊)와 교전하여 의병 3명이 전사함(韓國獨立運動史資料). 8 16일 예천군 훈령(醴泉郡訓令)에 따르면, 사묘(祠廟), 당각(堂閣) 및 명장(名將), 충효열(忠孝烈)이 있으면 기록하여 보고하라 함. 9월 의병대장 김규철(金奎喆), 소백산 죽령(竹嶺) 지역에서 예천, 단양, 제천, 영주 등지의 의병 400여 명을 이끌고 왜병(倭兵)과 싸워 5차례나 승리함. 98일 예천에서 의병이 왜적(倭敵)과 싸움.(梅泉野錄 第6)108일 의병 20여 명, 경북 서풍천(西豊泉) 흑곡동(黑谷洞)에서 일본군 예천헌병분견대와 교전함(韓國獨立運動史資料, 대한매일신보 1908.10.22 1908.10.29). 1011일 경북 각 군에 은결도(隱結稻)가 매년 엽전으로 10만 냥인데, 갑진년분에 경상북도 관찰사 장승원이 그 폐단을 혁파하였더니 예천군수 김병기, 의성군수 이인성이 그 혁파된 것을 몰래 받아먹자, 두 고을 사람들이 발기하여 그 돈을 찾아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그 관찰사에게 청원함(대한매일신보). 11 7일 지난 10월 하순에 예천 등지에 의병 몇 명이 출몰하였다 함(대한매일신문).

 

1909(隆熙 3) : 손종우(孫鍾禹), 부 진후(父鎭厚)의 수양지(修養地, 龍門杜川)인 바위에 <요빈암(激賓岩)>, <용암대(龍岩臺)>라고 각자(刻字). 2 3일 예천읍에는 군 관리들의 토색하는 풍속이 심하여 매년 교량 수축을 한다 하고 돈을 배람하여 민폐가 대단하더니, 금년에는 더욱 심하여 각 면 각 동에서 수 천 금을 거두고도 교량 역사는 촌민을 풀어 부역을 시키니... 백성은 점점 살 수 없어 협잡과 토색만 생긴다고 원성이 하늘에 울림(대한매일신보). 2 10일 근일에 일본 사람들이 한국 내지에 많이 들어와서 영업하는 자가 점점 느는데, 예천군 등지에 더욱 많이 거주하며 흔히 잡물화 장사와 돈 바꾸는 장사를 함(대한매일신보). 3 6일 경북 화적(火賊) 3, 감천면 오응근(吳應根) 집에서 약탈함(韓國獨立運動史資料). 4 23일 화적 7, 예천군 제곡면(渚谷面, 現 龍門面) 백화동(白化洞)을 내습(來襲)하여 최만성(崔萬成) 2명을 납치함(韓國獨立運動史資料). 5 22일 의병 약 60, 풍기군(現 醴泉郡) 상리면으로 내습함(韓國獨立運動史資料 14355). 7 7일 예천, 안동, 영주의 일병(日兵)이 일제히 낙동(洛東)과 용궁(龍宮)을 향해 떠남. 711일 의병 약 2,000여 명, 풍기군(現 醴泉郡) 상리면 송천동(松川洞)에서 영천(榮川)수비대와 교전함(韓國獨立運動史資料 1560). 7 12일 원주소모장(原州召募將) 인솔 의병 17, 풍기군(現 醴泉郡) 하리면 현촌리(縣村里)를 내습함(韓國獨立運動史資料 1560). 7 14일 상주 예천 등 군은 1/3이나 모를 내었으나 가뭄이 연속되어 농민들이 크게 근심함(대한매일신보). 8 7일 의병 30, 감천면 졸입동(猝入洞)에 내습하여 일진회원(一進會員) 송종락(宋鍾洛)을 납치함(韓國獨立運動史資料). 9 8일 의병 6, 예천군 제곡면(諸谷面) 금리(金里) 이장(里長) 김표진(金俵振) 집을 내습함(韓國獨立運動史資料). 9 26일 예천, 전신 업무(電信業務)를 개시함. 10 26일 경북 의병 13, 예천과 감천면에서 일본군 헌병분견대와 교전함(韓國獨立運動史資料) 10 26일 의병 13, 예천읍에서 일본헌병순사대와 접전함. 1114일 예천군에 사는 김천수와 곽모, 지난 달 경에 그 고을 감천면을 지나가다가 일본 헌병을 바라보고 겁이 나서 도주하므로 그 헌병이 총을 여러 번 쏘아서 김천수는 당장 죽었고, 곽모는 중상하였다고 그 고을 군수가 내부로 보고함(대한매일신보).

 

1910.1 : 15일 최성천(崔聖天), 윤국범(尹國範, 普門斗谷) 등 의병 15명이 보문면 산성리에 들어가 동민에게 의병운동 자금을 요구함.

 

1910.2: 24일 의병 11, 보문면 기동(基洞)을 내습하여 3명을 납치하여 감(韓國獨立運動史資料). 26일 의병 22, 보문면 우래곡(友來谷) 부근을 내습함(韓國獨立運動史資料). 27일 의병 33, 감천면 현내동(縣內洞)을 내습하여 2명을 납치하여 감(韓國獨立運動史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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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천읍 출신 고 김기석, 17일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됨...고문 후유증으로 30(1936)에 타계함. 축하합니다.

 

  김기석(故 김기석 先生 建國勳章 愛國章 追敍) [記事] : 예천읍 태생의 독립유공자 고 김기석 선생이 2017 1117일 제78회 순국선열의 날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돼 포상을 받았다며 조카 김영순(예천읍· 전 예천서예학원장) 씨가 뒤늦게 알려왔다.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은 일제에 국권을 잃었던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고, 대일항쟁기 국권회복을 위해 항거하다 순국한 선열의 위훈을 기리는 자리다.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고 김기석 선생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동맹휴업에 참여하고, 19326월 예천에서 한일당 등과 함께 농민조합을 결성하려다 동지의 체포로 실패했다. 같은 해 11월 다시 비밀결사 예천무명당에서 조직 확대에 힘쓰다가 체포되면서 징역 3년을 치렀다. 김 선생은 고문 후유증 등으로 출옥 후 1년 만에 30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김기석 선생은 슬하에 11녀를 두었으나 아들은 6·25 전쟁 때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훈장은 외손자인 황정기 씨가 대신 받았다.(醴泉新聞 20171215() 15:2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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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1,498

 

  한국농업경영인 예천군연합회(農業現實 타계, 對策要求 최교일 議員 招請 懇談會 : ()韓農聯 醴泉·榮州·聞慶 市郡聯合會 任員) [記事] : 한농연 문경·예천·영주 3개 시·군 연합회 임원 80여명은 20171210일 낮 12시 예천읍 예천축협한우프라자에서 최교일 국회의원 초청 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간담회는 어려운 농업 현실 타계와 대책을 요구하기 위해 예천군연합회(회장 윤희열)의 요청으로 개최됐다. 최교일 국회의원은 "지난해 3개 시·군 한농연 회원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도움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오늘 간담회를 통해 제시된 안건들은 국회 및 관계 기관을 통해 적극 관철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최교일 의원의 지역구인 문경·예천·영주 3개 시·군 한농연 임원들은 '농업인들이 걱정 없이 농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농업 분야 관련법 개정, 김영란법 개정 촉구와 새로운 농정정책 등 획기적인 방안, 지방선거에 농업인들의 비례대표 반영' 등을 요청했다. , 각 지역별로 '농가총기 규제완화, 무허가 축사 양성화, 공공비축비 우선지급, 농산물가공시설 규제완화, 관내 외지인 기업에 현지인 고용촉구'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개선을 요구했다. 최교일 의원은 "오늘 한농연 임원들이 요구, 제시한 사항들은 관련 기관과 협의해 농정정책에 빠른 시일에 개선·반영 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말했다.(醴泉新聞 20171215() 15: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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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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