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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14 : 가옥에 대한...가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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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정감록>에는 ‘금당 북쪽 10리에 피난처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며, 한국전쟁 때는 금당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한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곳은 인민군이나 국군이 한 번도 거쳐 가지 않은 난을 격지 않은 곳으로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져 있고, 좌우익의 이념 다툼이 심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마을에서 피해를 본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동네 어른들의 제보에 의하면, 최초의 마을 위치는 ‘큰등’의 동쪽 계곡인 ‘동녘골’이었다고 한다. 동녘골의 좌향은 남서향으로 ‘골 밖에서 도지 받아 오는 터’라고 한다. 마을 주변은 물론이고, 마을의 범주를 넘어서는 계곡 바깥까지 마을 사람들이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그곳에서 토지의 임대료를 받아올 절도로 마을이 부가 축적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을 뒤쪽 선동(용문면 선리)으로 통하는 재가 있어 그 고개 너머로부터 자주 도둑이 들고, 마을에도 역적이 생기는 등 좋지 못한 일들이 발생하자, 마을을 정랑공 묘소의 우백호 자락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 위치는 현재 마을 입구 쪽인 '대밭'이었으며, 이곳에서는 지금도 기왓장 조각과 사금파리가 밭에서 많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다가 차츰 현재의 위치로 마을이 옮기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1960, 70년대 이농이 시작하기 전 마을의 가구수는 무려 27가구까지 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지세는 제비혈이라고 하며, 그런 연유로 이집저집으로 자주 옮겨다니고 집에 필요한 공간을 새로 만들어 짓는 것이 좋다는 인식이 강하다. 제비가 해마다 집을 새로 짓고 옮겨 다니듯이 그리고 지븡을 지을 때 흙을 물어와 붙여 가면서 짓듯이 그렇게 하면 집이 잘 된다고 한다. 그래서 해마다 벽에 흙칠이라도 한 번 덧칠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그렇게 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정황을 반영하듯 대부분의 집들은 뒷벽이 일직선인 경우가 별로 없다. 이집저집 옮겨 다니면서 필요에 따라 도장방 등을 덧붙여 만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한 가구가 완벽하게 하나의 집을 지은 경우는 드물고, 여러 가구들의 손을 거치면서 증축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집과 대지의 소유 관계가 일치하지 않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서로 집을 바꾸어 살고 옮겨 다님으로써 빚어진 현상이다. 집들은 대체로 한국전쟁을 전후로 해서 지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지형적으로 보아 대부분의 집들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그렇지 때문에 해를 중심으로 보아서 ‘돋을 양지’에 위치하고 있다. 해가 돋을 때 양지가 된다고 하여 ‘돋을 양지’이다. 그 반대는 ‘질 양지’이다. ‘돋을 양지’와 반대로 해가 질 때 햇볕을 많이 받는 곳이다. [마을 地圖] : 구조상으로 보아 마을의 가옥들은 전부 흙벽돌로 벽을 쌓아 만든 흙집이고, 지붕은 원래 초가였으나 새마을사업으로 1970년대부터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당시 일일이 지게로 슬레이트를 큰길에서부터 짊어지고 옮겨왔다고 한다.
어느 한 집을 지붕 개량할 때 동네 사람들이 모두 동원되어 슬레이트를 한장두장 머리에 이고 지게에 져서 날랐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집의 정면은 문과 출입구 등을 내기 위해 기둥을 세우고 도리를 올린 형태이다. 벽면이 없기 때문에 서까래를 지탱할 받침 역할을 기둥과 도리가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정면에서 보면 나무로 기둥을 한 집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형태상으로 보아 일 자형, 기역 자형, 디귿 자형 등의 집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집의 중심이 되는 안채는 일 자형의 흙집 형태가 대부분이다. 집의 규모는 안채의 경우 대체적으로 15평 내외로서 안방, 사랑방, 부엌(주로 정지라고 부른다), 봉당, 도장을 구비한 형태가 전형이라 할 수 있다. [男女有別의 觀念과 空間 配置] : 공간 배치의 일반적인 형태는 사랑방과 부엌 사이에 안방이 있으며, 부엌이 남쪽에 위치하면 사랑방은 북쪽에, 부엌이 북쪽에 위치하면 사랑방이 남쪽에 있게 된다. 이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마을길이고, 다른 하나는 부엌에서 솥의 물을 푸는 방향이다. 마을의 가옥들은 앞마당과 마을 길 사이에 대문이 별도로 있는 집이 없다. 그러나 외부 사람들이 집을 방문했을 때 가급적 쉽게 눈길이 가지 않는 위치에 부엌이 위치한다. 그러므로 마을길에서 가장 먼 곳에 부엌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고, 반대로 사랑방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이는 외부 손님이 여성들의 공간인 부엌 쪽을 가급적 거치지 않도록 배려한 것에서 비롯한 것이다. 물론 방문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남의 집을 방문했을 때 부엌 쪽을 지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가급적 눈길도 부엌 쪽을 두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로 간주된다. 여성들의 공간인 부엌과 안방 주위를 외부의 남자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것은 남녀간의 내외하는 방법임과 동시에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절이었다. 대개 집들은 길에서 집으로 들어가면 안채를 거치지 않고 사랑채로 바로 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남자 손님들이 집을 방문하는 사랑방으로 가는 데는 별 애로가 없다. 하지만 주변의 집들이 사람이 살지 않게 되고 헐리게 되면서 길이 바뀌게 되었다. 편리한 빠른 길이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물론 마을에 가구수가 현격하게 줄고 집안간의 격식도 완화되면서 내왕하는 예절도 약화되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사용되지 않던 길이 자식들과 손자, 며느리, 시집 간 딸 등이 있는 그런 특별한 날 만큼은 다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격식과 예절이 다시 살아나는 날이 된다. 남녀간의 내외 관념은 집 구조에서도 잘 드러난다. 마을 대부분의 집에서 안방과 사랑방 사이에는 긴 벽이 가로놓여 있다. 이 벽에는 통할 수 있는 문이 일체 없다. 안방 앞에는 봉당이 있지만 이 봉당에서조차 사람방으로 곧바로 통하는 통로는 없다. 안방에서 사랑방으로 왕래하려면 봉당을 완전히 내러와 처마 밑에서 다시 사랑방 앞의 계단을 통해야 한다. 봉당과 사랑방 사이를 벽으로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는 편리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현대적 감각으로는 사뭇 다른 가옥 구조이다.
[초복 관념(招福 觀念)과 공간 배치] : 집의 공간 배치에 작용하는 요소로서 남녀유별이라는 내외 관념 이외에도 초복과 관련한 공간 배치의 원리가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는 부엌의 위치로서, 더 정확히는 솥을 거는 위치이다. 솥은 주로 음식물을 조리하는 조리 기구로서 그 속에는 물을 비롯한 음식물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이때 내용물을 먹거나 사용하기 위해서는 주로 바가지 등으로 퍼서 끄집어내야 하는데, 오른손을 사용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내용물을 퍼내는 방향이 어느 쪽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주변의 지형을 보아 높은 곳으로 향해 푸는 것을 ‘치푸다’ 혹은 ‘치푼다’라고 하고, 낮은 곳을 향하면 ‘내리푸다’ 혹은 ‘내리푼다’라고 한다.
이때 솥 안의 음식물은 가족원들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먹거리로서 재물에 비견된다. 그래서 내리푸게 되면 재물이 낮을 곳인 아래로 흘러내려가 버린다고 간주하고, 대신 높은 곳을 향해 치푸게 되면 보다 높은 곳으로 퍼내기 때문에 다시 낮은 곳인 부엌으로 흘러든다고 생각한다. 곧 내리푸게 되면 복이 나가고, 치푸게 되면 나간 복도 흘러 들어온다는 것이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성질처럼 재물도 흘러드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물과 재복(財福)을 동일시하는 유사 관념이 보인다. 강영환의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관념은 영남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옥의 공간 배치 원리라고 하며, 부엌의 위치를 풍수의 좌향으로 결정할 수 없다 하더라도 민간에서 ‘물이나 쌀을 들여 푸는 방향’으로 배치한다고 한다. 여기서 ‘들여 푸는’ 방향이 바로 조사지에서의 ‘치푸는’ 방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을의 지형상 집들은 대부분 동쪽을 향해 있고, 뒷쪽인 서쪽이 마을에서는 높은 곳이 된다. 이 경우 부엌에서 솥의 물을 치푸기 위해서는 주로 부엌의 위치가 집의 남쪽에 있어야 가능하다. 즉 남쪽에서부터 부엌, 안방, 사랑방을 차례로 배치하는 것이 이 관념에 들어맞는 배치 방법이다. 그러나 실제는 이와 반대인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해 뒷산의 지형과 마을 형상이 완전히 남북으로 펼친 것이 아니라 동쪽 방향을 행해 에워싼 형상이기 때문에 물을 푸는 방향이 직접적으로 낮은 곳을 향하지 않으면 별 문제가 없다고 한다. 원리를 교조적으로 적용시킬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조건만 만족시키면 별 문제가 없다는 식의 사고이다. 이는 원리의 적용 이전에 제한된 마을 공간 내에서 모든 가옥의 배치를 한결같이 완벽하게 할 수 없는 현실성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협소한 마을 공간 내에서 이집저집 모두 함께 살아가야 하고 특히 시기적으로 뒤에 짓는 집은 제한된 마을 공간 내에서 그러한 원칙을 모두 만족하게 충족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좋은 땅, 좋은 조건으로 모든 인간이 다 차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는 집이라는 주거 공간이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집 주변의 배수가 아주 중요하다. 특히 현대의 건축물과 비교할 때 전통 가옥들은 기초가 상대적으로 튼튼하지 못하고 벽도 약하다... 흙집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수나 집 주변에서 흘러드는 물의 배수를 위해 도랑을 잘 내어 주어야 집이 튼튼하게 오래 유지될 수 있다. 집 주변의 배수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도랑을 낼 때 가급적 도랑물이 하나로 합쳐 흐를 수 있도록 유념한다는 점이다. 도랑물이 한 곳으로 모여 흐르는 것은 그 집안의 자손들이 갈라짐이나 끊어짐 없이 대를 이어 내려가 영원한 지속을 유지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도랑을 두 갈래 세 갈래로 내면 집안이 분열하고 자손들이 갈라지는 것을 본다. 물은 아래로 흘러 내려갈수록 큰 물을 이루 듯이 그렇게 집안이 번성하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념은 관념적 수준이 아닌 실제적인 기능과도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이곳저곳으로 물길을 내어놓으면 그만큼 배수 관리도 어렵게 된다. 집 주변에 이리저리 배수로를 파는 것이 번거롭기도 하고,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배수하게 됨으로써 집 주변의 땅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기도 하다.
[마무리] : 용문면 원류리 허리골에서 가옥의 공간 배치 원리는 크게 남녀유별의 내외 관념과 초복 관념이 작용한 것으로 이해되며, 두 원리는 상호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공간 배치에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마을길의 위치에 따라 부엌과 사랑방의 위치가 달라지기도 하고, 그 것으로 다시 초복 관념과 관련시켜 맞지 안을 경우 부엌과 사랑방의 위치에 따라 마을길이 새로 나거가 조정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개별 가옥 내의 공간 배치와 마을길은 조정 단계를 거치면서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사랑방은 길에서 가까운 거리에 부엌과 안방은 먼 거리에 위치하고, 그러면서도 가급적 부엌 솥의 물을 치푸는 방향으로 위치하도록 짓는 결과를 빚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원리는 마을길과 개별 가옥들 간의 공간 배치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아울러 옛 마을의 상태를 복원하는 데도 역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 용문면 원류리 허리골의 경우 1970년 이후 마을의 가구수가 크게 줄어들고, 그렇게 생겨난 빈집들이 허물어지기도 하면서, 마을길은 심하게 바뀌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는 몇 가구 되지 않는 마을이지만 마을길을 비롯한 본래의 옛 모습이 이미 묘현해진 상태이다. 하지만 집의 배치 상태가 확실하다면 처음 상태의 그 집 대문과 마을길의 위치를 공간 배치의 원리에 의해 대강이나마 가늠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해 진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집은 인간이 만든 문화의 창조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기에 어떤 물질문화보다도 인간의 사고와 문화적 내용을 잘 함축하고 있는 듯 하다. 가옥의 공간 배치에 대한 이러한 원리는 그러한 점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tolkpia.hihome.com 2002)
가온과 균체첨가에 의한 연질 치이즈 숙성중 단백질 분해성향에 관한 연구(加溫과 菌體添加에 依한 軟質 치이즈 熟成中 蛋白質 分解性向에 關한 硏究 =A Study on the Effects of Elevated Ripening Temperature and Bacterial Cell Lysate Addition on the Proteolysis of Soft Cheese) [學術저널] : 지보면 신풍리 출신인 윤영호(尹永皓, 1941- , 中央大 敎授)의 논문으로, 한국낙농학회에서 1986년에 발행한 <한국낙농학회지(韓國酪農學會誌 =Korean journal of dairy science)> Vol.8 No.1 40-47쪽(8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
제어번호 3255917, KDC 527이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전주대(학술정보관), 연세대(중앙)이다. [초록] : 新鮮한 牛乳로 軟質치이즈를 製造한 후 熟成溫度를 7℃ 및 15℃로 하여 熟成進行에 隨伴된 水溶性窒素化合物 암모니아, 乳糖, 可溶性 tryptophane 및 tyrosine 含有度를 分析하고, 菌體濃縮液을 添加한 后 熟成된 軟質치이즈와 對照群의 casein 分解性向을 電氣泳動에 依하여 種別分布率變化度를 測定하였던 바 아래 結果를 얻었다./ 1. 軟質치이즈의 水溶性 窒素化合物과 암모니아 含有率은 熟成進行에 따라 上昇하였고 溫度를 7℃로 할 경우보다 15℃로 할 때 顯著한 上昇率의 增加를 나타내었으며, 軟質치이즈의 乳糖含有率은 계속 減少하여 消盡되었다./ 2. 可溶性 tyrosine과 tryptophan의 含有率도 熟成進行에 따라 增加하였으며, 熟成進展의 指標로 利用되고, 이를 基準으로 할 때 7℃에서 10週間 熟成한 軟質치이즈가 10℃에서 6週間 熟成된 것이 同一한 水準의 可溶性 tryptophan 및 tyrosine 含有度를 나타내어 熟成溫度 上昇效果가 重要視 되었다./ 3. 7℃에서 12時間 熟成된 軟質치이즈 보다 15℃에서 熟成된 casein의 組成上의 差異는 α_s-casein 含有度가 뚜렷이 低下된 水準이며 Pre α_s-casein 및 γ₁-,γ₂-,γ₃-casein의 增加된 것이며, 製造時에 菌體濃縮物을 添加하여 熟成시킨 軟貨치이즈는 L. casei 菌體添加區에는 α_s- 및 γ₁-Casein의 分解度가 높게 나타났으나 L. bulgaricus 菌體添加區에는 α_s-, β- 및 γ₁- casein의 分解度가 높은 것이 特徵이었다. =A study was conducted on proceeding rate and pattern of proteolysis during the ripening period of soft cheese. The effect of temperature and higher level of bacterial cell lysates on the ripening of soft cheese has been followed by the determination of the contents of soluble nitrogenous compounds, tryptophan tyrosine, ammonia, lactose and electrophoretic pattern of soft cheese casein; the following results were obtained./ 1. Contents of soluble nitrogenous compound and ammonia tended to increase as ripening proceeded, and rate of the proteolytic reaction was highly temperature dependent, with more rapid increment of these compounds in soft cheese ripened at 15℃ than at 7℃./ 2. Soluble tyrosine and tryptophane level tended to increase as ripening proceeded, and a similar level of soluble tyrosine and tryptophane in the soft cheese ripened for 12 weeks at 7℃ with that of for 6 weeks at 10℃ has been observed./ 3. More intensive proteolysis in α_s casein ripened for 12 weeks at 15℃ than that ripened at 7℃ occured. Addition of L. casei cell lysate to soft cheese caused to decrease the fraction of α_s and γ₁casein; whereas highly intensive proteolysis in α_s-β and γ₁casein proceeded in cheese which has been added with L. bulgaricus cell substance concentrate.(keris 2006)
가와사끼병에서 Myocardial SPECT를 이용한 심근허혈의 평가(가와사끼病에서 Myocardial SPECT를 利用한 心筋虛血의 評價 =Assessment of Myocardial Ischemia using Myocardial Perfusion Scan in Kawasaki Disease) [學術저널] : 풍양면 효갈리 41번지 출신인 윤용수(尹龍洙, 1944- , 서울大 敎授) 등(길홍량 최정연 윤명자 박순성 김호성 노정일 이명철 이동수)의 논문으로, 대한소아과학회(URL //www.pediatrics.or.kr)에서 1999년에 발행한 <소아과(Journal of the Korean Pediatric Association)> Vol.42 No.2 211-220쪽(10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 제어번호 18751921, 주제어 Kawasaki disease Myocardial SPECT Myocardial ischemia이다.(keris 2006)
가요: →보주향교 가요
가운데마: →사나물
가윗날: →추석
가유현(嘉猷縣), 산양현(山陽縣), 근품현(近品縣) [古縣] : 예천군(醴泉郡)의 신라 하대(新羅下代)와 고려 초(高麗初) 속현(屬縣) 중의 하나로, 원래 삼국시대 신라의 근품현(近品縣)을 757년(경덕왕 16)에 가유현(嘉猷縣)이라고 개칭하여 예천군의 속현이 되었다. 940년(高麗 太祖 23)에 산양현(山陽縣, <慶尙道地理志>에는 景德王 때에 改名 山陽이라고 함)이라고 하였다. 1018년(현종 9)에 상주목(尙州牧)으로 넘어갔다. 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1180년(高麗 明宗 10)에 감무를 파(罷)하고, 계속 상주(尙州)에 속하였다. 현 문경시 산양면(現聞慶市山陽面) 지역이다.(三國史記, 高麗史, 東國輿地勝覽, 文獻備考)
가유현: 상주목 [고려사]/ 정인지 외 저 | ㈜누리미디어/ ...서 이 현에 소속시켰다가 11년에 도로 상주에 소속시켰다. 산양현(山陽縣)은 원래 신라의 근품현(近品縣)〔품은 암(巖)으로도 쓴다〕인데 경덕왕은 가유(嘉猷)로 고쳐서 예천군(醴泉郡)의 관할 하에 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고 현종 .../ 고려사 > 고려사 번역문 > 《고려사》 제57권 - 지 제11 > 지리 2 > 상주목/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역사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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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