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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21:가학루...각도책판목록
작성자장병창 @ 2018.04.09 06:12:30

  도청신도시 예천 21 : 가학루...각도책판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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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학루(駕鶴樓) [建物] : 용문면 구계리 248-1번지에 있는 의성김씨남악종택의 사랑채로, 한 마리의 야학(野鶴)이 나래를 펴고 저 푸른 하늘 흰 구름 흐르는 곳, 벽공을 날아오르는 순간의 모습이다. 전설과 사연도 많은 산 국사봉을 뒤로하고 동남향으로 자리잡은 조선 중기의 옛집으로 알려져 있으나 처음 건축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낙향한 류우(1420-1486)가 세운 집으로 의성 김씨 남악종가에서 구입하여 종택으로 삼은 집이다. 이 집은 남악 김복일의 종질이며,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 활약하였던 불구당 김주(金迬, 1606-1681)가 태어난 곳이다. 학처럼 고고하고 지조 있는 선비가 살던 집이다. 1981년 지붕을 고칠 때 발견된 기록으로 보아 1632(인조 12)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종택의 안채는 앞면 9, 옆면 7칸 규모의 자형 건물이며, 안채의 앞면 왼쪽에 사랑채가 배치되었다. 안채는 영남 북부지방 민가의 기본적인 평면으로 가지고 있으며, 규모가 크고 옛스러운 모습이나 사랑채는 한껏 멋을 내고 우아하게 지었다. 멋진 행서체 글씨로, ‘駕鶴樓라고 쓴 현판이 붙은 사랑채는 민가의 전통적인 누각 형식을 따랐지만 처마 곡선을 학이 나래처럼 우아하고 기품 있게 처리하였다. 부연으로 댄 이중 처마로서 부연이 목재 아래 부분을 곡선으로 깎아서 경쾌하게 위로 반전되는 효과를 살렸으며, 지붕 전체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면 야학이 날아 앉는 듯, 또는 막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이다. 가학루는 안채와 이어진 건물이지만 앞에서 보면 독립된 건물인 느낌을 주며 실제로 그런 삶을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사랑채로서는 전면 3, 측면 3칸의 비교적 큰 규모로 지어졌다. 앞쪽에서 보면 2층이 누각인데, 아래쪽은 자연석을 주초를 놓고 아름드리 자연목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기둥을 세워 튼튼하고 자연스런 공간을 만들었다. 뒷쪽에는 흙을 돋우고 집터를 다졌으며 아궁이까지 만들었다. 실용과 멋이 그대로 느껴진다. 2층 뒷쪽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2칸은 사랑방이며, 1칸은 책과 종이를 넣어두는 서재로 사용했다. 앞쪽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난간을 운치 있게 둘렸다. 마루에 앉아보니 뜰 앞에 선 커다란 매화나무 가지 사이로 흰 구름이 흐르고 기러기가 줄지어 나르고 있다. 겨울철에는 온돌방에서, 여름철에는 마루에서 선비들이 모여 앉아 풍류를 즐기고 가난한 삶을 누리며 때로는 꼿꼿한 모습으로 세월을 걱정하여 뜻 깊은 삶을 살으셨으리라. 그 모습이 눈에 어리는 듯한 집이다. 2층 마루에는 네모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의 짜임은 익공이 하나 뿐인 짜임으로 간출하지만, 지붕은 2층 구조의 처마로서 서까래 위에는 우아한 곡선으로 아래 부분을 작은 부연으로 덧대었고, 골기와집 팔작지붕에 용마루를 짧게 만들어, 마치 야학이 나래 치며 벽동을 날아오는 듯한 형태이다. 특히 처마의 선이 상승감을 주며, 우아하고 시원스런 독특한 느낌이 나도록 만들었다. 당시 집을 짓는 사람들은 독창적인 대예술가들이었다. 똑 같은 형태나 구조의 집은 짓지 않았다. 모방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학루는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이다. 학처럼 고고한 기품으로 살아간 사람의 집이라서 학의 나래에서 영감을 얻은 집을 지었다. 가학루는 조선 중기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한결 醴泉郡民新聞 2002.4.22)

 

  가학루('이 앉는 듯, 날아오르는 듯' : 義城金氏 南嶽宗宅 駕鶴樓) [記事] : 온갖 새 중에서 가장 고고하고 품위 있는 새는 학이다. 서양에서는 백조를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새로 보지만 아무래도 학이 우리의 정서에 맞는다. 천년수를 누리는 학은 십장생의 하나이며 고고한 기품 때문에 그림과 시의 소재가 되었고 길조로 사랑받아온 새이다. 학가산, 학소대, 학여울 등 지명과 이름에도 학이 많이 들어있음은 학의 고고함과 천년수 때문이리라. 용문면 구계리 속칭 구렬마을의 의성김씨 남악종택 사랑채는 한 마리 야학이 나래를 펴고 내려앉는 듯,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이다. 국사봉에서 동남향으로 뻗은 문필봉 아래 자리잡은 조선 중기의 옛집이다. 처음 건축은 연산군 시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낙향한 류우(14201486)가 세운 것을 의성김씨 남악종가에서 구입하여 종택으로 삼은 집이다. 이 집은 남악 김복일의 종질이며,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 활약하였던 불구당(不求堂) 김주(金迬, 16061681)가 태어난 곳이다. 학처럼 고고하고 지조 있는 선비의 집. 1981년 지붕을 고칠 때 발견된 기록으로 보아 인조 12(1632)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전형적인 자형 건물인데 동쪽 행랑채 앞에 배치되었다.

 

  안채는 영남 북부지방 민가의 기본적인 평면을 가지고 있어 간소하고 고졸한 모습이나 행랑채와 사랑채에 붙여지은 가학루는 한껏 멋을 내고 우아하게 지었다. 행서체의 가학루(駕鶴樓) 현판도 학의 나래짓을 연상하게 한다. 민가의 전통적인 누각형식을 따랐지만 처마곡선을 우아하고 기품 있게 처리하였다. 부연을 댄 이중처마로서 부연의 목재 아랫부분을 깎아서 경쾌하게 위로 반전되는 효과를 살렸기 때문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면 지붕은 학이 날아 앉는 듯, 또는 막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이다. 안채와 이어지고 사랑채 앞 초가집과도 판장문 하나로 이어졌지만 앞에서 보면 독립된 건물로 보인다. 안쪽에서 보면 2층의 누각인데 아래쪽은 자연석으로 주초를 놓고 아름드리 자연목 그대로 기둥을 세워 통풍이 잘 되도록 하였고 튼튼하고 자연스런 공간을 만들었다. 뒤쪽엔 흙을 돋우고 집터를 다졌으며 아궁이까지 만들었으나 지금은 돌로 축을 쌓았다. 당시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민속학적으로 매우 소중한 집이다. 2층은 뒷쪽 반을 온돌방으로 만들어 2칸은 사랑방이며 1칸은 책과 문방구를 넣어두는 방으로 사용했다. 앞쪽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난간을 튼실하고 운치 있게 둘렀다. 마루에 앉아보니 뜰 앞에 선 커다란 회화나무 가지 사이로 흰 구름이 흐르고 기러기가 줄지어 나른다. 겨울철에는 온돌방에서, 여름철에는 마루에서 선비들이 모여 앉아 풍류를 즐기고 청정한 삶을 누리며 때로는 꼿꼿한 모습으로 세월을 걱정하는 모습이 눈에 어린다. 네모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의 짜임은 초익공으로 간촐하지만 2중 구조의 처마로서 서까래 위에 우아한 곡선으로 밑을 깍은 부연을 덧대어 반전시켰으며 상승감을 주는 우아하고 시원스런 처마로 학의 나래짓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집을 먼저 지었는지, 집 이름을 먼저 지었는지 생각하며 돌아오는 길, 학가산 봉우리가 보이는 갈매빛 들판에 흰 두루미 한 쌍이 유유히 나르고 있었다. <權相憲 論說委員>(醴泉新聞 2007071916:24:51)

 

  가현: 덧재

 

  가훈(醴泉郡 初等學校 漢字工夫 第224次時 家訓) [敎授學習過程資料] : 개발자 : 예천군 상리초등학교 교사 오재흥, 출처 : 경상북도교육청(EDUNET 2006)

 

  가흥창(可興倉) [漕倉] : 충주시 가금면 가흥리 강가에 있던 조창으로, 고려시대에는 덕흥창(德興倉) 또는 경원창이라고 하였다. 목계나루를 건너 가흥 방면으로 가면 충주에서 장미산 앞으로 지나오는 세 갈래의 길과 만나게 되는데, 이 길에서 앙성쪽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서 오른편 강가인데, 고려 때는 현재의 위치에서 2리 서쪽에 있던 것을 조선 세조 때에 옮겼다. 이 창고에는 곡식 200(400가마)을 실을 수 있는 평저선 20척이 있어, 경상도의 예천, 용궁(龍宮), 안동, 상주, 문경, 함창(咸昌), 비안(比安), 봉화, 풍기(豊基), 순흥(順興), 영천(榮川, 榮州), 예안(禮安)과 충청도의 영춘, 단양, 제천, 청풍, 충주, 연풍, 괴산, 음성, 보은, 청산, 영동, 황간 고을의 조세를 운송하는 일을 하였다. 이곳에서 서울까지는 수로로 200리였고, 최고 책임자는 전함사 소속의 수운판관이었다. 이 창고의 크기는 1879(고종 16) 당시에 70여 칸이었으나, 육상 교통의 발달로 그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어 창고는 폐허가 되고 흔적만 남아 있다.(인터넷 gochungju 2001)

 

  가흥창 고찰(可興倉 考察) [論文] : 예천 출신인 최일성(崔壹聖, 1942- , 忠州大 副敎授)의 논문으로, 충주대학교에서 1994년에 발행한 <논문집> 29197-126(30分量)에 수록되어 있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가톨릭대(성심), 서강대이다.(keris 2004)

 

  가흥창 고찰(可興倉 考察 =Kahungchang Revisited) [學術저널] : 예천 출신 최일성(崔壹聖, 1942- , 忠州大 敎授)의 논문으로, 충주대학교에서 1994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 요약] : The name Tuckhungchang, one of the twelve store house for keeping grains paid as tax, was changed to Kyeong-won-chang and to Kahungchang in the year of 1465(Sejo 11 nyeon) after moving to the country Kahung.Officials such as Su-un-pan-gwan, Gyeong-cha-gwan Cha-sa-weon, Chaweon,/ Kamguan, Saeng-ri, Su-bu, Kyeog-gun performed various duties. Ka-hung-chang collected grains paid as tax from the 12 countries located in North-eastern area of Chungcheong province, and Kyeongsang province. Since the era of Cheongjo, they collected grains paid as tax from 6 towns of Hoseo province. Whole grains paid as tax was received during the term ranging from November till January next month./ The grain was deposited in the field after collection. However, they were saved in the storehouse of 119 rooms in the 15 year of Cheongjong reign and about 50 rooms were added in the era of Hyeonjong reign. Although they owed to private ships for transportation, most of the time they transported grains by using ships employed in Chua-su-cheom./ Since Kahungchang had been built in the 11th year of Sejo, it continued/ throughout about 500 years, that is, till the late 19th century or/ early 20th century. Now, we see only the visage of it.(daum 2009)

 

  각골[] : 1) 보문면 산성리 산성(山城)마을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2) 보문면 수계리(首溪里) 홍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3) 예천읍 통명리 동짝마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마을이 있다. 4) 하리면 금곡2(金谷二里)에 있는 골짜기이다.

 

  각골, 윤촌(尹村), 윤천못, 윤천못티이, 윤천모티, 윤천모티이, 윤문(尹文)마을 [마을] : 예천읍 통명리 동짝마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통명리 마을회관이 이곳에 있다. 고추, 참깨, 담배, 양잠을 많이 하고, 감자, 고구마, 땅콩, 콩 등을 생산한다. 15가구(1980)가 살고 있는데, 파평 윤씨(尹氏)가 많고, 순흥 안씨(安氏)도 있다.

 

  각골(尹村, 윤천못) : 예천읍 통명리 동짝마 북쪽에 있는 마을로, 윤씨가 많이 살았다.(醴泉邑홈페이지 2013)

 

  각 군 우택 농형 및 예천 등 6군의 우박이 온 상황에 대한 부본(近代政府記錄類 公文編案 : 近代政府記錄類 慶尙南北道來去案 : 各 郡 雨澤 農形 醴泉 等 6雨雹이 온 狀況副本) [公文] : 경상북도관찰사(慶尙北道觀察使) 이충구(李忠求)190766일에 의정부 찬정대신(議政府贊政大臣)에게 올린 공문으로, 경상북도관찰사의 인장(慶尙北道觀察使之章) 1개가 있다.

 

  각 군의 강우량과 수해 상황의 처리에 대한 제63호 보고서(近代政府記錄類 公文編案 : 各 郡(靑松醴泉慶山義興開寧順興禮安新寧軍威奉化星州善山比安聞慶玄風尙州慶州義城永川安東靑道豊基河陽淸河迎日知禮慈仁高靈?)降雨量水害 狀況處理63號 報告書) [公文] : 경북관찰사(慶北觀察使) 엄세영(嚴世永)1898815일에 탁지부(度支部)에 올린 공문으로, 지령은, “도착했음(1898827)”이다.

 

  각 군의 비 온 상황과 농형 및 예천, 청송, 군위, 순흥, 상주, 함창 등 군의 우박이 온 상황에 대한 보고서 제14(近代政府記錄類 公文編案 : 의 비 온 狀況農形 醴泉, 靑松, 軍威, 順興, 尙州, 咸昌 等 郡雨雹이 온 狀況報告書 第14) [公文] : 경상북도관찰사(慶尙北道觀察使) 이충구(李忠求)190766일에 의정부 찬정대신(議政府贊政大臣 )에게 올린 공문으로, 경상북도관찰사의 인장(慶尙北道觀察使之章) 1개 외 1개가 있다.

 

  각 군의 수해 상황과 농사 진척 상황에 대한 제57호 보고서(近代政府記錄類 公文編案 : 各 郡(尙州淸河寧海永川靑松盈德河陽新寧迎日慶山慈仁?安東順興豊基奉化眞寶禮安醴泉榮川比安金山星州義城淸道河陽軍威義興開寧知禮高靈大邱玄風)水害 狀況農事 進陟 狀況57號 報告書) [公文] : 경북관찰사(慶北觀察使) 엄세영(嚴世永)1898713일에 탁지부(度支部)에 올린 공문으로, 지령(指令), “도착했음(1898725)”이다.

 

  각 군의 수해 상황과 농사 진척 상황에 대한 제59호 보고서(近代政府記錄類 公文編案 : 各 郡(奉化聞慶慶山仁同順興豊基盈德英陽榮川眞寶咸昌慈仁?慶州醴泉靑松迎日禮安義城永川寧海河陽知禮玄風尙州靑道龍宮比安安東高靈)水害 狀況農事 進陟 狀況59號 報告書) [公文] : 경북관찰사(慶北觀察使) 엄세영(嚴世永)1898729일에 탁지부(度支部)에 올린 공문으로, 지령(指令), “도착했음(1898813)”이다.

 

  각궁(無形文化財 角弓) [인터넷] : 이곳 예천여고 출신의 김진호(金珍浩) 선수가 세계양궁을 4관왕으로 제패하면서 우리나라 활의 고장으로 떠오른 예천, 그러나 그것은 김진호가 그러한 예천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오랜 전통을 끈질기게 지켜온 예천이 김진호를 배출해 낸 것이다. 예천에는 4120년 간 가업을 이어온 궁장(弓匠) 권영학(權寧鶴) 씨가 있다. 궁장기능보유자로서 경북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받은 이분은 양궁의 상대 개념인 국궁(國弓) 중에서도 무소뿔, 대나무, 소심줄을 접합하여 만드는 각궁(角弓) 제조의 제1인자이다. 나는 어느 책에서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활을 잘 만들어서 대궁(大弓)이라는 뜻의 동이(東夷)족으로 불리었고, 중국이나 일본 등 인접 국가들이 나무만으로 만드는데 비하여 우리는 무소뿔을 나무에 덧대어 만들음으로써 그 성능이 우월했었다는 기록을 보고 그 제조술이 자못 궁금했었는데 이번에 그 제조 공정을 직접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마디가 긴 왕대나무를 얇게 깎고, 그 밑에 역시 얇게 깎은 무소뿔을 대고, 그 위에 가늘게 찢어 말린 소심줄 여러 겹을 민어 부레풀로 접합한 것이 기본 재료이고 가벼우면서 질긴 산뽕나무, 굴참나무 등의 부재가 일부 쓰인다. 문제는 이 재료들을 적당한 크기와 적당한 굵기로 깎아 말리는 공정이 중요하고, 접합을 잘해서 심하게 탄력을 주는 신축 작용을 계속 반복해도 떨어지거나 부러지지 않아야 한다. 현대 과학으로 접합 기술이 아무리 발전했어도, 바짝 휘었다가 강한 탄력을 받으며 활짝 펴지는 작용을 계속하는 활대를 접착해 내는 방법은 재래식 부레풀 이외엔 없다고 한다. 이러한 각궁은 무소뿔은 물론 외국에서 수입해야 했고, 기타 재료는 국내에서 구하더라도 제조 공정이 하도 어렵고 특수한 기술을 요하는 것이어서 대량 생산이 불가능했으므로 장수에게나 주어지고, 상류 사회의 무예 수련용으로 사용되었을 뿐, 병사에게까지 일반화되지는 못했었다고 한다. 돈벌이와는 무관한 이렇게 어려운 가업을 대대로 계승해오는 이러한 분들이 있어서 예천은 활 만들기와 활쏘기를 숭상하는 고을이 됐고, 그래서 김진호 선수도 나왔고, 경북양궁협회는 물론, 전국 양궁협회도 이 벽지 예천에 있는 것이다. 예천읍에는 진호궁도장 자리에 국제 규격의 예천양궁장 시설을 마련하여 거의 완공되어 가고 있다. 󰡐동이(東夷)󰡑라는 이름으로 국제 사회에 이름을 떨쳤던 우리의 국궁이 이제는 양궁의 왕국이 되어 그 중심에 예천이 우뚝 서 있는 것이다.(pwj32.com.ne.kr 2004)

 

  각도책판목록(各道冊板目錄) [] : 각 도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판의 목록(7926)으로, 1(34), 필사본, 33.4x22.4cm이다. 1840(헌종 6)에 편찬되었다. 수록지는 예천 등 경상도를 비롯하여 북한, 남한, 화성부(華城府), 개성부, 강원도, 충청도, 황해도, 전라도, 평안도 등의 순으로 되어 있다. 기록 양식은 책 이름 및 책 수를 적고 보관 상태를 세자(細字)'완결()' '()' 등으로 기록하였고, 이어서 용입지(容入紙), 'ᄋ권 ᄋ장()'으로 밝히고 있다. , 착란(錯亂)이 있어 상세하지 않은 곳은 공란으로 두고 끝에, '이상 용입지 착란 불가상(以上容入紙錯亂不可詳)"이라고 부주(附註)하였다.(인터넷 kyujanggak.snu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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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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