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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37 : 간방리 마을...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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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방리(澗芳里) 마을의 구성, 간방리 [里] : 간방리는 보문면(普門面) 행정 동리 중의 하나로, 12간실(澗室)이라 할 만큼 마을이 많은 곳이지만, 간방리의 5대 마을은, 일방, 문고개, 간실, 꼭두바우, 골마이다. [澗芳1里(일방, 아릇일방, 윗일방)] : 내성천(乃城川) 변에 위치한 마을로, 면적 234.4ha, 밭 28ha과 논 22ha의 경작지에 고추(10ha)가 주된 소득 작물이다. 새마을사업을 우수하게 추진하여 1976년에는 내무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이 마을에는 보문역(普門驛)이 있어 주민들의 교통이 편리하다. 80가구 549명(1973)이 살고 있다가, 72가구 432명(1980) 중 반남 朴 48가구, 야성 宋 3가구, 기타 21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 후에는 61가구 237명(1992, 男 117名, 女 120名) 중 반남 朴 50가구 등이 살고 있다. [澗芳2里(꼭두바우, 덕거리, 문고개, 돌모리, 소죽지)] : 면적 213.8 ha, 밭 56ha와 논 44ha의 경작지에 주된 소득 작물로 고추(30ha)를 재배하고 있고, 75가구 428명(1973)이 살고 있다가, 67가구 430명(1980) 중 순흥 安 22가구, 안동 權 10가구, 진주 姜 8가구, 경주 金 6가구, 기타 21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 후 68가구 291명(1992, 男 146名, 女 145名) 중 순흥 安 26가구, 안동 權 24가구, 진주 姜 21가구 등이 살고 있다. 특산물은 고추와 잠업이다. [澗芳3里(간실, 고은정, 골마, 아랫마, 양지마, 음지마, 탑동)] : 면적 177.4ha, 밭 36ha과 논 20ha의 경작지에 주 소득 작물로 고추, 참깨를 경작한다. 72가구 410명(1973)이 살고 있다가, 58가구 307명(1980) 중 진주 姜 22가구, 춘천 朴 7가구, 반남 朴 7가구, 광산 金 5가구, 기타 17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 후 52가구 207명(1992,男110名,女97名) 중 진주 姜 25가구, 반남 朴 10가구 등이 살고 있다. 1979년 새마을사업으로 교량(길이 32m, 幅 4m)을 가설하였다. 특산물은 고추이고, 이 마을 중앙으로 맑은 냇물(石串川)이 흘러 여름철에는 물고기가 많이 올라오고, 물 좋고 뒷산의 경치가 아름답다. [澗芳里의 年度別 人口] : 그 현황은 다음과 같다.(醴泉統計年報)
澗芳1里 年度 1972 1974 1976 1977 1978 1979 1992 1995 1996 1999 2004
家口 75 72 72 72 72 72 57 49 47 43 37
人口 515 486 439 445 432 392 166 132 120 100 78
澗芳2里 年度 1972 1974 1976 1977 1978 1979 1992 1995 1996 1999 2004
家口 72 72 76 74 74 72 60 53 53 52 48
人口 424 450 416 390 388 374 187 136 138 126 102
澗芳3里 年度 1972 1974 1976 1977 1978 1979 1992 1995 1996 1999 2004
家口 71 70 66 66 64 58 51 46 44 42 41
人口 407 388 336 324 298 299 156 143 134 120 98
간방리(澗芳里) 연혁, 간방리 [里] : 간방리는 보문면(普門面) 행정 동리 중의 하나로, 원래 예천군 승도면(醴泉郡繩刀面) 지역인데, 1914년에 간곡(澗谷), 이방동(伊芳洞)과 보문면(普門面)의 마촌동(馬村洞, 一部)과 감천면(甘泉面)의 덕율동(德栗洞, 一部)을 병합하여 간곡(澗谷)과 이방(伊芳)의 이름을 한 자씩 따서 간방동(澗芳洞)이라 하였다. 1927년에 1.2.3동으로 분동(分洞)되었고, 1988년에 동(洞)을 리(里)로 개칭하였다.
간방3리(文化帝國 꿈꾼 산골 總角들) [記事] : 커버스토리 동구 밖 느티나무. 그늘은 넓어 아낙들이 귀엣말을 하고, 촌로들은 동네일을 공론한다. 가지 끝에 연이 걸리고 때로 아무개네 황소가 매어 있다. 하여, 뻥 뚫린 둥치 속에는 구비구비 마을이야기가 서려 있지 않겠는가. 서울 관악구 봉천동 장승백이문화서점(주인 강경원․66), 은평구 갈현 2동 속칭 먹자골목의문화당서점(주인 박상우․56), 성북구 정릉1동 16-158문화서점(주인 강성두․48). 동구 밖 느티나무 같은 책방들이다. 강경원 씨, 박상우 씨, 강성두 씨가 경북 예천군 보문면 간방3리 출신이다. 이쯤이면 한동네 출신이라는 소문이 그럴 법하다. 맞아요. 70, 80년대 예천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에요. 당시 시골에서는 먹고 살기 힘들어 대도시로 많이 나왔잖아요. 많이 배우지 않아도 밑천 많이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게 헌책방이었지요.(박상우씨) 예천 사람 헌책방의 원조는 박지우(67) 씨와 강경원(66) 씨. 같은 동네인데다 초등학교 동창 사이. 62년 대구에서 헌책방을 하고 있었는데 갓 군에서 제대한 지우 씨가 서울서 크게 해보자고 편지를 보내 왔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서점을 정리하고, 그 친구는 소 두 마리 판 돈을 합쳐 63년께 종로구 계동에계원서점을 냈어요. 청계천에서 헌책을 용달차 한 차 분량 사서 시작해 4년 동안 했어요. 강경원 씨의 회고다. 최초의 문화(당)서점은 72년 영등포 시장 뒤에서 지우 씨가 시작한 문화당서점. 4년 전인 68년 1․21 사태 직후 강씨의 군입대 문제가 불거지면서 강씨와의 동업을 청산한 그가 따로 책방을 차린 것. 폐휴지를 한꺼번에 사서 책을 골라내는 방식이었다. 대구에서 경북서점을 하는 박씨 형제한테서 좋은 책이 폐지로 나간다는 말을 듣고 아이디어를 얻었지요. 폐지를 함께 사면 분류하는 것이 힘들기는 해도 책을 사기 쉽고 원가가 덜 들었어요. 다른 책방에 비해 경쟁력이 있었던 거죠.(박지우 씨) 헌책은 있는 대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파지값도 괜찮아 1㎏에 40~50원, 지금 돈으로 4000~5000원이었다. 서너 집 중 한 집꼴 상경 책방 개업 지우 씨가상경하여 잘 먹고산다는 소문이 나면서 고향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다. 그는 술과 밥을 먹여주고 더러는 가게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일을 가르쳐 주었다.형님(박선우․65, 작고)이 연신내에서 헌책방을 했는데, 군대 제대하고 올라와 상의하니 돈 많이 들지 않는다면서 권하더라고요.
먹고사는데 지장 없다면서 말이죠.(박상우 씨) 그렇게 해서 한창 때는 서울 이곳저곳에서 헌책방 하는 간방3리 사람들이 20명을 웃돌았다. 그곳의 총 가구수가 70~80호였으므로 서너 집에 한 명꼴로 서울에 헌책방을 연 셈이다. 특히 최대 19가구가 살았다는 탑동(탑돌)의 경우 책방을 연 사람이 16명. 한 집에 한 명꼴이다. 또 이들 가운데 같은 성씨는 대부분 친인척이고 성이 다르면 앞․뒷집이어서 담 너머로 호형호제하던 사이다. 마을이 다른 경우도 대부분 보성국민학교(현재 폐교됐음) 선후배 관계다. 헌책방을 연 사람 가운데 같은 성은 대부분 4촌에 8촌으로 얽혀 있다. 형제, 남매도 제법 많다. 형제가 동시에 책방을 한 경우는 박상우-원우, 김시환-교환, 김기옥-기선씨, 박상하-종희. 박상하 씨의 경우 형 종길 씨가 대구에서 헌책방을 해 세 형제가 같은 일을 했다. 시환 씨 집안은 두 여동생(계순, 영순 씨)도 한때 헌책방을 내어 한두 해 운영한 바 있다. 이렇게 많은 헌책방을 낸 간방3리는 야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빈촌. 간방3리는 가난할 수밖에 없었어요. 올똥볼똥한 야산에다 들도 좁지요. 농토라고는 다락논에 대부분 밭이었어요. 세 동네 가운데 탑동이 가장 가난했어요. 옛부터 밥 못해 먹는 집이 많아연기 안 나는 동네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우리 집은 땅이 없고 문중 위토를 조금 붙였을 뿐입니다. 강경원 씨 형제는 본래 9남매인데 어려서 모두 죽고 딸 둘에 아들 하나가 살아남아 그는 5대 독자다. 그래서 탑동 사람들이 객짓물을 제일 먼저 먹었지요. 부평 신한제분, 신진자동차 등 공장으로 많이들 갔어요. 살기 위해 대처로 나가기는 우리 세대가 처음이었어요. 상경 3세대인 강성두 씨 사정도 비슷하다. 땅이 많지 않았어요. 올라올 당시 논 2000평, 밭 3000평으로 마을에서는 중간정도였어요. 시골에서는 비전이 없었어요. 아무리 땅을 팔아 봐도 아이들 상급학교 진학은커녕 겨우 먹고 살 정도였으니까요. 영주에서 외삼촌 땅콩공장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먼지 많이 나고 못하겠더라고요. 한날은 서울 아현동에서 헌책방을 하는 친구(김창기․48)가 내려왔는데 양복을 쫙 빼고 왔더군요. 서울 가면 돈을 갈퀴로 긁는 줄 알았어요. 이들이 서울에 올라와 자리잡은 곳은 대체로 변두리. 영등포구, 구로구, 관악구, 성북구, 강서구, 은평구, 마포구 등. 최근까지 헌책방들이 많이 분포했던 곳이다. 점포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낮고 헌책을 즐겨 볼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살고 있기도 하다. 갈현동 문화당 박상우 씨의 경우 75년 15평 규모의 책방을 65만 원(현재 값 6500만 원)에 인수하였다. 보증금 12만 원에 월세 1만2000원이었다. 당시 불광천이 복개되기 전이어서 악취가 심했어요. 게다가 깡패소굴이어서 싸움 없는 날이 없을 정도였지요. 주변에 일문서점, 정은서점, 중앙서점, 동아서점 등 우리말고 네 군데가 있었어요. 84년까지 다섯 식구가 책방에 딸린 방에서 살았다. 81년에 아현동 고가가 끝나는 곳에서 책방을 시작한 김창기 씨는 딸린 방에서 비키니옷장을 하나 두고 기거했는데, 고향에서 사람이라도 오면 책방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재웠다.
북악터널이 가까운 길음동에서 83년에 시작한 강성두 씨는 월세 6만 원이다. 강경원 씨도 74년에 50만 원을 들고 다시 상경하여 봉천극장과 시장 가운데쯤에 서점을 열었다가 상도동으로 옮겼다. 그는 집세 싼 곳을 찾아 상도동에서만 네 번째 옮겼다. 이들은 점포를 차려 서로 넘기고 넘겨받고를 거듭해 내력을 묻는 질문에 한결같이 복잡하다고 토를 달았다. 갈현동 박상우 씨는 재종형 선우 씨한테, 장승백이 강경원 씨는 박지우 씨한테, 정릉 강성두 씨는 김기선 씨한테, 김교환 씨는 동생인 시환 씨한테, 세환 씨는 봉천동 서점을 강경원 씨한테서 넘겨받았다. 같은 동네사람들인 탓에 서로 신뢰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결같이 문화(당)서점 이름을 쓴 것도 특이한 현상. 선배들이 그렇게 간판을 달아 별뜻없이 그대로 따랐어요.(강성두 씨) 한때 문화란 말이 고급스럽고 고상한 이미지를 주었던 것은 사실. 파지에서 책을 골라내는 일이 노가다에 속하는 일이어도 쓰레기에서 책을 살려내어 책 읽는 사회를 만드는 데 한 몫을 한다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스스로 힘내자 아자하는 추임새를 넣을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상호 공유하며 상도지켜 상호를 공유한 이들은 그만큼 동지 의식이 강했다. △다른 사람의 영역은 침범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개업할 경우 도와준다 △같은 책이 많이 나오면 나눠서 판다 등의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박상우 씨 증언) 고향은 다르지만 문화서점 대열에 합류한 사람들도 있다. 남가좌동 양원석 씨, 김진한, 윤진석 씨 등이 그 예. 양씨는 72~3년 신촌로터리에서 중간상을 하다가, 박지우 씨가 근처에 헌책방을 차려 김일환 씨한테 맡기면서 영역다툼이 있었다. 화해술을 한잔 하다가 친해져 지우 씨의 도움을 받으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들 문화서점은 95년 아이엠에프를 전후해 대거 전업하게 된다. 경기 자체가 어려워졌거니와 산아제한 세대가 학령기에 들고, 대학입시제도가 바뀐 동시에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헌책방을 찾는 사람이 급감하기 시작해 헌책방들이 대거 문을 닫은 시점과 일치한다. 몇몇은 한약방과 조명기구, 당구장 관련 사업으로 옮겨가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일단 서울물을 먹은 터, 70~80년대 시골에서 갓 올라와서보다는 시각이 다양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한마을 청년들이 집단 상경하며 같은 이름으로 헌책방을 연 것은 일대 사회사적인 사건. 영국의 헌책방마을 헤이온 와이가 책에 미친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장소를 옮겨 시간 속에 존재했던한국판 헤이온 와이는 도시화와 이농 현상이 만들어낸 우리 시대의 특별한 표정일 테다. 현재 헌책방을 계속하는 네 사람 가운데 갈현동 박상우 씨는 대체로 만족해하는 편. 삼남매(딸2, 아들1)를 두어 모두 대학을 보냈다. 아들은 마누라 고생시킨다면서 헌책방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가게가 작다면서 방문을 사양했던 장승백이 강경원 씨는 두 아들을 두어 맏이는 회사원이고 둘째는 취업 준비중이다. 정릉 강상두 씨는 고향에 그냥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를 한다. 서울에서처럼 고되게 일하면 이보다야 못 하겠느냐는 것.(임종업 記者 한겨레新聞 2005년 10월 7일 (금) 15:32)
간산(艮山), 뜸매산, 가내미 [山] : 호명면 직산리(稷山里) 아릇가네미마을 뒤 내성천(乃城川) 변에 있는 작은 외딴 산으로, 내성(乃城, 奉化)에서 떠내려 왔다고 한다. →뜸매산
간산 : 慶尙北道醴泉郡艮山居前?奉申性?名字를 泓淳으로 改定?오니 / 신문명 황성신문 1900/ 분류연속간행물 > 신문 > 皇城新聞/ 창간일 1898년 03월 08일 (光武二年 三月八日)/ 소장처 국립 고궁박물관/ 발간정보 간기:일간 언어:국한문/ 일자(양력) 1900년 12월 12일 (大韓光武四年 十二月 十二日 水曜日)/ 일자(음력) 1900년 10월 21일 (陰曆 庚子 十月 二十一日)/ 형태정보 크기:36.3*26.8cm 면수:04 단수:04/ 기사유형 廣告/ 기사위치 03면 02단/ 기사본문 : ●慶尙北道醴泉郡艮山居前?奉申性?名字를 泓淳으로 改定?오니 京鄕間照亮?시오 申泓淳 告白/ 제공 미디어가온 고신문(//www.history.go.kr/2014)
간산동(艮山洞) [터] : 임진왜란(1592) 직후에 예천군 간산면(醴泉郡艮山面, 陽山面) 행정 동리 중의 하나로, 1914년 예천군 호명면 직산동(醴泉郡虎鳴面稷山洞) 간산(艮山, 가느미)이 되었고, 1988년에 동(洞)을 리(里)로 개칭하였다.
간산면: →양산면
간산재(艮山齋) [齋舍] : 호명면 직산리 간산동(艮山洞)에 있는 재사로, 양한당 박치온(養閑堂朴致溫)을 제향하였다.(密城朴氏族譜 1982)
간선 도로변 상업지역 입체적 토지 이용 특성에 관한 연구(幹線 道路邊 商業 地域 立體的 土地 利用 特性에 關한 硏究 : 大邱廣域市 東大邱 副都心 商業 地域을 中心으로) [論文] : 예천 출신인 홍원화(洪元和, 1963- , 慶北大 敎授) 등의 논문으로, 대한건축학회에서 1999년에 발행한 <학술발표대회 논문집(學術發表大會論文集)> 19권 2호 685-690쪽(6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keris 2004)
간실(澗谷) [마을] : 보문면 간방3리(澗芳三里)에 있는 마을로, 간방리에서 으뜸된다. 고려 때부터 있었다. 최씨(崔氏)가 잡은 터에 진주인 강순국(姜順國)이 옮겨와 살면서, 수목이 우거져 겨우 사람만 내왕할 정도이고, 개울가에 가옥이 산재되어 있어서 간실(澗室)이라 하였다. 20가구 116명(1980)이 살고 있다.
간실 : 澗芳里 소속으로, 간방동에서 으뜸 되는 마을.(普門面홈페이지 2013)
간실: 백두자구용암용암단맥종주1-2구간 답사를 마치고/ 2016.05.24/ 육각정자가 하나 있는데 간실쉼터라고 합니다. 마침 동네 할마씨 한분이 나오시길레 어디라고 하면 택시가 오느냐 물으니 간방3리 간실쉼터(예천군 보문면)라고 하면.../ blog.daum.net/shinks32/ 우리산줄기이야기(daum 2016)
간실: 백두옥녀용암용암단맥종주제1-2구간(완)/ 2016.05.31/ 도로에서 올라 산줄기 끝에서 경북선 철로로 석관천을 넘어 예천군 보문면 간방3리 음지마 마을 간실쉼터까지 구간거리 : 12.2km 접근거리 : 0.4km 단맥거리 : 10.8km.../ blog.daum.net/shinks32/ 우리산줄기이야기(daum 2016)
간실: 예천여행/간실 마을에 있는 삼층석탑./ 2013.05.12/ 예천간방동삼층석탑. 198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지정. 간실마을 민가 옆에 서 있는 탑이다. 예전에는 이 마을 전체가 절터였다고 하나 지금은 탑을 제외하.../ blog.daum.net/duddnr1052/ 봐도 잊어버리고(daum 2016)
간실: 문화재를 찾아서 06 - 생활속의 종교인가? - 간방리.../ 2015.12.19/ 그러나 '간실(澗室)'이 이 마을의 이름이었다면, 이곳은 '크고 좋은 샘(泉)'을 가지고 있던 동네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찰이 망(亡)하면서 그 샘물을 따라 집들이.../ blog.daum.net/humm99/ 내 삶을 사랑해(daum 2016)
간실: 박사공 20세 순국(順國) 간오정(澗塢亭)/ 2007.10.12/ 의 교지(敎旨)를 의정부(議政府) 서리가 유세통(有勢桶)을 짊어지고 간실(간방. 경북 예천군 보문면 간방3리)까지 모셔왔다. 조상에게 높은 벼슬이 추증(追贈)되므로 묘소.../ blog.daum.net/pachunwangkang/ 염제신농(炎帝神農)..(daum 2016)
간실: 예천...간방리 석탑. 고은정/ 2008.06.07/ (追慕碑)를 세웠다(醴泉郡誌 1939). 박용학(朴容學) : 1869(고종 6)-1948, 보문면 간방리 간실(澗谷) 출신, 호는 고은(古隱), 본관은 반남, 평도(平度) 은의 후손.../ blog.daum.net/12977705/ 옛님의 정취. 그 향..(daum 2016)
간실: 아주 작은 정자 고은정/ 2007.08.29/ 흔들고 있다. 고요한 고은정은 시끄러운 여름 속에서 그렇게 있었다. 고은정은 보문면 간방리 속칭 간실 마을에 있다. 간실에는 문헌에는 아무 기록이 없으나 결점하나.../ blog.daum.net/ leekona(daum 2016)
간실: [경상북도] 예천간방동삼층석탑(醴泉澗芳洞三層石塔).../ 2007.06.19/ 통일신라 / 3.9m / 경북 예천군 보문면 간방리 290... 탑신(塔身)과 상륜부를 이룬 일반형 석탑이다. 속칭 간실마을 박복원의 집 바로 앞에 서 있는데 현재의 위치가.../ blog.daum.net/manbulsa/ 만불이 있는 그곳 ..(daum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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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