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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60 : 감천...감천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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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願聖明, 特垂睿鑑, 別遣京官, 巡視土壤之多寡, 兼察列邑境界之形勢, 本府舊土, 一一推給, 則新設殘薄之邑, 庶可成樣, 而趨役勞苦之民, 得以少蘇矣, 豈不幸哉? 且本府革廢之時, 分割土地, 移屬吏民, 必有所記, 而列邑所藏文籍, 或稱脫漏, 或稱無有, 終不出示, 則虛實難詳, 攷?無憑, 特令本道方伯, 査出列邑文書, 考其歲月, ?其有無, 則經界之定, 吏胥之推, 可坐而致也。 至於新府之所當先創者, 莫如鄕校與殿廳也, 昨冬經始, 工役浩大, 民戶凋殘, 子來之民, 雖不彈勞, 而新創之邑, 未易成樣, 此豈非切迫之甚者乎? 伏願聖明, 更加仁撫, 特垂恩典, 或以劃給糧資, 或以減除民役, 期於完事, 則斯莫非天地父母終始曲護之盛德也。 本府府使臣韓聖輔, 一自下去之後, 憊心罷精, 百方區劃, 日與臣等, 勤勤講究, 盡力施措, 靡不用極, 而壤地?隘, 民戶凋殘, 雖有善策, 地無用武, 萬目??, 難於善成, 故臣等, 不識忌諱, 敢來呼?於天日之下。 伏願聖明, 別遣京官, 審察地勢之遠近, 査出列邑之文簿, 曾已割屬之三邑, 則推其未盡推者, ?完本府之舊彊, 專未還給之列邑, 則一依古蹟, 還屬本府, 而還屬之中, 或有小小村落, 未盡屬於本府者, 則隨其地形, 竝爲移屬, 損其大而益其小, 從民志而定邑界, ?本府, 成一鎭於太白․小白之下, 則豈但爲府民之幸也? 抑亦有補於國家關防之萬一也。 臣等曲被恩私, 積?已雪, 感幸一念, 殞結難報, 而復此披肝, 區區陳達者, 誠若家人父子, 狎恩恃愛, 而不暇念其詰怒也。 伏願恕其罪務其情, 而垂仁採納焉。 臣等無任激切屛營之至。 答順興幼學李基命等疏曰, 省疏具悉。 疏辭, 令該曹稟處。/ 숙종 10년 3월(갑자) 원본303책/탈초본16책 (9/9)(www.history.go.kr 2007)
감천[記事] : [서명] 승정원일기 숙종 25년 / [기사명] 順興에 속한 胎藏里 등을 ?基에 예속할 것 등을 청하는 南斗潤 등의 상소 / [날짜] 1699-06-15(음) / [기관명] 국사편찬위원회 / 숙종 25년 6월 15일 (임자) 원본385책/탈초본20책 (16/16) 1699년 康熙(淸/聖祖) 38년 / ○ 豊基儒生南斗潤等疏曰, 伏以臣等聞, 心有?則必呼天, 身有疾則必呼父, 何者? 蓋人之生, 本乎天地父母, 故窮則必反本也。 臣等, 俱以嶺外殘民, 居至小之邑, 抱無窮之?, 每欲疾呼於天地父母之前者, 有日月矣。 然而九重邃矣, 千里邈矣, 有懷未暴, 隱忍苟活, 而到今削弱之勢, 困苦之狀, 有倍於前, 則安得不齊聲疾呼於天地父母乎? 此所以不計農月, ?足赴闕者也。 伏願聖明, 哀矜而垂察焉。 ?基爲邑, ?在竹嶺下, 當南北要衝之處, 爲左道直趨之路, 故使星之旁午, 貢輸之絡繹, ?役之煩重, 固非他邑所可比也。 前者順興合屬之時, 尙有難堪之歎, 況當順興復設之後, 郡內地面, 太半見失, 而直路諸役, 小無缺者乎? 摠計本郡地方民戶田結, 則僅得如他道一大面, 嶺以南七十餘邑, 罕有如此至小之邑也。 諸道郡邑, 亦未有如此至殘之邑也。 夫以至小至殘之邑, 處於僻隅, 難成郡邑模樣, 況處大路要衝之地乎? 雖無竹嶺之役, 自榮川至本郡, 直路輸致, 送迎烽燧等役, 自是職內之事, 而猶不能支撑者, 蓋以至小之邑, 當缺孔道也。 惟其如是, 故?民, 晝不息肩, 夜不帖背, 爭避隣邑缺年凶荒, 而里邑, 已多墟矣。 ?邑之削弱至此, 殘民之支保缺變通以爲蘇缺中於順興不缺內順興胎藏里亦在本郡數里之內, 蓋以本郡地順興缺田案中分越屬順興者也。 若割此三處, 使屬本郡, 則縱不缺興之時, 庶有支撑之勢, 故道內公議, 莫不皆然, 郡民曾以甘泉缺事, 齊訴於道臣, 而終不能成者, 蓋緣道臣之數遞也。 噫, ?基之削弱至此, 則隣邑之所當恤也。 以順興地大役小之邑, 欲避竹嶺之役, 謀送昌樂驛於本郡者, 抑何故也? 當初順興定界之日, 一從地誌, 尺土一民, 盡爲收復, 昌樂缺其中其時之急急推去者, 未?此驛之有弊也, 及其應役之後, 始覺此驛之有弊, 順興前府使沈楫等張皇瞞報, 欲移其役於本郡者, 非止一再, 道臣, 以其不當斥之, 其後累囑驛民, 更?其計, 自備局, 詢問本道, 則其時道臣啓本有曰, 昌樂本是順興地, 載在輿地誌, 割地分界, 疆〈?〉一定, 則不可以有弊而與人, 無弊而自取, 宜從地誌所載, 順自爲順, ?自爲?云, 自備局以爲的確之論, 昌樂仍屬順興, 又有判下公事, ?杜日後相爭, 此本郡之有五度, 得伸文案, 而卽今謄上備局者也。 不意去年, 昌樂吏卒, 更生奸謀, 誣訴該曹與本道, 卒然移屬昌樂, 而本郡則全然不知, 而未反爭辨, 驛民之挾詐弄奸之狀, 有不可勝言, 而所可惜者, 朝廷未察前事, 徒信驛吏一時之誣訴, 竟罷前日判下公事也。
噫, 昌樂之屬本郡, 於昌樂則幸矣, 於順興則得矣, 獨於豊基, 一何厄哉? 夫以削弱如?邑, 殘弊如?民, 恢一尺土, 得一民戶, 亦足自補, 不必辭去, 而若昌樂者, 其民則驛卒, 其土馬位, 無一毫缺郡之事, 有百端難堪之弊, 決非殘邑之所可擔當也。 本郡見削之後, 旣不堪職內直路應行之役, 今者他府之巨役, 實無異於以蚊負山, 其至滅亡之域者, 斷可知矣。 惟其如是, 故昌驛移屬之後, ?民驚擾未定, 向之憂者, 今爲之哀向之歎者, 今爲之泣, 欲罷數百年所居之郡, 願爲榮川投附之民, 欲延晷刻之殘命, 缺誠急, 而其情誠可慽也。 誠未知順興有何功, 而廣其土, 減其缺有何罪, 而削其地移其役乎? 此一邑之殘民, 擧切向隅缺之明猶未照缺道缺彼此, 而若論缺當要衝順在僻隅, 無所主管, 則廟堂之軫念藩翰缺也。 臣竊怪夫輕歇之順, 移其苦於他邑, 緊重之?, 代其役於缺常安泰, ?至削亡者, 此必廟堂不審此地之形勢而然也。 前相缺趾完按本道時啓本有曰, 順可無而?不可無。 又曰, 合順興於?基, 爲?․順府使, 欲守竹嶺要害, 則蓋審固國之形勢, 全在本郡也, 不特此也, 故相臣李敬輿按本道時, 請修竹嶺上古山城, 欲爲防禦之重地, 本郡之爲國重地, 自古而然矣, 奈何到今殘削, 關防之地, ?作一片之地? 又移他郡之巨役, 使至革罷之境, 此豈廟堂之得宜乎? 前日欲割三處, 以補本郡之殘缺者, 不但爲殘民之保護也, 抑亦衛國之長策也。 大抵甘泉縣, 間在?基․醴泉界, 故自?․醴往來使星, 皆過甘泉, 則出站支待軍馬, 雇立安東, 似爲擔當, 而甘泉, 在安東百里之外, 故豊基專當其役, 則安東任土, 豊基應役者, 不亦?苦之甚乎? 與其無土而應役, 無寧得土而應役, 故此所以豊基之民, 欲得甘泉者, 而亦非白地之請削, 則甘泉之屬於豊基, 非事理之至當乎? 且甘泉於安東, 則名雖本府, 道甚遼遠, 涉大川踰險嶺, 故當隆寒霖?之時, 不能相通, 便作一府之絶域, 於豊基, 則不?往來之便近, 所食土田, 多在?邑, 故土役․身役, 分應兩邑, 則甘泉之民, 不堪其苦, 每欲投附於?邑, 而至今未果者, 蓋有嫌於叛舊而就新也。 揆諸地形民情, 甘泉之屬於?基, 亦非公私兩便之道乎? 若以割地爲難, 則柒谷設邑之後, 大丘殘弊, 故割星州之花園縣, 密陽之?角縣, 以補其缺, 機張小民, 不堪苦, 故割蔚山之下味面, 以舒其困, 而今此?基之削弱困苦, 百倍於大丘․機張之殘弊, 則廟堂之分割土地, 例行於道內列邑, 而獨於豊基, 有所持難也哉? 至若龍山及胎藏, 不過小面與小村, 旣在本郡至近之地, 則在彼皆爲九牛之一毛, 在此可爲缺斗水, 此豈無變通之道乎? 道臣啓聞中三件事, 皆有所見缺乍還事近顚倒云者, 外面誠有然者, 然凡天下國家缺不可吝改, 則缺執一而論也, 至缺如或驛民拒逆, 則生事本郡, 渠卒無事, 終亦無補缺。 嗚呼, 孔道殘邑, 不可不恤, 國家關防, 不可不固, 則昌樂之移缺甘泉之割給, 宜矣。 末世凡事, 一隨形勢, 而若或朝廷未察此缺情終未變通, 則嶺底殘民, 保存無策, 請罷本郡, 以附榮川․醴泉, 乃其苟活之民情。 噫, 先王胎封陞號之郡, 不可罷也, 父母累世居生之邑, 不可革也。 民情至此者, 實由萬分危急, 無處求生也, 寧不悲哉? 噫, 謀之雖多, 決缺獨若使聖上, 特軫嶺底殘邑殘民, 詳覽本郡所上備局文案及地圖, 則聖主可以一見, 決矣。 其於保殘民重關防之道, 豈少補哉? 伏願聖明留神焉。 臣等, 無任祈懇之至。 謹昧死以聞。 答曰, 省疏具悉。 疏辭, 令廟堂稟處。 啓下備邊司 / 숙종 25년 6월(기묘) 원본385책/탈초본20책 (16/16) 숙종 10년 3월(갑자) 원본303책/탈초본16책 (9/9)(www.history.go.kr 2007)
감천[記事] : 병산서원/ 공간이야기/ 유성룡(柳成龍, 1542~1607)|서원의 행사/ ... 방학인 4월에서 7월에 농사비용으로 50석이 지출된다. 반면 수입은 예천군 감천에서 90석 등 각처에서 수...(www.koreastudy.or.kr 2007)
감천[記事] : 안동시사 1/ 간행년 : 1999/ 저자 : 안동시/ 발행처 : 안동시청/ 4. 임진왜란과 안동지방의 의병투쟁/ ...경상도 병마사가 이곳으로 달려오고 안집사는 별도로 군마(軍馬)를 차출하여 감천 일대에 진을 치자 영주 고을 ...(www.koreastudy.or.kr 2007)
감천[記事] : 안동시사 1/ 간행년 : 1999/ 저자 : 안동시/ 발행처 : 안동시청/ 2. 갑오개혁과 의병항쟁/ ...서ㆍ풍북ㆍ풍현내ㆍ서후ㆍ서선ㆍ북후ㆍ북선ㆍ동선ㆍ동후ㆍ임북ㆍ임동ㆍ임현내ㆍ임남ㆍ길안ㆍ일직ㆍ감천ㆍ내성ㆍ춘양ㆍ소천ㆍ재산...(www.koreastudy.or.kr 2007)
감천[記事] : 안동의 문화유산/ 간행년 : 2001/ 저자 : 서수용/ 발행처 : 안동문화원/ 14) 쌍계서재(雙溪書齋)/ 안동시 서후면 저전리/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삼종숙 되는 한양 조씨 9세 종(琮)은 청하현감을 지낸 분이다.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멸문지화를 당하자 한양에 살 수 없어서 화를 피해 지금의 영주 제베리로 낙남(洛南)하였다. 이분은 아들 여섯을 두었다. 그러나 화를 당한 뒤라 걱정이 없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섯 아들에게 각기 다른 고장으로 가 살라고 명했고, 그리하여 와람으로, 영양으로, 감천으로 갈라져 살게 되었다...(www.koreastudy.or.kr 2007)
감천[記事] : 안동의 가사/ 간행년 : 1995/ 저자 : 이대준/ 발행처 : 안동문화원/ 44. 몽중 탐승가夢中探勝歌/ 미상/ ...려 조弔상喪하고 천리고향 화華려麗강江산山손목잡고 이별하고 감천지나 대大구邱지나 부釜산山항港에 나렸도다 선船창...(www.koreastudy.or.kr 2007)
감천(甘泉) [우물] : 감천면 현내리 현내(縣內) 복판에 있는 우물로, 돌 사이에서 물이 나오는데, 그 맛이 달고 차며, 겨울에는 따뜻하다. 깊이가 한 길이 된다. 옛날에는 우물 사벽(四壁)을 자연석으로 쌓아 올리고 지상 부분은 통나무를 정 자(井字)로 쌓아 사용하였다. 현재는 지상 부분을 시멘트관을 놓고 있으나 우물 내벽(內壁), 즉 지하 부분은 옛날 그대로이다. 수량도 많아 한해(旱害)에는 영농에 급수하기도 한다. 지금(1980)도 이 샘물은 동리 식수(洞里食水)로 이용되고 있다. 감천면 사무소도 이곳 현내리 581번지에 있었으나, 1921년에 포리(浦里) 할미성으로 옮겨 갔다. [傳說] : 고려 말 나라가 한창 왜구(倭寇)의 말발굽 아래 쑥밭이 되어가던 무렵이었다. 어수선한 나라의 국기(國紀)를 바로 잡기 위하여 야비한 왜구의 횡포를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錦繡江山)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아침 햇살을 받아 휘황찬란(輝煌燦爛)한 투구와 갑옷을 입고, 서슬이 파아란 칼날을 번뜩인 일대의 어느 장군이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승전의 환호성을 울리면서 발걸음도 가볍게 지축을 계속 동진에 동진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목이 말라 입술을 적실 춤도 없는 갈증(渴症)으로 한 마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장군은 병사들에게 물 한 대박을 떠오라고 명령했다. 병사들은 여러 샘터를 수소문하여 찾아서 겨우 물 한 대박을 장군에게 떠바쳤다. 이 물을 받아 마시던 장군은 금방 활력소(活力素)라도 먹은 것처럼 생기(生氣)가 돌았다. 물맛이 기가 막히도록 시원하면서 단맛을 내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이 마을을 달 감 자(甘字)와 샘 천자(泉字)를 써서 감천(甘泉)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감천(甘泉) [우물] : 감천면 현내리 342번지(畓)에 있는 우물로, ‘현내’ 마을 복판에 있다. 돌 사이에서 물이 나오는데, 그 맛이 달고 차며, 겨울에는 따뜻하다. 깊이가 한 길이 된다. 옛날에는 우물 사벽(四壁)을 자연석으로 쌓아 올리고 지상 부분은 통나무를 정(井)자로 쌓아 사용하였다. 현재는 지상 부분에 시멘트관을 놓고 있으나 우물 내벽, 즉 지하부분은 옛날 그대로이다. 수량도 많아 한해(旱害)에는 영농에 급수하기도 한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감천(甘泉) [地形圖] : 국립지리원에서 작성한 1/25,000 지형도로, no.152-3, 지도 1매, 58x47cm, 수원 국립지리원에서 2000년에 발행하였다. 항공사진은 1994년에 촬영, 현지 조사는 1995년에 한 것이다. 보고서 여부는 NJ52-14-11-1이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이화여대이다.(keris 2004)
감천(甘泉) [由來] : ㅇ 위치 : 감천면 현내리, ㅇ 내용 : 현내리(縣內里) 마을 복판에 있는 우물이 감천(甘泉)이다. 돌 사이에서 나오는 물은 그 물맛이 달고 차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고려시대부터 감천(甘泉) 현청(縣廳)이 있던 곳으로 명천이라 하여 샘물이 잘 솟고 수량이 많아 가뭄에도 영농(營農)에 급수하였으며, 또한 물맛이 좋아서 단샘(甘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깊이는 한 길쯤 되는데 옛날에는 우물 내벽을 자연석(自然石)으로 쌓아올리고 지상 부분은 통나무를 정자(井字)로 쌓아 사용하였다. 현재는 지상 부분은 시멘트로 토관(土管)을 놓고 있으나 우물 내벽, 즉 지하부분(地下部分)은 옛날 그대로이다. 현내리 581번지는 감천면사무소(감천현)의 옛터였으나, 1921년에 할미성으로 불리는 지금의 포리(浦里)로 옮겼다. 감천면(甘泉面)의 이름은 이 우물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옛날 나라가 한창 외적(外敵)의 말밥굽 아래 쑥밭이 되어 가던 무렵이다. 이 일대에 아침 햇살을 받아 휘황찬란(輝煌燦爛)한 투구와 갑옷을 입고 서슬이 시퍼른 칼날을 번뜩이는 어느 장군이 있었다. 그는 어수선한 나라의 국기(國紀)를 바로 잡고 야비한 외적의 횡포를 이 강산(江山)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가는 곳마다 승전의 환호성을 울리면서 발걸음도 가볍게 지축을 계속 동진(東進)에 동진을 거듭하였다. 그러던 중 목이 말라 입술을 적실 틈도 없이 갈증(渴症)으로 이 마을에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장군은 병사들에게 물 한 대박을 떠오라고 하였다. 병사들은 여러 샘터를 찾아서 겨우 물 한 대박을 장군에게 떠 바쳤다. 이 물을 받아 마신 장군은 금방 활력소(活力素)라도 먹은 것처럼 생기(生氣)가 돌았다. 물맛이 시원하면서 단맛을 내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이 마을을 달 감(甘)자와 샘 천(泉)자를 써서 감천(甘泉)이라 이름하였다 한다.(甘泉面홈페이지 2013)
감천간이학교: 醴泉郡 甘泉에 簡易學校 新設/ 신문명: 동아일보 1937년/ 날짜: 1937-06-18/ 분류: 연속간행물 > 신문 > 동아일보/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 신문자료/ 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醴泉郡甘泉에 簡易學校新設/ 발행년월일 1937-06-18/ 발행구분 조간/ 면수 04/ 단수 05/ 표제어 간이학교(簡易學校)//
감천고등학교(甘泉高等學校), 학교 [敎育] : 감천면 포리 311-20번지에 있는 공립학교로, 1975년 2월 1일에 감천중학교(甘泉中學校)에서 병설 6학급 인가되어 1976년 3월 1일에 개교하였다. 24,006㎡의 대지(垈地), 8회 712명의 졸업생, 6학급, 14명의 교사, 325명의 학생(1986)이 있다. 1986년 3월 제39회 전국신인권투선수권대회(全國新人拳鬪選手權大會)에서 2명이 우승하였다. 역대 교장은, 초대 곽수룡(郭洙龍, 1973.3.1-1978.8.28), 2대 황하량(黃河亮, 1978.9.1-1984.2.29), 3대 최홍범(崔洪範, 1984.3.1-1986.2.28), 4대 권태등(權泰燈, 1986.3.1- )이다. 학교 현황은 다음과 같다.(面積 : ㎡)
年度 學級 敎室 敎員 學生 卒業者 校地面積 建物面積
1976 2 2 5 80 - 1,729 188
1977 3 7 7 151 - 共用 1,222
1978 5 7 8 232 - 13,000 182
1979 6 6 11 266 47 19,724 605
1980 6 7 10 305 65 同 同
1981 6 7 9 339 77 同 同
1983 6 6 12 337 108 - -
1984 6 6 12 313 115 - -
1985 6 6 12 321 95 - -
1986 6 - 11 323 - - -
1987 6 - 11 321 102 - -
1988 6 - 15 315 107 - -
1989 6 - 15 317 94 - -
1990 6 - 15 299 94 - -
1997 3 8 12 131 41 - 2,000
감천고등학교(甘泉高 1 노주희 孃 自身보다 어려운 이웃 爲해 이웃돕기 誠金 寄託) [記事] : 어려운 가정형편임에도 자신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기탁한 학생이 있어 훈훈한 미담이 되고 있다. 감천고 1학년인 노주희(감천면 대맥리, 16) 양은 모자가정으로 어머니(성현주)와 함께 살면서 평소 근검절약 정신으로 용돈을 모아 이웃돕기 성금으로 45,400원을 2008년 12월 12일 감천면사무소에 기탁했다.(金相國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8-12-13 오전 11: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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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