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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125 : 개솔새...개심사지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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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솔새[植物] : 예천군의 산지 건조한 곳에 자생하는 다년생 초본으로, 학명은 Cymbopogon Goeringii Honda이고, 화본과(禾本科)에 속한다.
개수로의 수리학(開水路의 水理學) [冊] : 주문덕(周文德, Techow Ven)의 저서를 예천읍 청복2리 골마 출신인 정암(鼎岩) 최영박(崔榮博, 1926- , 水原大 總長) 등이 번역한 책으로, 551쪽, 표(表), 26cm, 서울 야정문화사(冶庭文化社)에서 1976년, 1977년, 1979년에 출판하였고, 서울 태정문화사에서 1984년에 출판하였다. 목차는, 1) 기초 원리, 2) 등류(等流), 3) 점변류(漸變流), 4) 급변류(急變流), 5) 비정상류(非正常流), 부록(511-551쪽)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서고자료신청대에 소장(청구기호 8261-58=2)되어 있고, 경북대학교 도서관 중앙댠행본자료실에 소장(청구기호 중앙627 주37ㄱ최)되어 있고, 그 외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강원대, 건국대(상허), 경상대, 경일대, 경희대, 단국대(중앙), 대구대, 명지대(용인), 세종대, 순천대, 영남대, 충남대이다.(keris 2003)
개수로의 수리학(개수로의 水理學) [冊] : 예천읍 청복리 골마 출신 최영박(崔榮博, 1926- , 醴泉初 卒業, 水原大 總長) 등의 번역서로, 552쪽, B5, 야정문화사에서 1997년 1월 20일에 출간하였다. [목차] : 001. 기초원리 / 002. 등유 / 003. 점변류 / 004. 급변류 / 005. 비정상류(daum 2009)
개심사(開心寺) [터] : 예천읍 남본2리 200-3번지 외남본동(外南本洞) 솔개들(松浦)에 있던 사찰로, 나말여초(羅末麗初)에 창건되었고, 5층석탑(五層石塔, 寶物 第53號) 밑돌에 새긴 글자인 <석탑기(石塔記)>에 절 이름이 있고, 1011년(현종 2)에 이 석탑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개심사 석탑기(開心寺石塔記) [金石] : 예천읍 남본2리 송포들(松浦坪)에 있는 개심사지 5층석탑에 음각(陰刻)되어 있는 기문으로, 불교가 고려인들의 일상생활 속에 그 일부로 습합되어 있음을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자료이다. 1010년(현종 1) 3월에 공사가 시작되어 이듬해 4월까지 약 1년 정도 소요된 석탑의 조성공사는 이 지역 두 향도(香徒) 조직이 참여하였는데, 그 향도 조직의 임원이 42명과 95명, 그리고 참여 인원이 1만 명에 달하였다는 것이다. 1만이라는 숫자는 당시 예천 지역(當時 甫州)의 전체 인구에다 인근 풍산, 동로, 산북 일부의 인구까지 합해야만 가능한 숫자라는 연구를 주목한다면, 당시 지역민 전체가 향도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신앙 대상으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생활화된 불교의 모습을 고려 민중들의 삶에서 확인해 보는 것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들까 진지하게 살펴볼 일이다.(日常 삶으로서 佛敎-高麗의 民草 유영철, www.kamro.org 2002)
개심사 석탑기를 통해본 고려 전기의 향도(醴泉開心寺石塔記를 通해본 高麗前期의 香徒) [硏究物] : 1) 향도는 본래 불교 신앙 활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신도들의 결사를 일컫는다.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에 고대 사회발전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에 불교가 수용된 이후 널리 형성되어 활동하여 갔다. 그러나 불교 신앙 활동만을 위하여 존재하였다기보다는 구성원간의 길흉 경조(吉凶慶弔), 재난 구제 등의 기능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구성원들이 자발적, 자율적으로 형성한 신앙 단체이기 때문에 행정 편제나 생산 공동체 등과는 구별되지만, 향도가 존재한 각 시기의 촌락사회 구조 및 성장과 연관되면서 지역 사회의 공동체 형성에 큰 구실을 담당하여 왔다. 2) 개심사 석탑기를 통해 본 고려 전기 향도 : 신라 고려의 석탑, 불상, 볼종(拂鍾) 류(類)는 흔히 그 조성 내역을 밝힌 기문을 남기는데, 예천 개심사 석탑에 새겨진 기문은 고려 전기의 것으로서, 그 내용이 독특하여 관심의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특히 향도에 관한 구체적인 글이 적혀있기 때문이다. 향도는 불교가 융성하던 신라, 고려에서는 사회적 비중이 커서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고려 전기의 향도 조직과 성격은 신라 하대의 것을 기본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신라 말 고려 초 관반(官班) 조직을 이어 지방 사회에서는 지방 세력들이 주도하는 정치적 공동체(邑司)가 전면에 부각되었고, 향도는 이 조건에 일정하게 제약되고 역으로 그것을 보강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석탑 조성(1010.3.3-1011.4.8)에 참여한 추향도(椎香徒)와 미륵향도(彌勒香徒)를 설명해 보겠다. 석탑에서는 미륵향도와 추향도를 소개하고 있다. 이 두 향도의 소개는 석탑조성 역사(役事)의 주체가 그들이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기문에 나타난 직임(職任)으로 각각의 총수를 산출해 보면, 미륵향도는 42명의 임원들, 추향도는 95명의 임원을 가지는 단체로 파악된다. 임원의 수가 이 정도이면 상당한 규모의 향도 구성원을 가진 것으로 추측하는 바 기문에 보이는 '승속랑을 합해 1만 명이 투입되어 완료하였다(僧俗娘合一萬人了入)'의 1만 명이 이 향도와 어떤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이 1만 인이 두 향도의 일반 구성원이고, 그 뒤의 자세한 향도 소개는 그 임원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당시 예천군민의 수가 1만 명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되는바 이 역사로 개심사의 소재지인 예천군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 어느 이웃 지방과 공동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역사의 주체는 예천 본군으로서, 두 향도 중 임원의 수가 더 있는 추향도가 역사의 주체인 예천군민의 것이란 사실이 드러난다. 이렇게 되면, 미륵향도의 주체가 궁금해지는데, 기문에 나오는 최씨 성을 가지고 추정해 본 바 예천에 속현 관계였던 다인현(編著者 註 : 多仁縣은 뒤(1274)에 처음으로 醴泉의 屬縣이 되었기에 아니고, 757年부터 1018年까지 屬縣이었던 殷正縣(上下里面), 永安縣(安東 豊山), 嘉猷縣(聞慶 山陽), 安仁縣(聞慶 山北))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군내에서 최고 유력 계층인 호장(戶長)이 동량(棟梁)으로서 탑 건립을 주도하면서 광군(光軍)의 조직까지 동원하였기 때문에 읍사(邑司)의 관여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추향도의 구성원 중에서는 선랑(仙郞)의 존재가 나타나는데, 선랑은 신라 시대의 유풍으로서 불교 신앙 뿐 아니라 재래의 신앙 요소가 그 향도에 있음도 감지할 수 있다. 그려 전기 향도가 지역 공동체와 밀접하게 관계됨에 따라 국가적 차원에서 그 국중대회(國中大會)의 성격을 지니는 팔관회(八關會), 연등회(燃燈會)로 수렴되기도 하였고, 이와같은 향도의 조직과 성격을 12세기 이후 사회 변동 속에서 변화되었다.(인터넷 야후 2001)
개심사지(話題의 冊 <절터, 그 아름다운 蠻行>) [記事] : 어느 누구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눈 덮인 겨울 산을 올라본 사람은 안다. 번잡함을 벗어난 적막한 산을 찾으면 정결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보이는 것이 눈뿐인 그곳에서는창조를 경험할 수 있다. 백지에 그림을 그리 듯 상상만으로 여름의 푸름도 만들어 볼 수 있고, 형형색색 단풍 빛깔도 그려낼 수 있다. 형체가 가뭇없이 사라진 옛 절터에서의 느낌도 이런 것일까.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이지누의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에는 폐사지(廢寺址) 25곳의 역사와 저자의 사유가 담겨 있다. 불교나 미술에 관한 지식을 주는 책이라기보다는 심상을 담아낸 에세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이지누의 절터 톺아보기시리즈 중 첫째로, 강원도․경상도 편이다. 앞으로 경기도․충청도․전라도편과 경주편도 출간된다. 강원 양양의 진전사 터와 선림원 터에서 시작된 저자의 구도 행각은 한반도의 동쪽 허리를 따라 예천의 개심사 터등 경북 지역의 폐사지를 거쳐 경남 산청의 단속사 터와 지곡사 터 등으로 이어진다. 잃어버린 절터에서 저자는 죽비 소리를 듣고 부도와 탑에서 천년의 세월을 복원해 낸다. 사시사철 절터를 찾을 때마다 그는 고독의 그림자와 함께 거닐며지금 바로 여기가 가장 아름답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불교와 도교, 부처와 노자를 넘나드는 이야기는 책 읽는 내내 철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함께 실린 사진 218점은 정겹고 글은 아름답다. 표현만 아름답다고 미문으로 명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글은 마음 수양으로 나이가 든 잔잔함이 들어 있어야 아름답다. 그곳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그것이 보이지 않던가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현장을 찾아 사진기와 마음에 그 느낌을 담지 않았다면 공감을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저자의 폐사지 순례에는 여정이 있고, 사색과 철학이 있다. 그런 점에서 책은 아름다운 여행기이면서 또한 깊이 있는 철학 에세이다. 순례객의 발길이 끊어진 빈 절터의 당간 지주가 지닌 이미지는 기다림이다. 그는 사람들이 떠나 버린 동구 밖 느티나무와도 같은 것이다. 그들은 제 몸 속에 사무치도록 배어 있을 과거를 추억하며 묵묵할 뿐이다.그리하여 절터를 좋아하는 불교도의 심정으로 책을 대하지 않아도 좋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라면 여행기로, 꿈꾸는 자라면 철학적 사유로, 전통문화를 살펴보려는 이는 답사기로 바라보면 된다.(이보연 記者 世界日報 2006년 3월 10일 (금) 17:10)
개심사지석탑기(校勘․譯註 醴泉開心寺址石塔記=The correction and proofreading of the epitaph on the pagoda at the old site of Gesim temple in Yecheon) [論文] : 예천읍 서본리 출신인 김봉균(大邱保健大 敎授)의 논문(제어번호 40007537)으로, 대구보건대에서 2003년에 발행한 <논문집(論文集)> Vol.23 441-456쪽(16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 영문 초록은, A Korean translation of the original epitaph on the five-story pagoda at Gesim temple in Yecheon was done by correcting the errors of all records issued by Choseon Chong Dog Bu (Japanese Headquarter), and by footnoting. The main points of the epitaph are as follows: On March 3, 1010, King Hyeon Jong during Go Rye dynasty ordered to construct a pagoda at Gesim temple in order to set up a good stupa. At that time, about 10,000 Buddhist believers, military reserves, and farmers, as well as 1,000 cows with wagons participated in this construction. Thus, repay the Buddhist mercy to the heaven and establish righteous mind for the country, and wish to let the inculcation of Buddha spread to the rank-and-file in the earth. In the name of mother, Im Jang Bu, head of the village in Yecheon, erected the pagoda. It was erected in April, 1011.이다.(keris 2004)
개심사지오층석탑(開心寺址五層石塔) [記事] : <송대(松臺)> 제8호에 실린 권상헌(權相憲)의 글이다. [人間的인 모습의 八部神衆像] : 2층 기단이 4개의 판석으로 우주와 탱주로 나누어 있고, 팔부신중상을 돋을새김(浮彫)으로 조각했다. 팔부신중의 조각 솜씨도 이 탑의 12지신상 못지않으며, 옷주름의 선과 비례 균형 조화 등의 요소로 보아 같은 사람의 솜씨로 여겨진다. 팔부신중은 원래 고대 인도 신화에 나오는 신들로서 악마나 귀신에 해당되지만 불교에서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흡수한 여덟 신을 말한다. 제가, 니가, 야차, 건달마,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제가는 육계, 색계, 무색계의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을 말한다.
니가는 물 속에 살며 바람과 비를 오게 하는 호국 선신이다. 야차는 고대 인도 악신아나 불교에서는 인간을 도와 이로움을 주는 불법 수호신이며, 건달마는 천사의 신성한 물 소마(soma)를 지키는 신으로 아악을 관장하며 향을 먹고산다. 아수라는 얼굴과 팔이 여러 개인 악신이며, 싸움을 잘 한다. 아수라장은 싸움터를 말한다. 가루라는 새벽이나 태양을 신격화한 상상의 새이며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새의 왕이다. 긴나라는 사람은 아니지만 부처를 만날 때는 사람이 된다. 가무의 신, 아악의 신이다. 마후라가는 뱀의 머리를 한 음악의 신으로 땅 속 요귀를 쫓는 임무를 갖고 있다. 팔부신중상은 9세기 말부터 우리나라 탑에 나타나며, 청도 운문사삼층석탑과 화엄사오층석탑과 주왕산 대전사의 파괴된 탑들에도 보인다. 팔부신중은 탑의 조형상, 탱주를 세웠을 때 공간 장식에 적당한 소재가 되며, 수호신의 의미와 함께 탑을 화려하고 엄숙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 탑의 팔부신중상은 수호신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둥그스름한 한국인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띤 모습은 우리나라 불상 조각에 보이는 신비한 미소가 느껴진다. 예술 작품에는 그 시대의 시대상과 풍토미와 함께 작가의 혼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塔身部의 彫刻과 아름다움] : 2층 기단 갑석은 한 개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기단 위에 탑신받침을 두고 탑신을 얹었다. 탑신받침은 화려한 연꽃 받침으로 신라 탑에서는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장식이다. 이후에 제작되는 고려 탑의 한 양식으로 나타나며, 화려한 장식을 하는 고려 탑의 특징으로 발전되었다. 탑신부는 층마다 탑신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고, 체감률에서 신라 탑의 아름다운 비례가 남아있다. 옥개석도 한 개의 돌로 이루어졌고, 두께가 두터우나 반전이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탑신에는 목조탑의 잔재인 우주가 뚜렷하다. 1층 탑신석 남쪽에는 대문 모양이 선으로 새겨졌고, 자물쇠가 조각되었으며, 양쪽에는 인왕상을 배치하였다. 불국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이다. 인왕상 역시 불법 수호신으로서 금강신, 집금강, 금강야차로도 불린다. 절집 출입문 양쪽에 상으로 만들거나 그려서 수호하게 된다.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을 의미하며, 밀적금강은 금강저를 손에 들고 항상 부처를 수호하는 아차신이다. 나라연금강은 금강의 힘이 천왕호국경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에 나타난 돋을새김(浮彫) 역시 힘센 수호신이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다. 개심사지의 인왕상도 금강저를 손에 든 온화한 모습으로 자물쇠로 잠겨진 불국의 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국태민안을 바라는 당시의 시대상이 나타난 것이다. 옥개석은 두툼한 편이나 네 모서리와 지붕에 각을 지우고 경쾌하게 반전시킴으로써 둔중한 느낌이 없으며, 모서리 끝에는 풍경을 단 구멍이 옥개석 귀퉁이마다 뚜렷이 남아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만 남아 있다. 노반에는 안상을 뚜렷이 새겨 장식하였고, 복발은 화려한 꽃무늬를 둘렀다. 지주를 세워 앙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 촬주를 얹었을 것이나 상륜부 조각들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모두가 남아 있다면 장엄하고 화려하고 찬란한 석탑을 볼수 있을 텐데 당시의 모습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권상헌 송대 제8/호)
개심사지오층석탑(醴泉 開心寺址五層石塔 中 八部衆像) [記事] : 예천읍 남본2리 송포들(松浦坪)에 있는 석탑으로, 불교에서 팔(八)이라는 숫자는 완성을 의미하며 석탑에 채용한 팔부중상은 넓은 의미로 관음의 전당으로 팔각원당형을 구현한 것으로 신라시대 밀교에 자극받아 화엄불국토세계와 정토세계 구현을 위해 팔부중 신앙이 신라 석탑에 적용된 사례이다. 현대 신라계 석탑은 19기가 이와 같이 상층 기단부에 팔부중상을 두고 있다. 그것도 경주에 4기, 경북에 9기 등 절반 이상이 경주와 인접한 지방에 건립되어 있다. 예천 개심사지석탑은 고려 초기 석탑으로 알려져 있는데 석탑의 양식이 신라계를 철저히 계승한 흔적이 곳곳에 보여 고려 초 지방 토착 세력에 의해 신라계 탑의 응용이 진행된 흔적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팔부중상 중 서면에 해당하는 것은 '긴나라(kimnara)' 상의 조각이며 그 옆에 있던 것은 '천' 상이다. 긴나라상의 특징은 허리에서 칼을 두 손으로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간단하게 긴나라의 유래에 대해 설명을 하면, 인도 신화에서 긴나라는 영산에 살며 미묘한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며 춤추며 여러 보살과 중생을 감동시키는 음악신이었다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긴나라는 아름다운 음성의 새를 신격화한 인두조신의 모습이었으리라 알려진다. 불교에 수용된 후 고운 음성에 가무 솜씨가 뛰어난 악신으로서 모습은 사람과 비슷한데 뿔 하나가 돋아 있어 신인지 사람인지 짐승인지 의심스러웠다 한다. 긴나라가 명확히 보이는 신라계 석탑으로서는 숭복사 동삼층석탑, 선림원지 삼층석탑 등이 있다.(//blog.paran.com 2004-09-17 18:14 나알지)
개심사지오층석탑(醴泉 開心寺址五層石塔 中 仁王像) [記事] : 인왕상은 감실을 수호하는데, 안동 조탑동 석탑에도 거대한 입상형이 있다.(blog.paran/ 2004-09-17 18:15 from 나알지)
개심사지5층석탑(古蹟踏査 : 踏査 레포트) [記事] : 등록일: 2002-05-29, 파일이름: 고적답사2.hwp(55 KB), 조회수: 47, 들어가기에 앞서... : 답사를 간다는 것. 뭔가가 설레이는 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답사를 간 이유는 단지 여행이라는 의미보다는 수업을 하러 야외로 나간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 싶다.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나는 답사를 떠나기 전 답사를 하는 동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것저것 찾아보았다. 그 자료를 찾으면서 이렇게 내가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답사에 임해야할지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누가 그랬던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그래서 난 걱정 반 설레임 반으로 답사를 시작하였다. ● 개심사터의 5층 석탑 : 예천 읍내로 들어가는 길목 너른 들판 논 한 가운데에는 멀리서 보아도 아주 당당히 서있는 5층 석탑이 보인다. 이 곳에 있었던 절이 '마음을 여는 절'이란 뜻의 '개심사(開心寺)'이다. 넓은 분지 한 가운데에 자리잡아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시야가 넓기에 마음이 열린다는 뜻일까. 전설에 의하면, 한 도사가 예천의 남산인 잠두산에 올라 지형을 살피니 잠두산이 화기를 품고 소년을 죽일 형상을 하고 있어 이를 막기 위해 잠두산 아래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논 가운데 석탑을 향해 난 길을 따라 다가갈수록 보물 제53호인 개심사터 오층석탑의 진면모는 뚜렷해진다. 목차는, 탑, 석불, 서원, 사찰, 느낀 점이다.(야후 專門資料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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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