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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129 : 개심사지5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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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지오층석탑(開心寺址 五層石塔 整備 및 公園化 推進) [記事] : 예천군에서는 군의 대표 문화재이자 고려시대 역사연구 및 불교미술의 귀중한 자료인 개심사지 오층석탑의 보존관리의 문제점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정비 및 공원화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총사업비는 국비 등 43억 원으로 2012년까지 주변 농지 6필지 9,257㎡를 매입하고 필요시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침수되고 있는 탑을 들어올리고 주변을 공원화할 계획이다. 그동안 석탑 주변의 농지가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주변에 상가와 아파트 등 건축물이 신축되고 있어 탑의 기단부가 낮아지고 있으며, 생활 오폐수 유입과 매년 장마철에는 침수로 인해 탑이 훼손되고 있는 실정으로 탑 보존관리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또한 주변 농지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주민 재산권행사에 제약이 있어 조속히 주변 토지를 매입하고 복토를 실시해 탑이 침수되지 않도록 조치하여 귀중한 문화재가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고 주변을 공원화하여 군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개심사지 오층석탑은 예천읍 남본리 200-3번지에 위치한 석탑으로 고려 현종 2년(1011년)에 조성되었으며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이 탑은 건립연대와 주체에 관한 글이 상층 기단 면석과 갑석의 아랫면에 새겨져 있으며 1층의 기단에는 십이지신상, 2층 기단에는 팔부중상, 1층 탑신에는 인왕상이 각출된 미탑으로 고려시대 향토연구 및 불교미술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인정되어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53호로 지정되었다.(醴泉인터넷放送 2009-08-21 오후 6:34:27)
개심사지오층석탑('開心寺址 五層石塔 整備, 周邊 公園化 推進') [記事] : 예천군은 고려시대 역사 연구 및 불교미술의 귀중한 자료인 예천읍 남본리 개심사지 오층석탑(보물 제53호) 정비 및 공원화 조성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개심사지 오층석탑은 고려 현종 2년(1011년)에 조성되었으며,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지난 1963년 1월 보물 제53호로 지정됐다. 이번 공원화 사업은 침수 등으로 인한 탑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실시되는 것이다. 개심사지 오층석탑은 그동안 생활 오폐수 유입과 매년 장마철 침수로 인해 탑 보존․관리에 어려움을 겪어왔으며,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주변 농지는 소유자의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따라 민원이 제기되어 왔다. 예천군은 오는 2012년까지 총 사업비 43억원을 들여 석탑 보수 및 주변 공원 조성을 계획하고 있다. 이를 위해 2010년도에 우선 탑 주변 농지 9천2백57㎡를 매입(소요예산 28억여원), 2011년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 용역(5억여원), 2012년 석탑 보수 및 주변공원 조성(10억여원)을 할 계획이다. 한편 최근 문화재청 김창준 문화재보존국장과 직접 면담을 가진 이한성 의원에 따르면 문화재청이 개심사지 오층석탑 정비를 위해 내년도 예산 10억원(국비 7억원, 지방비 3억원)을 반영키로 했다고 밝혔다.(醴泉新聞 2009년 08월 27일 14:43:03)
개심사지오층석탑[記事] : 예천 번화가로 들어가는 길목인 예천읍 '솔개들'이라 불리는 논 한복판에 자리한 개심사터 5층석탑(보물 제53호)은 고려시대인 1010년(현종 1년)에 건립됐다. 마음을 연다는 뜻의 開心寺가 있었던 자리인데 지금은 탑만 외로이 서 있다. 2층 기단 위에 5층으로 세워진 이 석탑은 높이 4.3m로 그리 크진 않지만 정연한 비례와 적당한 상승감을 보여주고 있다. 2층 기단 중 아래층에는 한 면에 眼像이 셋씩 나있고 그 안상 안에 십이지신상이 하나씩 새겨져 있다. 그 위 상층 기단엔 각 면마다 가운데 탱주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하나씩 팔부중상이 조각되어 있다. 또 그 위 1층 탑신의 남쪽 정면에는 양 옆에 칼을 잡고 서 있는 인왕산이 새겨져 있다. 이 탑엔 탑신과 갑석 처마 밑에 문자가 새겨져 있다. 상대갑석 처마 밑에 새겨진 96자를 해독하면 '고려 현종 원년(1010년)에 이 고을 호장 임장부의 어머니가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僧俗 10,000인의 힘을 모아 4월초파일에 준공했다' 는 내용이라고 한다.(산과 우리산악회 카페 2009.01.16)
개심사지오층석탑[記事] : 예천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인 예천읍 남본리, 검은 매가 나래를 펴고 내려앉으려는 형국인 흑응산(黑鷹山) 밑, ‘솔개들’ 한 복판의 논 가운데에 오층석탑이 단정히 서 있다. 마음을 연다는 뜻의 개심사(開心寺)가 있었던 자리인데 지금은 흔적이 없고 이 탑만 외로이 서 있다. 절도 이 탑이 세워진 시기에 같이 또는 좀 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없어진 시기는 알 수 없는 모양이다. 2층 기단 위에 5층으로 세워진 이 석탑은 높이 4,3m로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정연한 비례와 적당한 상승감을 지니고 있으며, 여러 모양의 그림과 글씨가 조각되어 있어 다른 곳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이채로운 탑이다. 2층 기단 중의 아래층에는 한 면에 안상(眼像)이 셋씩 나 있고 그 안상 안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하나씩 새겨져 있으며, 그 위 상층기단에는 각 면마다 가운데 탱주(撑柱)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하나씩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조각돼 있다. 또 그 위의 1층 탑신의 남쪽 정면에는 자물쇠가 꼭 채워진 문 모양과 양 옆에 칼을 잡고 서 있는 인왕상(仁王像)이 새겨져 있다. 전에 어딘가에서도 이와 비슷한 조각을 보았는데 아마도 탑에 봉안한 사리를 수호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 탑의 특징은 십이지신상과 팔부중상 외에도 탑신과 갑석 처마 밑에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탑신에 있는 글자는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안 되고, 상대갑석(上臺甲石)처마 밑에 새겨진 96자는 형태는 온전하지만 난해한 고자(古字)여서 판독을 못하다가 최근 어느 학자에 의하여 명확하게 판독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이 고을 호장 임장부(戶長 林長富)의 어머니가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승속(僧俗) 1만인의 힘을 모아 4월 초파일에 준공하였다는 내용이라고 하니 이로써 탑의 건립시기와 건립주체가 밝혀졌을 뿐 아니라 권문세가나 호족세력이 아닌 일개 지방 아전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서민대중이 세운 것이라는 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안내하는 분의 말로는 50년 전 자기가 어렸을 적만 해도 탑신에 새겨진 글자들이 글을 몰라서 못 읽었지 글자는 제대로 보였었는데, 1000년 동안 보존되어온 글자들이 50년 사이에 모두 마멸된 것을 보면서 산업사회의 공해가 이토록 심각한 것임을 절감한다고 했다.(ask.nate.com 2004.09.06 21:15 조회 261)
개심사지오층석탑(開心寺址 5層石塔과 寄附文化 : 謙遜한 寄附精神을 담은 開心寺址 5層 石塔) [記事] : 예천 읍내를 가로지르는 조그마한 강가 들판에 높이 4m가 조금 넘는 아담하지만 기품 있는 5층탑이 외롭게 서 있다. 이 탑은 서민적인 조각 기법과 함께, 탑의 조성 배경과 시기, 기부자나 기여자의 명부가 적혀 있다는 데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탑이다. 우리나라에 많은 탑이 있으나 건립배경과 시기, 기부자 명단이 적혀 있는(塔記) 탑은 이 탑이 유일하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탑의 건립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탑의 규모가 줄어들고, 건립의 주체가 지방 호족이나 유지가 된다. 대개는 건립비용을 이들이 부담한다. 이러한 사실은 탑지(塔誌)에 기록되고 탑에 봉안되기도 하고, 사찰의 역사에 기록되기도 한다. 그런데 개심사지 5층석탑은 탑기가 새겨진 위치가 특별하다. 탑의 상층 기단부를 덮고 있는 덮개돌 아래에 모두 190자에 이르는 명문이 적혀 있다.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예천군 호장인 임장부의 어머니가 발원하였고, 좋은 사리를 구하여 예천군민과 다인현민으로 구성된 향도 및 광군조직을 동원해 탑을 지었다는 내용과 함께, 탑의 건립에 기여한 여러 이름이 같이 적혀져 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이 덮개돌의 아래쪽 면에 적혀 있어서 탑을 보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도록 했다. 탑의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에는 십이지신상과 8부중상이 아름답게 부조돼 있다. 만일 기여자의 이름을 탑의 바깥에 새겼다면 이런 조각상은 볼 수 없었을 것이고, 이 탑의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이 자신의 선행을 감추며 얼마나 겸손해 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어느 누구인들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고 싶지 않으랴. 그래서 요즘 건립되는 탑들은 대개 웅장한 자태를 뽐내지만 영락없이 기단부나 몸돌에 기부자의 이름이 크게는 주먹만한 글자로 새겨져 도배하듯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탑은 천년이 지나도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는다. 오늘날 기부자들은 이제 천박함을 버리고 겸손한 기부정신을 이 탑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다. 이 탑은 우리에게 그런 교훈을 준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박준식(문헌정보학·교수)(gokmu.com 2008-11-30 오후 5:57:33)
개심사지오층석탑(開心寺址 5層石塔=資料 醴泉郡) [記事] : 개심사지 5층석탑(보물 제53호 63.1.21 지정)/ 소재지 : 예천군 예천읍 남본리 200-3/ 소유자 : 국유 (관리자:예천군)/ 자세한 설명 : 예천읍 남본리 송포들에 위치한 탑으로 고려 현종 1년(1010)에 조성되었으며 속칭 외남본리 솔개들 논 가운데 2층 기단 위에 5층으로 조성된 탑으로 상층 기단 갑석에 탑기가 음각되어 있어 조성시기와 고려시대 사회제도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데 아직 완전 해독되지 않았다. 전체 높이 4.33m이며, 기단폭은 2.15m인데 지대석은 하층 기단갑석과 각 면이 일석으로 되어 있고 중석 각 면에는 12지신상을 조각 배치하고 2매의 갑석을 덮었다.(醴泉新聞 2010년 09월 15일 (수) 12:58:41)
개심사지오층석탑(開心寺址五層石塔 周邊整備 事業 : 寶物 53號 43億 投入하여 周邊 公園化한다) [記事] : 보물 제53호인 개심사지오층석탑의 안정적인 보존관리를 위해 주변정비 사업이 실시되고 있다. 예천군에서는 개심사지 오층석탑 주변을 공원화하기 위하여 2012년 까지 43억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일대 9,257㎡를 매입하고 발굴조사, 석탑해체보수 복원할 계획으로 추진 중에 있다. 개심사지오층석탑 주변 부지에 대해 2010년 문화재 보수정비국고 보조사업으로 오층석탑 주변 정비 변경승인을 신청하였으며 그 결과 사업부지에 대한 토지 매입 및 발굴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조건부 승인되었다. 이에 예천군에서는 2010년 8월 31일 경상북도 문화재연구원에 시굴 조사를 의뢰해 동년 10월 조사를 완료했다. 이번 조사는 4,109㎡ 부지에 길이 20m, 너비 120㎝의 트렌치 9개, 피트 1개를 설정하여 조사했다. 조사결과 유구는 적심 7기, 석렬 11기, 수혈 3기가 확인되었으며 선문과 무문계 와편, 자기편이 일부 출토되었다.(이태현 記者 2010년 11월 04일)
개심사지오층석탑(開心寺址 五層石塔 建立 1千 周年 記念 奉祝 茶禮祭 : 郡民의 安寧과 새로운 未來, 跳躍과 繁榮을 祈願) [記事] : 예천군은 2011년 5월 1일 오후 4시 예천읍 남본리 현지에서 지역대표 문화재인 개심사지 오층석탑(보물 제53호) 건립 1000주년 기념 봉축 다례제를 개최했다. 이번 다례제는 석탑건립 1천 주년을 기념하고 군민의 안녕과 새로운 미래, 천년의 도약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마련됐다. 사암연합회 주관으로 열린 이날 봉축 다례제는 불교관계자, 군민 등 200여 명이 참여했으며, 다례제에 이어 축원, 법어, 축시 낭독 등으로 진행됐다. 고려 현종 원년(1010)에 건립된 개심사지 오층석탑은 이중(二重)기단 위에 5층의 몸돌을 올린 탑으로, 아래 기단 각 면에는 머리는 짐승이고 몸은 사람인 문관 복장의 12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어 있고, 윗 기단 각 면에는 물건이나 무기를 든 팔부중상이 조각되어 있어, 몸돌부가 안정되어 균형을 이룬 아름다운 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예천군은 개심사지 오층석탑을 공원화하기 위해 올해 내 석탑 주변의 토지매입을 완료하고, 내년부터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醴泉뉴스 2011년 05월 01일)
개심사지오층석탑 : [보물 053호] 예천 개심사지오층석탑/ 2013.06.18/ 보물 53호(예천 개심사지오층석탑) written by 한국의 국보와 보물 ▲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 전경 고려 전기에 창건된 개심사에 있던 탑이었으나, 절터의 흔적은 찾아 볼.../ cafe.daum.net/touralone... 한국의 국보와..(daum 2015)
개심사지오층석탑 : 화려한 장식의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 2013.02.18/ 화려한 장식의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 우천으로 바닥이 물에 잠긴 개심사지 오층석탑 오층석탑이 위치한 개심사지는 예천읍내를 흐르는 한천의 주변 솔개들로 부르는 들판.../ cafe.daum.net/k.khr/8Jq... 경주한옥연구..(daum 2015)
개심사지오층석탑 :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9권 > 1931년 6월중·6월말 > 이달에 總督府 學務局 宗敎課에서 審議/ 연월일 1931년 06월/ 주제분류 문화,학술 > 문화재 > 문화재일반 > 보관보존/ 출전 東亞日報 1931.6.9·10/ 이달에 總督府 學務局 宗敎課 에서 審議한 朝鮮古蹟 名所 天然物保存令과 寶物保存令으로 規定된 것은 다음과 같다./ 建物/ ... 醴泉 開心寺址五層石塔, 東寺址三層石塔, 石佛像,(//db.history.go.kr/2014)
개심사지오층석탑 : 신편 한국사 17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5. 미술 > 2) 석조물과 조각 > (1) 석조물 > 가. 석탑 : 선대에서와 같이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석탑은 불교의 가장 중심적인 예배 대상이었으며 따라서 석탑은 그 수효에서나 조형미에 있어서 당시 불교적인 조형미술의 중추를 이루는 것이었다. 즉 불교의 교세는 고려시대에 와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그에 따라 불교적인 조영이 거의 고려 일대를 통해 국가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불교적 조영의 성황 속에 그 중심을 이루는 석탑 또한 다수 건립되어 그 결과 오늘날 많은 석탑의 유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려시대의 석탑에 관하여 나타난 현상을 정리함에 있어서는 우선 그 석탑 건립이 신라시대에 비하여 전국적으로 확산 분포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신라는 삼국통일과 더불어 거의 고려와 상응하는 영역을 지배하였지만 현재 남아있는 신라의 석탑은 지역적으로 볼 때 대체로 경주 부근에 밀집되어 있으며 그 외의 것도 대략 옛 영토인 영남에 편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나 백제의 옛 땅에도 약간의 유례가 있으나 소수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를 보면 숫자적으로 개경 부근이 우세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 유례는 전국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분포상의 변화는 시대상의 변화에 따르는 것으로, 일반적인 추세는 한마디로 왕실불교적 입장에서 출발한 한국의 불교가 수백 년을 지나면서 보다 보편화된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나 좀더 고려의 상황에 결부시켜 본다면 우선 다음과 같은 점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고려의 석탑 건립에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국가적인 조영이라 하겠다. 고려시대 역시 불교가 국가적 종교, 왕실불교로서 번영하였음은 물론, 신라로부터 이어지는 호국불교적 성격은 국초로부터 많은 국가적 사원의 창건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그러한 국가적 조영의 경우 역시 수도인 개경이 월등 우세함은 짐작할 수 있다. 개경의 法王寺·王輪寺·慈雲寺·內帝釋寺·舍那寺·天禪寺·新興寺·文殊寺·圓通寺·地藏寺 등 10대 사찰의 건립이나, 도성 안에 70區의 불사가 있었다는 기록 등은 불교국을 연상케 하며, 곧 고려의 불사 건립의 정도와 아울러 개경이 수적으로 우세함을 전하는 것이라 하겠다. 태조 왕건의「訓要十條」에도 반영되어 있듯이 새로이 유행되는 圖讖思想의 영향은 이러한 국가적인 조영 역시 전국적인 형태로 행해진 일면을 나타내게 하였다. 대체로 개경의 7층석탑 건립과 연관되는 것으로 믿어지는 고구려의 구도인 西京의 9층탑 건립, 신라의 옛 서울인 경주 皇龍寺九層木塔의 중수, 백제 옛 수도 부근의 거대한 益山 王宮里五層石塔의 유례, 그리고 후백제군을 격파한 곳에 天護山 開泰寺를 건립한 것 등은 모두 그러한 경향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석탑에서 좀더 주목을 끄는 것은 순수한 지방세력 내지는 현지 주민들이 대거 참여한 사실이다. 경상북도 醴泉郡 읍내에 소재한 開心寺址五層石塔의 銘文, 서울 경복궁에 옮겨 놓은 淨兜寺五層石塔 내에서 발견된<造成形止記>등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는 많은 경우 그 지방민의 발원에 의하여 석탑이 건립되었다고 믿어지며, 이것이 오히려 고려시대 석탑의 전국적인 분포의 좀더 근본적인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 석탑의 전국적인 분포나 그 건탑에 있어서 토착세력의 참여 가능성은 바로 고려 석탑의 양식상에 다양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함을 짐작하게 한다.
즉 신라의 왕도 중심의 일률적인 건탑 양식에서 벗어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각 지방의 토착세력이 건탑에 관여했을 때 과거의 일률적인 규범보다는 각기 제 나름대로의 특징이 반영되어 곧 다양한 건탑의 양상을 보일 것이니 실제 이 시대의 석탑은 그 조형 양식상에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신라 이래 전통양식을 계승함과 동시에 지방적 특색이 가미되어 그야말로 다양한 조형을 이루었으니, 이 같은 석탑의 지방적 특색은 신라시 대에는 그리 두드러지지 못하였던 것으로 중앙에서 지방으로 석탑이 보급되면서도 그다지 큰 차별상을 나타내지는 못하였었다. 신라의 옛 땅인 경상도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신라 석탑계를 충실하게 계승하면서도 세부적으로는 변형을 보이고 있다. 곧 예천 읍내의 개심사지 5층석탑(보물 제53호;현종 원년, 1010<사진 1>)은 연화문이 조식된 판석 1매를 끼워 탑신 괴임대를 삼고 있다. 漆谷郡 若木面 福星洞寺址에서 1924년에 서울 경복궁내로 옮겨 세운 정도사지 5층석탑(보물 제357호;현종 22년)은 하층기단 면석의 각 면에 3구씩의 안상이 있고 그 내면에 地線으로부터 귀꽃문이 조식되어 있어 주목된다./ <사진 1>開心寺址 5층석탑 (보물 제53호)/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URL : www.cha.go.kr/unisearch/imagefiles/treasure/(//db.history.go.kr/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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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