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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131 : 개심사지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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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지 오층석탑(醴泉邑 南本里 開心寺址五層石塔 1002周年 記念 '茶禮祭 및 奉祝法要式' 開催...) [記事] : 2013년 5월 11일 오후 2시에 열린 개심사지오층석탑(보물제53호) 1002주년 기념 다례제에는 500여명의 군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1천여 년의 기나긴 세월 속에도 고스란히 제 모습을 간직한 개심사지오층석탑에 군민들의 숭고한 뜻을 담은 육법공양을 시작으로 다례제가 행해졌다. 예천군불교연합신도회장인 김수남 전 군수는 축사에서 "희망과 기대와 용기로 충만한 계절, 무척이나 춥고 지루한 겨울을 보내고 희망의 계절을 맞아 개심사지 오층석탑 1002주년 기념 다례제 법회를 위해 동참하신 청안 스님을 비롯한 지역 사암 대덕 스님들과 신도회장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김수남 회장은 "1천3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예천은 역사만큼이나 많은 문화재와 자랑 거리를 간직하고 있으며 특히, 이 곳 솔개들에 천년의 세월을 하루같이 우리 예천의 중생들의 삶을 지켜보며 위대한 부처님의 법음을 말없는 미소로 전하고, 호장 임장부 님의 발원처럼 효심과 불.법.승 삼보를 향한 감사함과 지역의 발전을 위한 기원이 녹아져 내려온 정토의 땅'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끝으로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천년 또한 경북 수도의 중심부로 거듭나는 예천이 되어 웅도 경북과 함께 불심과 희망이 함께 증장되어 정토 건설과 지역 발전에 초석이 될 것을 기대하며 동참한 사부대중 여러분께 부처님의 가호가 충만하시길 기원드린다"고 말했다. 이날 김관용 지사 부인 김춘호 여사와 이현준 군수 부인 배미경 여사가 연꽃을 올렸다. 참석자들은 다음과 같은 발원문을 청취하며 행사를 마쳤다. 발원문 "밝고 어둠은 시작과 끝이 없이 흐르고 후삼국 허리를 고려라는 이름으로 묶어 세월을 엮던 어느 날! 불심 가득한 예천의 호강 임!장!부! 그가 어머니의 발원을 따라 탑을 쌓을 돌을 놓으며 기원했던 것처럼 오늘 불기 2557년 5월 11일 천년의 세월을 하루같이 등 굽은 중생들의 고뇌를 쓸어 내려 주셨고 이 땅의 흥망성쇠를 온 몸으로 감내하셨던 홍덕사지 5층 석탑 앞에서 위대한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심을 찬탄하고 그 위대한 가르침이 쉼 없이 흐르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법석에...... 번뇌는 모두 놓아버리고 법문은 두루 익히고 불도를 기어코 이루리라... 위로는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바른 공덕을 쌓으며 아래로는 일체 중생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두루 펼쳐지기를 두 손 모으며 서원했던 것과 같이 오늘 저희들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한 그루 소나무처럼, 가느다란 한 줄기 향으로 남아 천년의 세월을 인고의 끄나풀로 지켜왔음에 감읍하고..... 웅도 경북의 중심축에 서게 될 우리 예천이 푸른 희망의 중심지가 되며 때로는 우리 예천의 흥망을 온몸으로 막고 지켜주시며 어깨 무거워 눈물겨운 중생들의 기도의 발길이 이어지게 될 또 다른 천년의 불교성지가 될 것을 엎드려 공양 올리며 발원함이니, 이 기원 저버리지 마시고 스치는 바람이 법음이 되고 합장하는 발길마다 정법구현의 보살이 되어 불국정토 건설의 발원지가 되며 너와 내가 둘이 아닌 넓고 넓은 개심사로 거듭나 쉼 없이 피어오르는 법향이 진동할 것을 발원하나이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3-05-11 오후 9:38:46)
개심사지오층석탑([文化財巡禮] 寶物 第53號 醴泉 開心寺址 五層石塔) [記事] : 고려 전기에 창건된 개심사에 있던 탑이었으나, 절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현재는 논 한가운데에 서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4면마다 둥근 테두리 선을 새기고 그 안에 머리는 짐승, 몸은 사람인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차례로 조각했다. 위층 기단은 4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면을 나눈 다음 그 안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팔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의 모습을 새겨놓은 것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기단의 맨 윗돌은 그 윗면에 몸돌을 받치기 위한 연꽃무늬의 괴임돌을 놓았는데, 이것은 고려시대 석탑양식의 한 특징이다. 사리나 법경을 봉안하는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에는 문고리 모양을 조각하고 그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모두 4단씩의 받침을 깎아 두었으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있어 탑 전체에 경쾌함을 실어 준다. 기단에 남겨진 기록을 통해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세워진 탑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체감률이 매우 온화하여 좋은 비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탑이다. 소재지는 예천군 예천읍 남본리 200-3번지.(이보혁 編輯委員 · 도움말=文化財廳 嶺南日報2014-09-04)
개심사지오층석탑(사라진 절터 속 홀로 선 石塔…1層 基壇部 文官 服裝한 ‘12지신상’ 눈길 <27> 醴泉 開心寺址 5層石塔) [記事] : 고려 전기에 보주(甫州)라고 불리던 예천 고을의 중심지 읍내에는 큰 절이 두 곳이나 자리하고 있었다. 하나는 현재도 석조여래입상(보물 427호)과 아담한 3층 석탑(보물 426호)이 남아있는 동본리에 있었던 이름을 잃어버린 절이고, 또 하나는 남본리에 5층석탑(보물 53호)이 남아 있는 곳에 있던 개심사였다. 동본리 절은 불상의 조각 수법이나 3층석탑의 형식을 보면 대략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어, 늦어도 신라 말에 세워졌다. 경북 예천군 개심사지 5층 석탑은 지난 1963년 보물 제53호로 지정됐다. 석탑은 고려 전기에 창건된 개심사에 있었다는 기록이 예천읍지에 남아 있다. 현재 개심사 절터는 남아있지 않다. 이에 비해 개심사는 5층 석탑이 고려 전기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성 시기와 내력을 알려주는 탑지까지 새겨져 있어 고려 전기에 세워진 절이 확실하다. 오늘은 이 중에서 개심사지 5층 석탑을 자세하게 살펴보면서 고려 시대의 예천으로 역사 여행을 떠나볼까 한다. ◆읍내 한 가운데 세워진 개심사 : 예천군 동본리 논 한가운데 개심사지 5층석탑이 서 있다. 개심사는 예천 읍내 남쪽의 꽤 넓은 들판인 솔개들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선종이 전래된 신라 후기부터 대부분의 사찰은 산속에 지어졌지만, 개심사는 백성들이 살아가는 읍내 마을 인근의 들판에 건축된 평지 사찰이었다. 고려 왕조가 불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그만큼 불교가 백성들에게 이웃과 같은 친숙한 신앙으로 변했음을 보여준다. 개심사를 세우게 된 연기 설화로는 이런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어느 날 한 도사가 예천의 남산인 잠두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니, 잠두산이 화기가 강해 예천의 청년과 소년들을 상하게 할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잠두산의 화기를 막고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 산 아래에 절을 지었는데, 그 절이 개심사라는 것이다. 도선국사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된 비보풍수사상이 반영되어 있어 고려시대에 충분히 만들어질 만한 이야기다. 지금이야 어디쯤이 법당 자리이고, 어느 곳에 회랑이 있었는지, 또 얼마나 화려한 전우들이 어떤 모습으로 솟아있었는지 아무것도 알 길이 없고, 텅 빈 들녘 가운데에 5층 석탑만 우두커니 서 있다. 그러나 원래의 절의 경역은 상당히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의 남쪽에 있는 문경으로 가는 지방도의 건너편에 주유소 건축을 위해 터파기 공사를 하던 중에 2구의 나한상이 출토된 바 있고, 그 옆 농협 창고를 지을 때는 약 100여 점의 사찰 관련 유물이 발굴되었다. 적어도 그곳까지는 개심사의 경내였을 것이다. 5층 석탑은 멀리서 보면 그리 크지 않은 단아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주변을 도로나 건물을 만들면서 지반을 돋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게 되어 있어 더욱 그런 느낌을 준다. 탑의 높이는 4.3m로서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를 올렸다. 탑신 위에는 바리를 엎어 놓은 듯한 복발이 노반에 의해 받쳐져 있다. 탑의 각 층 사이가 신라 탑과는 달리 그리 높지 않아 5층의 탑신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며, 각 층의 체감률도 크지 않은 전형적인 고려 탑의 형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탑은 시간을 내어 가까이에서 조금만 자세하게 살피면,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작은 재미들을 듬뿍 찾을 수 있다. 2층으로 이루어진 탑의 기단부터 관찰을 시작하자. 석탑 1층 기단 4개면에는 머리는 짐승이고 몸은 사람인 수수인신((獸首人身)이 조각돼 있다. 각 면 3구씩 12개로 조각된 수수인신은 12지신상이다.(김정목 記者)
1층 기단부에는 한 면에 기둥 2개를 새겨 3구역으로 나누고, 구역마다 동물 하나씩 1면당 3종류의 동물을 조각하였다. 4면을 합치면 모두 12종의 동물 조각이 새겨져 있다. 바로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12지신상이다. 북쪽 면의 서쪽부터 쥐-소-호랑이, 동쪽 면에 토끼-용-뱀, 남쪽 면에 말-양-원숭이, 서쪽 면에 닭-개-돼지의 순서로 조각했다. 흔히 12지신상은 무관 복장을 한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는 문관의 복장을 하고 있어 이색적이다. 낮은 곳에 새겨진 데다가 앉은 모습을 하고 있어 12지신이 조금 옹색해 보인다. 2층 기단에는 불교의 수호신인 8부신장이 각 면에 조각돼 있다. 현재 북쪽 면에 조각된 8부신장은 오랜 세월 풍상으로 흔적만 남아있다. 눈길을 2층 기단으로 돌린다. 우선 면석의 가운데에 기둥을 조각하여 1개 면을 2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구역마다 병장기를 들고 무관 복장 차림의 신인(神人)을 한 명씩, 4면에 걸쳐 모두 8명의 신인을 새겨놓았다. 8부중상이다. 8부신장이라고도 하는 이 조각은 여덟 방향에서 부처와 불교를 수호하는 신장상으로 신라 후기부터 탑의 기단부에 조각되기 시작했다. 이 탑의 8부중상은 입상으로 하단의 12지시상보다 훨씬 크고 당당하다. 위치까지 눈높이에 맞추어 자리하고 있어 마치 그들이 탑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문득 무신을 위에, 문신을 아래에 배치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절대적인 문신 우위의 사회였던 조선시대라면 과연 이런 형식의 배치가 가능했을까?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숭무적 기풍이 남아 있던 11세기 초반의 고려사회였기에 무신을 중시하는 조각가의 잠재된 의식이 드러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숭무적 기풍 남아있어 : 이제 탑신부를 훑어본다. 탑신 1층 몸돌의 남쪽 면에 돋을새김을 한 또 다른 조각이 보인다. 닫힌 대문에 자물쇠가 단단히 채워져 있다. 경상도 사투리로 쇳대라고 부르는 열쇠를 옆에서 밀어 넣어 여는 자물쇠다. 고려시대에도 이런 자물쇠를 썼구나! 새삼 역사의 연속성을 실감한다. 꽉 닫힌 대문의 양쪽 옆에는 인왕상이 새겨져 있다. 짝다리를 한 채 입을 앙다물고 전면을 노려보고 있는 험한 인상이다. 근육질의 역사(力士)가 지키고 있는 자물쇠로 잠긴 대문 안의 1층 몸돌 속에는 대체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보물은 탑에 봉안했던 사리이다. 이 탑에는 탑신 1층 몸돌 내부에 직육면체의 구멍을 파고 그 속에 사리를 담은 사리함이나 사리호를 안치했음이 틀림없다. 2구의 인왕상에서 사리를 수호하려는 굳은 의지를 충분히 읽을 수 있지만, 이 탑의 해체ㆍ복원 과정에서 사리장치를 찾았다는 소식은 없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탐욕으로 언제쯤인가 도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써 개심사 5층석탑에 대한 대체적인 관찰은 끝났다. 그러나 이 탑의 가치를 증명해주는 더욱 중요한 자료를 더듬어 봐야만 이 탑을 제대로 감상한 셈이 된다. 그냥 보아 넘겼던 기단 2층 동쪽 면에 새겨진 신장상 옆에 세로로 얕게 음각된 한문이 눈길을 끈다. 여러 차례 탁본 작업이 있었던 모양이다. 글자 주위에 검은 먹자국이 선명하다. 그런데 대충 읽어봐도 뭔가 완결된 내용이 아니다. 나머지 문장은 어디에 새겨둔 것일까. 기단부와 탑신부를 나누는 덮개돌(이를 상대 갑석이라 한다)의 지면을 향한 밑 부분에 4면에 돌아가며 한문이 새겨져 있다.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절묘한 자리에 글자를 새겨놓아 지금도 글씨가 꽤 선명하다. 글의 순서는 남쪽에서 시작하여 서쪽과 북쪽을 거쳐 동쪽으로 이어진다. 4면에 걸쳐 덮개돌 밑면에 글자를 새겼지만, 그래도 새길 공간이 부족하여 미처 새기지 못한 나머지 문장은 기단 2층 동쪽 면석의 신장상 옆에 세로로 새겨 두었다. 이 한문 문장은 이 탑의 건립 시기와 과정, 건립에 동원된 노동력의 규모와 후원자, 건립 공사에 참여한 주요 인물에 대한 기록으로, 일종의 탑지(塔誌)이다.
고려 전기의 지방 사회의 모습을 알려주는 1차 사료여서, 역사 연구자들은 이 탑을 찾아 상대 갑석의 밑면을 고개가 아프도록 쳐다보곤 한다. 탑지에는 이 탑의 건립 과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010년(고려 현종 1년ㆍ통화 27년 경술년) 2월 1일에 돌을 다듬기 시작하였고, 3월 3일부터는 공사에 광군(光軍) 23개 부대와 수레 18대, 소 1천 마리가 투입되었다. 이렇게 공사가 진행되어 이듬해인 1011년 4월 초파일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공사 시작부터 1년2개월이 소요된 셈이다. 탑을 세우는데 승려와 속인, 그리고 선랑(화랑도가 변화한 존재) 등 1만 명이 후원하였는데, 그 중에서 미륵향도 36명과 치향도 50인이 참여했음을 특기하였다. 공사 책임자는 동량(棟樑)이라 했는데, 당시 예천의 향리 가운데 우두머리였던 호장 임장이 동량이었다. 탑지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그 속에 나오는 고려사회의 모습은 너무 전문적인 영역이어서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그 중에는 공사에 동원된 광군이라는 군대조직, 향도라는 모임, 11세기 초 예천을 장악하고 있었던 임씨로 대표되는 토착세력 등 고려 역사의 연구에서는 빠트릴 수 없는 주제가 허다하게 포함되어 있어, 앞으로도 역사 연구자들의 이 탑에 대한 순례는 계속 될 것이다. 현재 탑 하나만 외로이 서 있는 개심사 옛터지만, 조금씩 부활의 꿈이 피어나고 있다. 예천군청 학예사 최미정 씨에 의하면, 예천군에서는 개심사의 복원을 위한 예비 작업으로 절터 주변의 사유지를 매입하기 위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 중이라고 한다. 예천군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개심사 금당 자리라도 확인할 수 있다면 예천은 고려 전기 사회사 연구의 작은 메카로 떠오를 것이다.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린다.(이문기 慶北大 歷史敎育科 敎授)(大邱日報 2015.07.14)
개심사지오층석탑: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醴泉 開心寺址 五層石塔)은 경상북도 예천군 개심사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오층석탑이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53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현종(顯宗) 1년(1010년)에 건립한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탑파로서 신라식을 계승하고 있다. 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이 하나씩인 네 개의 돌로 되어 있고, 각면에는 안상(眼象) 속에 십이지상(十二支像)을 조각했으며 상층 기단에는 각면에 탱주 한 개를 두고 팔부신장(八部神將)을 조각했다. 처마가 길게 뻗어 고려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daum 2016)
개심사지오층석탑: 개심사지5층석탑(開心寺址五層石塔)/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남본리 개심사에 있는 고려시대 5층석탑. | 1010년(현종 1) 작. 보물 제53호. 높이 433㎝. 기단 폭 215㎝. 개심사는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나 역사 및 폐사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폐사된 사지에 남아 있는 이 탑은 표면에 부조된 여러 조각상들과 제작연대를 알려주는 석탑기(石塔記)가 있는 중요한 탑이다. 넓은 지대석 위에 높이가 다른 상·하층 기단이 있는데, 하층기단의 각 면에는 3개의 안상(眼象)이 있고 그 안에 동물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십이지신상이 합장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 양각되어 있다. 그 위에 놓인 뚜껑돌[甲石] 위에 낮은 괴임을 두고 높은 상층기단을 올렸는데, 4면을 각각 받침기둥[撑柱]으로 2등분하고, 입상의 팔부중상을 1구씩 양각했다. 상층기단 갑석과 1층 탑신과의 사이에 괴인 판석에 새긴 연꽃은 고려시대 석탑의 한 특징을 보여준다. 각 층의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 태그 고려 | 출처 Daum 백과사전(daum 2016)
개심사지오층석탑: 예천 개심사지오층석탑(醴泉開心寺址五層石塔)/ 돋을새김 하였다. 그 형태는 수수인신(獸首人身: 머리는 짐승모양이고 몸은 사람모양)으로 법의를 걸치고 합장하였다. 배치는 남면 동쪽부터 오상(午像)이 시작되어 미상(未像)·신상(申像)이 계속되고, 서면·북면·동면의 차례로 되어 있다. 갑석 상면은 약간의 경사가 표현되었으며... (轉角部)가 두툼한데, 반전이 경쾌하여 둔중감은 면하고 있다. 낙수면은 평박하고 합각선도 예리한데, 네 귀퉁이의 전각에는 양쪽에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있다. 상륜부는 현재 노반(露盤) 위에 복발(覆鉢: 바리때를 엎어 놓은 형상의 한 부분)이 놓여 있을 뿐인데, 노반에는 각 면에 안상이 1구씩 있으며, 복발에는 4면에 화형(花形)이 조식되고 이들을 연결하는 굵직한 횡대(橫帶)가 있다. 상층기단 갑석의 뒷면에 새겨진 석탑기에 의하면, 이 탑은 1010년(현종 1)에 개심사에서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어 석탑 자체의 양식과도 부합된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태그 고려, 유적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daum 2016)
개심사지오층석탑: 논 한가운데에 있는 보물,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 2009.01.21/ 논 한가운데에 있는 보물.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 물이 좋은 고장 예천은 곳곳에 불교 유적이 산재해 있다. 용문사 자락의 용문사, 예천동본동석불입상과 예천동본동삼층석탑.../ neowind.tistory.com/ 김천령의 바람흔적(daum 2016)
개심사지오층석탑: [개심사지 오층석탑(보물 제53호)]... 경북 예천의.../ 2013.12.11/ 경북 예천에 당일치기 여행 중에 들린 '개심사지 오층석탑' 이라는 문화재입니다. '개심사지 오층석탑' 은 우리나라 보물 제53호로, 이전에 들린 '예천동본동삼층석탑.../ noproblemyourlife.tistory.com/ 여행이좋다(daum 2016)
개심사지오층석탑: 예천 개심사지오층석탑/ 2016.05.08/ 승격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개심사지오층석탑(보물 제53호)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남본리 200-3번지 전체 높이 4.3m의 개심사지오층석탑은 상층기단 덮개돌 밑에.../ blog.naver.com/ story77616(daum 2016)
개심사지오층석탑: 예천 개심사지오층석탑 - 화려한 장식/ 2012.12.24/ 화려한 장식의 예천 개심사지오층석탑 우천으로 바닥이 물에 잠긴 개심사지오층석탑 오층석탑이 위치한 개심사지는 예천읍내를 흐르는 한천의 주변 솔개들로 부르는.../ blog.daum.net/kinhj4801/ 토함산솔이파리(daum 2016)
개심사지오층석탑: 보물 제53호 예천 개심사지오층석탑/ 2016.03.18/ 예천 개심사오층석탑(醴泉 開心寺址五層石塔), 지정 : 1963. 01. 21 / 경북 예천군 예천읍 남본리 200-3번지, 고려 전기에 창건된 개심사에 있던 탑이었으나, 절터의.../ hscphoto.tistory.com/ 골목 안 작은사진관(daum 2016)
개심사지오층석탑: 개심사지오층석탑 겨울 빗속에 논 가운데 홀로 서서/ 2012.04.26/ 실정이다. 이에 따라 예천군은 석탑보존관리와 주민 민원을 해소하기 위해 ‘개심사지오층석탑 정비 및 공원화 조성 계획’을 수립, 연차사업으로 국비 예산이 반영될 수.../ blog.daum.net/kmb2274/ 전혀 다른 향가 및 ..(daum 2016)
개심사지오층석탑: 예천 개심사지오층석탑/ 2011.11.16/ 개심사지(開心寺址)는 예천 읍내에서 예천교를 따라 한천 건너 남쪽에 있다. 탑은 한천둔치를 지나 평평한 들판에 서 있었는데 주위로 도로가 나고 도로 옆에는 상가가.../ blog.daum.net/ecnoon/ 석탑이 보이는 풍경(daum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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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