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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141:개포면...
작성자장병창 @ 2018.07.25 05:56:23

  도청신도시 예천 141 : 개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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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포면(開浦面) [歷史] : 1) 일제 말기 : 면장은 백상기(白相基, 黃山洞 산우물), 부면장은 권오봉(權五鳳, 上洞人), 산업계장은 김칠진(金七鎭, 冬松人), 주재소장(駐在所長)은 남상덕(南相悳, 忠北陰城人)이었다. 일제 말기에는 식량난이 심각하였다. 흉년에다 쌀, 목화 등의 공출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식량 공출을 피하기 위해 변소에 숨긴 것까지 일제가 약탈하여 갔다. 가마니 공출 때문에 가마니짜기 부역이 있었고, 공장에 보낸다고 처녀 공출이 강제로 있어 10여 세에 시집보내는 일이 많았다. 2) 해방 직후 : 조국이 해방되자 개포면(面長 白相基)은 두 지역으로 나뉘어 좌우익(左右翼) 투쟁이 심하였다. 특히 한 지역에는 예천군 좌익운동(左翼運動)의 중심인물이 두 명이나 있었다. 이들 좌익(左翼)들은 해방 직후 예천군청, 예천우체국을 장악하고 심지어는 예천경찰서까지 장악하려 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치안유지대(治安維持隊)가 들어오자 이들은 철수하였다. 좌익 중에는 소련 공산대학(?)을 졸업한 국제공산당원도 있었다. 그는 젊잖고 웅변이 좋은 미남이었고, 한문 실력도 좋아 제문(祭文) 등의 한문 문장의 청탁을 많이 받았다. 그는 일제 때도 공산당원으로 예천에서 항일운동에 앞장서다가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정부 수립(1948.8.15) 후에는 숯장사 등을 하기도 하였고, 나중 전향하여 모 한의대(漢醫大)에서 교무과장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한다. 또 한 사람은 예천군인민위원장(醴泉郡人民委員長)을 지냈고, 6.25전쟁(1950) 이전에 월북하여 황해도에서 인민위원장으로 있었다는 소문도 있다. 한편 해방 직후 우익 활동 단체로서는 광복청년단(光復靑年團)과 민보단(民保團)이 있었다. 광복청년단의 단장은 백상흠(白相欽, 黃山里 도미)이었는데, 후에 남봉수(南奉秀, 新陰里人)에게 인계되었다. 이 광복청년단은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團長 白正基, 副團長 李悳龍)으로 개칭되었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으로 다시 고쳤다. 대한청년단의 예천군단장은 박철구(朴哲九, 大同靑年團長도 함, 黑松人), 부단장은 이호근(李浩根, 後 國會議員)이었고, 개포면단장은 백정기(白正基), 이덕룡(李悳龍, 佳谷里人), 권혁대(權赫大, 上洞人)로 계승되다가(組織課長尹圭錫-新陰里人) 6.25전쟁을 맞이하였다. 전쟁 당시에 부단장은 장성오(張星五, 黃山里 山井人), 백승학(白承學, 山井人)이었다. 이 대한청년단 내의 특공대는 경찰의 협조 기구였다. 한편 민보단(民保團)도 경찰 협조기구였는데, 이덕룡(李悳龍), 남상주(南相周, 新陰里人)가 단장으로 계승되었다. 이 민보단(民保團) 내에도 특공대(特攻隊)가 있었는데, 그 대장으로 김영규(金永圭, 新陰里人)가 활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1948.8.15)되자, 좌익(左翼) 활동자 중 극렬적이었던 자들은 월북(越北)하거나 잡혀서 사형에 처해졌는데, 용궁면 산택리(山澤里) 우러리고개, 신음리(新陰里) 감나무골 냇가 등지에서 5-6명이 처형되었다. 좌익 활동자 중 미온적이었던 자들은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정신 훈화 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이들은 6.25전쟁(1950) 당시 인민군(人民軍) 치하가 되기 직전에 국군에 의하여 동송동(冬松洞) 동구에서 20여 명이 처형되었다. 이 중에는 군경을 학살했던 자, 좌익 열성분자 친척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좌익 활동자 중 일부는 개포면과 용궁면 성저리(城底里) 등 산골에 좌익 아지트를 꾸미고서 지하 활동을 하면서 보복 암살을 감행하였다. 밤이면 마을에 내려와 돈과 식량 등을 약탈하여 가다가 때로는 마을 골목에 불온비라를 살포하기도 하고, 벽에 붙이기도 하더니, 이들에 의해 우익(右翼) 출신 이재만(李再滿, 長松里人 洞長)과 그의 아들 이우석이 칼로 난자한 후 총으로 사살되고, 입암정미소(立岩精米所) 일꾼(主人 白相欽暗殺하려다 일꾼이 죽음) 등이 암살되었다. 한편 성저리(城底里) 아지트인들에 의해 용궁면 대은리(大隱里)의 윤봉현(尹鳳鉉, 本家에서), 관현(寬鉉, 德溪釀造場에서) 형제 및 가족들을 마구 암살하였다. 이때 우익(右翼) 활동자는 피신하기도 하였다. 그들을 체포해보니 대부분 인근에 사는 친분이 있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일들이 예천군 전체에 자주 일어나서 예천경찰서에서는 지역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의 협조를 얻어 용문면 사부동(沙夫洞) 뒷산 기슭에 적의 아지트를 발견하고, 그 주변을 밤새도록 잠복 끝에 새벽 4시 경 미명(未明)을 기해 좌익분자 중 1명이 식사 준비를 하려고 거동하는 것을 불의에 급습, 체포하여 자수를 권고하였으나 끝까지 불응하므로 나중에는 집중 사격을 가해 8명 전원을 사살하고 총기 8()과 일본도(日本刀) 10여 점을 노획한 사실이 있었다.

 

  3) 한국전쟁 때 :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농촌에는 통신 시설이 없어 서울에서 내려오는 피난민을 통해 비로소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며칠 후 북쪽 방향에서 "! !"하는 포 소리가 들이기 시작하더니 하루는 행정 관서에서 피난을 가야 한다 하기에 울면서 모두 피난짐을 꾸려가지고 허둥지둥 목적지도 없이 남쪽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당시 일부 면민들은 대구 쪽으로 피난을 갔으나, 가까운 산골짜기에서 피난을 간 사람도 많았다. 개포면이 인민군 치하로 들어가자 모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지시에 하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와 소위 인민 정치를 받았다. 그러나 이 때부터 평소 상상해 보지도 못했던 생지옥의 생활이 계속되었다. , 과거 지방 좌익들 중 죽지 않고 남아있던 자가 다시 나타나 총을 메고 치안자위대(治安自衛隊)라 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개포면인민위원회(開浦面人民委員會) 위원장(轉向), 내무서장(內務署長, 越北), 인민재판장(人民裁判長), 여맹위원장(女盟委員長, 當時 37), 신음판정위원장(新陰判定委員長, 農産物 分配 等判定 職務) 등이 개포면민으로 지명되어서 그들은 활약하였다. 특히 내무서장(內務署長)은 면민을 동원에 보내고, 우익(右翼) 활동자를 잡아 매를 때리고, 식량을 거두어 갔고, , 닭 등을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 잡아먹고, 후일에 후방 부대가 돈을 후히 계산하여 준다는 허황된 말만 남기고 갖은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그 후에는 그것도 부족하여 젊은 부녀자를 마구 데려다 강간하는가 하면, 과거의 직분을 물어가며 공직에 있던 자나 부유한 층은 전부 반동으로 몰아 인민재판(人民裁判)에 회부시켜 무참하게 사살(射殺), 감금(監禁)하는 등, 그 만행(蠻行)을 이루다 말할 수 없었다. 특히 여맹위원(女盟委員) 중 남편이나 가족을 잃은 일부 위원은 과거 우익 활동자를 잡아 돌로 처형하는 사례가 있었다. 이세극(李世極, 佳谷里 鍾山人), 임휘원(林輝元, 新陰里人) 등이 그렇게 죽었다. 조영래(趙永來, 新陰里人, 餘毒으로 病死), 박석기(朴奭基, 牛甘里 도장골) 등은 탈출하여 생명을 구하기도 하였다. 우익 박정식(朴楨植, 龍宮面 鄕石里 回龍人)은 처가에 왔다가 개포에서 암살되고, 순경 황종섭(巡警黃宗燮, 豊壤人)은 개포초등학교(開浦初等學校) 앞에서 총살 당하였다. 그래서 이때 과거 우익 활동자들은 다락 등에 피신하였다. 4) 수복 후 : 개포 지역이 수복되자 우익 활동자들이 스스로 방위대(防衛隊, 隊長 李悳龍)을 조직하여 탈주하는 인민군(人民軍)들의 총을 압수하기도 하고, 국군들의 입성을 환영하기도 하였다. 이 환영식 때는 소 두 마리를 잡아서 대대적인 환영 잔치를 열기도 하였다.

 

  개포면: 1684년에 예천군에서 김구만에게 발급한 준호구 [가족생활 > 가족구성] | [국가지식] 전북대학교 박물관/ 1684(숙종 10)에 경상도(慶尙道) 예천군(醴泉)에서 개포면(開浦面) 제오검암리(第五劒岩里)에 사는 김구만(金九萬)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당시 김구만의 나이는 25, 그는 3살 위인 부인과 함께 4살 된 딸 하나를 데리고 살았다. 한편 김구만은 .../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역사자료󰡑이다.//

 

  개포면: 1690년에 예천군에서 유학 김구만에게 발급한 준호구 [가족생활 > 가족구성] | [국가지식] 전북대학교 박물관/ 1690(숙종 16) 醴泉에서 開浦面 第五劒岩里에 사는 幼學 金九萬에게 발급해 준 문서이다. 당시 호주인 金九萬의 나이는 31세였으며, 34세의 처 이씨와의 사이에 10세의 딸을 두었다. 金九萬은 후에 挺萬으로 개명을 한다(문서번호 고07851 참조)..../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역사자료󰡑이다.//

 

  개포면: 1693년에 예천군에서 김정만에게 발급한 준호구 [가족생활 > 가족구성] | [국가지식] 전북대학교 박물관/ 1693(숙종 19)에 경상도(慶尙道) 예천군(醴泉)에서 개포면(開浦面)에 사는 34세의 김정만(金挺萬)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김정만의 원래의 이름은 김구만(金九萬)이며 37세의 처 이씨와의 사이에 13세된 딸을 두고 있다. 처의 부는 당시 생존하였으.../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역사자료󰡑이다.//

 

  개포면: 1696년에 예천군에서 김정만에게 발급한 준호구 [가족생활 > 가족구성] | [국가지식] 전북대학교 박물관/ 1696(숙종 22)醴泉에서 開浦面 第五劒岩里에 사는 金挺萬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당시 김정만의 나이는 37, 그는 3살 위인 부인 이씨와 함께 16살 된 딸 하나를 데리고 살았다. 그리고 每男 등 다수의 노비를 소유하였는데 그 중에는 외거노비들.../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역사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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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포면: 1744년에 예천군 개포면에 사는 과부 송씨가 작성한 호구단자 [가족생활 > 가족구성] | [국가지식] 전북대학교 박물관/ 1744(영조 20)에 경상도(慶尙道) 예천군(醴泉) 개포면(開浦面) 하리동(下里洞) 제사검암리(第四劒巖里)에 사는 과부송씨(寡婦宋氏)가 작성한 호구단자이다. 이 호구를 작성할 당시 송씨부인은 90을 바라보는 어머니 이씨부인을 모시고 있었으며, 수영(.../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역사자료󰡑이다.//

 

  개포면: 1748년에 예천군 개포면에 사는 과부 송씨가 작성한 호구단자 [가족생활 > 가족구성] | [국가지식] 전북대학교 박물관/ 1748(영조 24)에 경상도(慶尙道) 예천군(醴泉) 개포면(開浦面) 하리동(下里洞) 제사검암리(第四劒巖里)에 살고 있던 과부(寡婦) 송씨(宋氏)가 작성한 호구단자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처럼 여성이 호주로 나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조선시대의 호주란, .../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역사자료󰡑이다.//

 

  개포면: 1753년에 예천군에서 과부 송씨에게 발급한 준호구 [가족생활 > 가족구성] | [국가지식] 전북대학교 박물관/ 1753(영조 29)醴泉에서 開浦里面 ?巖里에 사는 寡婦宋氏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준호구란 오늘날의 주민등록등본과 같은 것이다. 이 준호구를 발급받을 당시 송씨부인은 49, 그녀는 남편이 사망한 후 혼자서 살고 있었다. 한편 노비질의 기사를 보면 .../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역사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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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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