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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162:개화기정치의식...객사초석
작성자장병창 @ 2018.08.14 06:11:56

  도청신도시 예천 162 : 개화기정치의식...객사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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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기 정치의식 상황(開化期 政治意識 狀況 ; 1876부터 1910까지의 開化過程政治史的 考察, 韓國政治學會報3, 1969 / 具範謨 = 112) [學術저널] : 유천면 매산리 출신인 구범모(具範謨, 1932- , 서울大 敎授, 國會議員)의 논문으로, 한국인문과학원편집부의 편저를 서울 한국인문과학원(韓國人文科學院)에서 2000년에 발행한 <한국근현대사논문선집(韓國近現代史論文選集)(40, 27cm) [Volume. 19] 112-146쪽에 수록되어 있다. KDC 911.005 4, DDC 951.9 21, 소장된 기관은 국립중앙도서관이다.(keris 2006)

 

  개화당의 민권사상(開化黨民權思想) [論文] : 용문면 하금곡리 출신인 강지한(康智漢, 1941- , 慶北大 敎授)의 논문으로, 경북대학교 평화문제연구소에서 1984년에 발행한 <평화연구(平和硏究)> 9159-76(18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는, 1) 서언, 2) 개화사상의 배경, 3) 개화당의 형성, 4) 개화당의 민권사상, 5) 결언이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명지대(인문), 서강대, 이화여대, 전주대이다.(keris 2003)

 

  개화당의 민권사상(開化黨民權思想 =The Thought of Civil Right on the Gae-Wha Party) [學術저널] : 용문면 하금곡리 출신 강지한(康智漢, 1941- , 醴泉中 卒業, 慶北大 敎授)의 논문으로, 경북대학교 평화문제연구소에서 1984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 : . 序 言/ . 開化思想背景/ 1. 實學思想開化/ 2. 國際情勢變化/ 3. 劉大致影響/ . 開化黨形成/ . 開化黨民權思想/ 1. 自主國權에 대한 思想/ 2. 身分制度에 대한 改革思想/ 3. 自由에 대한 思想/ 4. 政黨에 대한 思想/ 5. 財産權에 대한 思想/ . 結 言(daum 2009)

 

  개화사상의 정치이념적 구조(開化思想政治理念的 構造 =The Structure of the " GaeHwa " Enlightenment) [學術저널] : 예천 출신인 윤순갑(尹錞甲, 1956- , 慶北大 敎授)의 논문으로, 한국정치학회(URL //www.kpsa.or.kr)에서 1996년에 발행한 <한국정치학회보> Vol.30 No.2 7-26(20分量)에 수록되어 있다. 제어번호 3084318, KDC 340이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명지대(인문중앙), 서울대(중앙), 서울여대(중앙), 연세대(중앙),이화여대(중앙), 한국외대(중앙), 서강대(로욜라중앙)이다. [초록] : 이 논문은 사상의 생명과정에서 형성기의 특성이 전반적으로 영향력을 가진다는 전제 아래, 개화사상이 정치이념적으로 어떠한 내면적인 연계구조(聯契構造)를 가졌던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 쓴 글이다. 18, 19세기의 조선조 한국사회는 봉건적 모순과 민족적 모순의 심화로 사회체제의 유지와 존속을 위협받을 정도의 총체적 위기에 봉착하였다. 개화사상은 이러한 위기를 초래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현상을 타파하려는 전형적인 진보형의 정치이념으로서 다음과 같은 구조적 특성을 지녔다./ 첫째로 실학의 봉건적 신분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초기 개화사상은 당시의 어떠한 정치적 사유(思惟)보다도 봉건적 모순에 대한 인식에는 투철하였다. 그러나 민족적 모순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는 서구문화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개방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것에 내재된 침략성을 간과하는 위험을 배태하고 있었다. 이러한 개화사상의 상황인식, 즉 사상적 관점은 개화사상을 종횡으로 관통하는 유전적 형질(形質)처럼 기능하였다./ 둘째로 초기 개화사상가들은 당시 한국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는 주로 봉건적 사회관계와 이것에 토대를 둔 전제군주제에 기인한다는 반봉건적인 상황인식을 토대로 이러한 사회관계와 정치체제를 각각 근대적인 시민사회와 입헌군주제로 대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주적이고 근대적인 부국강병을 성취하는 것을 지향가치로서 추구하였다. 지향가치의 이러한 특성은 개화사상을 당시 어떠한 정치이념보다도 진보적이게 한 요소였다./ 셋째로 초기 개화사상의 실천방안이었던 강령적 처방의 준거는 당시의 현실적인 정치구도와 복잡하게 맞물려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치적 상황의 개선에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차원의 상황개선이 장애에 직면할 때 마다 대외의존성이 증대되었으며 대외의존성이 증대되는 것과 비례하여 대중의 소외는 가속화되었다. 그 뒤에 이러한 과오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실기(失機)하고 있었다./ 이상의 논의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개혁(특히 엘리트에 의해서 추진되는 개혁)의 성패(成敗)는 대중의 동의에 달려 있다는 평범한 사실이다. 개화사상이 추구했던 지향가치는 상황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역사성을 갖는 통시대적 과제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것은 한 세기 이전의 세계화 이념이었던 개화정책의 실패가 오늘의 개화이념인 세계화 정책에 대해서 던지고 있는 의미있는 충고라고 할 수 있다.(keris 2003 2006)

 

  개화사상의 정치이념적 구조(開化思想政治理念的 構造 =The Structure of the 󰡒GaeHwa󰡓 Enlightenment Thoughts as a Political Ideology) [學術저널] : 예천 출신인 윤순갑(尹錞甲, 1956- , 慶北大 敎授)의 논문으로, 한국정치학회에서 199612월에 발행한 <한국정치학회보> 30집 제37~26(20分量)에 수록되어 있다. 파일형식 : Image PDF, DBPIA 고유번호 : 763978 , UCI : G300-j1229506X.v3n3p7이다. [목차] : 논문요약/ . 문제의 제기/ . 개화사상의 형성과 전개과정/ . 개화사상의 정치이념적 구조/ . 요약 및 결론/ 참고문헌/ [초록] : 이 논문은 사상의 생명과정에서 형성기의 특성이 전반적으로 영향력을 가진다는 전제 아래, 개화사상이 정치이념적으로 어떠한 내면적인 연계구조(聯繫構造)를 가졌던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 쓴 글이다. 18, 19세기의 조선조 한국사회는 봉건적 모순과 민족적 모순의 심화로 사회체제의 유지와 존속을 위협받을 정도의 총체적 위기에 봉착하였다. 개화사상은 이러한 위기를 초래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현상을 타파하려는 전형적인 진보형의 정치이념으로서 다음과 같은 구조적 특성을 지녔다./ 첫째로 실학의 봉건적 신분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초기 개화사상은 당시의 어떠한 정치적 사유(思惟)보다도 봉건적 모순에 대한 인식에는 투철하였다. 그러나 민족적 모순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는 서구문화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개방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것에 내재된 침략성을 간과하는 위험을 배태하고 있었다. 이러한 개화사상의 상황인식, 즉 사상적 관점은 개화사상을 종횡으로 관통하는 유전적 형질(形質)처럼 기능하였다./ 둘째로 초기 개화사상가들은 당시 한국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는 주로 봉건적 사회관계와 이것에 토대를 둔 전제군주제에 기인한다는 반봉건적인 상황인식을 토대로 이러한 사회관계와 정치체제를 각각 근대적인 시민사회와 입헌군주제로 대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주적이고 근대적인 부국강병을 성취하는 것을 지향가치로서 추구하였다. 지향가치의 이러한 특성은 개화사상을 당시 어떠한 정치이념보다도 진보적이게 한 요소였다./ 셋째로 초기 개화사상의 실천방안이었던 강령적 처방의 준거는 당시의 현실적인 정치구도와 복잡하게 맞물려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치적 상황의 개선에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차원의 상황개선이 장애에 직면할 때 마다 대외의존성이 증대되었으며 대외의존성이 증대되는 것과 비례하여 대중의 소외는 가속화되었다. 그 뒤에 이러한 과오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실기(失機)하고 있었다./ 이상의 논의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개혁(특히 엘리트에 의해서 추진되는 개혁)의 성패(成敗)는 대중의 동의에 달려 있다는 평범한 사실이다. 개화사상이 추구했던 지향가치는 상황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역사성을 갖는 통시대적 과제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것은 한 세기 이전의 세계화 이념이었던 개화정책의 실패가 오늘의 개화이념인 세계화 정책에 대해서 던지고 있는 의미있는 충고라고 할 수 있다.(daum 2008)

 

  개화사상의 형성과 전개과정(開化思想形成展開過程 =Ideas of Enlightenment in Later Yi Dynasty : The Process of Its Formation and Development) [學術저널] : 예천 출신인 윤순갑(尹錞甲, 1956- , 慶北大 敎授) (盧東一)의 논문으로, 경북대학교 평화문제연구소(PEACE RESEARCH INSTITUT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에서 1994년에 발행한 <평화연구(PEACE RESEARCH)> Vol.19 117-135(19分量)에 수록되어 있다. 제어번호 2073689, KDC 349.904이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연세대(중앙), 서강대(로욜라중앙), 경북대(중앙)이다. [목차] : . 序論/ . 開化의 개념/ 1. 開化語源的 의미/ 2. 用例로 본 開化의 개념/ . 開化思想의 형성배경/ 1. 政治思想的 상황/ 2. 開化思想의 형성/ . 開化思想의 전개과정/ 1. 1단계 開化思想期/ 2. 2단계 開化思想期/ 3. 3단계 開化思想期/ . 結論(keris 2003 2006)

 

  객관 : 객사

 

  객구, 객귀(客鬼) [民間療法] : 예천군에 전승되어온 주술적 요법(呪術的療法)으로, 잡귀신이 환자의 몸에 들어 와서 앓는 병이다. '객구가 들렸다'라고 생각이 되면 생콩을 씹어 보아 비린내가 나지 않으면 '객구가 들렸다'라고 단정을 하고, 객구물림을 한다. 객구의 증상으로는 하품이 자주 나고 기지개를 자주 켠다고 한다. 바가지에 찬물을 담고 밥을 조금 넣은 뒤 부엌칼을 가지고 환자의 머리맡에 앉아서 헛기침을 크게 세 번 하고, "어허 객구야! 들어 봐라. 김가(金哥) 죽은 귀신이나, 이가(李哥) 죽은 귀신이나, 오다 죽은 귀신이나, 가다 죽은 귀신이나, 배 아파 죽은 귀신이나, 머리 아파 죽은 귀신이나, 오늘 저녁에 물박 진지 함박 진지, 이걸 먹고 썩 떠나거라"라고 하고는 칼로 환자의 머리카락을 세 번 베는 흉내를 낸다. 그런 다음 환자는 바가지에 침을 세 번 뱉는다. ()을 읽은 사람은 문을 열고 나와 문에다 칼로 X 자형(字形)으로 크게 문살을 그리고, 마당에 나와 바가지를 쏟을 때 칼을 먼저 땅에 꽂는다. 칼끝이 바깥으로 되게 꽂고는 바가지를 엎는다. 바가지를 엎을 때, '어허 들어 봐라. 썩 안 나가면 이 칼로 배를 짼다'라고 하고, 칼로 마당에 ()로 그리고 바가지에 칼을 걸쳐놓고는 바로 집으로 들어오지 않고, 이웃집에 들렸다가 오거나, 집을 돌아서 방으로 들어간다.

 

  객구풀이: 푸닥거리

 

  객귀: 객구

 

  객귀풀이: 푸닥거리

 

  객사(客舍), 객관(客館), 예천객사(醴泉客舍), 용궁객사(龍宮客舍) [建物] : 1) 예천읍 노상리 1번지 대창중고등학교(大昌中高等學校)의 행정실(行政室), 교장실(校長室), 송대실(松臺室)로 사용되고 있는 120평의 건물로, 원래 노하리 74번지 예천읍사무소 부근에 있던 조선 시대의 객관(客館)이다.

 

  이 건물은 1907년 융명학교(隆明學校, 只今 醴泉初等學校前身) 교실로 쓰다가 1911년부터는 예천공립보통학교(醴泉公立普通學校)의 교실로 쓰였다. 1927년 노상리 1번지인 지금의 자리로 이건(移建)하여 대창학원(大昌學院)의 교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객관은 목조와가 단층 팔작(木造瓦家單層八作) 지붕으로 규모가 우람하고 거대하다. [尹祥] : 무릇 주군(州郡)에 관사(館舍)를 설치하는 것은, 사신(使臣)이 왕화(王化)를 선포하는 때를 기다려, 행례(行禮)할 곳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주 작은 고을이라도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예천군은 동쪽과 서쪽에서 죽령(竹嶺)과 초령(草嶺) 두 재 사이에 끼어있다. 죽령으로부터 상주 낙동(洛東)으로 가는 자, 초령으로부터 화산(花山)에 가는 자는 반드시 이 고을을 경유하게 된다. 그래서 사신의 순시(巡視)와 길가는 나그네의 오고감이 거의 없는 날이 없다. 그런데, 객관이 좁고 누추하여서 고을과 더불어 서로 걸맞지 않았다. 1439(세종 21)에 완산 이지명(完山李知命)이 이 고을의 수령으로 나왔다. 정사(政事)를 본 지 3년에 정사는 형통하고 사람들은 화합하게 되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에게 모의하고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여, 농부나 공장(工匠)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놀고 있는 사람들을 일 시키었다. <집이 이루어지니> 뜰층계가 높고 커서 심한 더위의 무더움을 제거할 수 있고, 마루의 간살이 넓고 시원하여서, <()를 행할 때에> 읍양(揖讓)할 위치를 마련하기에 넉넉하다. 서늘한 곳과 더운 방을 따로 만들었고, 외관(外觀)과 실질(實質)은 알맞게 되었으니, 이 군수(李郡守)의 정사(政事)하는 것이 급소(急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한도를 넘지 아니하였다. 공사를 일으켰으나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으니, 어짐을 베풂이요, 사신을 우대하고 왕명을 존중하니 공경함이 크다. 어짐과 공경함을 갖추었으니 수령의 직책은 다한 것이다. 예천은 나의 누대(累代)의 고향 땅이다. 이 군수의 정사(政事)하는 것은 내가 잘 아는 바이다. 그러므로 대강 일의 경과를 적을 뿐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그리고 윤상(尹祥)의 기문(記文) 중에 초령(草嶺)은 문경의 조령(鳥嶺)이고, 화산(花山)은 안동의 옛이름이다. 예천군수 이지명(醴泉郡守李知命)1441(세종 22) 10월에 기공(起工)하여 섣달에 일을 마쳤다... 1442(세종 24) 음력 5월 상순(上旬)에 통정대부 첨지중추원사 겸 성균관 사성 윤상(通政大夫僉知中樞院事兼成均館司成尹祥)이 썼다. [客舍東軒 韻에 대한 尹祥次韻] : 시냇물 돌아 돌고 산이 둘러쌌는데, 무르녹은 나무 그늘/ 예로부터 경승지로 그 이름 아름다웠네/ 높디높은 묘우(廟宇, 官衙)는 험준한 고개 뒤에 했고/ 곱게 치장한 누대(樓臺) 평평한 수풀 속에 보일 듯 말 듯/ 천 길 산곽(山郭)에는 구름 안개 얄포롬하고/ 십리 상마(桑麻) 들에는 비이슬이 짙구나/ 치하(致賀)하오 사군(使君)이여 그대 치적 으뜸임을/ 황화(皇華, 王命을 받은 使臣)가 붓 휘둘러 꽃다운 시() 읊었구려/(別洞先生文集). 그 외 관찰사 권맹손(觀察使權孟孫), 관찰사 김정국(觀察使金正國), 강원 감사 홍귀달(江原監司洪貴達), 서거정(徐居正)의 시가 있고(군지 1780 1895 1939), 구질(舊秩) 및 객관 현판(客館懸板)이 있다(군지 1786).

 

  2) 용궁 객사(龍宮客舍) : 용궁면 향석1리 동헌(東軒)터 동쪽에 있던 용궁현 객사(龍宮縣客舍)의 터로, 지금은 향석초등학교(鄕石初等學校)를 세우기 위해 없어졌다. [龍宮客舍 板上詩陽村 權近次韻] : 한 고을의 풍연 (風烟)10리 사이에 뻗쳤고/ 정사(政事)는 맑고 형벌은 적어 아전(衙前)과 백성이 한가하네/ 문 앞의 곧은길은 담대(澹臺)의 길이요/ 창 밖의 여러 봉우리는 사조(謝眺)의 산일세/ 다행히 고인(故人)과 더불어 서로 만나니/ 귀양살던 가련한 몸 살아 돌아왔네/ 이제부터 농사하는 뜻을 이루려 하니/ 벼슬길은 예부터 가장 험하고 어려운 것을/(陽村集 第7卷 詩)(용궁현읍지 1780, 축산승람 1934, 교남지 1937).

 

  3) 용궁객사(龍宮客舍) : 용궁면 읍부리 251-252번지에 있던 용궁현 객사(龍宮縣客舍), 1857년에 창건되었다가 없어지고, 현재 그 유지(遺址)에 용궁초등학교(龍宮初等學校)가 있다.

 

  객사 : 西浦先生集卷六/ 七言絶句/ 醴泉客舍/ 留客華軒秋日午。朱絲解作黃鶯語。無端門外角三聲。忽復悤悤騎馬去。/ 저자 김만중(金萬重)/ 분류고도서 > 집부(集部) > 별집류(別集類)/ 제공 한국고전종합DB(//db.history.go.kr/2014)

 

  객사 동헌 : 別洞先生集卷一/ 詩○七言律/ 次醴泉客舍東軒韻/ 川回山轉樹濃陰。勝地佳名?匪今。??嶸依峻嶺。樓臺粧點隱平林。千尋山郭雲煙老。十里桑麻雨露深。多賀使君治第一。皇華揮筆費芳吟。/ 저자 윤상(尹祥)/ 분류고도서 > 집부(集部) > 별집류(別集類)/ 제공 한국고전종합DB(//db.history.go.kr/2014)

 

  객사 동헌 : 別洞先生集卷二/ / 醴泉客舍東軒重創記/ 凡州郡官舍之設。所以待使臣宣王化。以備行禮之所。雖十室之邑。不可廢也。醴泉爲郡。居嶺南初面。地廣民稠。東西介于竹草二嶺。自竹而之商洛。由草而達花山者。必經由是邑。故使華之巡遊。行旅之往來。殆無虛日矣。其館舍低微隘陋。不與邑相稱。然其前後廳事與西兒房。則自經倭火以後。稍稍修改。東軒與東兒房。尙仍其舊。隘陋尤甚。棟宇傾?。凡所行禮。步武不周。儀形不稱。歲己未。完山李侯知命出宰是邑。視事三年。政通人和。乃謀諸邑人。斥其舊制。高其?榮。改棟與樑。換楹與?。其飾則雜以舊材。不煩農工。遊手是役。自辛酉十月始。至十二月告訖。階序峻壯。可以祛炎暑之毒。軒楹?豁。足以備揖讓之禮。?煥異所。文質得宜。李侯之政。可謂知所急矣。興工役而不勞民力。仁之施也。慰使臣而尊異王命。敬之大也。具仁與敬。斯爲君子之全德。而上以尊王命。下以愛斯民。守令之職盡矣。醴邑。吾桑梓鄕也。故記其事之本末。聊書終始云耳。蒼龍歲在玄??茂仲夏上澣有日。通政大夫僉知中樞院事兼成均司成某記。/ 저자 윤상(尹祥)/ 분류고도서 > 집부(集部) > 별집류(別集類)/ 제공 한국고전종합DB(//db.history.go.kr/2014)

 

  객사 초석(客舍礎石) [遺蹟] : 용궁면 향석리 향석초등학교(鄕石初等學校) 운동장 동쪽에 있는 주춧돌로, 용궁면(龍宮面)이 용궁현(龍宮縣)이었던 무렵에 객사(客舍) 기둥을 받치고 있던 주초석(柱礎石)이다. 중앙의 기둥을 세울 곳은 원형(圓形)으로(지름 44cm) 다듬어졌고, 그 주위에는 연화(蓮花)의 잎이 양각(陽刻)되어 있는데, 그 양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여러 개가 옛 객사(客舍)터인 이곳에 남아 있었는데, 거의 용궁향교(龍宮鄕校)의 대성전(大成殿)을 중건할 때 초석(礎石)으로 사용하고 요즘 눈에 띄는 것은 이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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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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