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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294 : 경북예천지역자활센터...경북예천지역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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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예천지역자활센터: 예천군 사회적기업 1호 인증서 전달/ 2011.08.12 | 뉴시스 | 다음뉴스 【예천=뉴시스】노창길 기자 =/ 경북 예천군 사회적기업 1호인 (주)행복드림에 대한 인증서 전달식이 12일 오후 2시 예천읍 남본리 소재 예천지역자활센터에서 열린다. 이현준 군수를 비롯한 .../ 10301^http://v.media.daum.net/v (daum 2016)
경북예천지역자활센터: 예천군, 경북형 예비사회적기업 지정서 전달/ 2012.01.09 | 뉴시스 | 다음뉴스/ 전달했다. 이 두 업체는 '2012년도 경북도 예비사회적기업'으... 식재료', '다문화가족 생산 공예품', '지역 농·특산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오일장영농조합법인은 지역자활센터의 영농사업.../ 10301^http://v.media.daum.net/v (daum 2016)
경북예천지역자활센터: 예천군, 2012년 예비 사회적 기업 2곳 신규 지정 받아/ 2011.12.27 | 뉴시스 | 다음뉴스/ 다양한세상이 경북도로부터 '2012년 경북도 지역형 예비 사회... 늘어났으며 19명의 일자리가 창출됐다. 오일장영농조합법인은 지역자활센터의 영농사업단과 농산물 유통 사업팀을 법인으로 ...(daum 2016)
경북 예천지역 태실에 관한 일고찰(慶北 醴泉地域 胎室에 關한 一考察) [論文] : 예천군청 이재완 학예연구사가 예천지역 태실의 특징을 밝힌 학술논문을 발표하였다. 예천의 역사와 태실은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보주(고려 때 예천의 지명)는 명종 2년(1172) 태자의 태를 묻고 기양의 군명이 바뀌면서 현령으로 승격됐다고 했다. 과거 고을의 승격은 왕의 태실을 묻고, 태의 주인이 왕으로 등극함과 동시에 지역의 고을단위가 승격돼, 각 지역에 위치한 태실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국가적으로 보호되었던 문화유적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소속의 이왕직 예식과에 의해 태실에 묻혀진 왕실의 유물을 수집하기 위해 파헤쳐진 후 예천 지역사와 관련된 태실 사례는 보고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경북 예천지역의 사도세자와 문종대왕의 태실이 발견되고, 예천지역의 태실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예천지역의 왕실태실은 모두 금당실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십승지와 관계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경북 예천군청 이재완 학예연구사는 국립고궁박물관이 발간하는 년간 학술지인 '고궁문화' 최신호(제6호)에 '경북 예천지역 태실에 관한 일고찰'이라는 글을 기고해 예천군에 분포한 왕실의 태실 6곳을 소개했다. 이 연구사는 관련 문헌기록과 현지조사를 통해 확인한 결과 고려의 강종, 조선의 문종, 폐비윤씨, 사도세자(장조), 문효세자, 오미봉 무명 태실 6곳의 예천지역 태실을 소개하고, 예천지역에 태실은 사람들이 난을 피해 살 수 있는 곳, 국난에도 안전한 곳이 선정되었다고 말했다. 나아가 예천지역에는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왕비태실인 폐비윤씨 태실과 왕으로 등극하지 못했지만 정조에 의해 태실의 추가적인 석물이 조성된 사도세자의 태실은 조선 정조시대의 문화적 특수성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이 학술논문은 고궁문화 홈페이지(http://www.gogung.go.kr)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예천 지역이 왕실과의 연관성을 가진 연구로 향후 향토사 연구 및 관광자원개발의 실마리를 풀어줄 연구라고 평가된다.(이상만 記者 慶北日報 2013-12-16)
경북 예천지역 태실에 관한 일고찰(慶北 醴泉地域 胎室에 關한 一考察) [論文] : 예천군청 이재완 학예연구사의 논문으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2013년 11월 30일에 발행한 ‘古宮文化’ 제6호에 실려 있다. 목차는 Ⅰ. 머리말, Ⅱ. 醴泉地域의 胎室遺蹟의 分布現況, Ⅲ. 醴泉地域 胎室의 史料檢討 및 考證, 1) 高麗時代 胎室, 2) 朝鮮時代 胎室,
Ⅳ. 맺음말/ Ⅰ. 머리말 : 십승지로 잘 알려진 예천지역에는 왕실의 태실(胎室:胎峯) 6곳이 있다. 여기서 왕실의 태실이란 왕과 왕비를 비롯한 그 자손들의 태를 묻은 시설물이며, 이 태실이 조성된 산을 태봉(산)이라 한다. 1 현재까지 예천에는 고려 강종대왕(康宗大王)태실 1곳을 비롯하여, 조선의 문종대왕(文宗大王)태실, 폐비윤씨(廢妃尹氏)태실, 장조대왕(莊祖大王:사도세자)태실, 문효세자(文孝世子)태실, 오미봉(五美峰) 무명(無名) 태실을 포함한 총 6곳이 있다. 게다가 이곳에는 유천면 유천리 태봉산과 용문면 방송리 삼태골)三胎谷), 지보면 만화리 구태미마을 뒷산 태봉산, 지보면 수월리 수동 태봉산, 예천읍 대심리 태실골이라는 지명이 있어, 추가적인 태실 발견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예천지역 조선왕실의 태실유적 5곳 중 4곳은 일제강점기 이왕직 예식과의 주관 아래 파괴되어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고, 이후 예천지역의 조선시대 왕실 태실은 모두 훼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미봉에 있던 무명(無名) 태실도 도굴된 후 태함만 남아있는 것을 2010년 예천군에서 수습하여 국립대구박물관으로 장소를 옮겨 보관하고 있다. 더구나 장조대왕의 태실비는 1940년경 비면을 깎아 명봉사 사적비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었고, 장조 태실 터는 태실(註1) 석물이 등산로에 노출되어 훼손이 염려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렇듯 지금까지 예천지역 조선왕실의 태실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후 방치된 문화유적이었다. 필자는 2011년 10월 19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영조자료집 간행팀과 함께 장조태봉도(장서각소장)를 참고하여 명봉사 일대를 조사하던 중 문종 태실터와 장조 태실터를 발견하였다. 이는 2005년에 발간된 예천군의 『문화유적분포지도』에도 문종과 장조의 태실터가 기록되지 않았고,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87호로 지정된 ‘명봉사 문종대왕 태실비’도 원위치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태실유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명봉사 바로 뒷 봉우리에 위치한 문종의 태실터에는 횡죽석, 전석 등 석물이 깨져 인근에 흩어져 있었고, 장조의 태실터에는 개첨석 등의 석물들이 노출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부 석물들은 산 아래로 굴러 떨어져 있었다. 이후 필자는 2011년 10월 30일 태실 연구가인 울진군청 심현용 학예연구사와 함께 2차 조사를 실시하였고, 명봉사 경내에 있는 태실 석물과 태봉 근처에 흩어진 석물들을 추가로 발견하였다. 이에 지표자료와 문헌자료를 수합하여 문화재청에 긴급발굴조사를 신청하였고, 2012년 2월 유적의 추가적 훼손방지와 문화유적의 안전한 보존 관리를 위해 국비를 지원받아 성림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하여 2012년 6월~8월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많은 태실석물들을 수습할 수 있었고, 문종과 장조 태실유적에 각 2기씩 무연묘가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필자는 2012년 10월 태실 주변의 무연묘 공고를 통해 이장절차를 완료했으며, 향후 태실유적 복원을 위한 기초자료 확보를 위해 예천지역 왕실의 태실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왕실의 태실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편이었다. 대부분의 연구는 지역단위의 태실연구, 발견에 따른 개별 태실에 관한 것이었다.2 이는 조선시대 왕자, 공주 등 왕실 태봉의 위치가 정리되지 않았고, 그나마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역대 왕실의 태실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이봉되면서 대부분의 태실이 훼손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19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역대 왕조 중심의 태봉을 정리한 연구서가 발간되면서, 풍수관련 연구, 태실 출토 유물의 양식변천 연구 등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직까지 각 지역에 분포해 있는 태실의 구체적인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각 지역의 태실 또한 원형이 남아 있는 사례가 극히 드문 실정임으로 기초조사라는 측면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특히, 이 글은 예천 지역의 문화 유적을 발굴함과 동시에 향후 문화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는 기초자료 확보에 목적이 있다.(註2)
註1: 胎峯은 태실이 있는 산이란 보통명사이다. 한편 胎封은 胎를 封한다, 封, 書, 開封 등의 봉과 같이 ‘꼭 막아서 둔다’는 뜻으로 사실상 臧 胎나 安胎와도 통하는 動名詞이다(김용숙,「태봉연구」,『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p.349. 경북慶北 예천醴泉지역 태실胎室에 관한 일고찰一考察 100 고궁문화 제6호)
註2 : 최호림, 「조선시대 태실에 관한 일연구」, 『한국학논집』7 (한양대학교한국학연구소, 1985); 김영진, 「충주경 종태실 소고:변작과 복원을 중심으로」, 『박물관보』7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______, 「청원 산덕리 태실 발굴조사 보고」, 『박물관보』10 (청주대학교박물관, 1997); 홍성익, 「강원지역 태실에 관한 연구」, 『강원문화사연구』제3집 (강원향토문화연구회, 1998); 김만중, 「강릉 모전리 정복태실비와 성종의 자녀에 대하여」, 『박물관지』 제7호 (강원대학교박물관, 2001); 심현용, 「울진지역 태실에 관한 시고」, 『고문화』제57집 (한국대학박물관협회, 2001); ______,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연구」, 『박물관연보』2 (강릉대학교박물관, 2005); ______, 「성주지역 태실과 생명문화관 전시방안」, 『세종대왕자태실 생명문화관 컨텐츠 및 전시 방향 모색을 위한 전문가 초청 학술세미나』 (성주군, 2010); 홍성익, 「원주시 대덕리 태실에 대하여」『,강 원문화사연구』제9집 ( 강원향토문화연구회, 2004); 심현용, 「광해군태실에 대하여」, 『강원문화사연구』제9집 (강원향토문화연구회, 2004); ______, 「대구 광해군태실 고」, 『향토문화』제20집 (대구향토문화연구소, 2005); 홍성익, 「홍천 공작산 정희왕후 태실지 위치비정」, 『강원문화사연구』제13집, 2008. 박채은, 「성종대왕과 후궁 명빈김씨:경숙옹주 태실과 관련하여」, 『울산문화연구』 제1호, 2008; 심현용, 「조선 단종의 가봉태실에 대한문 헌.고고학적 검토」, 『문화재』제45권 제3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김태일,「조선 초기 왕실의 태실 연구:경북 성주지역 태실 21기를 중심으로」, 『백악논총』제7집, 2012.
II. 醴泉地域의 胎室遺蹟의 分布現況(註3)(註4)(註5)
예천 지역에는 고려 강종대왕(康宗大王)태실 1곳을 비롯하여, 조선의 문종대왕(文宗大王)태실, 폐비윤씨(廢妃尹氏)태실, 장조대왕(莊祖大王:사도세자)태실, 문효세자(文孝世子)태실, 오미봉(五美峰) 무명(無名) 태실이 있다. 폐비윤씨 태실과 미명 태실을 제외한 예천지역에 안치된 태주는 모두 원자로, 태실지로서 가장 좋은 1등급의 명당에 조성되었다.(註6)
예천 지역의 태실 중 강종대왕, 문종대왕, 장조대왕, 문효세자의 태실은 1등급이며, 폐비윤씨와 미명태실 또한 태봉의 입지조건을 대부분 갖추고 있는 명당임을 알 수 있다. 윤진영은 조성왕조실록에 기록된 태실이 취할 수 있는 명당의 조건으로 첫째, 들판 가운데 위치한 둥근 봉우리와 같은 지형, 둘째, 산 정산에 주산(主山)의 능선과 연결되는 내맥(來脈)이 없어야 하며, 좌우의 용호(龍虎)를 마주 볼 수 있는 지형, 셋째, 반듯하고 우뚝 솟아 우로는 공중을 받치는 듯한 형세의 지형으로 요약하였다.(註7)
더구나 『태봉등록(胎封謄錄)(奎12893)』에 기록에는
“태봉은 산의 정상을 쓰는 것이 전례이며,
내맥(來脈:종산(宗山)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이나 좌청룡 우백호나 안산은 보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
하였다.(註8)
여기에서 윤석인이 말한 두 번째의 지형은 주산에서 태실로 쓰이는 봉우리까지 연결되는 내맥의 요건과 봉우리와 안산이 연결되지 않는 지형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예천 지역의 태실을 살펴보면, 아직 위치가 확인되지 않은 강종대왕 태실을 제외한 나머지 태실은 둘째와 셋째의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으며,
오미봉 태실은 3가지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고궁문화 제6호에 번호 주인공 탄생년월일 장태년월일 가봉년월일 태실등급 원태실 관련유물 비고의 순서임
1 강종대왕
1152년 1171년
1등급
2 문종대왕
1414.01.03 1450년(1차추정) 1735.09.25(2차) 1등급 내·외 항아리,
봉합천, 주칠끈,
장조태봉도 가봉태실
3 폐비윤씨
1455.閏06.01 1478.11.12. 1478.11.12. 내·외 항아리,
지석, 봉합천,
주칠끈 가봉태실
4 장조대왕
1735.01.21 1735.閏04.04 1785.03.08 1등급 내·외 항아리,
은편, 동전,
지석, 장조태봉도,
경모궁 태실 감역 각석문 가봉태실
5 문효세자
1782.09.07 1783.09.06 1등급 내·외 항아리,
지석 원자
6 오미봉태실 태함이 있다.
물론 태실로서 명당의 조건은 위의 사항만으로 단순화하기에 무리가 있지만,
대체로 예천지역의 태실은 위의 조건을 갖추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천지역에 태실이 조성된 태주 중 왕으로 등극하거나 추층된 왕은 고려시대 강종과 조선시대 문종,
장조이며, 가봉태실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였던 폐비윤씨를 포함한
3곳이 남아 있다. 더구나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1509~1571)는 『정감록鄭鑑錄』에서 십승지지十勝之地 가운데 한 곳으로 금당실 북쪽을 거론했다.
즉, 금당실 북쪽은 위에서 언급한
6개의 태봉이 안치된 곳이었다. 따라서 예천지역에 분포한 왕조의 태실은 금당실 북쪽에 위치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주3: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조선의 태실』Ⅰ.Ⅱ.Ⅲ, 1999;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실의 태봉』, 2008.
주4: 박대윤,
「조선 성종 태봉의 풍수지리적 특징 비교:초장지와 이장지를 중심으로」,
『한국학연구』33집,
고려대 학교 한국학연구소, 2010; ______, 「조선시대 국왕태봉의 풍수적 특징 연구」,
『한국문화』59집
(서울대학교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2).
註5 : 윤석인,
「조선왕실의 태실석물에 관한 일연구:서삼릉 이장 원 태실을 중심으로」,
『문화재』33 (문화재관리국, 0200);
심현용, 「조선시대 아기태실비의 양식과 변천」,
『미술자료』제75호
(국립중앙박물관, 2006); 윤석인,
「조선왕실 태항아리 변천 연구」, 『고문화』제75집
(한국대학박물관협회, 2010);
심현용, 「조선왕실 태실석함의 현황과 양식변천」,
『문화재』제43권 제3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 10).
註6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편,
『조선의 태실』Ⅱ (1999), pp.238~243.
註7 : 윤진영,
「왕실의 태봉도」, 『조선왕실의 출산 문화』
(이화문화사, 2005), pp.94~9
註8 : 국립문화재연구소,
『국역태봉등록』, 2006, p.39 참조.
Ⅲ. 醴泉地域 胎室의 史料檢討 및 考證
1) 고려시대(高麗時代)
태실(胎室)
강종대왕(康宗大王)
태실(胎室) :
강종대왕 태실은 경북 예천군 용문사길 285-30 용문사 주변에 위치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려사』에 나타난 강종은 명종의 맏아들로서 의종 6년(1152)
태어나 명종 3년(1173)
태자로 책봉되었고, 희종
7년(1211)에 왕이 되었다(註10).
더구나 명종 15년(1185)
제작되어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제460호로 지정된 「중수용문사기비重修龍門寺記碑」에는
“신묘년(명종1, 1171)에 음양을 관리하는 관리가 현재 황태자의 태를 묻을 곳으로 사찰 문밖의 왼편 봉우리 꼭대기를 점쳐 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註11).
이와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보주(甫州:예천)는 안동부에 예속된 고을이었으나 명종
2년(1172)
태자의 태를 장치하고 기양(基陽)으로 군명이 바뀌면서 현령(縣令)으로 승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註.12)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명종(明宗)
때에 (태자)太子의 태를 묻고 이름을 창기사(昌期寺)라 고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註13)
이를 정리하면, 원손의 태는 태어난 후 바로 태실을 만들지 않고 어딘가 보관하였다가 태자책봉 무렵 태장지 선정 후 이장되었고,
이후 해당 고을은 승격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태실이 위치한 사찰은 명칭을 바꾸는 등 태실수호사찰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중수용문사기비」에는 “조정의 명령에 의거하여 근처 주현이 없어진 절의 토지
30경과 안동부 보주(예천)의 금당동 북쪽이니 이 땅은 비록 지세가 깊지 못하여 밖으로 드러나 있으나 전쟁의 영향이 미치지 않아 여러 대에 걸쳐 편암함을 누릴 것이다(“醴泉金堂洞北,
此地難淺露, 兵戈不入,
累代安亭”).
지역 10곳 작은 사찰의 노비들 각
2명을 사찰에 소속시켰다. 그리고 근처 지역의 조세
700석을 촌민들에게 나누어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도량에 머무는 승려들의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용문사에 소장된 『용문유적-불용』에는 서거정(徐居正:1420~1488)
등 12인의 유학자가 지은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계양(桂?)
이각(李珏)은
“태실만정화(胎室滿禎華)”라고 하면서,
태실의 상서로움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1785년 제작된 「예천 용문산 창기사 응진전 상량문(醴泉龍門山 昌基寺 應眞殿 上樑文)」에는
“법우가 태실과 가깝다하여 임금의 명을 받아 동쪽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강종의 태실지는 용문사 대장전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왼쪽 봉우리(용문면 내지리 산
81)에 위치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왕실에서는 가람배치를 조절하여 태주의 발복을 염원하였으며, 태실수호사찰은 사찰명을 바꾸는 등 왕실과의 연대감을 드러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왕실의 태를 수호하는 사찰에는 왕실의 여러 가지 지원과 혜택이 주어졌다.
그리고 고려시대 왕실 안태제도는 국왕뿐만 아니라 태자의 장태에서도 읍호의 승격이 이루어지는 등 조선시대의 제도와는 다른 양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註14-19)
註10 『高麗史』,
卷21, 康宗條, “明宗長子 母曰光靖太后金氏 毅宗六年 壬申 四月 乙巳生 明宗三年 四月 冊太子賜名璹 二十七年 九月 崔忠獻放于江華 熙宗六年 十二月 召還京 明年正月封漢南公改名貞 十二月 癸 卯 忠獻廢熙宗 奉王于私第 卽位於康安殿改名.”
참조.
註11 『重修龍門寺記碑』, “歲在辛卯 陰陽官卜定今皇太子胎臧地於寺門外左臂峯頭.”
참조.
註12 『新增東國輿地勝覽』卷24,
醴泉郡 建治沿革條, 「重修龍門寺記碑」 참조.
註13 『新增東國輿地勝覽』卷24,
醴泉郡 佛宇條 「重修龍門寺記碑」.
註14 「重修龍門寺記碑」, “據朝旨 納近州縣亡寺田三十頃 幷安東府甫州十小寺臧獲各二口 及近州寺稅租七百石 分貸村民取息 以爲道場衆料.”
註15 「醴泉 龍門山 昌基寺 應眞殿 上樑文」, “法宇逼近於封底 被敎移建于卯地.”
註16 디지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www.encykorea.com/).
註17 『文宗實錄』卷2,
卽位年 7月 26日(戊辰), “慶尙道基川任內殷.縣,
乃安胎之處。 請依昆陽郡例, 陞爲郡,
以基川縣合屬, 號爲.基郡.”
註18 『新增東國輿地勝覽』卷25,
豊基郡 山川條, “鳴鳳山 在殷豊縣西十六里 藏本朝 文宗胎.”
註19 『豊基郡誌:1899』 佛宇條, “鳴鳳寺 在鳴鳳山 文宗大王胎室奉安後.建.”
2) 조선시대(朝鮮時代)
태실(胎室)
(1) 문종대왕(文宗大王)
태실(胎室) :
문종대왕태실은 경북 예천군 상리면 명봉사길 62 명봉사 무량수전 뒷 봉우리(상리면 명봉리 산
2)에 위치하고 있다.<도1,25,28,29>
문종은 태종 14년(1414)
태어나 문종 2년(1452)
몰(歿)한 왕으로,
세종의 맏아들이다. 그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의 소생으로 세종
3년(1421)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50년
37세로 왕위에 올랐다. 문종이 즉위된 1450년 그의 태가 안치된 은풍현(殷豊縣:지금의 예천)은 풍기군(豊基郡)으로
승격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명봉산鳴鳳山은 은풍현殷.縣 서쪽
16리에 있으며, 본조 문종(文宗)의 태(胎)를 안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풍기군지(豊基郡誌
: 1899)』에는 “명봉사는 명봉산에 있으며 문종대왕의 태실을 봉안한 후에 창건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명봉사는 문종의 태를 지키는 수호사찰로서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명봉사 인근에는 보물 제1648호로 지정된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가 있으며,
이 비의 조성 시기는 고려 태조 24년(941)이다.
따라서 명봉사에 있었던 사찰은 미상시기 폐사된 후 문종의 안태 이후 태실수호사찰로서 다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태봉등록』의 기록에 따르면, 문종대왕 태실표석은 장태시 제작되지 않았고, 1735년 표석이 없다는 보고를 통해 제작되었다(註20).
더구나 문종대왕의 태실표석은 청주 땅 태봉 석물의 체제보다 크기를 줄여 제작되었으며(註21),
기존석물은 깨끗한 곳에 묻고, 태실 좌우로 가장 가깝게 있는 나무들은 모두다 베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註22)
따라서 문종의 즉위이후 태실은 가봉비를 세우지 않고 석물만 배치하는 형태였고, 1735년(영조11)
원자(사도세자)의 태봉 낙점 사건을 계기로 태실비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문종의 태봉은 명봉사 무량수전 바로 뒷 봉우리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이왕직 예식과에 의해 태항아리는 서삼릉으로 이장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태실석물은 파괴되었다. 이후
1940년경 명봉리 마을 사람들에 의해 문종의 가봉태실비는 명봉사 경내로 옮겨졌으며, 198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제187호로 지정되면서 더 이상의 훼손을 막을 수 있었다.(註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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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