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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295 : 경북예천지역태실...(부, 예천군, 18일 경북도청 동락관 세미나실에서 2018년도 지역경제 활성화 평가 최우수상을 수상함...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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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8월 훼손된 문종태봉을 발굴한 결과 태실은 가봉 당시 사용한 사방석편, 상석, 전석편, 동자석편, 횡죽석 등이 수습되었고, 석함 없이 인골 2기가 매장되어 있었다.(註24)
하지만 1735년 태실가봉비 설치 때 묻어놓은 기존의 석물과 아기태실비는 찾지 못했다.
한편, 문종과 관련된 태실 유물은 문화재로 지정된 문종대왕태실비와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된 분청인화문외호, 서삼릉에서 출토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중인 백자 외항아리(서삼릉 이전시 제작)와 뚜껑(서삼릉 이전시 제작), 도기 내항아리와 뚜껑(서삼릉 이전시 제작), 지석(서삼릉 이전시 제작)이 있으며 외항아리를 묶은 봉합천과 주칠끈이 남아있다.(註25)
그리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장조태봉도(1785)에는 문종의 태실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현재 명봉사 무량수전 서편에는 문종대왕가봉태실비가 있으며, 이 비는 귀부와 이수가 있다. 비신 앞면에는 ‘문종대왕태실文宗大王胎室’ 뒷면에는 ‘숭정기원후일백팔년을묘구월이십오일건崇禎紀元後一百八年乙卯九月二十五日建’으로 음각되어 있다. 이수는 폭 128cm, 높이 47cm, 두께 46cm이며, 비신의 크기는 폭 96cm, 높이 184cm, 두께 21cm이다. 귀부는 가로 130cm, 세로 146cm, 높이 51cm이다.
註20 “列朝胎室表石則今此 文宗大王胎室獨.表石誠爲久缺”(국립문화재연구소, 앞의 책, p.275).
註21 “淸州 胎峯石物體制.已.損今後以此定式導行事”(국립문화재연구소, 앞의 책(2006), p.287).
註22 국립문화재연구소, 앞의 책(2006), p.290.
註23 조동윤, 『예천기행』, (주)역사만들기, 2003, p.214.
註24 성림문화재연구원, 「예천 명봉리 조선왕실 태실(문종.장조) 유적 문화재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12, p.10.
註25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1999, pp.28.29.57.186.248.249.417.
26 『成宗實錄』卷70, 成宗 12년 8月 9日; 『成宗實錄』105卷 成宗 15년 6月 2日.
(2) 폐비윤씨(廢妃尹氏) 태실(胎室) : 폐비윤씨태실은 경북 예천군 용문사길 285-30 용문사에 위치(용문면 내지리 산 81)하고 있다.
폐비윤씨廢妃尹氏는 세조 1년(1455) 태어나 성종 13년(1482) 몰한 인물로 성종의 후궁이자, 연산군의 생모이다. 그는 성종 7년(1476) 왕비가 되었고, 성종 15년(1484)에 폐출된 인물이다.(註26)
그의 아들 연산군은 그의 생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였으나,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왕권을 잃음으로써 폐비의 추존도 삭탈되었다.(註27)
현재 용문사에 위치한 태주는 제헌왕후이다. 하지만 1818년 이후 발간된 『용문사사적-불용건龍門寺事蹟-不用件』 「용문사기(龍門寺記)」와 광무 4년(1900) 5월 장례원掌隷院에서 발급한 용문사 『완문(完文)』에는 태주가 소헌왕후(昭憲王后)로 기록되어 있으며(註28), 소화(昭和) 14년(1939)에 발간된 『예천군지』에는 “성화십사년봉왕비태실(成化十四年封王妃胎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용문사에 위치한 태실비에도 앞면에는 “왕비태실”, 뒷면에는 “성화십사년이월십사일”이라고 음각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의 자료를 참조한 많은 자료에서는 태주를 소헌왕후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춘관통고(春官通考)』에 소헌왕후의 태봉은 순흥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한편, 『성종실록』에는 “중궁(中宮)의 태실이 경상도 예천에 있으니”라는 기록으로 보아 용문사에 위치한 태실의 태주는 폐비윤씨임을 알 수 있다.(註29)
또한 서삼릉에서 출토된 지석은 “경태육년윤육월초일일생 왕비윤씨태성화십사년십일월십이일오시장(景泰六年閏六月初一日生 王妃尹氏胎成化十四年十一月十二日午時藏)”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성화 14년(1478)은 폐비윤씨가 왕비가 된 2년 후임으로, 태주는 폐비윤씨가 확실함을 알 수 있다
폐비윤씨의 태봉은 용문사 보광명전에서 동남쪽 5시 방향으로 약 370m거리의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다. 폐비윤씨의 태항아리도 일제강점기 이왕직 예식과에 의해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폐비윤씨의 태실에는 가봉태실비가 있으며, 귀부와 이수가 떨어진 것을 시멘트로 붙여 놓은 상태에 있다. 가봉태실비 이외의 석물은 보이지 않으며, 원형석함의 상부면이 노출되어 있는 실정이다.(註30)
이 태실비는 비록 일부 훼손되었지만, 현존하는 조선시대 왕비 가봉태실비로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註31)
한편, 폐비윤씨와 관련된 유물은 가봉태실비, 석함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분청사기귀얄문외호, 서삼릉에서 출토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중인 백자외호(서삼릉 이전시 제작), 도기내호, 지석이 있으며 외항아리를 묶은 봉합천과 주칠끈이 남아있다.(註32)
용문사에 위치한 가봉태실비의 비신 앞면에는 ‘王妃胎室’ 뒷면에는 ‘成化十四年十一月十二日’로 음각되어 있지만 각자의 훼손이 심한 편이다. 이수는 폭 50cm, 높이 38cm, 두께 21cm, 비신의 크기는 폭 50cm, 높이 77cm, 두께 21cm이다. 귀부는 폭 122cm, 너비 175cm, 높이 93cm이다.
註27 『燕山君日記』卷53, 燕山君 10년 5月 6日.
註28 『春官通考』卷68, 嘉禮 胎峯, “昭憲王后 胎峯順興小白山輪庵峯.”
註29 『成宗實錄』卷75, 成宗 8년 1月 5日, “中宮胎室, 在慶尙道醴泉.”
註30 심현용, 「조선왕실 태실석함의 현황과 양식변천」, 『문화재』43-3 (국립문화재연구소, 2010), p.215.
註31 현재 왕비태실은 경북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 소헌왕후 태실과 강원도 홍천군 동면 덕치리 정희왕후 태실 그리고 폐비씨윤 태실 3개소가 알려져 있으나, 가봉태실비가 발견된 사례는 폐비윤씨의 것이 유일하다.
註32 국립문화재연구소, 앞의 책(1999), pp.36.37.80.205.284.285.420.
(3)장조대왕(莊祖大王) 태실(胎室) : 장조대왕태실은 경북 예천군 상리면 명봉사길 62 명봉사 문종대왕 태실 북쪽으로 약410m 정도 떨어진 곳(상리면 명봉리 산 2)에 위치하고 있다. 장조는 사도세자로 잘 알려진 인물로, 영조 11년(1735)에 태어나 영조 38년(1762) 몰한 왕으로, 영조가 맏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1719~1728)를 잃고 7년 만에 얻은 둘째 아들이다. 그는 영빈 이씨(暎嬪李氏) 소생으로 영조는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원자(元子)라 칭호를 정했고, 두 살이 되었을 때 왕세자로 책봉하였다.(註33) 그는 영조 25년(1749) 나이 15살에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했으며(註34), 영조 38년(1762)에 뒤주에 갇혀 훙서(薨逝)했던 인물이다.(註35) 그 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를 계승하였고, 정조는 즉위년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 수은묘의 봉호(封號)를 영우원(永祐園), 사당을 경모궁(景慕宮)이라 하였다.(註36) 고종 36년(1899) 사도세자는 장종(莊宗)으로 추숭되었고(註37), 장종대왕의 묘호 망단자는 장조(莊祖)로 하였다.(註38) 『태봉등록』에는 “금년 을묘 정월 21일 축시에 출생한 원자아기씨의 일등 태봉을 경상도 풍기현 소백산 산자락인 명봉산鳴鳳山 아래, 축좌미향(丑坐未向; 북북동을 등지고 남남서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낙점되었으므로, 장태 길일을 오는 윤4월 초 4일 사시巳時로 하였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註39) 따라서 장조의 태는 문종대왕의 태가 위치한 곳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1등 태봉에 조성되었다. 장조의 태실과 관련된 조선왕조실록에는 “안태사 송인명(宋寅明)과 종사관(從事官) 윤흥무(尹興茂)를 보내어 원자의 태를 풍기에 갈무리하게 하였다”(註40)는 것과 “경모궁의 태실을 더 봉하는 공사가 끝났다고 하자, 서표관(書標官) 이하의 관리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서표관인 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 홍양호(洪良浩)를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올려 주고 감역관(監役官)인 풍기군수 이대영(李大永)을 통정대부로 올려 주었다(註41)”고 기록되어 있다.(註42) 더구나 장서각에 남아 있는 경모궁태실 비의 탁본에는 “경모궁태실(景慕宮胎室)/건융오십년을사삼월초팔일건(乾隆五十年乙巳三月初八日建)”으로 기록되어 있다.
위의 기록을 볼 때 장조의 태는 출생 3개월 후(1735년)에 장태되었으며, 사도세자의 사후인 정조 9년(1785) 때 가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정조대왕 때는 장헌세자의 존호를 받았을 뿐 왕으로 추증되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경모궁의 태실 가봉은 이례적이었다. 더구나 장조의 직계 현손(玄孫)인 헌종까지 왕위를 계승하였고, 정조태실가봉은 정조 즉위년에 이루어지지 않고 그의 아들 순조(순조 1년:1801)에 의해 이루어졌다.(註43)
위의 정황으로 볼 때, 정조는 생전에 자신의 태실을 가봉하지 않았던 점과, 정조대왕 이후 사도세자의 직계 현손까지 왕위를 계승하였던 점은 경모궁의 태실 가봉에 대한 명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장조의 태실은 일제강점기 이왕직 예식과에 의해 태항아리는 서삼릉으로 이장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태실석물은 파괴되었다. 이후 태실가봉비는 1940년경 명봉리 마을 사람들에 의해 문종의 가봉태실비와 함께 명봉사 경내로 옮겨졌다. 그러나 명봉사 측에서는 장조대왕 태실비의 비면을 깎아 버리고 「명봉사사적비(鳴鳳寺事蹟碑)」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註44)
그리고 『풍기읍지』에는 “문종대왕 태실비 바로 옆에는 명봉사 사적비가 있는데 이것은 사도세자의 태실비를 깎고 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註45)
2012년 6~8월 훼손된 장조태봉을 발굴한 결과 태실은 가봉 당시 사용한 개첨석, 횡죽석, 태함, 사방석 및 아기비(阿只碑)의 비좌대(碑座臺) 등이 수습되었고, 인골 2기가 매장되어 있었다.(註46)
하지만 1785년 가봉태실비 설치 때 묻어놓은 아기태실비는 찾지 못했다. 한편, 장조와 관련된 태실 유물은 명봉사사적비로 사용되고 있는 장조대왕가봉태실비와 서삼릉에서 출토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중인 백자 외항아리, 백자 내항아리, 은편(銀片), 동전(開元通寶), 지석이 있다.(註47)
그리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장조태봉도, 1940년 이전의 태실탁본, 일주문 인근에 위치한 경모궁 태실 감역 각석문(景慕宮 胎室 監役 刻石文)의 유물이 남아 있다.(註48)
문종대왕가봉태실비 바로 옆에 위치한 명봉사사적비(장조대왕 태실비)는 귀부와 이수가 있으며, 장조대왕 태실 주위에 있던 석물들이 명봉사 마당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註49)
태실비의 이수는 폭 72cm, 높이 63cm, 두께 44cm이고, 비신은 폭 59cm, 높이 141cm, 두께 31cm, 귀부는 가로 120cm, 세로 215cm, 높이 50cm이다.
註33 김문식,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사도세자 서거 250주기 추모 특별기획전 사도세자』 (수원화성박물관, 2012 ), p.283.
註34 『英祖實錄』 卷69, 英祖 25年 1月 27日.
註35 『英祖實錄』 卷99, 英祖 38年 閏5月 21日.
註36 『正祖實錄』 卷1, 正祖 1年 3月 20日.
註37 『高宗實錄』 卷39, 光武 3年 9月 1日.
註38 『高宗實錄』 卷39, 光武 3年 12月 7日.
註39 국립문화재연구소, 앞의 책(2006), p.277.
註40 『英祖實錄』 卷40, 英祖 11年 4月 28日.
註41 『正祖實錄』 卷19, 正祖 9年 3月 18日.
註42 『사도세자 서거 250주기 추모 특별기획전 사도세자』 (수원화성박물관, 2012), p.22.
註43 『純祖實錄』 卷3, 純祖 1年 11月 11日.
註44 명봉사사적비는 “비신 전면에는 ‘소백산명봉사사적비명(小白山鳴鳳寺事蹟碑銘)’이 새겨져 있고 배면에는 ‘소화십오년경진오월일…불기이천구백육십칠년창사후일천영육십육년야(昭和十五年庚辰五月日…佛紀二千九百六十七年創寺後一千零六十六年也)’라 새겨져 있다.”
註45 풍기읍지편집위원회,『풍기읍지』 (풍기읍, 1997), p.235.
註46 성림문화재연구원, 앞의 책(2012), p.17.
註47 국립문화재연구소, 앞의 책(1999), pp.32.33.70.71.197.268.269.
註48 이 각석문은 세로로 각석되어 있으며, 오른쪽부터 각자를 살펴보면, 雲“觀提擧 洪良浩, 都巡察使 鄭昌順, 豊基郡守 李大永, 榮川郡守 鄭來鼎, 監役官 安思彦”으로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승정원일기』 정조 9년(1785) 3월 18일조에는備 “忘記, 景慕宮胎室加封工役順成, 以予小子追慕之誠, 凡係賞典, 豈循前例? 觀象監提調洪良浩, 今番則旣兼書標官及繕工提調之任, 效勞甚多. 監役官兼都差使員.基郡守李大永, 以地方官, 兼管兩役, 卽初有之擧, 參下監役, 例皆陞品, 況四品職乎? 倂加資. 監役官·傳香官·奏時官副司果安思彦, 各役兼管, 係是無例, 且考前例, 皆有相當職除授之命, 今番豈可承傳而已? 善地察訪·監牧官中, 今日政擬入. 浮石都差使員榮川郡守鄭來鼎陞敍, 員役工匠等, 比常例倍數施賞事, 分付戶曹。鄕看役將校, 令道伯拔例陞 差後狀聞. 吏隷工匠等, 亦令比常例倍數施賞事, 下諭.”으로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감역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註49 예천군, 『예천군지』 중권, 2005, pp.655~656.
(4) 문효세자(文孝世子) 태실(胎室) : 문효세자태실은 경북 예천군 용문사길 285-30 용문사 대장전 바로 뒷 봉우리(용문면 내지리 산 81)에 위치하고 있다. 문효세자는 정조 6년(1782) 태어나 정조 10년(1786) 몰한 원자로, 정조의 맏아들이다.(註50)
그는 의빈성씨宜嬪成氏의 소생으로 정조 8년(178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정조 10년(1786) 홍역에 결려 몰한 인물이다.(註51)
『정조실록』에는 원자의 태를 대궐 안의 2등 태봉이 아닌 궐 밖의 1등 태실로 정하고자 하였고,(註52) 정조 7년(1783) 8월 5일 원자의 태봉을 예천으로 정하게 된다.(註53) 한편, 장례원에서 발급한 용문사 『완문(完文 : 1900)』에는 “昭憲王后 文孝世子兩宮胎室奉安之地라… 賜牌禁養 야 守護由來가 已爲久遠矣러니”라고 기록된 점으로 보아, 용문사가 소헌왕후(폐비윤씨의 誤記)와 문효세자의 태실 수호사찰로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완문에는 금양하는 곳의 산지기는 금양 구역 안에 소재하는 감나무골(柴木谷)과 둔지방(屯地坊) 두 마을에서 1명씩 차출한 뒤 엄중하게 수호하고, 두 마을의 관역과 면역은 영구히 침범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註54) 그러나 폐비윤씨의 태실이 소헌왕후의 태실로 바뀌어 기록된 것은 용문사가 폐사된 적이 없고 세조 때부터 감역사찰이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오기(誤記)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이왕직 예식과에 의해 문효세자의 태실이 조사되었고, 태항아리는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용문사에는 문효세자의 아기태실비가 있으며, 서삼릉에서 출토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중인 백자 내외 항아리와 동전, 지석이 남아있다.(註55) 현재 용문사에 위치한 문효세자의 태실비는 아기태실비로, 비신 앞면에는 “건릉사십칠년구월초칠일인시생원자아기씨태실乾陵四十七年九月初七日寅時生元子阿只氏胎室”, 뒷면에는 “건릉사십팔년구월초육일잎乾陵四十八年九月初六日立”으로 음각되어 있다. 비좌는 폭 94cm, 너비 65cm 높이 34cm이며, 비신 높이 100cm, 너비 52cm, 두께 21cm, 이수높이 45cm, 너비 63cm, 두께 27cm이다.
註50 『正祖實錄』 卷14, 正祖 6年 9月 7日; 『正祖實錄』, 卷21, 正祖 10年 5月 11日.
註51 『正祖實錄』 卷18, 正祖 8年 8月 2日.
註52 『正祖實錄』 卷15, 正祖 7年 4月 27日, “臣等以元子宮胎封事, 竊有愚見. 臣等謹稽先朝受敎, 則此後藏胎之以御苑爲定, 亶由伊時, 適得舊闕內石.書刻, 然胎封之法, 元有一等、二等、三等之分, 而臣曹謄錄中, 國朝以來, 十八朝胎峰, 歷歷見載, 則一等胎峰之不在舊闕, 石.之爲二等以下明矣. 受敎中, 雖無一二等分別之敎, 而舊闕石函, 旣爲二等以下, 則一等儀節之不可援此爲例, 斷然無疑. 事係典禮, 不敢泯默. 乞賜財擇, 以重國體焉. 命就議大臣稟處.”
註53 『正祖實錄』 卷16, 正祖 7年 8月 5日.
註54 「完文」, “禁養山直役 局內所在.木谷屯地坊兩洞中 一名式差出後 嚴切守護事, .木屯地兩洞官役與免役 永爲勿侵事.”
註55 국립문화재연구소, 앞의 책(1999), pp.48.49.110.111.227.328.329.
(5)오미봉(五味峯) 태실(胎室) : 오미봉 태실은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산32-1번지 오미봉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다. 1980년경 경북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 마을 뒤 오미봉 정상부에서 태실이 발견되었다. 남대호(註56) 씨에 의하면, 당시 태함은 예비군훈련을 위해 진지를 구축하던 중 발견되어 개장되었으며, 태함 안에 보관되었던 유물은 유실되었다고 한다. 이후 2007년 3월경 동신제 제단 정비작업으로 석함은 돌출되어 방치되던 것을 그가 농산물 간이집하장으로 이동하였다. 2010년 4월경 태함과 태함 뚜껑은 남대호 씨가 매장문화재 발견신고를 함으로써 국립대구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당시 매장문화재에 대한 의견서를 작성했던 김세기 교수에 따르면 “석함은 원형의 화강암으로 직경(외경) 92cm 높이 70cm의 석재에 내경 52cm 깊이 50cm로 석공이 파여져 있고 석공내부 중앙바닥에 직경 18cm의 구멍이 뚫어져 있으며, 석함 뚜껑은 합개형으로 외경은 92cm, 높이 50cm 규모이며 내경 58cm으로 안쪽에 깊이 16cm로 속을 파낸 형태로 태함의 뚜껑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마을 북편의 산줄기가 내려오다 중앙에 볼록 솟은 단독의 봉우리가 있는데,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이 봉우리에서 30여년 전 예비군 진지 구축시 출토되었고, 이 봉우리의 위치로 보아 태봉이다”라고 판단하였다. 한편 주승택은 “상금당실의 마을 뒷산인 오미봉이 명당혈明堂穴로 입수(入首:용이 머리를 들이민다는 뜻)하는 현무정(玄武頂)의 지형으로, 오미봉이 위치한 금당실마을은 주산, 청룡과 백호, 외청룡, 외백호, 안산과 조산의 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註57) 더구나『胎封謄錄(奎12893)』에 기록에는 “태봉은 산의 정상을 쓰는 것이 전례이며, 내맥(來脈:종산宗山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이나 좌청룡 우백호나 안산은 보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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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 18일 경북도청 동락관 세미나실에서 2018년도 지역경제 활성화 평가 최우수상을 수상함...축하합니다.
예천군 수상(예천군, 지역경제 활성화 평가 “최우수상” 수상 : 경북 지역경제 활성화평가에서 최고의 상 수상) [기사] : 예천군은 2018년 12월 18일 오후 2시 경북도청 동락관 세미나실에서 열린 ‘2018년도 지역경제 활성화 평가’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번 평가’는 경북 지역 23개 시ㆍ군을 대상으로 소상공인 및 전통시장 지원 추진실적, 일자리 및 투자분야 추진실적, 물가안정관리실적 등 지역경제 활성화 전반에 대해 2018년 한 해 동안 추진한 성과를 바탕으로 평가했다. 예천군은 침체된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도내 최초로 지역의 영세 소상공인에게 사업장 시설개선과 경영지원 사업을 지원하여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제2농공단지 입주기업의 애로사항을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여 추가 투자유치를 이끌어내 지역의 일자리를 늘리는데 힘썼다. 또한, 번거로운 신청절차로 활용하지 않고 있던 한국전력공사의 전통시장 전기요금 할인 특례제도를 군에서 일괄 신청하였으며, 공공요금을 동결하고, 착한가격업소에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등의 다양한 시책으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노력한 기여를 인정받아 도내 23개 시·군 중 최고상인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김학동 예천군수는 “이번 결과에 만족하지 않고 침체되는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내년에도 예천사랑상품권 발행, 소상공인 특례보증지원 등의 신규 사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예천뉴스 2018.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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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