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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310:경상도방언...경상도예천군경자...
작성자장병창 @ 2019.01.02 06:31:51

  도청신도시 예천 310 : 경상도방언...경상도예천군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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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천󰡑은 오늘날의 󰡐예천󰡑이므로 이 문헌은 경상도 방언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간행자, 언해자, 필자 등이 경상도 사람인지 확인하였다.- 이들이 경상도 사람이면 경상도 방언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풍 곽씨 언간>을 예로 들어 보자. 편지 중에 아래의 글귀로 끝난 것이 있다...”, 34쪽에 “ ..관련 문헌ᄀ) 미타참략초(1704, 예천 용문사) ) 염불보권문(1764, 대구 동화사) ) 왕랑반혼전(1753, 대구 동화사) ) 염불보권문(1776, 합천 해인사) ) 왕낭젼,공각젼,.(18세기 말, 대구 동화사) ) 임종정념결.부모효양문(1741, 신령 수도사) 관련 문헌의 구성ᄀ) 미타참절요..”, 169쪽에 “ ..간행된 <염불보권문>1704년 예천 용문사에서 간행된 <미타참략초>를 저본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1741년에 대구 수도사에서 간행된 <임종정념결>, <부모효양문><미타참략초>(1704, 용문사본)의 것과 동일하다. <왕랑반혼전>(17..”이 수록되어 있다.(daum 2008)

 

  경상도 속찬 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 : 1469(예종 1)에 경상도 관찰사 김겸광(金謙光, 1419-1490) 등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한 예천군, 용궁현 등의 경상도지리지((1)10008, (2)4790-39), (1)1(54), 목활자본, 30.6x20.2cm이고, (2)1(194), 필사본, 30.6x20.2cm이다. <세종실록지리지> 이후의 변화된 사항만을 보충 정리하였기 때문에 정월에 편찬을 지시하여 비교적 단기간인 3월에 편찬이 완료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속편의 성격을 띠고 있다. , 이 책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동국여지승람>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조선 초기 지리지의 발달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2)<4990-39>본은 (1)<10008>본을 그대로 필사한 것이다. 1981년 아세아문화사에서 간행한 <전국지리지총서> 1권에 영인본이 수록되어 있다.(申炳周, 인터넷 야후 2001)

 

  경상도 알방구[바위] : 예천읍 지내리(池內里) 못안동네 앞에 우뚝 솟은 연화봉(蓮花峯) 옆구리에 있는 바위로, 그 형상(形狀)이 마치 새가 알을 품은 것 같다(飛鳥抱卵). 높이는 약 5m 정도이고, 연화봉(蓮花峯) 양옆에 집채만한 바위 두 개가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그 위에 거의 크기가 같은 동그란 바위를 얹어 놓았고, 바로 뒤에는 마치 나무가 자란 것처럼 바위가 세워져 있다. 그 꼭대기에 올라가서 양팔을 벌리고 기도를 하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한다.

 

  경상도 예천 경자개량전안(慶尙道醴泉庚子改量田案) [] : 1722(경종 2)에 작성된 예천군 관하 23개 면 가운데 17개 면에 대한 양안(量案 : 14956)으로, 8, 필사본, 65.4x70cm이다. 숙종 말년의 삼남 양전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전체적으로 파손된 부분이 많아서 표지가 남아 있는 책은 제3책과 제4책뿐이다. 이에 의하면 표제(表題)'경상도 예천군 경자전안(慶尙道醴泉郡庚子田案)''경상도 예천군 경자개량전안(庚子改量田案)'이며, 내제(內題)'강희 61년 정월 일 예천군 양전 성책(康熙六十一年正月日醴泉郡量田成冊)''강희 61년 임인 정월 일 경상도 예천군 경자개량전안(康熙陸拾壹年壬寅正月日慶尙道醴泉郡庚子改量田案)'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강희 61년은 1722(경종 2)으로 경자년(숙종 46, 1720)이 아니다. 그런데 모두 경자 양안으로 제목이 붙은 것은 1717년에 양전사목(量田事目)이 결정되고, 1719-1720년에 걸쳐 삼남 지방에 양전이 대대적으로 실시된 후 그 결과에 의해서 작성된 양안으로 '경자 양안'이라 통칭한 때문인 듯하다.

 

  즉 예천군의 경우는 경자년(1720)에 양전이 실시되어 시량(始量), 필량(畢量)을 거쳐 임인년(1722) 1월에 양안이 정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 책에 2-3개의 면이 수록되어 있고, 면이 시작되는 곳에는 면 이름에 이어서 면의 방리(坊里), 관문(官門)으로부터의 거리, 사표(四標) 및 천()의 소재가 실려 있다. 양안의 전답 각 필지에는 지번(地番), 양전 방향, 토지 등급, 전답형(田畓形), 지목(地目), 장광척(長廣尺), 결부수(結負數), 사표, 기주(起主), 진주(陳主)가 기재되었다. 기주, 진주를 막론하고 각각 금(: ()로 나누어 ''에는 성명이나 명()만을, ''에는 성명과 신분을 표시하고 있다. 양반에게는 관직과 품계를, 상민은 초인(草人)이라 하고 성명을 혹은 명만을, 노비는 주인의 신분과 성명 다음에 노명(奴名)을 적거나 사노(私奴사노(寺奴), 관노(官奴)는 소속 관명(官名)과 노명(奴名) 또는 노성명(奴姓名)을 적고 있다. 난외 상단(欄外上段)에 신기경전(新起耕田)'()' 자를 따로 표시하고, 속전(續田)의 경우에는 '()' 자를 삽입하기도 하였다. 이 경우는 구주(舊主)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금주(今主)만 기재하고 있다. 가경전(加耕田)이 새로 증가되어 자호(字號)가 이전과 바뀌어 지므로 난외 상단에 구자호(舊字號)를 표시하여 이전 양안과 연결시켜 주고 있다. 지역 명칭도 난외 상단에 적혀있는데, 'ᄋᄋ'으로 되어있다. 각 자호(字號)는 일자오결(一字五結)의 원칙에 따라 5결이 넘는 경우는 다음 자호로 넘기고 있다. ()마다 마지막에 면의 양전 내용이 집계되어 있다. 여기에 총전답 결수(總田畓結數) 및 전결(田結), 답결(畓結), 1등부터 6등까지의 등급별 결부수, 면부세질(免賦稅秩 : 官基, 鄕校, 書院基, 官屯, 祭壇基 等), 면세출부질(免稅出賦秩 : 官公須位, 衙祿位 等), 출부세 결수(出賦稅結數), 실전(實田), 실답결(實畓結) 및 제언(堤堰)이 밝혀져 있다. 양안에 남아있는 면명(面名)으로 <예천군읍지> 등과 대조한 결과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지도(慶尙道地圖)>(10512) 등에 의하면, 당시 예천군은 총 23개 면으로 밝혀지나 양안은 17개 면의 것만 남아있고, 이 중에서도 제1,6,7책은 앞부분이 파손되어 면명이 확실치 않다. 그러나 양전 순서인 천자문(千字文)의 자호 순서에 의한 면의 순서가 상기 양 도서에 기재된 면 순차와 거의 일치되고 있어서 파손된 부분의 면명을 대략 추정할 수 있다. 천자문 순서에 의하면 예천군의 양전 순서는 제35761248책이 되고, 3책 앞에 4개 면, 5책과 제7책 사이에 2개 면의 양안이 빠져있는 것이 된다. 추정에 의하면, 1책의 전반부는 당동면(堂洞面), 6책의 전반부는 유등천면(柳等川面), 7책의 전반부는 서읍내면(西邑內面)이 되고, 빠져있는 면 이름은 제3책 앞의 동읍내면(東邑內面)승도지면(繩刀只面)보문면(普門面)음산면(陰山面), 5책과 제7책 사이의 현남면(縣南面)현동면(縣東面)인 것으로 보인다. 각 책에 수록된 면과 천자문 자호는 다음과 같다. 1책 당동면(추정에 의함. -), 화장면(花庄面 : -), (앞부분 파손). 2: 북읍내면(北邑內面 : -)제곡면(渚谷面 : -)제고곡면(渚古谷面 : -), (앞부분 파손). 3: 남읍내면(南邑內面 : -)신당동면(神堂洞面 : -), 4: 유리동면(流里洞面 : -)동로소면(冬老所面 : -), 5: 호명리면(虎鳴里面 : -)위라곡면(位羅谷面 : -), 6: 유등천면(柳等川面 : 추정에 의함. -)지서아면(只西牙面 : -)(앞부분 파손). 7: 서읍내면(西邑內面 : 추정에 의함. -)개포리면(開浦里面 : -) (앞부문 파손), 8: 현내면(縣內面 : -)현서면(縣西面 : -)(인터넷 empas 2001)

 

  경상도 예천 경자개량전안(慶尙道 醴泉 庚子改量田案) [古文書] : 예천군(조선)에서 편찬한 고문서로, 8(), 필사본(筆寫本), 65.4×70cm, 1722(景宗 2)에 작성된 예천군(醴泉郡) 관하 23개 면() 가운데 17개 면에 대한 양안(量案)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청구기호 14956-v.1-8)되어 있다. 이는 숙종(肅宗) 말년의 3남양전(三南量田)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전체적으로 파손된 부분이 많아서 표지가 남아 있는 책은 제3책과 제4책뿐이다. 이에 의하면 표제(表題)慶尙道醴泉郡庚子田案慶尙道醴泉郡庚子改量田案이며 내제(內題)康熙六十一年正月日醴泉郡量田成冊康熙陸拾壹年壬寅正月日慶尙道醴泉郡庚子改量田案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강희(康熙) 61(壬寅)은 경종(景宗) 2, 1722년으로 경자년(庚子年, 肅宗 46: 1720)이 아니다. 그런데 모두 경자양안(庚子量案)으로 제목이 붙은 것은, 1717년에 양전사목(量田事目)이 결정되고 17191720년에 걸쳐 3남지방(三南地方)에 양전(量田)이 대대적으로 실시된 후 그 결과에 의해서 작성된 양안을 경자양안이라 통칭한 때문인 듯하다. 즉 예천군의 경우는 경자년(1720)에 양전이 실시되어 시량(始量)필량(畢量)을 거쳐 임인년(壬寅年, 1722) 1월에 양안이 정서(正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 책에 23개의 면()이 수록되어 있고, 면이 시작되는 곳에는 면명(面名)에 이어서 면의 방리(坊里), 관문(官門)으로부터의 거리, 사표(四標) 및 천()의 소재(所在)가 실려 있다. 양안의 전답 각 필지(筆地)에는 지번(地番)양전 방향(量田方向)토지 등급(土地等級)전답형(田畓形)지목(地目), 장광척(長廣尺), 결부수(結負數), 사표(四標), 기주(起主), 진주(陳主)가 기재되었다. 기주진주를 막론하고 각각 금(, 흑은 ) ()로 나누어 ''()''에는 성명이나 명()만을, ''()''에는 성명과 신분을 표시하고 있다. 양반에게는 관직과 품계를, 상민(常民)은 초인(草人)이라 하고 성명을 혹은 이름 만을, 노비(奴婢)는 주인의 신분과 성명 다음에 노명(奴名)을 적거나 사노(私奴)사노(寺奴), 관노(官奴)는 소속 관명(官名)과 노명(奴名) 또는 노성명(奴姓名)을 적고 있다. 난 외 상단(欄外上段)에 신기경전(新起耕田)''()''자를 따로 표시하고 속전(續田)의 경우에는 '(')''자를 삽입하기도 하였다. 이 경우는 구주(舊主)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금주(今主)만 기재하고 있다. 가경전(加耕田)이 새로 증가되어 자호(字號)가 이전과 바뀌어 지므로 난 외 상단에 구자호(舊字號)를 표시하여 이전 양안과 연결시켜주고 있다. 지역 명칭도 난 외 상단에 적혀 있는데 <○○()으로 되어 있다. 각 자호(各字號)15(一字五結)의 원칙에 따라 5()이 넘는 경우는 다음 자호로 넘기고 있다. ()마다 마지막에 면의 양전 내용이 집계되어 있다. 여기에 총 전답 결수(總田畓結數) 및 전결(田結)답결(畓結), 1등부터 6등까지의 등급별 결부수(結負數), 면부세질(免賦稅秩 : 官基鄕校書院基官屯祭壇基 等), 면세출부질(免稅出賦秩 : 官公須位衙祿位 等), 출부세결수(出賦稅結數), 실전(實田)실답결(實畓結) 및 제언(堤堰)이 밝혀져 있다. 양안에 남아 있는 면 이름을 <예천군읍지(醴泉郡邑誌)> 등과 대조한 결과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지도(慶尙道地圖)[10512] 등에 의하면 당시 예천군은 총 23개 면으로 밝혀지나 양안은 17개 면의 것만 남아 있고, 이 중에서도 제167책은 앞 부분이 파손되어 면 이름이 확실치 않다. 그러나 양전 순서(量田順序)인 천자문(千字文)의 자호 순서(字號順序)에 의한 면의 순서가 상기 양 도서(上記兩圖書)에 기재된 면 순차(面順次)와 거의 일치되고 있어서 파손된 부분의 면 이름을 대략 추정할 수 있다. 천자문 순서에 의하면 예천군의 양전 순서는 제35761248책이 되고 제3책 앞에 4개 면, 5책과 제7책 사이에 2개 면의 양안이 빠져 있는 것이 된다. 추정에 의하면 제1책의 전반부(前半部)는 당동면(堂洞面), 6책의 전반부는 유등천면(柳等川面), 7책의 전반부는 서읍내면(西邑內面)이 되고, 빠져 있는 면 이름은 제3책 앞의 동읍내면(東邑內面)승도지면(繩刀只面)보문면(普門面)양산면(陽山面), 5책과 제7책 사이의 현남면(縣南面)현동면(縣東面)인 것으로 보인다. 각 책에 수록된 면()과 천자문 자호(千字文 字號)는 다음과 같다. 1: 당동면(堂洞面, 推定, )화장면(花庄面, ), (앞부분 파손). 2: 북읍내면(北邑內面, )제곡면(渚谷面, )제고곡면(渚古谷面, ), (앞부분 파손). 3: 남읍내면(南邑內面, )신당동면(神堂洞面, ), 4: 유리동면(流里洞面, )동로소면(冬老所面, ), 5: 호명리면(虎鳴里面, )위라곡면(位羅谷面, ), 6: 유등천면(柳等川面, 推定, )지서아면(只西牙面, )(앞부분 파손), 7: 서읍내면(西邑內面, 推定)개포리면(開浦里面, )(앞부분 파손), 8: 현내면(縣內面, )현서면(縣西面, ).(韓國歷史情報綜合시스템 奎章閣解題國漢文解題 1)

 

  경상도예천경자개량전안(慶尙道醴泉庚子改量田案) : 저편자: 醴泉(朝鮮) / 발행자: [刊寫者未詳]/ 날짜: 1722/ 분류: 목록·해제 > 목록 > 한국고전적종합목록/ 제공: 한국고전적종합목록/ 표제/책임표시사항 慶尙道醴泉庚子改量田案 / 醴泉(朝鮮) / 판사항 筆寫本/ 발행사항 [刊寫地未詳] : [刊寫者未詳], 景宗 2(1722)/ 형태사항 8; 65.4 ×70.0 cm/ 주기사항 卷頭書名: 康熙六十一年正月日.../ 卷末: 醴泉郡守...[手缺] 慶尙道觀察使...[手缺]/ 번호 지역 도서관명 청구기호 시작권호(권차)/ 1 서울(11)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4956 1-8//

 

  경상도예천경자개량전안(慶尙道醴泉庚子改量田案) : 저편자: 醴泉(朝鮮) / 발행자: [刊者未詳]/ 날짜: 景宗2(1722)/ 분류: 목록·해제 > 목록 > 규장각소장목록/ 제공: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원서명 慶尙道醴泉庚子改量田案/ 청구기호 14956-v.1-8/ 편저자(한자) 醴泉(朝鮮) 판본사항 筆寫本 간행지 [刊地未詳] 책권수 8/ 편저자(한글) 예천(조선) 편 간행연도 景宗2(1722) 간행자 [刊者未詳] 책크기 65.4×70cm/ 表紙書名:慶尙道醴泉郡庚子田案, 慶尙道醴泉郡庚子改量田案/ ,,卷首,卷末 卷首:康熙六十一年(1622)正月日, 卷末:醴泉郡守[手缺], 慶尙道觀察使[手缺]/ 表題紙,內題紙 內題紙:康熙六十一年正月日醴泉郡量田成冊, 康熙陸拾壹年壬寅正月日慶尙道醴泉郡庚子改量田案 附/ 자료소개 肅宗 말년의 三南量田의 결과로 1722(景宗 2)에 작성된 醴泉관하 23가운데 17에 대한 量案/ 印記 醴泉郡印/ 四部분류 史部 政法類 度支 田制 量案 一般量案(慶尙道) 기타/ M/F번호 M/F81-103-470-1(v.2), M/F81-103-470-2(v.6), M/F80-103-344-1(v.3), M/F80-103-344-2(v.5), M/F80-103-344-3(v.7), M/F81-103-470-3-1(v.8), M/F81-103-470-3-2(v.8), M/F98-35-85-1(v.1), M/F98-35-85-2(v.2), M/F98-35-85-3(v.3), M/F98-35-85-4(v.4), M/F98-35-85-5(v.5), M/F98-35-85-6(v.6), M/F98-35-85-7(v.7), M/F98-35-85-8(v.8)//

 

  경상도예천경자개량전안(慶尙道醴泉庚子改量田案) : 저편자: 醴泉(朝鮮) / 분류: 목록·해제 > 해제 > 규장각소장자료해제/ 제공: 규장각한국학연구원/ 慶尙道醴泉庚子改量田案 저자 醴泉(朝鮮) / 간행년대 景宗2(1722)/ 청구기호 14956-v.1-8/ 책수 8판본 筆寫本 사이즈 65.4×70cm/ 1722(景宗2)에 작성된 醴泉관하 23가운데 17에 대한 量案으로 肅宗말년의 三南量田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전체적으로 파손된 부분이 많아서 표지가 남아 있는 책은 제3책과 제4책뿐이다.

 

  이에 의하면 表題慶尙道醴泉郡庚子田案慶尙道醴泉郡庚子改量田案이며 內題康熙六十一年正月日醴泉郡量田成冊康熙陸拾壹年壬寅正月日慶尙道醴泉郡庚子改量田案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康熙61(壬寅)景宗 2, 1722년으로 庚子年(肅宗 46:1720)이 아니다. 그런데 모두 庚子量案으로 제목이 붙은 것은, 1717년에 量田事目이 결정되고 1719·1720년에 걸쳐 三南地方量田이 대대적으로 실시된 후 그 결과에 의해서 작성된 量案庚子量案이라 통칭한 때문인 듯하다. 醴泉의 경우는 庚子年(1720)量田이 실시되어 始量·畢量을 거쳐 壬寅年(1722) 1월에 量案正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 책에 2·3개의 이 수록되어 있고, 이 시작되는 곳에는 面名에 이어서 坊里, 官門으로부터의 거리, 四標 所在가 실려 있다. 양안의 전답 각 筆地에는 地番·量田方向·土地等級·田畓形·地目, 長廣尺, 結負數, 四標, 起主, 陳主가 기재되었다.起主·陳主를 막론하고 각각 (흑은 )로 나누어 ''''에는 姓名이나 만을, ''''에는 姓名身分을 표시하고 있다. 兩班에게는 관직과 품계를, 常民草人이라 하고姓名을 혹은 만을, 奴婢는 주인의 신분과 姓名 다음에 奴名을 적거나 私奴·寺奴,官奴는 소속 官名奴名 또는 奴姓名을 적고 있다. 欄外上段新起耕田''''자를 따로 표시하고 續田의 경우에는 ''''자를 삽입하기도 하였다. 이 경우는 舊主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今主만 기재하고 있다. 加耕田이 새로 증가되어 字號가 이전과 바뀌어지므로 난외상단에 舊字號를 표시하여 이전 量案과 연결시켜주고 있다. 地域名稱도 난외상단에 적혀 있는데 <○○으로 되어 있다. 各字號一字五結의 원칙에 따라 5이 넘는 경우는 다음 字號로 넘기고 있다. 마다 마지막에 量田 내용이 집계되어 있다. 여기에 總田畓結數 田結·畓結, 1부터 6까지의 등급별 結負數, 免賦稅秩(官基·鄕校·書院基·官屯·祭壇基 ), 免稅出賦秩(官公須位·衙祿位 ), 出賦稅結數, 實田·實畓結 堤堰이 밝혀져 있다. 量案에 남아 있는 面名 醴泉郡邑誌 등과 대조한 결과輿地圖書, 慶尙道地圖[10512] 등에 의하면 당시 醴泉은총 23으로 밝혀지나 量案17의 것만 남아 있고, 이 중에서도 제1·6·7책은 앞부분이 파손되어 面名이 확실치 않다. 그러나 量田順序千字文字號順序에 의한의 순서가 上記 兩圖書에 기재된 面順次와 거의 일치되고 있어서 파손된 부분의 面名을 대략 추정할 수 있다. 千字文 순서에 의하면 醴泉量田順序는 제35761248책이 되고 제3책 앞에 4개면, 5책과 제7책 사이에 2개 면의 量案이 빠져 있는 것이 된다. 推定에 의하면 제1책의 前半部堂洞面, 6책의 전반부는 柳等川面, 7책의 전반부는 西邑內面이 되고, 빠져 있는 面名은 제3책 앞의 東邑內面·繩刀只面·普門面·陰山面, 5책과 제7책 사이의 縣南面·縣東面인 것으로 보인다. 각 책에 수록된 千字文字號는 다음과 같다. 1:堂洞面(추정에 의함, ·花庄面(·), (앞부분 파손). 2:北邑內面(·渚谷面(·渚古谷面(·), (앞부분 파손). 3:南邑內面(·神堂洞面(·), 4:流里洞面(·冬老所面(·), 5:虎鳴里面(·位羅谷面(·), 6:柳等川面(추정에 의함, ·只西牙面(·)(앞부분파손), 7:西邑內面(추정에 의함 ·開浦里面(·)(앞부분 파손), 8:縣內面(·縣西面(·).//

 

  경상도예천경자개량전안(慶尙道醴泉庚子改量田案) : 저편자 醴泉郡(朝鮮) / 발행자 [刊寫者未詳]/ 날짜 1722-99-99/ 분류 목록·해제 > 목록 > 한국고전적종합목록/ 제공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http://www.history.go.kr/2014)

 

  경상도예천경자개량전안(慶尙道醴泉庚子改量田案) / 14956-v.1-8/ 저편자 醴泉郡(朝鮮) / 발행자 [刊者未詳]/ 날짜 景宗2(1722)/ 분류 목록·해제 > 목록 > 규장각소장목록/ 초록 肅宗 말년의 三南量田의 결과로 1722(景宗 2)에 작성된 醴泉郡 관하 23개 面 가운데 17개 面에 대한 量案/ 자료제공 규장각한국학연구원(http://www.history.go.kr/2014)

 

  경상도예천경자개량전안(慶尙道醴泉庚子改量田案) : 분류 목록·해제 > 해제 > 규장각소장자료해제/ 저자 醴泉郡(朝鮮) / 생성일 景宗2(1722)/ 자료제공 규장각한국학연구원(http://www.history.go.kr/2014)

 

  경상도 예천군 경자개량전안(奎章閣解題經濟關係文獻 : 慶尙道 醴泉郡 庚子改量田案) [] : 예천군의 토지대장으로, 볼륨 8(1700), 1722(경종 2)에 작성되었다. 기주(起主)와 진주(陳主)가 밝혀져 있다. 전반(前半) 일부가 탈락되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14956)되어 있다.(韓國歷史情報綜合시스템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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