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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360: 고려장...고려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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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장(高麗葬), 고래장(古來葬) [古墳] : 원래 고려장(古麗葬)은 고구려의 장사(葬事)지내는 법을 말했다(韓國史 古代篇 參照). 늙은 사람을 묘실(墓室)에 옮겨 두었다가 죽으면 거기 안치하고, 금은 보화(金銀寶貨)를 넣은 다음 돌로 쌓아 봉토(封土)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떤 이는 고래장(古來葬)이라고도 하여 고구려의 영향을 중시하기도 한다. 일반적인 명칭에는 고려장(高麗葬)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지방에서는 이 고분군(古墳群)을 고래장(古來葬)이라고 말하고, 또 고분(古墳)이 한 개씩 흩어져 있는 것을 독뫼라고 부른다. 하여튼 예천군과 상주군 일대에는 고분들이 많이 산재하여 있다. 전국에 흔한 듯도 하고, 귀한 듯도 하다. 그러나 그 고분들은 옛날 가야, 신라, 고려시대의 지방 특권층 및 일반민들의 고분들이다. 그 고분들의 장소를 보면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것은 지대가 낮고 습한 평지에 있고, 중기이후의 것은 당(唐) 나라에서부터 전래되어 온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민가에서 멀리 떨어지고 높고 건조한 곳을 택하여 지정되었던 것이다. 후기에는 당(唐) 나라의 능묘제도(陵墓制度)를 모방하여 분묘 주위에 상석(床石)들로 장식되고 정남향을 하는 형식이 유행되어 이것이 전형적으로 유행이 되었다. 예천읍 대심리 북쪽 서악사(西岳寺) 근처 구릉 절정(絶頂)에 산재하고 있는 수는 대소 합하여 현재 남아있는 고분이 30여 기(基)가 있으나, 바람에 깎이고 비에 씻기고, 무너지고 밭으로 변해 버려 그 원형은 상상할 수 없고, 대부분 도굴되어 완전한 것은 몇 기에 불과하다. 옛날에는 고래장(古來葬) 근처에서 기와 파편을 주워다 놋그릇 닦는 가루로 만들어 쓰는 지애깨미(기와깸이인 듯)로 삼았고, 지금도 더러는 부장품(副葬品)인 토기들을 숫돌 물그릇으로 쓰고 있다. 일제 초기부터 왜놈들이 도굴을 하고 그 뒤에도 자주 낯선 사람(호리군?)들이 백주(白晝)에 파보기도 한다. 그러니 완전한 형태는 한 기도 없는 듯하다. 그런데 우리 고장에서는 특히 촌으로 갈수록 이 고래장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 이유는 일제 때 도굴을 당한 즐겁지 못한 추억과 이 곳에 묻힌 유골(遺骨)이 조상들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傳說] : 이 곳에 묻힌 분들은 늙으면 자기의 죽을 날을 알기에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서면, 자신이 모았던 재산을 탕진하므로 그 자손들이 독뫼를 만들어 업어다 두고, 죽을 때까지의 양식과 필수품을 부장(副葬)했었다고 한다. 한 사람이 늙은 할아버지를 지게로 져다 놓고, 그 지게를 독뫼 옆에 버리고 돌아서려는데 그의 어린 아들이 지게를 지고 오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아버지도 늙으시면 이 지게로 져다가 또 묻어야 될 게 아닙니까?" 라고 대답하더란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버렸던 늙은 할아버지를 다시 집으로 모셔오고 그 뒤부터 고래장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예천군내에 있는 고려장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醴泉邑] : 1) 갈구리 거서리 재궁골(巨西里齋宮谷)에 몇 기가 있다. 2) <교남악부(嶠南樂府, 1818)>에 의하면, 대심리 고분(大心里古墳)에서 '사벌국왕 모후릉(沙伐國王母后陵)'이라는 지석(誌石)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대심리(大心里)의 '하무실'이라는 마을 이름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았나 추측된다. 이 골짜기에서 발견된 모후의 능이 큰 무덤이기 때문에 그 곳을 '대총곡(大塚谷)' 또는 '대모곡(大母谷)'이라 하였고, 이 '대모곡(大母谷)'은 '한무실'로, '한무실'은 와전(訛傳)되어 '하무실'로 불리어지지 않았을까? 또 한 설은 사벌국(沙伐國)의 왕족들이 현 상재봉에 와서 가무(歌舞)를 즐겼다 하여 화무실(化舞室)이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그 후 1930년대에 농촌진흥조합(農村振興組合)이 설치되자, 당시 1동을 '대무동(大毋洞)'이라 부르고, 2동은 '홍심동(紅心洞)'이라 불렀다. 그 후 진흥조합(振興組合)이 합치자 1동의 '대(大)' 자와 2동의 '심(心)' 자를 따서 '대심동(大心洞)'이라고 하게 되었다. 3) 우계리(愚溪里) 매골에 1기가 있는데 도굴되었다. [開浦面] : 가곡리 송담(松潭) 앞산에 15기 가량 있다. [普門面] : 1) 간방리(澗芳里) 골마마을의 동쪽, 즉 간방리삼층석탑(澗芳里三層石塔)에서 서쪽으로 약 800m 되는 마을 뒷산에 고분 2기가 있는데, 모두 도굴 당하고, 복토(覆土)까지 무너졌고, 석재(石材)가 산란하다. 이 고분들은 통일신라 후에 만들어진 석실분(石室墳)으로 규모가 적고 직경이 30m, 높이가 3-4m 정도인데, 가야의 풍속을 본받아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檀國大 鄭永鎬 博士는 新羅時代의 古墳으로 보았다). 주변에 개석(蓋石)과 토기 조각들이 노출되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1970년 대에 도굴된 것이라고 한다. 발굴당시 발견된 부장품(副葬品)을 보면, 도편(陶片), 철검편(鐵劍片), 마구(馬具) 등이니, 고분의 주인은 남자로 판명된다. 연대 관계를 고증할 만한 자료는 없으나 산재되어 있는 토기가 약간 지방 색채를 띄우고 있는데, 이것은 대략 선산(善山), 고령(高靈) 등지의 것과 같은 문화 상태였으리라고 추측된다. 즉 예천에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고려장(高麗葬)이라고 하나, 부장품(副葬品)과 위치 선정을 참고로 하면, 남쪽 가야의 형식으로 보인다(以上은 慶北鄕土史料集 參考). 2) 독양리(篤陽里) 마을의 동쪽 밭 가운데 3기가 있는데, 이것 역시 상부(上部)가 무너져 그 원형을 찾을 수 없다. 3) 승본리(繩本里) 윗노트기에서 예천읍 우계리(愚溪里) 매골쪽에 있는데 도굴되지 않았다. [上里面] : 두성리(斗星里) 사성 뒷산에 한 가운데에 있다. [龍宮面] : 대은리 학당산(大隱里鶴堂山)에 있다.
[知保面] : 1) 도장리(道庄里) 매봉재의 고래장들은 그 봉우리 위에 큼직한 돌들이 덮혀 있고, 잔디들이 없는 것이 특색이며 그 중 한 기가 1972년 겨울에 도굴되었다. 이들 고래장 근처에 잔디가 없는 것은 도굴하느라고 황토를 파헤쳐 잔디를 덮었기 때문인 듯하다. 2) 도화리(道化里) 실근재에 고래장(古墳群)이 있는데, 산의 능선을 따라 듬성듬성 약 20개의 봉우리가 있고, 잔디가 없으며, 큰 돌로 덮혔고, 도굴되었으며, 이 곳에서 200m 가량 떨어진 곳에 독뫼가 있는데, 금베틀이 들어서 여름의 비오는 밤이면 그 속에 베 짜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나, 밭 가운데 있기 때문에 밭 임자가 그 주위를 해마다 파서 객토로 썼기 때문에 지금은 형체만 남아 있다. 3) 마전리 월탄초등학교(月灘初等學校)에서 동으로 100m 가량에 독뫼가 한길 밑으로 1기가 있고, 봉분(封墳)은 커졌으나 잔디가 덮히고 높이가 지상에서 5m는 됨직하다. 4) 역시 월탄초등학교에서 동으로 100여 m 지점에 한길 북쪽으로 2기가 있는데, 높이 3m 가량이고, 잔디가 덮혔고, 특히 이 지역은 월탄동자(月灘童子) 라는 전설의 인물이 태어났다는 지역이기도 하다. 5) 월탄초등학교에서 서쪽으로 15m쯤 떨어진 곳에 옆이 뚫어진 독뫼(古來葬?)가 있다. 6) 지보리(知保里) 바닥재 근처에도 이런 형태의 고래장(古來葬)이 있다. [豊壤面] : 흔효리(欣孝里) 뒷산에 몇 기가 있으나 내부는 일제시대에 한 일본 사방수(砂防手)의 손에 의하여 도굴되고 부서진 토기 조각만이 흩어져 있다. [下里面] : 1) 부초리 부초(芙草) 마을 뒷산에 있는 옛 무덤으로, 그 위에는 수령(樹齡) 100년의 단풍나무가 있다. 2) 우곡리 정자촌(亭子村) 뒷산인 성재 중턱 덕봉사 유지(德奉寺遺址)에도 1기가 있다.
고려장터(高麗葬터) [窟] : 용문면 상금곡리(上金谷里) 등지미 뒷 등성이에 있는 굴로, 삼국시대의 도편(陶片)과 인공석(人工石)이 있다. 입구를 막아 놓았다.
고려 중기 문인들의 자아 인식의 양상(高麗 中期 文人들의 自我 認識의 樣相 : 林椿과 李奎報의 境遇) [論文] : 예천 출신인 이동철(李東喆, 1941- , 關東大 敎授)의 논문으로, 한국어문학회에서 1998년에 발행한 <어문학(語文學)> 62권 173-198쪽(26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는, 1) 서론, 2) 시대적 배경, 3) 시에 나타난 자아 인식의 양상, 4) 자칭어의 경우, 5) 시작품의 경우, 6) 결론, 참고문헌이다.(keris 2003)
고려 초기의 첩문과 그 이두에 대하여(高麗初期의 帖文과 그 吏讀에 대하여 : 醴泉 鳴鳳寺慈寂禪師碑의 陰記의 解讀) [論文} 남풍현(南豊鉉)의 논문으로, 1994년 5월 성남 한국고문서학회에서 출판한 <고문서연구(古文書硏究)> 5집 1-19쪽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는, 1) 서언, 3) 판독, 3) 이두문의 해독, 4) 결어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고,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고려대이다.
고려 초기의 첩문과 그 이두에 대하여(高麗 初期의 帖文과 그 吏讀에 대하여 ; 醴泉 鳴鳳寺 慈寂禪師碑의 陰記의 解讀 : 古文書硏究 5) : 저자: 南豊鉉/ 날짜: 1994/ 발행자: 한국고문서학회/ 분류: 연구자료 > 한국사연구휘보/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연구휘보/ 한국사연구휘보 제86호/ 제목 高麗 初期의 帖文과 그 吏讀에 대하여; 醴泉鳴鳳寺 慈寂禪師碑의 陰記의 解讀/ 저자/편자 南豊鉉/ 게재지 古文書硏究 5/ 페이지 1-19/ 구분 논문/ 발행처 한국고문서학회/ 발행지역 성남/ 발행일 1994/ 목차/ Ⅰ. 序言/ Ⅱ. 判讀/ Ⅲ. 吏讀文의 解讀/ Ⅳ. 結語//
고려 초 예천 지역 세력과 개심사 석탑 건립(高麗 初 醴泉 地域 勢力과 改心寺 石塔 建立) [論文] : 서성희의 부산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의 2002년 석사학위 논문으로, 59장, 부산 부산대학교에서 2002년에 발행하였다. 또한 2002년 6월 부산대학교 사학회에서 출판한 <부산사학(釜山史學)> 25ㆍ26권 1-22쪽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는, 1) 머리말, 2) 고려 초 예천 지역 세력의 동향과 불교 사원, 3) 고려 초 예천 지역과 개심사 석탑 건립, 4) 맺음말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고,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부산대, 동국대(중앙)이다.(keris 2003, home.pusan.ac.kr 2002)
고려 초 예천 지역세력과 개심사 석탑 건립(高麗 初 醴泉 地域勢力과 開心寺 石塔 建立 =The Local Classes at Yeonchon County during the Beginning of Goryeo and Building a Stone Pagoda at Gaesim Temple) [學術저널] : 서성희의 논문으로, 부산대학교 사학과에서 2002년에 발행하였다. [목차] : I. 머리말/ II. 고려 초 예천 지역세력의 동향과 불교사원/ III. 고려 초 예천 지역세력과 개심사 석탑 건립/ IV. 맺음말(daum 2008)
고려 태조 왕건과 우리 고장 예천(高麗 太祖 王建과 우리 故庄 醴泉) [記事] : 예천읍 서본리 출신인 김효정(金孝貞, 慶熙大 韓醫科 卒業, 韓醫師)의 기사로, 예천문화원에서 2000년에 발행한 <예천문화(醴泉文化)> 13권 46-63쪽(18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는, 1) 궁예(弓裔)의 몰락과 왕건의 등장, 2) 왕건의 남진과 견훤의 조물성(曹物城) 침공, 3) 조물성과 상을곡성(上乙谷城), 4) 용주(龍州) 출병과 두운 선사(杜雲禪師) 예방, 5) 견훤의 근품성(近品城) 침공과 왕건의 오어곡성 패전, 6) 왕건과 경청선원 자적선사(境淸禪院慈寂禪師) 및 용문사, 시완사(示完寺) 중창, 7) 글 마무리, 도표(태조 왕건과 우리 고장 예천 관련 중요 사항), 참고문헌이다.
고려후기 문학((韓國漢文學史)高麗後期 文學-假傳의 世界 鑑賞:麴醇傳, 孔方傳, 麴先生傳) [大學報告書] : 해피캠퍼스에서 2006년 6월 16일(02:32:42)에 발행하였다. 2쪽 분량, 고려후기 가전작품에 대한 설명이다. [목차] : 1. 고려시대의 산문문학/ 2. 가전(假傳)의 발생/ 3.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 4. 국선생전(麴先生傳)/ [본문 요약] : 3.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 / 작가소개 / 임춘(林椿, 1147~1197) : 고려 중기의 문인. 호는 서하(西河). 과거에 수차 낙방하였으며, 1170년(의종 24) 정중부의 난(무신난) 때에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인로(李仁老), 오세자(吳世才) 등과 함께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문과 당시(唐詩)에 능하였으며, 이인로가 그 유고(遺稿)를 모아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6권을 엮었다. 삼한시귀감(三韓時龜鑑)에 시문(詩文)이 기록되어 있고, 두 편의 가전체 소설이 전한다. 예천 옥천정사(玉川精舍)에 제향되었고, 저서로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 등이 있다. 국순전(麴醇傳)의 줄거리 : 가전체 문학의 효시가 되는 작품으로, 술의 내력과 그것의 흥망성쇠를 통해 향락에 빠진 임금과 이를 따르는 간신배들을 풍자하고 있다. 후직(중국 주왕조의 전설적 시조. 농사일을 잘 다스려 순임금이 후직이라는 이름을 좀.)을 도와 백성을 먹여 살린 공을 세운 모(牟)를 조상으로 모시는 국순의 집안은 아버지 대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국순은 성품이 맑고 사람의 기운을 더해주어 뭇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정계에 진출한 국순은 군신의 회의나 국사 중대사에 참여하여 전횡을 일삼고 부정 축재를 하지만 임금의 비호를 받는다. 또한 향락에 빠진 임금에 간언하지 않고 아첨하여 세인의 악평을 닫게 된다. 순은 입에서 냄새가 난다고 하여 은퇴하고 돌아와 병사한다. [공방전(孔方傳)의 줄거리] : 돈(엽전)을 의인화한 가전체 작품으로, 돈의 내력을 밝히고 역사 속에서 돈의 쓰임과 폐단을 보여줌으로써 재물을 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공방의 집안은 수양산 속에 숨어 지내다 황제(중국 전설상의 제왕인 헌원씨) 때 공방이 채용되어 세상에 처음으로 나왔다. 공방은 한나라 때 홍려경(외국의 빈객을 접대하는 벼슬)으로 등용되어 오왕 비의 비호 아래 큰 이익을 보았고, 무제 때는 부민후(백성을 잘 살게 하는 일을 담당하는 벼슬아치)를 지냈다. 권력과 부를 가지게 된 공방은 탐욕적이며 돈을 중시하고 곡식을 천시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농업을 버리고 장사에 매달리게 하고, 또 재물을 가진 이라면 누구든지 가까이 하는 등 문란한 행위를 보였다. 원제 때 공후가 상소하여 조정에서 쫓겨난 후, 한때 다시 등용되었으나 뇌물을 즐기다 다시 벌을 받았다. 공방의 사후에도 그의 제자 무리들이 등장하여 세상에 작패가 끊이지 않았다. <참고문헌> : 이규보의 문학이론과 작품세계, 하강진, 세종출판사/ 가전문학의 이론, 김창룡, 박이정/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옛이야기 백가지, 서정오, 현암사(daum 2008)
고려 후기 석탑의 연구(高麗 後期 石塔의 硏究 : 麻谷寺五層石塔과 敬天寺多層石塔을 中心으로) [論文] : 이영택의 학위 논문으로, 89쪽, 삽도, 도판, 27cm, 동국대학교에서 2001년에 출판하였다. 도판(圖板) 목차 2에 예천 개심사지오층석탑이 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자료실 학위논문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 후기 수선사의 결사운동(高麗後期 修禪社의 結社運動) [論文] : 하리면 출신인 진성규(秦星圭, 1949- , 大昌高(14回) 卒業, 中央大 敎授)의 논문으로, 고양 불함문화사에서 1998년에 출판한 <한국사상논문선집(韓國思想論文選集)> 31권(480쪽, 삽도, 27cm)에 수록되어 있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강원대, 경남대, 고려대, 부산외대, 연세대, 원광대, 한남대, 한성대이다.(keris 2003)
고려 후기 수선사의 결사운동(高麗 後期 修禪社의 結社運動) [論文] : 하리면 송월리 출신인 진성규(秦星圭, 1949- , 中央大 敎授)의 논문으로, 일지사에서 1984년에 발행한 <한국학보(韓國學報)> 10권 3호 2-29쪽(28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keris 2003)
고려후기 수선사의 결사운동(高麗後期 修禪社의 結社運動) [學術저널] : 하리면 송월리 출신인 진성규(秦星圭, 1949- , 大昌高 卒業, 中央大 敎授)의 논문으로, 고양 불함문화사에서 2004년에 발행한 <한국불교학연구총서(韓國佛敎學硏究叢書)> 117권(結社運動(1), 447쪽, 27cm) 중에 수록되어 있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강원대(중앙), 경희대, 국민대, 동국대(경주), 서울대(중앙), 성균관대(중앙), 위덕대, 중앙대(제1캠퍼스)이다.(keris 2006)
고려후기 수선사의 결사운동(高麗後期 修禪社의 結社運動 =The Innovative Movement of the Su-sun Temple(修禪社) in the Late Koryo Dynasty) [學術저널] : 하리면 송월리 출신인 진성규(秦星圭, 1949-, 大昌高 卒業, 中央大 敎授)의 논문으로, 일지사에서 1984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9)
고려후기 신앙결사운동(高麗後期 信仰結社運動 : 修禪社와 白蓮社를 中心으로) [學術저널] : 하리면 송월리 출신인 진성규(秦星圭, 1949- , 大昌高 卒業, 中央大 敎授)의 논문으로, 중앙승가대학교에서 1992년에 발행한 <승가(僧伽)> Vol.9 41-48쪽(8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keris 2006)
고려후기 신앙결사운동(高麗後期 信仰結社運動) [學術저널] : 하리면 송월리 출신인 진성규(秦星圭, 1949-, 大昌高 卒業, 中央大 敎授)의 논문으로, 중앙승가대학교에서 1992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 요약] : 12세기 후반의 무신란은 고려사에 있어 커다란 전환을 이루는 시기였다. 정치ㆍ사회ㆍ경제 구조상의 변화에 병행하여 사상 구조상의 변화 중 불교계의 양상은 한마디로 신앙 결사가 중핵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결사 운동은 진정한 불자가 되기 위해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약속하여 함께 수도하며, 나아가 그 사회를 정화하려는 신앙 운동이다. 이 중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결사가 선종 계통의 수선결사와 천태종의 백연결사였다. 결사운동은 중국 동진의 혜원(334-416)이 노산(강서성 구강현)에서 백연사를 맺고, 동지 유유민, 뢰차종 등을 123인을 모아 무량수불상 앞에서 서방정토에 나아가기를 서약하며, 염불삼매를 정수하는 데서 시작하였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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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