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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468:광무연간...광복청년단
작성자장병창 @ 2019.06.02 21:03:59

  도청신도시 예천 468 : 광무연간...광복청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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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무연간의 승적에 대한 일고(光武年間의 僧籍에 대한 一考-醴泉郡을 中心으로) / 何石金昌洙교수화갑기념사학논총/ 저자 金甲周/ 날짜 1992/ 발행자 동간행위원회/ 분류 연구자료 > 한국사연구휘보/ 정보 서명 한국사연구휘보 제77호/ 내용 1. 序言, 2. 朝鮮時代 僧籍의 運營形態, 3. 光武年間 醴泉郡의 僧籍, 4. 結語/ 자료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www.history.go.kr/2014)

 

  광복군(光復軍) [軍隊] : 예천 출신의 광복군으로는 권혁무(權赫武), 우영숙(禹永淑), 유경희(劉敬熙) 등이 있다.

 

  광복군(光復軍 把握 길 열렸다, 留守名簿․大陸設計硏究所 名單 發掘) [記事] : 󰡐유수명부󰡑와󰡐광복대륙설계연구소의 광복군 명단󰡑은 한국광복군 등 중국 내에서 활동한 항일 무장단체 구성원들을 조명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전문가들은 특히 두 명부에 담긴 인물들의 신상 내역이 동일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유수(留守)명부〓지난 1945년 귀환 일본 부대장의 보고를 기초로 작성됐다. 이 명부는 지난 1991~1993년 한국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4차례에 걸쳐 한국 병적 전시 명부 등을 전달받는 과정에서 받은 문서 중 하나로, 강제 징용자 중 탈영자 16만 148명의 신상 명세를 담고 있다.

 

  국가기록원 분석에 따르면, 16여만 명 중 25,622명이 중국 주둔 일본 지나 파견 군영에서 탈영한 사람들로 분석됐다. 이 문서에는 해당자의 이름과 나이, 본적, 배속 부대, 배치 지역, 학력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명부는 출신 도는 물론, 군 리 번지까지 정확히 기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향후 해당 유공자 및 유족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또 강제 징용자 명단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만큼 향후 한국-일본 정부 간 일제 강점기 강제 동원자들에 대한 배상 문제가 실마리를 찾을 경우 귀중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명부 작성 시점이 1945년 4월 30일자라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그 동안 보훈처는 다수의 서훈 신청자들에 대해, 󰡒광복 후 광복군 확군(擴軍) 과정에서 새로 부대에 편입된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포상을 보류해왔기 때문이다. 탈영 시점을 못 박고 있는 이 자료는 그 간의 의심을 풀어주기에 충분한 자료가 된다. 특히 학계는 이 자료가 아직까지 연구가 미진한󰡐광복군 충원 실태󰡑를 밝혀줄 귀중한 단서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유수 명부는 전산화가 완료된 지난 1996년 이후 열람이 허용되고 있다. ◈대륙사무소 명단〓중국 국민당 정부에 의해 작성됐다. 국민당은 당시 중국 전 지역에 흩어져 있던 한국 광복군에 점검조를 파견, 현지 실사 조사를 실시한 뒤 광복군 명단을 작성했다는 게 국내 학계의 보편적인 학설이다. 이 명단은 현재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에 패퇴, 대만으로 쫓겨 가면서 함께 옮겨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병헌 의원측은 현재 광복군 제1지구대 3구대와 빈번이 교류한 중국군 9전구(戰區) 사령관을 지낸 고(故) 설악 장군(외국인으로 한국 독립유공자로 포상 받음)이 한국 광복군 지사에게 보내온 2건의 문건, 60명의 광복군 명단을 확보해 분석 중이다. 이 외에도 30여 명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 명단 1건이 추가로 한국으로 전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앞서 국가기관이 파악한 광복군 명단은 중일전쟁 당시 광복군 제2지대 3구대 대원 21명(중국군 점검조 장견(章堅)의 보고)과 중국군사위원회가 파악해 국민당 정부에 보고한 중경 지역의 광복군 제1지대 39명 명단 등 불과 50명이 고작이었다. 중국 연변대학교 민족문제연구소 이진숙 원장은, 󰡒최근 중국 사학자 및 전문가들과 논의하고 사료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현재 대만에 광복군 명단 일체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지난 1980년대 보훈처 공훈심사위원으로 활동한 성신여대 이현희 명예교수는, 󰡒아직까지 유수명부의 존재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이 명부는 현재 광복군의 정확한 수치도 추산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현대 한국독립운동사를 조명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유수명부의 내용이 대만 명부와 일치한다면 두 명부를 면밀히 대조해 적적한 포상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밝혔다. 광복군 명단 <이름, 생년, 본적 順>, 권혁무 1923년 경북 예천군, 이종열 1923년 경북 예천군, 김병림 1924년 경북 예천군, 조청래 1923년 경북 예천군, 백문기 1922년 경북 예천군, 윤종록 1922년 경북 예천군, 박주대 1923년 경북 예천군, 김정숙 1923년 경북 예천군, 우영숙 1922년 경북 예천군,(박수균 記者 文化日報 2004-10-04)

 

  광복군 비호대(光復軍飛虎隊) [軍隊] : 권혁무(權赫武, 龍宮), 이규일(李圭一, 醴泉邑), 이종열(李鍾烈, 豊壤), 권택구(權宅九, 龍門), 김병림(金炳林, 知保), 조청래(趙淸來, 豊壤), 백문기(白文基, 開浦), 윤종록(尹種錄, 豊壤), 박주대(朴周大, 柳川), 김정숙(金正淑, 龍門) 등 20대 청년들은 함흥(咸興, 1943), 평양(1944) 일본 부대에 강제 징발 입대 당하여 의주(義州)를 거쳐 만주 안동(滿洲安東)을 지나 남경(南京)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선편(船便)으로 양자강 상류에 있는 연호(燕胡), 안경(安慶), 구강(九江), 무한(武漢), 삼진(三眞)에 도착하여 일본 보병 부대(步兵部隊)에 배속, 훈련 중이었다. 여기서 각기 흩어져 온 본대(本隊)와 지대(支隊)가 합류(合流)하여 악양(岳陽), 장사(長沙), 형산(衡山) 등지에서 동지와 탈출을 시도하였다. 탄로가 나면 총살형이었으나 이를 무릅쓰고 야간에 도주하였다.

 

  그리하여 형산 경비대(衡山警備隊)와 만났는데 이때 2명의 동지가 전사(戰死)하였다. 여기서 중국 유격대와 총격전을 전개하다가 접선되었으나 조사 후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리하여 현지에서 광복군 제1지대(第一支隊)에 입대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9전구(戰區)와 3전구 간의 연락 미비로 광복군 편성이 지연되었다. 따라서 일본군 후방을 통과하여 의춘(宜春)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선착한 이봉훈(李奉勳) 동지와 함께 1945년 1월 경 항일 투쟁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개시키기 위하여 비호대(飛虎隊)를 조직하였다. 그 대장(隊長)에는 이봉훈(李奉勳)을 추대하고 광복군에 정식 편성될 때까지 과도기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국군에서는 한국인 청년들의 애국심과 항일 투쟁 의식을 가상히 여기고 생필품(生必品)과 전투에 필요한 무기를 공급하면서 탈출 공로를 찬양하였다. 비호대(飛虎隊)는 독립 단체로서 100여 명의 동지가 모였다. 이들은 파음 선전(播音宣傳)으로 군내 한적 사병(軍內韓籍士兵)의 탈출을 촉진시키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비호대는 중국군과 합동으로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 뒤 4차 장사회전(長沙會戰)에 참전하여 중국군도 시인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린 바 있었다. 장사회전은 1945년 1월 말 경에 개시되었던 항일 전투였다. 9전구 사령관 소악(戰區司令官蘇岳) 장군의 요청으로 비호대원들이 참전하였다. 개전(開戰) 초에는 전원이 일반 전투에 참전하였으나 수 일 후 동지들의 건의로 일본어가 능하고 건장한 동지 20명을 선발 특공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일본군과 그 모습이 같게 위장한 뒤 적군 구역 내에 투입되어 독전대 연락병(督戰隊連絡兵), 전령(傳令) 등을 가장한 채 적정(敵情)을 탐지하고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귀대 시에 적군 대대본부와 중대본부 등 3개소에 수류탄을 투척, 폭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은 일본군 대대장(陸軍 小佐) 1명, 중대장 1명, 본부 근무 사병 수 명 등을 납치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제2차대전의 전의를 상실케 하는 등 일대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이들은 1946년 6월 20일 경에 귀국하였다. 그 동안 이들은 광복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의 일본군을 수색, 무장을 해제하였고, 임정(臨政)의 요인이 환국할 때 경호 등의 임무를 분담하였다. 뿐 아니라 전상자의 치료와 간호, 후송 등의 일을 도맡은 것을 비롯하여 그 전후(戰後) 처리까지 담당하였으므로 귀국이 다른 광복군보다 늦었다. 광복군 9전구 관병(官兵) 52명과 제1지대 3구대 2, 3분대원 91명의 명단이 기재된 자료가 있다. 앞의 것은 중국의 소악(蘇岳) 장군이 이끌던 9전구의 일본군 탈출자 명단이다. 그 원명(原名)은 '제10전구 사령장관 사령부 한적투성 관병명책존(第十戰區 司令長官 司令部 韓籍投誠 官兵名 冊存, 民國 27年, 52名)'으로 기재되어 있다. 뒤의 것도 소악(蘇岳) 장군 휘하의 일본 군대를 탈출한 한국인 군졸이다. 이는 '한국 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 제2.3분대 대원 연명책(連名冊, 91名)으로 표기되어 있다. 전자(52名)는 중국 계동(桂東) 일대에서, 후자(91名)는 중국 의춘(宜春) 지역에서 각기 애국심에 불타 항일 전쟁을 전개하였던 거의 이름 없는 사병들이다. 위 글머리 명단 중 박주대(朴周大), 김정숙(金正淑)은 후자에 속하고, 그 외에는 모두 전자에 속한다.(韓國光復軍, 이현희 著, 獨立記念館 獨立運動史 敎養叢書(19) 1991, 三星出版社).

 

  [인터넷] : 예천 출신의 박주대(朴周大) 등 20대 청년은 함흥(1943), 평양(1944) 일본 부대에 강제 징발, 입대 당하여 의주를 거쳐 만주 안뚱(安東)을 지나 남경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선편으로 양자강 상류에 있는 연호(燕胡), 안경(安慶), 구강(九江), 무한(武漢), 삼진(三眞)에 도착하여 일본 보병부대에 배속, 훈련 중이었다. 여기서 각기 흩어져 온 본대와 지대가 합류하여 악양(岳陽), 장사(長沙), 형산(衡山) 등지에서 동지와 탈출을 시도하였다. 탄로가 나면 총살형이었으나 이를 무릅쓰고 야간에 도주하였다. 그리하여 형산 경비대와 만났는데, 이때 2명의 동지가 전사하였다. 여기서 중국 유격대와 총격전을 전개하다가 접선되었으나 조사 후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리하여 현지에서 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9전구(戰區), 3전구 간의 연락 미비로 광복군 편성이 지연되었다. 따라서 일본군 후방으로 통과하여 의춘(宜春)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선착한 이봉훈(李奉勳) 동지와 함께 1945년 1월 경 항일 투쟁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비호대(飛虎部隊)를 조직하였다.

 

  그 대장에는 이봉훈을 추대하고, 광복군에 정식 편성될 때까지 과도기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국군에서는 한국인 청년들의 애국심과 항일 투쟁 의식을 가상히 여기고 생필품과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공급하면서 탈출 공로를 찬양하였다. 비호대는 독립 단체로서 100여 명의 동지가 있었다. 이들은 파음(播音) 전선으로 군내(軍內) 한적사병(韓籍士兵)의 탈출을 촉진시키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비호대는 중국군과 합동으로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 뒤 4차 장사회전(長沙會戰)에 참전하여 중국군도 시인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린 바 있었다. 장사회전은 1945년 1월 말 경에 개시되었던 항일 전투였다. 9전구 사령관 설악(薛岳) 장군의 요청으로 비호대원들은 참전하였다. 개전 초에는 전원이 일반 전투에 참전하였으나 며칠 후 동지들의 건의로 일본어가 능하고 건장한 동지 20명을 선발, 특공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일본군과 그 모습이 같게 위장한 뒤 적군 구역 내에 투입되어 독전대(督戰隊) 연락병, 전령 등으로 가장한 채 적정을 탐지하고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귀대 시에 적군 몇 명을 납치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제2차대전의 전의를 상실케 하는 등 일대 타격을 주었던 것은 손꼽을 수 있는 성과로 기록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들은 1946년 6월 20일 경에 귀국하였다. 그 동안 이들은 광복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의 일본군을 수색, 무장을 해제하였으며 임정의 요인이 환국할 때 경호 등의 업무를 분담하였다. 뿐 아니라 전상자의 치료와 간호, 후송 등의 일을 도맡은 것을 비롯하여 그 전후 처리까지 담당하였으므로 귀국이 다른 광복군보다 늦었던 것이다. 광복군의 9전구 관병(官兵) 52명과 제1지대 3구대 2-3분대원 91명의 명단이 기재된 자료는 또 한 번 우리 현대사 연구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게 되었다. 중국의 설악 장군(上將)이 이끌던 9전구의 일본군 탈출자 명단이 발혀진 것이다. 그 원명은, ‘제10전구 사령장관 사령부 한적 투성관병명 책존(第十戰區 司令長官 司令部 韓籍投誠官兵名 冊存 : 52名)으로 기대되어 있다. 설악 장군 휘하의 일본 군대를 탈출한 한국인 군졸이다. 새로 발견된 자료명은, ’한국 광복구 휘하의 일본 군대를 탈출한 한국의 군졸이다. 새로 발견된 자료명은, ‘한국 광복군 제1지대 제3전구대 제2-3분대 대원 연명책’(91명)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상의 두 자료는 16절지 크기의 한지 17페이지에 붓글씨로 또박또박 종서로 적어 놓았다. 이 자료는 최근 성신여대의 직원인 장철호(張哲鎬 : 光復軍 張錫昌 志士의 子弟)가 원래 소장자인 광복군 출신 김경화(金慶華 : 當時 姓名은 金貴先)가 소개됨으로써 이를 확인하게 되었다. 이 명단은 당시 김경화 지사가 광복군 간부로서, 일본군에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온 청년들을 영접 인솔한 책임을 지고 있어서 직접 상세하게 인적 사항을 작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52명은 중국(桂洞) 일대에서, 91명은 중국 의춘 지역에서 각기 애국심에 불타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던 거의 이름 없는 사병들이다. 이 번에 새로 입수된 자료 가운데 보다 주목을 끄는 것은 91명 자료이다. 그 것은 그들이 일본 군대에서 탈출하여 1945년 4월 광복군에 정식으로 편성될 때까지의 공백기를 메우면서 한일 투쟁을 지속적으로 감행, 성과를 올렸다는 숨은 사실 때문이다. 그 것은 100여 명(초기에는 50명 규모)의 대원을 거느린 비호대가 올린 공이다.

 

  비호대를 조직하는데 주동적인 임무를 수행한 사람은 이 명단에 나와 있는 박주대(22세, 예천 출신) 등이었다. 이들은 1943년 5월에 징병령에 따라 함흥, 평양(1944)부대에 강제 입대하였다. 이들은 의주를 지나 안동, 금주(錦州), 산해관(山海關), 개평(開平), 천진(天津), 제남(濟南), 서주(徐州)를 거쳐 구강(九江), 무한(武漢), 삼진(三眞)에 도착하였으나 탈출할 기회만을 노렸다. 어느 날 자정, 불침번 교대 때 탈출하여 형산경비대을 만났다. 이 때 9전구에 근무하던 김귀선(金慶華) 광복군 소령과 최문열, 이병곤 등 3명을 만나 1945년 4월 광복군에 현지 입대했다. 그 때 지금 발견된 명단이 김경화 소령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90명 중 대졸은 3명 정도이고, 중학 출신이 일부이며, 대개가 국졸로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일제가 침략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각계각층의 20대 청년들을 제물로 삼았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산 증거였다. 간간이 전투를 하면서 강서성 의춘에 선착한 이봉훈(一名 李宰鶴)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1945년 1월 초 마침내 항일독립운동 단체로서 100여 명 규모의 비호부대를 조직하였다. 중국군에서는 이들 한국인 청년들의 충천하는 애국심을 높이 찬양, 군수품과 무기를 공급하고 상여금까지도 지급하였다. 이들은 비호부대를 조직한 뒤 파음선전(播音宣傳 : 日軍의 投降勸誘宣傳)을 전개, 일본군 내에 있는 한적 사병의 탈출 합류가 계속 이루어졌다. 특히 중국군과의 합동 항일 투쟁으로 유명한 것은 제4차 장사회전에 참전, 전과를 올린 사실이었다. 이는 1945년 1월 말 경이었다. 9전구 사령관 설악(薛岳) 장군의 요청으로 비호부대원들은 참전하였다. 개전 초에는 일반 전투에 합류하였으나 일본어에 능하고 건장한 청년대원 20명을 선발하여 특공대를 조직하였다. 이들 20명중에는 박주대, 정재윤, 백진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의 복장을 하고 적군 구역 내에 치투 독전대 연락병, 전령 등으로 가장한 채 적정을 탐지하는 등 첩보 활동을 하였다. 귀대 때에 일본군의 대대와 중대본부에 수류탄을 투척, 폭파하였다. 이 의거 중 대대장(육군 소좌) 1명, 중대장 등 3명을 폭사시켰고, 2중대장을 납치하여 중국군에 인계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비호대 100여 명 중 특공대원 20명은 각각 수류탄 2개씩을 소지하고 적군 진지에 위장 침투하여 기관과 인명에 손실을 주었다. 이 사실은 당시 중국 언론에 보도가 될 정도로 주목을 끌었던 승전의 사실이었다. 8.15 당시 비호부대는 의춘에서 풍성으로 이동해 있었다. 이들은 1946년 6월 20일 경에 귀국하였다. 8.15광복 후 1년 뒤 귀국한 것은 그들 나름대로 전후 처리 때문이었다. 광복군의 자격으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 정리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채원개, 이범석 장군의 신병을 안전하게 호위하였다고 박주대는 주장하였다. 뒤늦게나마 이 명단이 발견 확인됨으로써 비호대원의 항일투쟁 사실이 국가적으로나 역사 기록상에 정당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배지까지 갖추어진 비호대의 항일 투쟁은 광복 투쟁사의 최후를 장식한 셈이다.(인터넷 獨立記念館 2002)

 

  광복청년단(光復靑年團) [團體] : 예천군에 있던 해방 후의 우익(右翼) 단체로, 1946년 10.1사건의 여파는 각 면에도 파급되어 참극(慘劇)을 빚기도 하였으나, 이 단체에서는 좌익(左翼)을 물리치고 경찰과 협력하여 난국을 수습하는데, 일조(一助)가 되기도 하였다. 1948년 9월 미군정(美軍政)으로부터 정권(政權)을 이양 받은 후 광복청년단이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으로 개칭되었고, 그 중 청년단 간부를 육군사관학교에서 단기 훈련을 시켜 방위 장교로 임관하고 방위대가 각 면에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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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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