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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548:국제회의발표...국창유고...
작성자장병창 @ 2019.08.12 05:58:27

  도청신도시 예천 548 : 국제회의발표...국창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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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혜왕후(昭惠王后) 왕대비(王大妃) 호(號)로서 사재(思齋)는 1475년에 되었고, 안순왕후(安順王后) 존호 악장인 어황(於皇)는 1471년에 되었다. 또 공혜왕후(恭惠王后) 봉왕비(封王妃) 악장도 1471년에 이루어졌고, 정혜왕후(貞惠王后)의 봉왕비 악장은 1480년에 된 것이다. 1547년(명종 2)에는 문정왕후(文定王后) 존호 악장인 명명(明明)이 만들어졌고, 선조 때에는 선조 존호 악장인 어황(於皇)이 1604년(선조 37), 인목왕후(仁穆王后) 존호 악장인 현천(俔天)이 역시 1604년에 이룩되었고, 인조 때에는 인목왕후(仁穆王后) 존호 악장인 청녕(淸寧)이 1624년(인조 2), 인열왕후(仁烈王后) 봉왕비(封王妃) 악장인 유아(惟我)가 인조 원년에 이룩되었다. 경종 때에는 장열왕후(莊烈王后) 존호인 아여(아歟)가 1651년(효종 2)에 완성되고, 1661년(현종 2)에 또 황의(皇矣)가 이룩되었다. 숙종 때에도 역시 1676년(숙종 2)에 유황(有煌)이 마련되었고, 1686년에도 다시 수강(壽康)이 이룩되었다. 효종 때에는 인선왕후(仁宣王后) 봉왕비(封王妃) 악장인 양휘(敭徽)가 2년에 만들어졌고, 현종 2년에도 사재(思齋)가 역시 마련되었다.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악장으로 현종 2년에는 현천(俔天), 숙종 2년에 사재(思齋)가 각각 마련되었다. 숙종 때에는 1713년에 숙종 존호 악장인 유천(維天)이 이룩되고, 인원왕후(仁元王后) 존호 악장인 사재(思齋)가 1713년에 만들어졌고, 경종 때에는 인원왕후 존호 악장인 어소(於昭)가 1722년(경종 2)에 마련되었다.

 

  영조 때에도 인원왕후 존호 악장인 사황(思皇)이 1726년(영조 2), 또 1740년에도 어황(於皇)과 어현(於顯)이 마련되고 다시 1747년에도 유황(維皇)이 마련되는 등 4차에 걸쳐 인원왕후 존호 악장이 마련되었다. 이후 아아(아我, 27년), 아혁(아赫, 28년), 아황(아皇, 29년), 어황(於皇, 32년) 등 7차에 걸쳐 인원왕후(仁元王后) 악장이 마련되고, 선의왕후(宣懿王后) 존호 악장인 현아(顯아), 1726년 영조(英祖) 존호 악장인 유성(維聖), 1740년 유천(維天), 1752년에 황의(皇矣)가 32년에 세 차례에 걸쳐 만들어졌고, 정성왕후(貞聖王后) 존호 악장인 아여(아與)가 1740년, 황상(黃裳)이 1752년에 각각 만들어졌다. '열조추상존호악장'에 있어서도 덕종(德宗)의 추호(追號)를 위해 어현(於顯, 初獻), 유상(維上, 亞獻), 유황(維皇, 終獻)의 3장이 1471년에 이룩되었고, 덕종의 시호를 위해 사문(思文, 初獻), 어황(於皇, 亞獻), 유아(惟我, 終獻) 등 3장이 1475년에 마련되었고,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추호를 위해 순성(順成)이 1677년에 이루어졌다. 인현왕후의 추호를 위해서도 영범(永範)이 1713년에 이룩되었다. '진풍정악장(進豊呈樂章)'에서는 해동, 근심(根深), 석주(昔周), 적인(狄人), 칠저(漆沮), 상덕(商德), 적작(赤爵), 유주(維周), 봉천(奉天), 일부(一夫), 우내(虞내), 오년(五年), 헌언(獻言), 성시(聖詩), 양자(揚子), 시명(侍命) 등 16편은 용비어천가 및 봉래의무가(鳳來儀舞歌)에서 뽑은 것이고, 유황(惟皇)은 금척사(金尺詞), 유제(惟帝)는 하성명사(賀聖明詞), 성택(聖澤)은 성택사(聖澤詞)의 이름이고, 개언로(開言路), 보공신(保功臣), 정경계(正經界), 정례악(定禮樂)은 문덕곡(文德曲)을 지칭하는 것이다. “조회례 연의 통용 악장"에서는 미미(隆安之樂), 어황(休妄之樂), 피고(彼高 : 受寶록之樂), 진진(振振 : 覲天庭之樂), 어황(文明之曲), 혁혁(赫赫 : 荷皇思之樂), 환환(桓桓 : 武烈之曲), 미관(미觀 : 受明命之樂), 선양(善養 : 耆英會投壺) 등 9장으로 분류되었다. '친경악장'은 천립(天粒 : 殿下出大次), 염아(念我 : 殿下耕籍), 일개(日凱 : 殿下陞觀耕臺), 유엄(有儼 : 王世子耕籍) 등 친경 의식 때에 연주되는 악장이다. '관례악장'은 시우(時雨 : 殿下出大次), 적전(籍田 : 殿下觀례)의 두 악장으로 벼베기 때 왕의 행차 때의 악장이다. '친잠악장'은 유잠(維蠶 : 五妃出大次), 위의(威儀 : 王妃還大次)의 2장으로 왕비의 친잠(親蠶) 행차 때 연주되는 악장을 말한다. '대사례 악장'에는 사악(思樂, 御射), 어악(於樂, 侍射)의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종묘(宗廟), 문소전(文昭殿), 열조악장(列朝樂章) 등의 선조(先祖)의 의식용으로 쓰인 악장의 사(詞)를 뽑아 편찬한 것으로 친경(親耕), 친잠(親蠶) 등의 행차 때에 연주되는 악장도 가려 뽑은 것이다. 악장의 제정은 이미 세종 때에 용비어천가 등을 지어 각종 의식에 사용하여 왔으나 이후 각 임금마다 보완이 행해지고 특히 영조 때에 이르러 태종과 원경왕후를 1악장으로 합장(合章)하는 등의 악장 정리 작업이 수행되었고, 악장은 물론 무법(舞法)까지도 이정(이正)되었다. 1765년 12월에는 경정(更定)된 국조악장에 따라 태묘악장(太廟樂章)과 무법의 이정을 명한 것도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여하튼 세종 이후 악장을 정비한 것은 바로 이 국조악장의 편간에 있다. 그러므로 조선의 음악의 변천올 살피는 데는 필수적인 책이다.(인터넷 야후 2001)

 

  국지골 [골] : 하리면 오류리(五柳里) 옥장등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국창문집(菊窓文集) [冊] : 국창 이찬(李燦, 1575-1654)의 문집으로, 3권 1책, 영인 중간(影印重刊)이다. 용궁면 무이리 여주 이씨가 소장하고 있다. 이찬은 공조 정랑, 금산 현감을 지냈다.(驪州李氏先祖由來 2001)

 

  국창선생문집(菊窓先生文集) [冊] : 용궁면 무이리 출신인 국창 이찬(李燦, 1575-1654, 工曹正郞)의 문집으로, 4권 2책, 목활자판(木活字版), 29.5x19.7cm, 반곽(半郭)은 18.3x15.7cm, 10행(行) 18자(字), 사주쌍변(四周雙邊), 유계(有界), 주쌍행(註雙行), 판심은 상 이엽 화문 어미(上二葉花紋魚尾)이다. 서문은 1892년 이만인(李晩寅), 발문은 1895년(고종 28) 2월 황난선(黃蘭善)이 썼다. 이준구(李駿九)가 1895년에 발행하였다. 내용은 권1에 시(詩), 만사(輓詞), 권2에 서(書), 제문, 권3에 부록이다. 국립중앙도서관 고전운영실에 소장(청구기호 古4648-62-461)되어 있고,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 존경각(尊經閣)에 소장(분류기호 D03B-1710)되어 있다.(醴泉郡誌 1939, 인터넷 야후 2001)

 

  국창선생문집(菊窓先生文集 1) [冊] : 용궁면 무이리 출신인 국창 이찬(李燦, 1575-1654, 名醫, 工曹佐郞, 縣監, 墓는 豊壤面 靑雲里 굴미 큰嶝)의 문집으로, 한국문집편찬위원회에서 편집하여 서울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에서 1996년, 1999년에 발행한 <한국역대문집총서(韓國歷代文集叢書)> 1832권(535쪽, 影印本, 23cm)에 <국반선생문집(菊伴先生文集 1)>(呂應奎 著)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菊窓集」,「菊伴集」의 영인본이다. DDC 811.08 20이고, 경북대학교 도서관 중앙국학자료실에 소장(청구기호 중앙811.8 한17-1832)되어 있고, 그 외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강남대, 강원대, 경남대, 경상대, 경성대, 계명대(동산), 단국대(천안), 단국대(중앙), 대구가톨릭대, 경산대, 동국대(경주), 동의대, 목포대, 부경대, 부산외대, 상명대(서울), 서강대, 서원대, 성균관대(중앙), 세종대, 숙명여대, 순천향대, 신라대, 영남대, 울산대, 원광대, 인제대, 인하대, 전남대, 전북대, 중앙대(제1캠퍼스, 제2캠퍼스), 충남대, 충북대, 한국외대, 한남대, 한양대(백남), 홍익대이다.(keris 2003 2005)

 

  국창선생문집(菊窓先生文集) : 伏次龍宮叔母主韻爲問還鄕知幾年,明朝返?意茫然,一堂談話皆陳迹,不覺雙眸感涕漣,姪光載華堂情話幸今年,却把離杯意缺然,明日江郊相送後,徘徊??涕還漣,姪光鐵別久重逢壬戌年,一堂歡喜盡同然,離筵莫厭情盃滿,明日相思感淚漣,一去竺山今幾年,顔容端正出天然,佳期莫負新秋月,?望歸程涕淚漣,姪耀亨序屬三秋節,虛堂爽氣生,夜?開軟語,?外月三更,一體初分派,殷勤骨肉情,樂極還成別,忽忽意不平,共酌淸樽酒,黃花喜我來,飜思十年事,回首轉堪哀,姪光繼唯我嫡從之行,皆已損世,獨大夫人年,近八?,尙此康寧寄來,篇什措語,筆畵無異,壯年而意,亦淸婉奉讀,再三感喜,交集敬次,其韻忘拙敢呈,/ 상위서지: 菊窓先生文集 乾 > 菊?先生集卷之二 > 附菊窓先祖?令人光州金氏逸稿/ 분류: 고도서 > 집부(集部) > 별집류(別集類)/ 제공: 한국국학진흥원/ 국창선생집 (菊窓先生集)/ 伏次龍宮叔母主韻爲問還鄕知幾年,明朝返?意茫然,一堂談話皆陳迹,不覺雙眸感涕漣,姪光載華堂情話幸今年,却把離杯意缺然,明日江郊相送後,徘徊??涕還漣,姪光鐵別久重逢壬戌年,一堂歡喜盡同然,離筵莫厭情盃滿,明日相思感淚漣,一去竺山今幾年,顔容端正出天然,佳期莫負新秋月,?望歸程涕淚漣,姪耀亨序屬三秋節,虛堂爽氣生,夜?開軟語,?外月三更,一體初分派,殷勤骨肉情,樂極還成別,忽忽意不平,共酌淸樽酒,黃花喜我來,飜思十年事,回首轉堪哀,姪光繼唯我嫡從之行,皆已損世,獨大夫人年,近八?,尙此康寧寄來,篇什措語,筆畵無異,壯年而意,亦淸婉奉讀,再三感喜,交集敬次,其韻忘拙敢呈, ( 伏次龍宮叔母主韻爲問還鄕知幾年,明朝返?意茫然,一堂談話皆陳迹,不覺雙眸感涕漣,姪光載華堂情話幸今年,却把離杯意缺然,明日江郊相送後,徘徊??涕還漣,姪光鐵/ ▣ 131/ 別久重逢壬戌年,一堂歡喜盡同然,離筵莫厭情盃滿,明日相思感淚漣, 一去竺山今幾年,顔容端正出天然,佳期莫負新秋月,?望歸程涕淚漣,姪耀亨序屬三秋節,虛堂爽氣生,夜?開軟語,?外月三更, 一體初分派,殷勤骨肉情,樂極還成別,忽忽意不平, 共酌淸樽酒,黃花喜我來,飜思十年事,回首轉堪哀,姪光繼/ ▣ 132/ 唯我嫡從之行,皆已損世,獨大夫人年, 近八?,尙此康寧寄來,篇什措語,筆畵無異,壯年而意,亦淸婉奉讀,再三感喜,交集敬次,其韻忘拙敢呈, )/ 幾歲東西隔,相逢白髮生,挑燈喜不寐,漏畵已殘更, 告歸回首處,離恨?然生,蘆浦茅?月,村鷄報五更, 短篇深寄恨,尺素遠舍情,長?讀未已,我心還不平,/ ▣ 133/ 光陰川共逝,書信?俱來,持此惱心曲,感懷生七哀,/ ▣ 134/ 菊?先祖?令人光州金氏逸稿//

 

  국창유고(菊窓遺稿) [冊] : 용문면 금당실 태생인 국창(菊窓) 김필형(金弼衡)의 문집으로, 4권 4책, 영본(零本) 1책, 필사본,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된 국창유고에는 두 종의 이본(異本)이 있다. 하나는 후손 가에 소장되어 온 4책의 교감본이고, 다른 하나는 동처 소장의 교감본 이전에 정리된 초고본으로 보이는 영본 1책이다. 영본 1책은 표제에 권9의 표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의 총 권수는 적어도 9책 이상이었던 것 같다. 교감본과 영본에는 모두 서문이나 발문이 없어 정확한 필사 시기나 필사 주체 등을 알 수가 없고, 저자에 대한 기초적 정보를 제공하는 비지문이나 행장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교감본의 구성 체계를 보면 권1은 시(詩) 271제(題), 권2는 서(書) 63편, 권3은 서(書) 55편, 서(序) 18편, 권4는 제문(祭文) 37편, 애사(哀辭) 4편, 묘갈명(墓碣銘) 1편, 상량문(上樑文) 1편, 잡록(雜錄) 1편을 수록하고 있다. 문집의 여러 곳에 먹물이나 주묵으로 원래의 글씨를 긋고 수정된 글자를 적어 넣었다. 가필과 산삭의 비교 분석을 통해 해당 글의 최종 수록 여부와 오기에 대한 교정, 체제의 보완 등의 과정을 추론할 수 있다. 영본(零本) 1책에는 교감본의 서(書)와 중복되지 않는 서(書) 92편과, 저자의 인품, 성격, 학문 연원, 교유 관계, 친지 등에 대해 일정한 자료를 제공해주는 뇌문(뇌文) 2편, 만사(輓詞) 9편, 제문(祭文) 32편, 소상 때의 제문(小祥時祭文) 16편, 대상 때의 제문(大祥時祭文) 31편을 부록으로 편성하여 수록하고 있다.

 

  교감본의 표제에는 {菊窓遺稿 元}, {菊窓遺稿 亨}, {菊窓遺稿 利}, {菊窓遺稿 貞}으로 제명되어 있어 비교적 정고본(定稿本)에 근접한 4책의 완질본임을 알 수 있다. 저자인 김필형(金弼衡, 1725~1800)의 자는 극부(克夫), 호는 국창(菊窓), 본관은 순천(順天), 성원(聲遠)의 양자, 휘원(輝遠)의 아들, 예천(醴泉) 금당실에서 태어났다. 교감본이나 영본에는 저자의 이력을 알려주는 1차적인 자료가 실려 있지 않다. 다행히 류이좌의 {학서문집}에 저자의 행장이 실려 있다. 행장은 국창의 생질인 김재근(金在根)이 아들 병운(炳運)을 류이좌에게 보내 부탁해서 받은 것이다. 류이좌는 가장(家狀) 초고를 바탕으로 국창의 행적을 정리하면서 '평소 국창공의 덕에 심취했고 훈육을 마음속에 새겨서 잊은 적이 없었다.'고 실토했다. 류이좌는 안동 하회 출신으로 정조 때에 문과에 급제해서 예조 참판를 역임했다. 행장의 주요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국창은 고려조 인(仁)의 후손으로 현조로는 조선조의 을재(乙財)가 호조 전서를 지냈다. 을재의 4대손 군수 경언(慶言)은 1615년 화를 피해 서울에서 함창으로 이거해서는 다시 예천으로 옮겼다. 인산사(仁山祠)에 제향되었다. 고조는 만구(萬具)로 호가 남계(藍溪), 증조는 원주(元柱)로 호가 도은(逃隱), 조부는 명기(命夔)로, 호가 체당(체堂)이다. 아버지는 성원(聲遠)으로 호가 신재(新齋)며, 생부 휘원은 체당공의 아우 명설(命卨)의 소생이다. 1725년 7월 20일에 예천 금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소시부터 재주와 품성이 뛰어나 가정에서 특별하게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열셋에 비로소 [반양절(潘陽節)] 1편을 배우게 되었는데 한 글자도 착오없이 외웠다. 조부는 "읽지도 않고 외우는 것은 기뻐할 게 아니다."고 나무라며 도리어 조숙함을 걱정하였다. 1738년에 생모의 상을 당했다. 1744년에 쌍벽당[봉화 거촌의 광산김씨가]으로 장가를 갔다. 거촌은 눌은 선생이 거처하던 황전과 근접한 곳이다. 눌은 선생은 당시 사림의 종사로 영남 북부지역의 선비를 영도하는 위치에 있었는데 그 문하에 들어가 고인의 학문하던 방법을 배웠다. {주자서(朱子書)} 1질을 받아서 돌아온 뒤로 견문이 더욱 넓어지고 문장력이 점점 증진되었다. 1753년(영조 29)에 안동의 가곡으로 옮겼다. 가곡은 병곡 선생이 살았던 곳인데 옮긴 뒤로 수곡(樹谷), 가재(可齋) 등과 더불어 환와(丸窩) 서실에서 학문을 토론하고, 외재, 임여재, 수오재 등과 도의를 강학함에 선비들이 모두 의귀처로 삼았다. 지극한 효성은 지극해서 생가와 양가에 정성을 다해 조금도 태만한 적이 없었다. 1756년과 1773년에 만난 친상에서는 상 장례의 의식을 하나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준수하였다. 하루는 모친의 묘소에서 곡을 할 때, 범이 앞을 가로막기에 울면서 달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물러갔다. 고인이 남긴 교훈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써서 벽에 붙여놓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았고, 수재들이 와서 배움을 청하면 정성껏 가르쳐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성품이 개결해서 남의 선행을 보면 칭찬을 하고 허물을 언급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그러나 의리와 시비에 관련된 문제의 경우에는 쇠못을 끊어 버리듯 조금도 타협치 않았다.

 

  인정이 많아 구걸을 청하면 보는 대로 베풀어주고 길가에 굶어죽은 시체에는 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신동으로 호가 행당(杏堂)이다. 서너 살에 하늘에다 손짓하면서 "넓어서 포괄하지 못하는 게 없다"하고, 땅에다 손짓하면서 "넉넉해서 자라지 못하는 게 없다." 하였다. 다섯 살에 "길 위에는 나귀, 구름 가에는 새, 천기(天機)가 유동하는 곳에 자연의 소리가 들리네."라는 시를 지었다. 재주와 풍격이 이와 같았으나 나이 아홉에 죽었다. 효랑이란 누이동생도 총명하고 슬기롭더니 어린 나이에 죽었다. 국창은 자신의 찢어지는 아픔을 속으로 삼키면서 도리어 애통해하는 부인에게 고금의 낙을 즐기던 일을 얘기해 주면서 슬픔을 달래주었다. 일찍부터 국화를 좋아해서 섬돌 가에 몇 포기를 길렀고 시를 읊으면서 만년을 기탁하였다. 안동 부사로 부임한 이집두(李集斗)는 향사당에서 국창을 만나 본 뒤 '산림고사(山林高士)'라 크게 칭탄하고 '국창(菊窓)' 두 글자를 대자로 써주어 대청에 걸어두고 호로 삼도록 하였다. 1800년 7월 4일에 세상을 하직했다. 향년 76세. 배위 광산 김씨는 처사 광협(光協)의 딸로 부덕을 갖추어 남편의 덕을 어긴 적이 없었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경림(景霖)으로 행당동자이고, 딸은 어려서 죽었다. 후배(後配)인 안동 김씨는 첨추 시경(時慶)의 딸이다. 역시 아들이 없어서 아우 필정(弼楨)의 아들 태림(泰霖)을 후사로 삼았다. 태림은 하응청(河應淸)의 딸에게 장가가서 1녀를 낳고, 뒤에 성산 이의근(李義根)의 딸을 맞아 1남을 낳았다. 국창은 평생 도를 즐기면서 자질을 훈육하고 후진을 장려했다. 때때로 주흥이 일면 시를 읊어 내면의 정신세계를 펼쳐 내고 성정을 들추어내었다. 성격이 담박해서 과거는 본래 뜻하지 않았으나 부친의 명으로 잠시 종사했지만 부친 사후에는 과장에 출입하지 않았다. 족보 발행과 관련해서 남한의 개원사에 갔었는데 마침 정시(庭試)가 있었다. 족친이 억지로 끌어다가 과장에 들어가게 했으나 곧바로 돌아 나왔다. {평성세고(平城世稿)}를 손수 써서 후세에 전하게 하여 선대의 뜻을 매듭지었다. 내외 선조에 대한 세계와 행적, 유묵에 대해서는 별도의 책자를 만들고, 혹은 훼손된 것을 보수하고 배접하여 보배롭게 간직하였다. 눌은 선생의 유고가 권질이 많아서 미간의 상태로 있었는데 한 부 베껴서 주야로 독송하였다. 병곡 선생의 원고도 간행을 못하고 있었는데 가재(可齋) 등과 더불어 경비를 적립해서 사업을 추진해 대역사를 마치게 하였다. 손삼성(孫三省), 곽호재(郭浩齋), 권모산(權慕山) 등 제현의 흩어진 원고를 수습해서 교감을 본 뒤 계를 닦아 간행토록 하는 등 유림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에 대해 자임해서 일을 성취했다. 영남에서 명망이 있던 이대산(李大山) 및 김천사(金川沙), 이후산(李后山), 유동암(柳東菴) 등 여러 학자와 도의를 통해 탁마하고 권면을 하자, 향촌의 큰선비와 장로들은 이구동성으로 국창을 사림의 종장으로 추중하였다. 병산서원과 화천서원에서 열린 강회에서는 말씨와 문사가 맑고 깨끗했고 강의는 트이어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고고한 자태는 선계에 사는 학이 인간 세계로 내려와 홀로 서 있는 듯 했다. 문집 서너 권이 본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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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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