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제목예천550:국창유고...
작성자장병창 @ 2019.08.14 06:02:40

  도청신도시 예천 550 : 국창유고...

---

 

  重陽前二夕余抵蔡內弟士集家諸友要余同宿於竹林書堂翌朝共次安上舍而定竹林移建韻 : 중양절 이틀 전, 즉 9월 7일 저녁에 죽림서당에서 지은 것이다. 국창이 채내제 사집의 집을 방문했을 때 윤비 류필화 김경채 종인 김언섭 류택화 남이중 윤군범 윤길범 등 여러 벗이 죽림서당에서 동숙할 것을 청하기에, 이튿날 안상사 이정의 '죽림서당을 이건한 뒤 읊은 시'에 차운한 것이다. 서당의 이름이 '죽림(竹林)'인 것에 착안하여 {시경}의 '저 기수의 굽이를 보니 녹죽이 무성하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흥취를 돋우면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대나무의 변치 않는 굳센 절개가 드러나듯이 참다운 공부는 힘써 실천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여러 유생에게 간곡하게 충고하고 있다.

 

  金晉吉就質朱書于樹谷丈吟成絶句索和於諸友余亦次韻(1754) : 김진길(金晉吉)이 {주자서절요}를 가지고 수곡 권보에게 나아가 질정을 받고 절구 1수를 지어 여러 벗에게 차운을 구하기에 국창이 써준 것이다. 김진길에게 시종일관 오로지 바른 학문을 구할 것을 격려하는 내용으로, 국창은 이 시 바로 뒤에 있는 시에서도 {주자서절요}에 모든 도리가 담겨있으니 학문의 연원을 찾자면 반드시 이 책을 통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이 책에 침잠하여 전공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위의 시를 포함해서 김진길의 시에 차운한 국창의 시는 모두 5편인데 모두 한결같이 학문을 권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산수경물이나 소회를 읊은 시와는 시적 정조가 자못 이채를 띤다 하겠다. 그 중에 '독서의 목적이 녹을 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을 하는 것이 어찌 명예를 구하기 위함인가?'라는 평소의 소신을 밝힌 것도 있다.

 

  權자兄平叔(우)輓 : 자형인 권우를 애도하는 만사이다. 권우는 국창과 동갑으로 소시부터 친형제와 다름없이 지냈다. 70이 넘었으나 근력이 아직 좋고 시를 읊조리며 성정을 도야했는데 때때로 마음에 드는 벗과 짝하여 동서 사방을 노닐었다. 쇄락하고 화평한 인품은 고을 사람들이 모두 공경했고 후배의 전형이 되었다. 지난 7월에 국창이 찾아가자 신발을 거꾸로 신은 채 반갑게 맞아서는 맑은 바람 부는 초간정에 앉아 기뻐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어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 생각했던가. 국창도 곧 저승객이 될 줄 자인하고 지하에서 서로 쫒아 노닐 날이 멀지 않다고 하면서 눈물을 뿌리며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金參議善吾養根輓(1799) : 안동 소산 출신으로 참의를 지낸 김양근을 애도한 만사이다. 동야는 김양근의 호로 정조가 총애하여 내린 것이다. 평생 진퇴에 대해서 근심을 하고 늘 왕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한 김양근의 동야라는 호칭은 우연하게 맹교씨와 일치한다고 하면서 문장은 우열을 가리지 못하나 효도와 우애는 꼭 같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동야는 사람을 대할 때는 겸손하고 공순하며 동몽을 교육할 때는 잘 깨우쳐 주었고, 누차 간쟁의 직책을 맡았으나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는 것을 쉽게 여겼다. 숨을 거두기 직전에도 지나간 일을 명료하게 기억했고 충성과 효도를 가정에 범절로 전해질 것을 일일이 자손에게 부탁하였다. 누대에 걸쳐 서로 친하게 지내던 세의를 떠올리면서 홀로 부르는 처량한 노래 소리만 가을 강가에 끊어진다고 애통해 하는 내용이다.

 

  卷2 : 書

 

  上訥翁李先生 : 1744년 경 스승인 눌은 이광정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유고에는 모두 6편의 글이 실려 있다. 첫째는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조급하고 횡포한 성격을 바로잡고 싶다는 심정을 고백하고, 아울러 인의와 도덕에 관한 학설을 배워 전에 못 다한 공부를 성취하고자 한 것이다. 둘째는 나태한 습관이 점점 고질이 되어 허송 세월만 하다가 근래에 벗과 함께 산에 들어가 글공부를 할 생각이나 글의 의미를 깊이 있게 보지 못하는 폐단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토로한 것이다. 셋째는 스승의 병환을 염려하는 사연을 서두에 싣고, 아울러 과거 공부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는데 작문의 구법이 졸렬하여 시관의 눈에 들지 않겠지만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여름 시험에는 응시해볼 생각임을 밝혔다. 넷째는 신당에 문상을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광감루와 중대사, 관왕묘 등을 들러 보고 느낀 감회를 서술하면서, 경물에 빠져 본심을 상실함은 유가의 법도가 아니라고 자신을 경계한 것인데 {주자서} 서너 편을 낭랑하게 외우자 마음과 눈이 맑아졌다고 한 고백은 매우 흥미롭다. 다섯째는 뜻밖에 병이 나서 수개월 간 위독하게 지낸 것과 저 번에 보내온 편지에서 생각과 일을 줄이고 독서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라고 한 가르침이 병 조섭에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여섯째는 초가을에 벗과 함께 대승사에서 공부를 하다가 단구의 산수를 구경한 것과 귀가한 지 수 개월 되어 천연두가 사방 수 십 리에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모친을 모시고 오미동에 우거해 있던 사정과 지난 달 보름쯤에 가곡으로 이주한 사실에 대해 말한 것이다.

 

  上淸臺權先生 : 청대 권 선생에게 올린 서간문이다. 명 나라 시인의 시집에 나오는 연대와 고사당, 두보대와 태백루에 대해 질정을 구한 것으로 국창은 시에 나오는 지명이 요성과 악운루를 지적한다고 주장했다.

 

  答仙溪權先生 : 선계 권 선생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모두 3편이다. 첫째는 누차 병상에 위문해 준 것과 서간을 보내 위로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다. 또한 보내준 시문은 자신을 살펴보는 자료로 병든 마음을 치료하는 데 좋은 약이 된다고 하였다. 둘째는 1766년에 쓴 답장으로 13년 간 독서를 폐한 나머지 일 푼의 정력도 남지 않아 득실을 다투는 과장에 출입할 처지가 아니며,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명성에 대해서는 개의하지 않는다는 소신을 피력하였다. 셋째는 1767년에 쓴 답장으로 어린 자식의 병에 대해 걱정하면서 과거에 응시하라는 권유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5ㆍ6년 이래로 세상일이 차마 듣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되어 있어 도리어 입산이 깊지 않음을 한탄한 것이다.

 

  答南野朴戚兄(1747) : 척이 되는 남야 박손경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첫째는 1747년에 답한 것으로 비석을 세운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병세가 중하여 가서 거들지 못하게 된 데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고 {주자서절요}의 의심나고 난해한 것에 대해 추후 질정할 것과 {강록간보}를 빌려 줄 것을 청한 것이다. 둘째는 {강록강보}를 빌려 독파하면서 한두 군데 요령을 얻게 된 것과 볼수록 글맛이 나서 {주자서}를 읽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고 평하고는 이 책을 널리 간행해서 유포시켜야 할 것을 시사했다.

 

  與白雲洞主權丈九淵(1754) : 소수서원 원장이던 권구연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선조 눌재공이 풍기군수 재직 중에 순직하게 되자 소수서원의 어떤 유생이 제문을 지었는데 누구의 소작인지는 실전되어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임사안(任司案)}을 살펴보고 당시 동주와 재유사의 성명을 알려줄 것을 청한 것이다.

 

  上大山李先生 : 대산 이상정에게 올린 서간문으로 모두 2편이다. 첫째는 1763년에 쓴 것으로 전에 질정을 구했던 구절에 대해서는 논변과 해석이 명쾌하고 절실하여 막힌 가슴이 트이게 된 것 같다고 진술하면서 그 간 산더미처럼 쌓인 의난처는 필설로 다할 수가 없어 조만 간에 찾아뵙고 질정을 구하겠다는 내용이다. 둘째는 1777년에 보낸 글로 선고(先稿)를 상세하게 교정해 줄 것과 유묵첩에 발문을 써줄 것, 그리고 {행당원고}의 서문을 써줄 것을 정중하게 청한 것이다. 이 글을 통해 행당은 이미 67세에 대산의 문하에 취학하려는 성의가 절실했고 임종에 미쳐서도 대산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答小山李先生(1784) : 소산 이광정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삼성재의 본손과 달관자의 본손이 집사를 찾아 뵐 테니 그 선조의 문집 교정과 서문을 맡아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이제 때를 놓치면 실전할 수도 있으니 두 원고를 함께 교정하여 연방집의 형태로 간행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答戰兢齋金丈瑞一書(1770) : 풍산 미동에 거주하던 전긍재 김서일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전긍재가 선회(仙會)의 운자를 보내 시를 청하자, 자신은 본래 작시의 율법에 어두워 추위에 떠는 지렁이와 매미처럼 음향이 쉬이 끊기어 볼만한 것이 없으나 감히 거절할 수도 없는 처지이기에 원운과 차운시를 등사해서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與宗丈交河守百鍊(1761) : 교하의 사또로 있는 종장 김백련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족보의 계보를 상의할 일로 절재 후손인 경조의 근황을 탐문해 줄 것과 고산에 거주한다고 하는 유공의 후손 홍기의 소재처를 알아보고 면식이 있으면 그 집에 소장하고 있는 보첩을 베껴 보내줄 것을 청한 것이다.

 

  與李表兄宜時 : 외사촌형이 되는 이의시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2편이 있다. 첫째는 1757년에 작성된 것으로 12조의 별지가 첨부되어 있다. 신주가 심하게 훼손되어 개조가 불가피한 경우의 조치와 절차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했는데 권장(權丈)을 뵙고 여쭈어본 것과 국창이 들은 것을 조목별로 정리한 것이다. 둘째는 상복에 대해 논했는데 참최 3년의 복을 마치고 담제를 지내지 않는 것은 천하 고금에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축문과 여러 절차를 한결같이 {주자가례}에 따라 시행해야 유감이 없다고 하였다.

 

  答杏陰金子友弘輔 : 행음 김자우 홍보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모두 4편이다. 첫째는 1762년에 보낸 것으로 천리 먼 곳에 귀양가 있는 행음을 곡진하게 위로했는데 사건의 전말에 대해 매우 원통해 하고 있는 국창의 심기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귀양으로 인해 관동의 산수를 두루 돌아보게 된 것을 하늘이 도와서 그런 것이라 하면서 풍악은 설경이 가장 좋다는 평까지 곁들였다. 둘째는 1788년에 보낸 것으로 상제에 대해 논한 것이다. '부친의 빈소를 치우기 전에 모친이 죽었을 경우에는 자최 3년을 입어야 한다.'는 {우복집}의 문구를 인용하여 예를 실행할 때 의심스러우면 두터운 것을 따라야 할 것을 개진하였다. 상례는 모두 시례(始禮)를 표준으로 삼는 것이 원칙이나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것은 시의에 따라 적절하게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셋째는 1789년에 작성된 것으로 향당의 직임을 맡고 있는 행음에게 기강을 세우고 명분을 바로잡으며 염치를 권할 것 등을 주문하였다. 넷째는 1778년에 보낸 것인데 유림의 의견을 모아 눌은 선생 유집의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與守吾齋安訥甫敏修 : 수오재 안눌보 민수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모두 4편이다. 첫째는 1777년에 쓴 것으로 수오재가 지은 {행당원고} 발문에 대해 미진한 곳 3조목을 적어 보내 다시 개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둘째도 1777년에 보낸 것인데 유묵첩을 표구하여 보내준데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 한두 군데 개정한 것은 매우 온당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셋째는 1784년 한식에 쓴 것으로 무쇠처럼 차디찬 방에서 궁색하게 살지만 분수에 따라 국화를 따며 남산을 쳐다보면서 유연하게 사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다만 날로 새로워지는 공부가 없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라 고백하고 있다. 넷째는 1785년에 쓴 것인데 화초와 대를 가꾸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하면서 눌은 선생의 [구옥암] 시 등을 보내주니 벽에 걸어 두고 보면서 마음을 잘 다스릴 것을 당부하였다.

 

  答東皐金士重鼎東 : 동고 김사중 정동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모두 5편이다. 첫째는 1762년에 보낸 것인데 근래 {주서}를 보고 느낀 소회를 밝힌 것이다. {주서}의 언어와 문자를 끌어다가 문장을 수식하거나 현학의 자료로 삼는 것은 잘못이고 한결같이 몸과 마음으로 체험할 것을 강조한다. 둘째는 1764년에 보낸 글로 정시일(庭試日)에 보소의 여러 분이 구경삼아 응시를 독촉하기에 과장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애초에 지필묵을 휴대하지 않아 시제가 걸린 뒤 곧바로 나와 버린 사정을 서술하였다. 이때 주해와 자법이 볼만한 개원사 소장의 {천자문} 판본을 구입해 가지고 와서 어린 자식을 가르치는 교재로 삼았다. 셋째는 1765년에 쓴 글로 석과 갑이란 아동의 특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석과 갑은 동고의 자식으로 국창에게 보내 교육을 부탁한 것 같다. 석은 시가의 기질을 타고나 색태(色態)가 많으나 기력이 떨어지고, 석은 가끔 강건하고 기이한 구절을 내나 결구가 약한 게 흠인데 동네의 또래에 비교하면 뛰어난 편이라 평하였다. 넷째는 1766년에 쓴 글이다. 지난번에 항우의 죽음 여부는 범증과 관계가 없다고 논한 적이 있는데 참으로 의론문의 체재를 체득한 것이다. 다섯째는 1767년에 쓴 글로 동고 자신이 취중에 망발한 것에 대해 사과의 뜻을 담은 서신을 보내준 데 대한 답장이다. 잘못을 후회하는 것이 선(善)의 단서라 지적한 뒤, 도정절의 [지주] 시 1편을 종신토록 마음에 새겨 잊지 말 것과 뜻을 오로지해서 심성을 다스리는 공부에 종사할 것을 충고하였다.

 

  與權其天思浩(1784) : 권기천 사호에게 보낸 서신으로 스승의 팔질고 및 친우인 조영산의 서신, 삼의골에 갈 위문장을 아울러 보내니 확실한 인편을 통해 전달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答李戚丈溟 : 척장이 되는 야일 이명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모두 2편이다. 첫째는 1744년에 쓴 것으로 병든 누이의 약재를 보내준 데 대해 매우 감사하다는 뜻을 밝힌 글이다. 둘째는 1747년에 쓴 것으로 천질에 약을 먹어도 뚜렷한 차도가 없는 것이 염려되고, 오래 전에 문방사우가 떨어졌는데 마침 보내 주어 고마워하는 내용이다.

 

  答朴大憲弼載(1748) : 박대헌 필재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백밀연담환을 보내 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전에 구하던 호격문과 기호설을 별지에 적어 보내주면서 [공중누각기], [귀대야유기], [구파설] 등의 글에 대해서는 고향에 돌아온 뒤 서신을 보내 토론할 계획임을 밝히는 내용이다.

 

  答洪報恩侃戚丈(1748) : 척장이 되는 홍보은 간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내일 광산에 근행하러 간다는 내용으로 보아 객지에서 작성된 글로 보인다. 홍간이 편지를 보내 '객지에서 병이 들면 제삿날을 당하더라도 소식(素食)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자, 기일을 당해서는 대체로 사흘을 소식하고, 친구의 부음을 들으면 하루나 이틀, 혹은 나흘을 소식하는 것이 가문의 범절이라 항변하고, 육식을 금한다는 내용이다.

 

  答楊公輔埰(1748) : 양공보 채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금성에서 돌아온 뒤 수 삼 일의 공력을 들여 작성한 글이다. 양공보가 질문한 수십조의 문목에 대해 조목별로 열서한 장문으로 이 중 서법에 대해 논술한 것이 주목된다. 한대의 서법은 수척하면서도 강경하여 정제된 맛을 풍기는 바 감정이 적고 골기가 많은 편이다. 당대의 서법은 넓으면서도 살이 찌고 요염하면서도 완만하여 골기가 적고 색태가 많은 편이다. 혹자는 당인의 서법은 굳세면서도 격식이 있어 송대의 글씨로는 따라갈 수 없다고 한다. 진무기는 위부인의 자인데 예서를 잘 써서 우군이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회소첩}을 어떤 총사가 수 십 금을 주고 구입했다고 하는데 중국 사람들의 호사가 심한 것을 볼 수 있다. 소주의 독락사 편액은 이백이 쓴 것으로 필세가 날아오르는 듯 발랄한 생기가 돈다. 설암은 원대의 인물로 본래 승려였으나 그가 쓴 주점 글씨를 조송설이 보고서 환속을 권해 조정에 천거하여 관직을 주었으니 바로 이보광이다. 대체로 서법은 세업과 관계가 있다. 이지봉은 왕희지와 헌지, 구양순과 구양통 부자, 우리나라의 이암과 이강, 김희수와 김로 부자는 모두 글씨를 잘 썼으나 대체로 혈기에서 나온 것이라 논평하였다.

 

  與朴자兄君源孝大(1745) : 자형이 되는 박군원 효대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거촌에 도착한 뒤 내일 부중과 함께 눌은 선생이 계신 각화사로 공부하러 가야 될 형편이기에 부석사에 가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옛날 사람들은 천 리를 걸어와서 스승을 모셨는데 이제 백 리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헛되이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答宗叔역窩公震遠 : 종숙인 늑와 김진원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모두 3편이다. 첫째는 1754년에 쓴 것으로 부친의 명으로 상량문을 지었다는 것과 과거는 때가 되면 응시해 보겠다는 내용이다. 둘째는 1763년에 쓴 것이다. 선고 형제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 뒤 세상일에 대해서는 괘념치 않는다. 삼 백 년 간 이루지 못했던 족보의 편찬을 이제 시작하게 되어 구담재사에 보청을 설치했고, 서울에 거주하는 종친들도 남한 개원사에 보청을 설치하였다. 셋째는 1764년에 쓴 글이다. 혼사가 있는 집에서는 한결같이 치부에 뜻을 두어 문학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데 고가의 후손이라도 불학무식이면 무인과 다를 게 없다. 보사의 일로 개원사에 갔다가 본의는 아니나 과장에 출입했는데, 과거생들이 의리는 전혀 알지 못하고 오직 과환으로 마음을 삼는 게 매우 한심스럽다는 세태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페이지만족도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성에 만족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