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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551 : 국창유고...(부, 예천방문 1,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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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安訥甫 : 안 눌보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모두 3편이다. 첫째는 1784년에 쓴 글로 {병곡집}의 표제를 쓰는 일에 관해서는 사람을 구했고, 국화 몇 포기를 보내 준다는 내용이다. 둘째는 1788년에 쓴 글로 상소에 대한 왕의 답변이 매우 넉넉하여 스승 눌은의 오명을 깨끗이 씻어버리게 된 것을 기뻐한 것이다. 셋째도 1788년에 쓴 글인데 각자 병이 들어 소청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데 대해 한탄한 것이다.
答金道彦宗德直甫宗敬四昆季書(1794) : 김도언 종덕 4형제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우선 김도언의 계씨 상사에 대해 애통함을 표시하고, 수오재 안민수의 행적을 적어 보내 비문을 청한 내용이다.
與權汝三思謙書(1784) : 권여삼 사겸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노인의 몸으로 눈이 쌓인 백릿길을 무릅쓰고 찾아 준 데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자신처럼 명이 궁한 자는 죽기도 쉽지 않다고 하면서 답례로 마땅히 방문하여 여러 벗과 함께 계원과 암정, 석천의 사이에 노닐고 싶으나 조만 간에는 예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내용이다.
答李汝行時達書(1785) : 이여행 시달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이여행의 주갑이 되던 해에 보낸 글이다. 이여행이 자신의 환갑날에 국창을 초청하자 가내 여러 사정을 들어 양해를 구하고, 부탁한 회갑 송축시에 대해서는 원시의 운자를 기다린 뒤 차운해서 올리겠다고 하였다.
答金和國彦燮書(1785) : 김화국 언섭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사또가 부임한 뒤 독촉하는 거조는 없으나 도리로 보아서는 자제를 보내 하소연해야 하니 형편을 보아 출행하는 것이 좋겠다. 관문에 출입하는 경우에 시비를 따질 때는 사리를 헤아려 다툴 것은 다투어야 하니 합치되면 머물고 합치되지 않으면 떠날 뿐이다. 오직 공정과 염치, 두 글자로 마음 쓰는 법을 삼아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答趙光彦頊書(1785) : 조광언 욱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역사서를 읽는 법은 흥망과 치란의 자취, 어진 자와 아첨하는 자, 충성스런 자와 간사한 자의 행위를 서로 참고하여 감계로 삼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與權支國以肅書 : 권지국 이숙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모두 2편이다. 첫째는 1785년에 지은 글로 득실로 본심에 누를 끼치지 말 것과 더욱 공부에 매진하여 초연히 속세의 학문을 탈피하여 자득할 것을 주문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의중의 사람과 손을 잡고 아름다운 산사 사이를 노닐면서 천고의 흥망성쇠를 논하고 싶다고 했다. 둘째는 서로 알고 지낸 지가 이미 40여 년 되는데 보내온 글에 감당할 수 없는 말이 많아 부끄럽다 하면서, 노년에 더욱 공부에 힘써야 하되 새로운 책을 보는 것 보다는 예전에 읽던 책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했다.
與李季胤重績(1791) : 이계윤 중적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적성산인이 선물한 영수장(靈壽杖)이란 지팡이를 편지와 함께 보내면서 백 세 뒤에 이 지팡이를 짚고 백옥루로 나를 찾아와서 적성자를 만나자고 하였다.
答玄上人(1785) : 현상인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보내준 싯구 중에 '전생후사(前生後死)'의 말은 실소를 금치 않을 수 없는데 전생이 모두 꿈이거늘 후생이 어찌 홀로 꿈이 아닐 것인가 반문하면서 보내준 청부를 백주와 바꾸어 먹었더니 대취하여 자세하게 답할 수가 없다는 내용이다.
答李汝承錫胤(1786) : 이여승 석윤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그 곳의 풍토와 습속이 우리 남쪽과는 아주 딴판이니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고 마음을 더욱 굳게 먹어 고향 친구의 기대에 부응하라고 당부한 뒤, 그 곳 주위의 여러 고을에는 우리 영남 선배들의 거사비가 있으니 사또도 작은 고을이라 여기지 말고 반드시 충서와 공렴으로 선정을 펼 것을 바라는 내용이다.
答朴憲度漢淵(1786) : 상중에 있는 박헌도 한연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병이 날 경우에는 술도 먹고 고기도 먹어야 하니 상중에 몸이 상해서 병이 난다면 군자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몸을 훼손하여 죽는 것을 자식이 없는 일이라고 강도 높게 비난하였다. 예서를 읽는 겨를에 산서(山書)를 본다고 하는데 길지를 구하는 것이 상정이긴 하나 묘소의 길흉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예전의 학업을 익히어 그 의심스런 것은 능옹(能翁)에게 질정하기 바란다. 본래 청약한 자는 혈기가 부족한데 단오에 익모초를 취해 음지에 말렸다가 빻아서 환을 만들어 복용하고, 궁귀와 섞어 만든다면 더욱 약효가 좋다고 하였다.
答金君若宗五書 : 김군약 종오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모두 2편이다. 첫째는 1777년에 쓴 글로 분(憤)에 대한 해설과 눈이 많이 내리면 보리 풍년이 든다는 속언에 대해서는 {우복집}을 살펴본 뒤 다시 논하겠다는 것이다. 둘째는 1778년에 보낸 글이다. 외우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필시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인데 천 번을 읽으면 글의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 경전의 말씀은 모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니 단지 뜻만 부연해서는 안되고 체험하여 실천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答宋坦經弘九(1789) : 송탄경 홍구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독서법에 대해 논하고 있다. 천 권의 책을 펼쳐 보는 것이 소리를 내어 열 줄의 글을 읽는 것만 못하고, 아무 생각 없이 천장의 글씨를 쓰는 것이 유의하여 한 글자를 쓰는 것만 못하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가지고 치밀하게 공을 들여 익숙하게 외운 뒤 다른 책이나 우리나라 문장가들의 글을 읽어 견해를 넓혀야 한다. 학문이란 사람에게 있어서 음식과 의복과 같은 것으로 하루라도 그만둘 수가 없으니 반드시 성인의 '배움은 미치지 못한 것과 하고 오히려 잃을까 두려워한다.'는 말을 마음속에 새겨야 한다.
答金鼎吉象鉉(1786) : 김정길 상현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의례(疑禮) 서너 조목의 질문에 대해 답변한 것인데 용강(龍岡) 처사의 문목 답서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본 생가의 상사를 위문하는 자는 마땅히 각 폭을 사용해야 하며 한 폭에다 상주의 이름을 연서하여 묻는 것은 마땅치 않다. 답장의 연월 밑에 먼저 주인의 성명을 쓰고 그 우측에 상인의 이름을 순서대로 쓰는 것이 좋다.
答孫汝述弘纘(1788) : 손여술 홍찬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소산장을 뵙고 제반의 사정을 갖추어 말했으나, 한 가문의 문자를 한 사람이 짓는 것은 번잡하다며 사양을 했다. 전에 보내준 묘갈문에 대해서는 소산장이 지적은 하면서도 역시 손을 대지 않으므로 참람함을 잊고 대충 산삭하고 윤문해서 별지로 보낸다는 내용이다.
答金士重 : 김사중에게 답한 편지로 모두 2편이다. 첫째는 타女와 영아(嬰兒)에 대한 답변을 매우 조리있게 논술했다. 타녀란 마음을 지적한 것으로 제어하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고, 영아란 기를 지적한 것으로 기르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둘째는 1784년에 쓴 글로 자신의 소회를 개진한 고백적 성격의 장문이다. 지금의 세상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어렵다. 사소한 이해라도 있으면 문득 계교를 부리면서 논설과 취지가 자기와 같으면 가까운 친척이 되고, 다르면 초와 월처럼 전혀 모르는 사이로 지낸다. 종중의 산을 둘러싸고 전개된 산송에서 패하게 되어 숭정처사 두 선조의 은거지와 4ㆍ5대에 걸쳐 소유하던 땅이 아전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내가 죽은 뒤에는 말 한 마디 언급할 자가 없을 것 같아 올해 안으로 예천 사또에게 소장을 올리고 내년 봄에는 서울로 올라가 격쟁할 생각이다. 산송 문제는 죽을 각오를 하고 논쟁을 벌일 정도로 원통함이 골수에 사무쳐 있었다.
卷3 : 書
答朴茂仲別紙(1785) : 박무중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별지가 첨부되어 있으며 {매당집(梅堂集)}의 문자 출처와 내력의 질의에 대해 변증한 것인데 5, 7자 혹은 2, 3자로 백여 조목에 달하는 문목은 다소 현학적이며 전거를 인용하여 문의가 매우 난해하다.
與龜山(1786) : 귀산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객지의 숙소를 방문해서 두 편의 증별시를 준 데 대해 고마움을 표한 뒤, 말 위에서 문득 '양(揚)' 자 운의 시를 차운하여 신당에 도착해서 보낸다는 내용이다.
與三悔堂金子晦敏源 : 삼회당 김자회 민원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새벽달 아래 벗의 얼굴을 마주하여 예전에 접하지 못했던 좋은 말씀을 듣게 된 것은 참으로 노년의 즐거운 일이었음을 회상하고 분부대로 졸고를 보낸다.
答能皐朴申慶丈 : 능고 박신경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모두 2편이다. 첫째는 1784년에 쓴 글이다. 지금 세상에 학문에 뜻을 둔 자가 몇이나 되는가. 금곡 문헌의 책임은 모두 집사에게 달려있다. 선사(先師)의 유집을 간행할 기약은 없고 일후 일실될 염려도 있는데 등사를 한다니 좋은 소식이다. 둘째는 종숙인 늑와공의 유고를 산정해 달라는 부탁이다. 근래 문인이니 시인이니 자처하는 자는 모두 유고를 남겨 문단의 폐습이 되었다. 그러나 자식된 자가 선조의 유고를 수습하여 후손에게 전하는 것은 본시 인정인 것이다. 선사의 유집 두 책을 찾아 보내니 등사가 끝난 뒤 다시 빌려 보았으면 한다.
答金丈弘景弘成弘式(1746) : 김홍경 계범 등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회암시 절구는 고맹(膏盲)을 치료하는 약석이 되니 이를 써서 좌우에 붙여두고 아침저녁으로 반성하는 것이 마땅하다. 감히 후덕한 자의 아끼는 뜻을 저버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答李行觀 : 이행관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모두 2편이다. 첫째는 1771년에 쓴 글이다. 수요(壽夭)는 명에 달렸고 궁달은 하늘에 달렸다. 모두 지력과 계교로써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분수에 따라 글을 읽고 편한 마음으로 일을 처리할 뿐이다. 죽은 이를 조문할 때는 슬퍼하고 사람과 교제할 때는 진지하며, 칭찬한다고 해서 자랑하지 않고 비난한다고 해서 저상하지 않으며, 가난하고 천하다고 해서 걱정하지 않고 시세에 따라 영리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는 1777년에 쓴 글이다. 보내온 시의 의미가 깊고 어구가 자연스럽다. 졸렬한 솜씨로 감히 차운해서 보내기는 하나 뜻이 짧고 말이 속되니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바란다.
與孫而成雲五 : 손이성 운오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모두 3편이다. 첫째는 1783년에 쓴 것으로 선고(先稿)의 등서를 착수하지 못했고 보내온 초본에 오자가 많아 정밀한 교감이 필요한 것에 대해 피력하였다. 둘째는 1786년에 쓴 글로 선고의 교감을 일대의 종장인 능고장(能皐丈)에게 부탁해 두었으니 찾아뵙고 도리로써 간청해 보라는 내용이다. 셋째도 1783년에 쓴 것으로 선고는 지난달에 능고장에게 전해서 이미 교정보는 일을 착수했으나 서문을 써달라는 데 대해서는 굳게 사양을 하니 지성으로 간청해 볼 것과 선고의 간찰 두 편을 김천용의 고적첩에서 구해 원고의 말단에 등서한 것을 말했다.
答李伯茂慶蔓 : 이백무 경만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모두 3편이다. 첫째는 1777년에 쓴 글로 상례와 제례 등의 절차를 물어온 데 대해 답변한 것이다. 아내의 상에 기년복을 벗으면 신주를 철수하는 것이 예법에 맞지만 그대로 두는 것은 자식의 정을 참작한 때문이고, 상인의 복색이 소상이나 대상에 흰색을 사용하고 담제에 검은색을 사용하는 것은 통용되는 예법이다. 둘째는 신주가 빈소에 있는데 상식을 폐하는 것과 상중에 손님을 사절하는 것에 대해 논변하였다. 셋째는 1789년에 쓴 글이다. 시를 짓고 책을 읽는 것이 원래 문인의 본분이다. 그러나 경물을 만나 흥을 부치며, 책상을 대해 촛불을 밝혀 공부할 마음을 내는 것이 쉽지는 않다. 다만 좋은 산수를 찾아 벗과 함께 거닐고 싶은 생각은 아직 쇠하지 않았다. 별지로 물은 윤달에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서는 혹자의 문목에 답변한 퇴계의 편지글을 참고삼아 보낸다.
答李賓汝尙觀(1785) : 이빈여 상관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헌작, 연제 후 조석전, 하관(下棺) 등에 있어서 변례(變禮)에 대해 답변한 것이다.
答金子悔弘度(1766) : 김자회 홍도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환란은 옛사람들도 모면하지 못했으니 신선이 사는 곳을 어떻게 바닷가의 풍토와 비교할 것인가 라고 반문하면서 양양으로 가게 된 것이 불행 중 다행한 일임을 위로한 것이다.
答河宗甫宅海書(1788) : 하종보 택해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의례 몇 조목에 대한 질문에 선배들의 예설을 참작해서 답변한 것이다. 모든 복은 다 시제(始制)를 가지고 결정하니 예법에 어긋난 것을 알면 사후라도 개정해야 한다.
答后山李學甫宗洙書(1789) : 후산 이학보 종수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보내온 {행당원고} 발문에 대해 약간의 산정을 구한 것이다.
與郭一初萬冑書(1789) : 곽일초 만주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자식으로 지녀야할 올바른 효성에 대해 논한 글이다. 보내준 선고의 교정을 아직 끝맺지 못해 비판을 면할 길 없다. 몸을 세우고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끝이다. 그러나 몸을 세우고 이름을 날리는 것이 영달이나 부귀를 이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경으로 태만을 이기고 의리로 욕심을 이겨 그 몸을 선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군자의 자식'이라 부르게 하는 것이다.
與河孟用龍馹(1789) : 하맹용 용일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선고를 교감하고는 있으나 마음과 뜻이 날로 혼매하여 하루에 서너 줄 밖에 볼 수 없는 형편임을 해명하는 내용이다.
與李稚春우(1789) : 이치춘 우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당초 대산 선생의 기일 전에 한 번 가서 곡할 생각이었으나 우환이 겹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자책하는 내용이다.
答朴甥時若 : 생질인 박시약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모두 2편이다. 첫째는 1783년에 쓴 것이다. 심신을 수습해서 글을 읽고 성취를 이루어 몇 백 년 내려온 세업을 실추해서는 안된다. 또한 마음을 미루어 백모를 친모처럼 섬기어 사랑과 공경을 다해 봉양해야 하며, 아내의 부족한 점은 정성스럽게 깨우쳐 주고 지나친 점은 순순하게 비유를 들어 이해시켜야 한다. 둘째는 1791년에 쓴 것이다. 마마를 앓고 나서 정신과 기운이 허약할 것이니 밭 한 뙈기를 팔아 생선과 쌀로 바꾸어 원기를 돋우고 분수에 따라 독서하면서 근본을 굳게 다져 잡념에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경여는 너에게 사표가 될 만하니 날마다 종유하여 견문을 넓힐 것이며, 모든 일을 자연과 운수에 맡기게 되면 근심도 시름도 없을 것이다.
答申昌伯興烈(1786) : 신창백 흥열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주자는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할 뿐이오, 성패란 미리 예측할 수가 없다'고 했다. 비단 공력을 세우는 데만 그러할 뿐이 아니니 참으로 배우는 자가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긴요하지 않는 출입과 설화는 그만두고 뜻과 몸을 다해 독서하고 사색하여 좋은 시간을 자신의 소유로 삼아 향촌 사회의 기운을 증진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答河規汝錫中(1785) : 하규여 석중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천하의 일은 모두 사세에 달려있다. 사세란 부귀와 높은 관직을 도외시할 수 없는 바, 이 것은 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독실하게 공부한다면 좋은 바람을 만나 청운에 올라가서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答河道而錫九(1791) : 하도이 석구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상 제례에 대한 문답은 겨우 등서를 마쳐 인편에 부쳤으나 눈은 어둡고 글씨는 서툴러 남에게 보이기 민망하다. 후일 분류하고 정정한 뒤 다시 써서 변례의 일례로 참고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일은 우리 선비들이 해야할 부득이한 공부로 말썽의 혐의가 있다고 해서 높은 다락에 방치할 필요는 없다.
答權希進進道(1791) : 권희진 진도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서애집}은 말한 대로 빌려 주고 싶으나 확실한 인편이 없다. 지금 보내는 {예기}, {회암서}, {율곡집}은 언제 빌려온 것인지 모르겠으나 지난 번 서가를 열람하다가 그 도서를 보고 돌려주는 것이다. {예기}는 박종백, {율곡집}은 권방응, {주서}는 그대의 종가에 전해주기 바란다.
與安子居爾宅(1788) : 안자거 이택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이유서가 병곡옹을 추모하는 계회를 발론하여 18일에 간소(刊所)에서 회합하기로 했다. 화국에게 통지를 못했기에 이 소식을 구담에 전해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與金進士一老宗壽(1792) : 진사인 김일로 종수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세상 사람들이 과거에 오른 뒤에는 학문에 유의하지 않는데 참으로 경계할 일임을 탄식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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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1,591
예천군 방문(대구 수성새마을회 농촌봉사활동) [기사] : (사)대구수성구새마을회(회장 하윤수)는 2019년 8월 12일 새마을정신계승사업의 일환으로 자매도시인 경북 예천군에서 농촌봉사 활동을 실시했다.(경북매일신문 201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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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