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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552 : 국창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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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柳養直浩源 : 류양직 호원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망천 옥연의 승경이 꿈속에서도 선하다. 내년이 임술 해는 아니지만 7월 열엿새의 달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을 테고 물색도 적벽이나 귀대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겸암과 옥연정사, 화천사를 노닐면서 예전의 현인들에 대해 사모의 정을 부치고 싶으나 노인으로서 용이한 일은 아닐 듯 싶다. {평성세고}의 서문과 발문 등의 글을 보내드리니 선대부 길주공의 행장을 등사해서 보내주기 바란다.
答李命吉弘天(1794) : 이명길 홍천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국임(局任)은 실로 분수에 넘치는 일로 사임 의사를 밝힌 단자를 다섯 번이나 보냈으나 아직 허락을 받지 못해 보름쯤에 대면해서 교체를 요청할 작정이라는 내용이다.
答李仲章天燮(1794) : 이중장 천섭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보내온 {행당원고}의 문자를 펼쳐보니 눈물이 절로 떨어진다. 누차 상전벽해의 변고를 당했으나 동고옹이 또 나를 버리고 먼저 떠났다. 덧없는 세상에서 죽고 사는 일로 바쁜 것이 이와 같은가.
與趙甥基重基大(1785) : 생질인 조기중, 조기대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사람의 혈기는 본래 화평하여 봄날 따스한 햇살 같고 심지는 본래 광대하여 넓은 하늘과 같다. 상서로운 구름과 단비, 사납게 부는 바람과 우뢰의 구분은 마음 하나를 버리고 잡는 사이에 있는 것이다. 마음을 잡는 요령은 오로지 공경을 유지하면서 글을 읽는 데 있을 뿐이다. 선배 가운데 상중에서 예서를 읽어 힘을 얻은 경우가 많다. 생업을 닦는 것이 학문의 선무가 되니 하인들을 잘 다독여 농사에 힘쓰게 해서 전래의 토지를 묵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與內弟蔡幼簡貞大(1775) : 내제인 채유간 정대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장례의 여러 절차를 논했는데, 축문은 마땅히 자식의 명의로 해야 하고, 주부가 아헌을 드리는 것은 수숙(嫂叔)의 혐의가 있으니 피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與金文若應輔(1777) : 김문약 응보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정리되지 않은 원고본 두 책은 전에 약속했던 대로 보내니 편목마다 교감을 해서 다 해진 옷을 기워주 듯 정정을 바란다. 우리 동방에서 사람을 취재하는 도는 과거시험 한 길 뿐인데, 명색이 선비인 사람이 과거를 폐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남보다 높다고 할 수는 없다. 설령 유사의 눈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후진들을 교도해야 할 방책을 잃어서는 안 된다.
答金善吾養根(1779) : 김선오 양근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김양근의 시문에 대해 비평한 것이다. 임(壬) 계(癸) 연간에 지은 시문은 격식을 벗어난 것인데, 완벽한 작품은 간간이 눈에 띄었다. 그 후 수 십 년 간 시문에만 전문적으로 치중하여 등단은 했으나 아직도 전인을 답습하고 옛날 작품을 모방하는 병폐가 있었다. 지난해와 금년에 지은 수 백 편의 시문은 평담하면서도 청려하고 원만하여 일가의 풍골을 이루었다.
與權子淵明佑 : 권자연 명우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모두 2편이다. 첫째는 1788년에 지었다. 상소의 초본에 미진한 데가 있으나 반중(泮中)의 여러 벗들과 상의하면 될 것이다. 이 번 일의 성패를 이미 하늘에 맡겼으니 귀향 시기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호계서원에서 {창의록}을 정리한다고 하는데 법전의 강 감찰은 동주가 되었으나 아직 취임하지 않았다. 난졸재의 시호를 청하자는 논의가 갑자기 나왔는데 실직으로 참판 벼슬을 지내도 시호를 내리는 은전이 없어 전례를 벗어나 소를 올리는 것은 불가하다고 한다. 두 번째 편지도 1788년에 쓴 것으로 보인다. 듣기에 소행(疏行)의 광경이 아름답지 않다고 하니 실로 우리들의 일에 해가 된다. 이미 그 곳에 도착했다면 소를 올리는 일을 그만 둘 수 없는 처지인데 능행의 날자가 조만 간에 정해지지 않을 테니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答金錫之百亨書(1776) : 김석지 백형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필획에 기골이 부족하니 안태사의 수법을 배운 뒤 퇴도 선생의 심획을 익혀야 굳건한 필력을 이룰 수 있다. 보내온 {행당원고}의 발문에 단지 재예만을 언급하고 지성스런 효우와 타고난 지식에 대해서는 생략했는데 내가 지은 유록을 참고한 뒤 수정해 주기 바란다.
與金來初復慶姻丈書(1785) : 인척 어른이 되는 김래초 복경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역서를 보내는데 첫 장은 없어져 온전하지 못하다. 숭정 정축년부터는 절의를 지키는 선비들이 일상 문자에 청 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기에 역서를 나누어주면 반드시 첫 장을 찢어버린 뒤에 보기 때문이다.
答李府伯集斗仲輝 : 안동 부사로 있던 이집두 중휘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지나간 밤에 화재가 나서 초당이 모두 타버렸다. 장차 잿더미 속에서 몸을 가릴 계책을 세워야 할 터인데 재목과 개초를 구할 수가 없다. 조만 간 재목과 공석을 넉넉하게 조처해 주기 바란다.
答南厓權敬叔(1798) : 남애 권경숙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저 번에 내격묘와 고죽원에 시호를 내린 것과 오산과 평해에 치제한 것은 실로 천고에 없는 은전이다. 이에 어제문과 예관(禮官)의 시, 개제축문을 서신과 함께 보낸다.
答李仲章天燮 : 죽하 이중장 천섭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수오재유고}는 당시의 제현들이 정성을 다해 교감한 것인데 돌아와 생각해 보니 오히려 미흡한 곳이 있다. 중초(中草)가 나오면 그대에게 교감을 청하겠다.
答李日升鎭東 : 이일승 진동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아무런 일도 없이 생병이 났다고 하는데 혹시 후회할 짓을 했다면 종일토록 두렵고 조심해야 할 것이다. 또한 더욱 마음 다스리는 공부를 해서 강개한 성격을 고쳐야 한다.
答臨汝齋柳秀夫규(1800) : 임여재 류수부 규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거듭 벼슬을 받은 것에 대해 축하하며, 해서의 객지에서 당한 상은 반장해 올 방법이 없어 걱정하고 있다. {모산고(慕山稿)}의 서문 쓰는 일은 유의하고 있는가.
答柳安岳相祚 : 류안악 상조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붓과 양종의 어물을 보내주니 기쁘고 고맙다. 방금 독한 약을 복용해서 현기증이 심해 소회를 다 펼 수가 없다. 책자는 삼가 받아 보았다.
與權其天思浩(1783) : 권기천 사호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남아라면 천지 간에 허다한 사업이 있거늘, 작은 일과 덧없는 이름을 얻었다고 해서 평생의 사업을 마쳤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가학을 진중하게 여겨 차례로 체득하여 백천간두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야 할 것이다. 선사의 수적이 모두 소실되었으니 하늘의 뜻이 과연 어떠한가. 매번 황전의 유허지를 지나다보면 구옥암이 모두 땅속에 묻혔고 한 개 바위만 탈이 없다. 하루 종일 배회하니 선생의 모습을 뵙는 듯 하였다. 허다한 문적이 없어져 버려 후학들이 어디에서 선생의 정신을 볼 것인가.
答竹下李仲章 : 죽하 이중장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시월 삭일 신묘에 일식이 있어 검은 안개가 사방에 가득했는데 전염병이 돌 징조인 듯 하다. 고죽원에 내린 은전은 천고에 없던 일로 필시 감회가 있을 터인데 맞이하는 행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게 한스럽다. 보내온 서신과 주옥같은 시편을 펼쳐보니 다시 대면한 듯 하다. 평측의 공부를 익히지 않아 화운할 마음을 내지 못하다가 이제 운자를 엮어 편지 끝에 써서 보낸다.
與臨汝齋 : 임여재 류규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안극인이 선고의 교감 문제로 고죽장, 류하옹, 황천장을 사단산사로 초청하여 문자를 따지고 가르침을 받을 계획이다. 나를 사이에 두고 청하니 참석의 가부를 돌아오는 인편에 부쳐주면 고맙겠다.
答李木之楨國 : 풍산 우렁골에 거주하던 이목지 정국에게 답한 서신이다. 손에 마비가 와서 고생하다가 이제 답장을 닦게 되었다. 일상의 공부는 수준에 이르렀으리라 짐작된다. 만나서 격려하지는 못하나 마음으로 기대하는 것은 높다.
答權敬叔聖제 : 권경숙 성제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원고(寃稿)}의 발문을 몇 번이나 읽었는데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초본에서 베낀 것을 전했는데 누락된 곳이 없었다. 하필 수정할 필요가 있는가.
序
平城遺事錄後敍 : {평성유사록}의 후서로 1761년에 지은 것과 1765년에 추가하여 서술한 것이 있다. 시조로부터 이하 여러 대에 대해서는 세보가 일실되어 징험할 수가 없다. 사람의 언행은 비록 미세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를 통해 그 평생을 대략적으로 살필 수 있다. 유사란 신빙할 수 있는 것만 기록해야 하지 조금이라도 포장하는 뜻이 있다면 이는 조상을 욕보이는 것이다. 세계도와 설을 붙이고 옛기록을 수습하고 탈고하여 책을 이루었다. 체재는 먼저 생졸과 관작을 기술하고 다음에 유사, 배위 세계, 분묘의 위치를 기술하고, 마지막에 자녀를 기록하였다. 전서부군으로 부터 망제(亡弟)에 이르기까지 모두 14대이다. 후일 조상의 세계에 대해 뜻을 둔 자가 있어 고적을 두루 상고하여 이 {유사록}을 증보하리라 생각한다.
書破閒集後(1762) :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 뒤에 쓴 글이다. 김경수가 이 책을 보내와 한가할 때 읽어보았다. 이인로는 몸소 난리를 겪고 조정의 변고를 목격했을 터인데, 한 마디도 거기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다. 호사스럽게 문묵으로 스스로를 자랑하고 태평한 세대에 자신만 득의하였으니 이규보의 비판을 받는 것도 마땅하다.
書역翁稗說後 : 려말의 학자 이제현의 {역옹패설} 뒤에 쓴 것이다. 경수에게서 이 책을 얻었다. 물건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원래 덧없는데 하물며 서책이랴. 책은 읽는 사람이 주인일 뿐이다.
書古詩抄後 : {고시초} 뒤에 쓴 것이다. 고시 한 책은 나의 7세조 눌재부군이 20세에 쓴 것이다. 자획에 잔결된 것이 많고 표지도 좀이 먹어 이에 새로 장정을 했다. 표지에 쓰인 아홉 자 및 책 끝에 초서로 쓴 당시 한 수는 모두 부군의 유묵이다.
書張掌令南州日錄後文輔伯勳 : 장령 장문보 백훈의 {남주일록} 뒤에 쓴 글이다. 지난 1795년에 장건보의 집에 들렀는데 건보가 자기의 선조 장령공의 {일록}을 보여주었다. 그 책에 나의 7세조 눌재공 형제의 기사도 있어서 양가의 세의가 오래된 것을 알았다. 금년 봄에 건보의 부친이 {일록}을 가지고 와서 한 벌 써 달라고 하기에 선배의 자호와 관직을 대략 상고하여 주를 붙여 등서를 했는데 그 음운과 품격을 후생으로서 함부로 말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충담하고 화평하여 풍치를 상상할 수 있다.
書平城世稿序後(1770) : {평성세고} 서문 뒤에 쓴 것이다. 1748년에 은진에 이르러 절재공의 후손 소장의 세계도 소첩을 보았다. 위로는 전서부군 윗대 3세가 기록되어 있었고 아래로는 절재공 윗대 4세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첩에 근거하면 절재공은 실로 전서부군의 증손이고 나의 8세조 사월부군과는 재종형제가 된다.
書中山八恨解詩後(1778) : [중산팔한해] 시의 뒤에 쓴 것으로 소한절에 지었다. 이 시는 눌옹 선생의 작품이다. 선생이 태백산 황지 아래 초가를 얽어 녹문정사라 하고 잡영 20수, 소시 15절 및 [천성악색인]을 지었다. 다시 [팔한해] 시를 지어 흥을 부치고 뜻을 우탁했다. 속세를 벗어나는 금회를 살필 수 있는데 시풍이 맑고도 전아하며 온화하고도 평실하다.
書先師先生贈別金成仲鎔丈序後 : 눌은 선생이 김성중 용과 송별할 때 써준 서문 뒤에 쓴 것으로 1778년 복월에 지었다. 내가 약관에 태백산 각화사에서 선생을 모시고 있을 때 선생께서 산수의 승경에 대해 말씀하던 중 이 글을 꺼내 보이며 '장부가 세상에 뜻을 펴지 못하면 깊은 산속에 들어가 독서하면서 몸을 선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제 백발이 다 되어 생각해 보니 선생의 말씀에 과연 무궁한 뜻이 있는 걸 알겠다.
書桃原翁次玉溪趙上舍相변采山歌釣水曲韻後(1781) : 옥계 조상변의 [채산가] [조수곡]에 차운한 도원옹의 시문 뒤에 쓴 것이다. 도원옹이 이 시를 짓고서 미처 조상사에게 전해주지 못한 채 갑자기 위독했는데 내가 옥계에 가는 것을 보고 난고를 수습해서 전하고자 했다. 내가 '후에 보내는 게 좋겠다' 이르고 옥계에 갔는데 돌아오기 전에 옹은 고인이 되었다. 두 집의 자제에게 이 일을 알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기에 내가 마침내 그 시를 등서하고 또한 뒤에 한 마디 말을 붙여 보낸다. 도원옹의 자는 통보, 이름은 성해로 단계 하위지의 후손이다. 깨끗한 지조와 효우의 행실에 대해서는 소문이 향촌에 자자하며 시문도 고인의 풍치가 있다.
書역窩公龍門詩軸後(1782) : 늑와공의 [용문시축] 뒤에 쓴 글이다. 늑와공이 1776년 정월 초이렛날에 절에 가서 소망에 병으로 환가했는데 마침내 일어나지 못했다. 시축에 들어있는 탄사에게 준 시는 그의 절필인데 구법과 필획이 평상시와 다름없다. 이제 유고를 등출하는 날 이 시축을 보니 차마 손을 놓지 못하겠다.
從祖祖姑宋孺人行蹟記(1786) : 종조할머니 송유인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1743년에 선군자가 불초에게 고하였다. "나의 고모 송유인의 효우와 정렬은 맏고모 이 부인과 우열을 가릴 수 없는데 이부인의 행실은 읍지에 실렸으나 송유인은 함께 실리지 못했으니 실로 천고의 한이 된다. 가난한 자를 보면 먹을 것을 주고 다시 전곡과 포백, 의복까지 나눠주었다. 구걸하는 아이들이 '나에게 김씨 어머니가 있어 저 고평에 사네. 우리를 불쌍하게 여겨 먹을 것과 입을 옷을 주네'라고 노래하였다. 평생에 죄인으로 자처하여 머리를 빗지 않았고 새 옷을 입지 않았으며 맛있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남과 더불어 담소를 나누지 않았고 따뜻한 방에 들지 않았는데 베개와 자리에는 늘 눈물 자국이 배어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열부로 칭송하여 고을에 소문이 파다했는데 읍지를 주관하는 자들이 자매를 모두 수록하는 것을 과중하다 생각하여 마침내 후세에 전함을 잃게 되었다. 비단 동기로서의 정 뿐 아니라 실로 양육의 은혜까지 받았으니 너는 이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부군은 이 말을 하시면서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불초는 아직 어려서 유인의 사적 전말을 알 수가 없었고 다만 한 때 들은 것을 초고 상태로 기록해 두었다. 이제 40년 세월이 흘렀는데 다시는 옛일을 물을 데가 없다. 어느 날 유인의 현손인 홍구가 이 말을 듣고 기록을 청하기에 마침내 글을 지었으나 불초는 글재주가 없어 송 부인의 행적을 필력으로 드러낼 수 없으니 참으로 한스럽다.
書西原世稿後(1789) : {서원세고} 뒤에 쓴 것이다. 표형 곽문현(郭文顯) 씨의 장자인 만주가 {서원세고} 수 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나의 7세조 호재공의 유고 및 [용사일록(龍蛇日錄)]이다. 6세조 사오공과 5세조 양헌공의 저술은 조금 남아있고, 양담공의 경우는 유문이 많았으나 모두 다 흩어져 없어지고 [창의격문] 및 [유사록]만 겨우 전하고 있다. 선친이 전에 한 부를 써서 곽씨의 세고로 엮고자 했으나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다. 불초가 남긴 뜻을 받들지 못할까 두려워 삼가 탈고는 했으나 그 오류를 정정하지 못했는데 교감을 가하고 발문을 써 주기 바란다." 하였다. 표형이 네 분의 글을 모아서 세고로 만들고자 한 것은 실로 후손으로서 선조의 훌륭함을 알리기 위함인데 만주도 훌륭한 자손이라 하겠다. 세인들이 이 세고를 보고 누군들 감탄을 발하지 않을 것인가.
書枝谷學계案後(1790) : {지곡학계안} 뒤에 쓴 것이다. 병곡 권 선생이 작고한지 40년이 되었으나 선비들의 존경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작년에 이유서가 발론하여 동짓달에 본동의 간역소에 회동하여 문서 닦는 날에 모두 50여 명 참여하였다. 마침내 성명을 책에 쓰게 되자 나와 김우경에게 일을 주관케 하여 초안을 만들고 나서 제목을 {풍서학계안(豊西學契案)}이라 하였다. 김자회가 '풍서'라 칭하는 것보다는 '지곡'이라 칭하는 것이 낫다고 하여 명칭을 {지곡학계안}으로 바꾸었다. 유서가 계를 구성한 본 뜻을 기록케 하니 끝내 사양치 못하고 책의 끝에 적는다.
書金以用喪祭抄卷後(1792) : 김이용의 {상제초} 뒤에 쓴 것이다. 이용이 이 책을 찍고는 나에게 변례에 대해 써 줄 것을 부탁하기에 몇 조목을 등서했는데 종이가 떨어져 많이 쓰지는 못했다. 후일 계문문답 및 제가의 예설을 아울러 써서 창졸 간에 참고하는 자료로 삼기 바란다.
書稷谷道中詩後(1793) : [직곡도중] 시의 뒤에 쓴 것으로 소서에 지었다. 지난 1779년 봄에 수오재가 손자를 데리고 마마를 피해 직곡 산중에 있었다. 내가 현애에서 돌아오던 중 슬프게 바라보면서 시를 지었는데 이미 12년 전의 일이다. 어느 날 자정군이 난고 속에서 이 시를 찾아 나에게 서신을 보내 고사로 삼고자 했다. 추모하는 성의를 기특하게 여기어 시의 뒤에 몇 마디 말을 적어 보낸다.
書冊籠前面 : 책장의 앞면에 쓴 명문(銘文)이다. 성현의 가르침을 안에다 간직했으니 가난하지 않으며, 독을 쌓는 것 같아서 사람에 따라 접혀지기도 하고 펼쳐지기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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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