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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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554 : 국창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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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杏陰金子友弘輔(1791) : 행음 김자우 홍보를 애도하는 제문이다. 내가 공과 더불어 형제처럼 지낸 지가 거의 50년 되는데 사랑하는 정은 피를 나눈 동기와 같았다. 서로 백 리나 떨어져서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서신을 보내거나 찾아가서 담화를 하며 서로 면려하였다. 지난 봄 현애에서 동숙하던 즐거움은 마치 소시에 머리를 맞대고 놀던 것과 같았다. 이별할 때 날씨 좋은 날을 택해 오래된 살구나무와 가지가 성긴 소나무 아래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었다. 내가 병이 나서 갈 형편이 못되던 차 갑자기 슬픈 소식을 듣게 되어 백 년의 흉금을 하루아침에 서로 잃었다. 오래된 가문이 일시에 쓸쓸해지고 후생들은 덕을 상고하여 모범으로 삼을 곳이 없으니 단지 한 가문만의 불행이 아니다.
祭小山李先生辛亥用律(1791) : 소산 이광정을 애도하는 제문으로 운자를 맞추어 지었다. 아! 선생은 대산의 아우님이네. 일평생 경을 실천했으니 백세토록 이름이 남는다. 조카는 객지에서 죽고 손자는 명을 재촉하니 우리의 도가 잘못된 것인가. 상기가 다되어 슬픔을 고하자니 눈물이 쏟아진다.
祭玉峯權海수尙佑壬子用鶴膝體(1792) : 옥봉 권해수 상우를 애도하는 제문으로 학슬체를 사용하여 지었다. 내가 이웃하여 산지가 이미 40년이 된다. 형제처럼 지내면서 질병에는 서로 부축하고 출입에는 서로 따르며 또한 강독도 함께 했다. 문장은 칼날처럼 예리했고 글씨는 정묘하여 명성이 무성했는데 띠집에 높게 누워 육경을 근본으로 삼고 {중용}과 {대학}을 다반사로 삼았다. 가학을 계승하여 정밀하게 연구하면서 더욱 {주역}의 은미하고 오묘한 뜻을 부연하여 다섯 책을 지었다. 손수 선기옥형을 만들어 별자리를 배치함에 착오가 없었고, 구주의 산천과 사방의 지리를 친히 둘러 본 듯 환하게 알았다. 악기와 주산, 곡예와 같은 여러 기예에도 마음으로 체득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祭外姑光州金氏(1793) : 장모인 광주 김씨를 애도하는 제문이다. 대체로 아녀자의 덕을 살펴보면 실로 온전하게 구비한 경우가 드물다. 유인은 처신이 시종 한결같아 아내가 되어서는 아내의 도리를 다했고 어머니가 되어서는 어머니의 도리를 다했다. 홀로된 시어머니를 잘 모시면서 숙씨에게는 공경을 다하고 올케와는 우애가 있었다. 제사가 다가오면 기일 전에 미리 재계한 뒤 제수와 술을 정결하게 준비했고 손을 대하는 데는 정성과 공경을 다해 집에는 손이 끊일 새가 없었다. 촛불 아래에서 종이에 쓴 세필은 눈썹 먹과 같았고 바른 견해와 확고한 논리는 세속의 선비들로는 당할 수 없었다. 79세의 천수를 누리다 훌훌 떠나니 남긴 규범을 뉘 있어 후세에 전하랴.
祭可齋權子淵明佑(1795) : 가재 권자연 명우를 애도하는 제문이다. 형제처럼 지내면서 주역도와 상수학, 고금의 역사와 우주에 대해 토론하고 비교하였다. 경전의 의미를 깊이 연구하여 가학의 연원을 잇고 안동 권씨의 족보 중수를 주관하였다. 오직 선집(先集)을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떠나니 한스러운 일이다. 1770년 상원 전날 저녁 공의 중씨와 함께 수오재에 가서 호쾌하게 새해의 회포를 담론하면서 농삼아 사호라 일컬었다. 이제 병들면 누가 붙잡아주고, 소회를 누구에게 말할 것이며, 모르는 것을 누구에 질의하며 일 처리를 누구와 상의할 것인가. 선생[병곡]의 문집을 공이 교감하다가 일을 매듭짓지 못한 채 작고했다. 복초가 대가에게 두루 교정을 받았으며, 후산 등 여러 벗이 열심히 편집을 하고, 고여는 판에 새길 판본을 정사했는데 조만간에 목판에 새겨 간행될 것이다. 학계는 아직 구성을 이루지 못했는데 계의 유사를 맡은 천휘는 세상을 떠났다.
祭金和國彦燮甲寅用律(1794) : 김화국 언섭을 애도하는 제문으로 운자를 사용하여 지었다. 이른 나이에 환와를 종유하여 인과 의에 대해 배워 이해는 정밀하고 행실은 고인의 규범에 맞았다. 온화한 성품은 좋은 옥과 같고 꾸미지 않는 졸박한 마음은 새댁과 같았다. 남의 선한 말을 좋아하기는 목말라서 물을 마신 듯 했고 남의 악한 행실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몽땅 붓과 떨어진 책, 나물밥으로 자신을 즐겁게 했으나, 때로는 세상 사람들의 세력에 따라 부침하는 것에 대해 강개하였다. 하고픈 말은 끝이 없으나 붓을 잡자 눈물이 쏟아지고 종이를 대하자 위축되어 약술한다.
祭金澤普龍雨(1795) : 김택보 용우를 애도하는 제문이다. 자질은 화기롭고 용모는 온화하여 훈훈한 봄날 같고 따뜻한 겨울날 같았다. 시와 예를 가업으로 삼아 재주가 있고 규수처럼 얌전하여 모두들 아끼고 사랑했다. 맏이가 객지에서 죽은 것을 차마 볼 것인가. 몇 마디 말을 쓰면서 만감이 교차된다.
祭金淵淵溥源用律 : 김연연 보원을 애도하는 제문으로 운자를 써서 지었다. 십 수 년 전에 공의 마을에 우거하면서 이웃하여 아침저녁으로 상대했고, 어린 손자를 나에게 보내 공부를 배우도록 했다. 내가 환거하게 되자 떠나는 것을 제일 아쉬워했고 나는 더욱 우러러 그리워하면서 달마다 찾아가 며칠을 머물렀는데 그 정은 담담한 물과 같았고 그 맛은 향기로운 난초 같았다. 시비와 비판을 입에 담지 않고 득실과 궁달을 조물주에 맡겼다.
祭素山寡姉(1798) : 소산의 홀로된 자씨를 애도하는 제문이다. 자씨가 금년에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나도 나이가 74세니 곧 죽을 몸이다. 내가 죽은 뒤 자씨에 대한 행적이 없어질까 두려워 몇 가지 사실을 서술하여 영결한다. 모씨가 위독할 때 자씨는 한걸음에 달려와 칼을 찾아 손가락을 찔러 피를 먹이고자 하자, 내 딸이 울면서, “아침에 똥을 맛보니 맛이 극히 달콤했는데 피를 먹어도 소용없을 것 같다.”고 말렸다. 한밤중에 변을 당해서는 자씨의 곡성이 끊이지 않았고 피를 토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상을 마친 뒤로는 다시는 집에 오지 않았는데 모씨의 거실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1758년 봄에 내가 백모 씨에게 아뢰어 여러 자매에게 전토를 분배했는데 자씨만이 한 자락의 땅도 받지 않았다. 내가 만년에 생활이 어려워 살길이 막막하자 자씨는 70 노인으로 손수 베를 짜서 15민의 돈을 만들어 부모 제사의 위토를 장만하게 했다. 1782년 정월 초하루 아침에 입양하는 일로 해서로 길을 떠났는데 자씨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말을 하면 못 가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자씨는 내가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돈을 내주며 아우의 하인을 시켜 뒤를 쫓아와 전해주도록 했다. 내가 낭패를 보고 돌아와 하룻밤을 잔 뒤 가서 뵈오니 자씨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나는 네가 천리 밖에서 죽는 줄 알았다. 이제 네 얼굴을 보니 죽은 형제를 만난 것 같다.” 하였다. 1779년 남편의 상을 당해서는 지나친 슬픔으로 몰골이 수척했으나 상을 마친 뒤에도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자주 나에게 이르기를, “맏언니는 남편상을 당해 35일 간 단식하다 죽었는데 내가 비록 언니의 정렬에는 미치지 못하나 죽은 뒤에 남편 곁에 묻히는 게 소원이다.” 하였다.
祭川沙金道彦宗德 : 천사 김도언 종덕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이른 나이에 소호[대산 이상정]에게 배워 이치에 대한 견해가 명확하고 자신을 반성하는 데 더욱 독실하여 안과 밖이 한결같았다. 아울러 과거 공부도 하여 청년기에 소시에 합격하였으나 시운이 좋지 않아 마침내 물러나 학문에 몰두하면서 세 아우를 가르쳐 차례로 출세케 하였다. 언덕에서 우는 학 울음이 하늘에 미쳐 특별하게 금오랑의 직책을 받자 관모에 옥관자가 찬란했다. 문장의 체례는 법을 준수하고 서술하는 데는 실마리가 있었다. 2주기가 되어 지팡이 짚고 와서 곡을 하고 물러날 제 차가운 매화에 달빛이 밝다.
祭後山李學甫宗洙 : 후산 이학보 종수를 애도하는 제문이다. 소호에게 입문하여 실천에 힘썼고 깊은 사색과 세밀한 분석으로 사문으로부터 '도가 그대에게 돌아갈 것이다.'라는 인정과 기대를 받았다. 스승이 죽자 책을 안고 한숨을 쉬면서 아직 궁구하지 못했던 것을 각골의 노력을 기울여 십분 연찬하였다. 의심나고 난해한 것은 동문들과 서신을 통해 토론하였고 주돈이와 장재를 소급하고 정자와 주자를 표준으로 삼아 의리를 탐구하였다. 유문이 수습되어 흩어진 게 없으니 문장과 정신이 후세에 영구히 전할 것이다.
祭東야金善吾養根 : 동야 김선오 양근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청년기에 책문을 바쳐 대궐에서 동야라는 호를 받았고 병조와 사헌부의 관직을 차례로 역임했다. 신하와 백성이 복이 없어 왕이 승하하니 그 은혜를 갚을 데가 없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리고 뜻에 따라 소요하면서 겸양과 졸박을 기르고 청풍과 명월, 산수를 벗하였다. 소쇄한 회포와 진솔한 풍류는 저술을 좋아해서 율시와 고시, 장편과 단율, 잡저 등 몇 상자를 남겼고, {행당원고}에 발문을 지어 주었다. 자상한 서신은 간찰의 체제를 터득했고 정치한 필법은 곱고 아름답다. 만년에 특별한 은총을 입어 참의의 직책에 제수되었다.
劍舞山祈雨文(1794) : 검무산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사용한 축문으로 칠석에 지었다. 산은 풍서에 우뚝하게 서 있어 기운이 맑고 영기가 모여 있다. 산 주위에 거처하는 많은 주민들이 한 마음으로 우러르고 조석으로 바라본다. 질병과 가뭄을 만나면 그 때마다 기도하는데 감응이 메아리 같으며 배가 고플 때 젖을 먹이는 것 같다. 지금 한발이 전에 없이 심하여 곡식 줄기는 시들어 비틀어지고 샘물은 바싹 말랐으며 집에 불을 지른 듯 민심이 매우 흉흉하다. 산의 정령만을 믿으니 빨리 가뭄 귀신을 쫓아내고 단비를 내려 재앙을 복으로 바꾸어라.
哀辭
金君若宗五哀辭(1779) : 김군약 종오를 애도하는 글이다. 나와 군약의 선친과는 세의가 있어 정분이 좋다. 군약은 나를 선친의 벗이라 하여 공경을 다해 예우하였다. 지난 해 내가 자씨의 이웃에 우거하게 되자 군의 집과는 수 십 보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군이 수시로 와서 글을 물었는데 한 번은 자기가 지은 글을 보여주었다. 나는 읽어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근처에 이 같은 사람이 없을 것인데 장차 과거에 응한다면 필시 손쉽게 합격할 것이라고 탄복하였다. 그러나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두창에 걸려 34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이 글 말미에 '미친바람이 풀을 덮쳐 높은 난초가 꺾어졌네.'로 시작되는 사(詞)가 붙어있다.
李德吉弘積哀辭(1779) : 이덕길 홍적을 애도하는 글이다. 사곡처사 이공이 읍지의 편수를 맡아 부의 저택에 머물러 있던 중, 며칠을 앓다가 종택인 임청각에서 향년 58세로 숨을 거두었다. 이듬해 3월 신미에 거주하던 곳의 서쪽 산기슭에 장례를 치루었는데 내가 평생의 정으로 묘소에 이르러 곡을 한다. 이 글 말미에 '옥같이 깨끗한 나무가 바람을 맞아 휘날리네.'로 시작되는 사(詞)가 붙어있다.
龜山丈哀辭(1788) : 귀산장을 애도하는 글이다. 귀산처사 김공은 고금의 서책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오직 옛것을 좋아하였다. 또한 천문과 지리, 하도와 낙서, 산천의 도리, 고금의 명물, 이치와 의리, 상수의 묘한 이치, 음양의 변화, 일월성신의 운행, 풍뢰상우의 변화에 대하여 그 깊은 이치를 궁구하고,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후세에 자운(子雲)같은 자가 나와 공의 시를 외우고 공의 글을 읽어 본다면 공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 것이다. 이 글 말미에 '공의 의표는 쇄락했고 공의 마음은 밝고 밝았네.'로 시작되는 사(詞)가 붙어있다.
新浦金德仲龍普哀辭(1788) : 신포 김덕중 용보를 애도하는 글이다. 공은 일의 시비와 논의의 모순에 대하여 한 마디로 판단을 내렸다. 흉회와 기상이 진실로 큰 그릇이었으나 경화(京華)에서 성장한 때문에 인사를 담당하는 자가 한 번 들러 물은 적이 없어 마침내 포의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아니면 시운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천전과 신당은 본래 문헌의 대방가(大方家)로 일컫는데 덕 높은 선배들이 새벽별처럼 떨어지니 우리 고을의 불행이다. 이 글 말미에 '중후하면서 순수한 것은 공의 자질이오, 화락하면서 자상한 것은 공의 성품이네.'로 시작되는 사(詞)가 붙어있다.
墓碣銘
양潭郭公墓碣銘幷序(1790) : 양담 곽공의 행적을 기록한 묘갈명으로 서문을 아울러 붙였다. 공의 이름은 수인, 자는 경택, 호는 양담으로 청주가 관향이다. 공은 1537년에 태어나 1585년에 넷째 아우 수지와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임진난에 창의하여 공을 세웠고 1594년에 천거로 황산승에 제수되고 1598년에 특명으로 창령 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고는 다섯 달 만에 관직을 버리고 귀향했다. 공의 유고와 구적은 산일이 되어 전하지 않기에 학덕과 업적을 상고할 수 없다. 그러나 본 고을의 읍지 및 창녕고을의 거사비 글을 통해 충분히 징험할 수는 있다.
上樑文
佳谷家舍上樑文(1574) : 가곡에 집을 지을 때의 상량문으로, 칠석에 지었다. 복주의 큰 고을에 가곡은 이름난 곳이다. 에워싼 화산은 눈앞에서 광경을 독차지하고 구불구불 흐르는 낙수는 문 밖에서 맑은 물결을 일렁인다. 주인[국창 자신]은 7대에 걸쳐 예천에서 살았고 금곡에서 10년 살다가 반생을 떠돌더니 하루아침에 이 곳에 우거하여 집터를 잡았다. 백 대 친분의 구지에 10여 칸의 새집을 세우니 가운데는 마루를 깔고 좌우에는 방을 만들었다. 원컨대 신은 불행을 내쫒고 땅은 빼어난 기운을 잉태하여 자손과 효자가 계속 이어져 문호를 폐하게 하지 말라.
雜錄
西征錄 : 후사를 구하는 일과 관련하여 재령을 다녀오면서 돌아올 때까지의 여정과 도중에 만난 사람들, 승경을 둘러보고 느낀 감회, 양자를 들이는 것과 관련되어 낭패를 당한 일 등을 기록한 것으로 수 십 수의 기행시가 포함되어 있다.
지난 1764년 초여름에 내가 개원사 보청(譜廳)에 있을 때였는데 재령에 사는 족형이 이르렀다. 나와 9대조를 같이하지만 서로 천 리 멀리 떨어져 있어 초면이었다. 각자 지난 일을 얘기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별에 즈음해서 내가 족형에게 9대조의 묘소가 파주에 있는데 작년에 가서 내외의 산을 이레를 뒤졌으나 찾지 못했기에 족형이 탐문해서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수 일 뒤 족형이 와서 신곡에 있다고 일러주어 함께 가서 성묘를 했다. 내가 족형에게 이르기를 “자식놈이 하나 있는데 실로 쇠퇴한 가문에 재주가 많아 심히 염려가 된다. 만일 불행하게 되면 형의 집에서 후사를 구하겠다.” 하였다. 3년 지난 뒤 족형이 방문하여, “자네가 전에 후사를 구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내가 여러 아이를 눈여겨보니 나의 막내 아이가 자네의 안목에 들 것 같아 이름을 안동아(安東兒)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3년 뒤 가을에 나는 자식을 저 세상으로 보냈다. 그 후 3년 뒤 내가 유산의 족친 집에 가서야 마음에 두었던 아이가 벌써 죽었다는 것을 처음 듣게 되었다. 마침내 족형에게 서신을 보내 안동아를 조만 간에 데려 올 것이라 하고, 1782년 초하루에 재령을 향해 길을 떠났다.
내가 불효의 큰 죄를 지어 천 리 길을 오가면서 혈혈단신으로 처량한 생각이 배나 들었다. 박 봉사가 상례를 벗어나 뜻을 다해 도와주었고 한강 나루를 지나던 길에는 친구를 만나 시와 술로 담소를 나누면서 객지의 향수를 달랬다. 하물며 군망은 백 세대의 정분으로 손을 잡고 동행하면서 숙박과 말채비와 음식 일체를 마음에 들게 해 주었다. 또한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너며 접대하고 수작하는 즈음에 좌우에서 보호하는 것이 자제가 부형을 위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이 번 여행길을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릉에 도착해서는 귀로는 차마 들을 수 없고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일에 놀라고 슬퍼서 천 길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 같아 다만 하늘이 컴컴할 뿐이었다. 귀로에 올라 말머리에서 바라보는 풍광에 울적한 가슴이 조금 열리게 되었다. 각력을 헤아리지 않고 박연에서부터 구경하여 천마산 절정에 올라서는 눈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천만의 절벽과 골짜기, 넓고 긴 바다와 강, 푸른 시내와 붉은 놀, 진귀한 금수 등 절경이 전후좌우에 쭉 벌려져 있었다. 문득 객지에서 여행하는 고생을 잊은채 쌓인 번뇌와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다만 산에 올라서는 그 요령을 얻지 못하고 물을 보는 데는 근원을 궁구하지 못하여 나무꾼과 목동이 지나쳐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 길을 왕래하던 때의 아침저녁의 날씨와 기후, 지나온 많은 장소, 사람과 문답한 말을 대략 기록하여 두니 후일 나의 후손된 자가 펼쳐보면 필시 감회가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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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