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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555 : 국창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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零本 菊窓遺稿 : 卷9 : 국창유고의 원고본이 전하지 않는 시점에서 비교적 초고본의 체제와 형태를 보여주는 영본(零本) 1책에는 표제 아래에 '구(九)'의 권수 표기가 있으며, 이 책의 후반부에는 부록이 실려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책의 총수는 적어도 9책은 넘었던 듯하다. 소자(小字)의 해정한 글씨체로 필사된 이 책에는 4책의 교감본에는 실려 있지 않은 저자에 대한 개인 정보가 많이 들어있다. 저자의 인품이나 교유 관계, 세평 등 저자 연구의 기초적 자료를 보여주는 것이다. 교감본과는 별개의 서(書)가 92편 수록되어 있고, 부록이란 제하에 저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문(文)이 2편, 만사(輓詞)가 9편, 제문(祭文)이 32편, 소상 때 제문(小祥時祭文)이 16편, 대상 때 제문(大祥時 祭文)이 31편 실려있다. 내용 설명은 생략하고 제목만 적어둔다.
書 : 與金子恢弘度書(1792), 與金子恢(1785), 答金錫之百亨書(1766), 答金錫之(1766), 與金仲志得行書(1767), 答金仲志(1790), 與金仲志(1790), 與金仲志(1794), 答張僉樞世衡(1765), 答張僉樞2, 上玄厓聘君2(1776), 上玄厓聘君5(1777), 與金來初復慶姻丈書(1777), 與金來初復慶姻丈書(1785), 與金公理重燮(1783), 與金以用遇根實之有根(1776), 代書(1777), 與權敬叔聖제書(1795), 與李士言綸, 答柳養直, 答李士言, 答權子成襄(1796), 答金進士君星台翼, 答金汝一始精, 答權公弼始彦(1795), 答金進士聖圭宗錫, 答李能伯增白, 答李後山學甫, 答李士言(1796), 與校長金晦彦顯運, 與南甥正度, 答權敬叔, 答金善吾, 與河規汝, 答李府伯集斗仲輝號琶西, 與柳慶山秀夫(1797), 與李日昇, 與宋羽成馹成, 答南上舍魯仲泰鎭, 與南甥正度, 答府伯琶西, 答李聖有鎭九, 與張和叔東潤, 答李守卿宅靖, 答李木之楨國, 與李日升, 答臨汝齋柳秀夫, 與琶西李參判, 答見叔, 與黃以亘應玄, 答南厓權敬叔(1798), 與三悔堂金子晦敏源, 與臨汝齋, 答竹下李仲章, 答權士則聖규, 與黃以亘, 答竹下李仲章, 與南甥正度, 答權進士周甫補, 答金子恢弘度, 答金士深봉, 與張汝燦爀, 與張景瞻宇標, 與人書(1799), 與金武伯虎臣, 答李日升, 答臨汝齋(1800), 答金升彦應燮, 與金虞卿龍弼, 與朴憲度, 與金子恢, 答金樂敎, 答柳安岳相祚, 與河聖會(1798), 與同人2, 答同人2, 與河規汝(1789), 與同人(1797), 與同人(1798), 答同人(1799), 與河道而(1797), 答河道而(1798), 與權其天思浩(1783), 答金忠兼世孝孝兼世忠(1783)
附錄 : 뇌文 : 生員驪江李天燮, 坡平尹備
輓詞 : 固城李孝慶孟仁, 安東權聖제敬叔, 眞城李鎭九, 生員英陽南泰鎭, 敎官宣城李楨國, 進士安東權馨復, 生員풍山金宗鐸, 門人晉陽河錫中, 河錫九
祭文 : 婦翁花山金時慶晦叔, 前都正풍山柳규, 晉陽河宅海, 晉陽河應淸, 풍山柳國春, 永嘉權祖佑, 풍山金相龍, 侄子復霖, 妹壻寧海申興烈, 자子花山金在根, 자子咸安趙基重基大, 妹子英陽南正度, 晉陽河龍馹, 晉城李尙珌, 竹溪安曦復, 기城潘致相, 竹溪安爾岳, 門人晉陽河錫中, 光山金近儒, 晉陽河錫九, 永嘉權수, 善山金虎臣, 晉陽河錫七, 永嘉權길, 永嘉權琮, 풍山金晉亨, 竹溪安允적允直, 永嘉權聖謨, 竹溪安馨宅, 永嘉權寬, 竹溪安汝宅, 풍山柳昌東
小祥祭文 : 永嘉權兢, 表從孫聞韶金榮壽, 妹子寧海申致영, 풍山金晉敎, 表從姪玉山張宇杓, 竹溪安愿, 金義李養敬, 生員풍山金宗錫, 姪子復霖, 金在根, 南正度, 河錫中, 河錫九, 安允적允直, 安汝宅, 月城孫誼顯
大祥祭文 : 眞城李鎭東, 進士安東金正根, 婦弟光山金弘度, 聞韶金始宏, 生員光山金百趾, 聞韶金克喆, 永嘉權彪, 聞韶金象鉉, 冶城宋鴻九, 生員竹溪安爾龍, 眞城李中德, 淸州郭孝冑, 族孫應燮, 族孫錫喆, 晉陽河錫中, 光山金近儒, 晉陽河錫九, 竹溪安允적允直, 竹溪安汝宅, 竹溪安始宅, 安東金在根, 從子復霖, 晋陽河宅海, 晋陽河應淸, 豊山柳國春, 永嘉權祖佑, 豊山金相龍, 姪子復霖, 妹壻寧海申興烈, 자子花山金在根, 자子咸安趙基重基大(林魯直)(한국국학진흥원 소장 문집 해제 2004)
국창유고(菊窓遺稿) [冊] : 예천 출신 국창(菊窓) 김필형(金弼衡)의 문집으로, 4권 4책. 영본(零本) 1책, 필사본이다. 卷2에서 이르기를, “... 말 한마디 언급할 자가 없을 것 같아 올해 안으로 예천 사또에게 소장을 올리고 내년 봄에는 서울로 올라가 ...”라는 내용이 있고, 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書// [上訥翁李先生] : 1744년 경 스승인 눌은 이광정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유고에는 모두 6편의 글이 실려 있다. 첫째는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조급하고 횡포한 성격을 바로잡고 싶다는 심정을 고백하고, 아울러 인의와 도덕에 관한 학설을 배워 전에 못 다한 공부를 성취하고자 한 것이다. 둘째는 나태한 습관이 점점 고질이 되어 허송세월만 하다가 근래에 벗과 함께 산에 들어가 글공부를 할 생각이나 글의 의미를 깊이 있게 보지 못하는 폐단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토로한 것이다. 셋째는 스승의 병환을 염려하는 사연을 서두에 싣고, 아울러 과거공부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는데 작문의 구법이 졸렬하여 시관의 눈에 들지 않겠지만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여름 시험에는 응시해볼 생각임을 밝혔다. 넷째는 신당에 문상을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광감루와 중대사, 관왕묘 등을 들러 보고 느낀 감회를 서술하면서, 경물에 빠져 본심을 상실함은 유가의 법도가 아니라고 자신을 경계한 것인데 {주자서} 서너 편을 낭랑하게 외우자 마음과 눈이 맑아졌다고 한 고백은 매우 흥미롭다. 다섯째는 뜻밖에 병이 나서 수개월간 위독하게 지낸 것과 저번에 보내온 편지에서 생각과 일을 줄이고 독서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라고 한 가르침이 병 조섭에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여섯째는 초가을에 벗과 함께 대승사에서 공부를 하다가 단구의 산수를 구경한 것과 귀가한지 수개월 되어 천연두가 사방 수십 리에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모친을 모시고 오미동에 우거해 있던 사정과 지난달 보름쯤에 가곡으로 이주한 사실에 대해 말한 것이다. [上淸臺權先生] : 청대 권 선생에게 올린 서간문이다. 명나라 시인의 시집에 나오는 연대와 고사당, 두보대와 태백루에 대해 질정을 구한 것으로 국창은 시에 나오는 지명이 요성과 악운루를 지적한다고 주장했다. [答仙溪權先生] : 선계 권선생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모두 3편이다. 첫째는 누차 병상에 위문해 준 것과 서간을 보내 위로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다. 또한 보내준 시문은 자신을 살펴보는 자료로 병든 마음을 치료하는 데 좋은 약이 된다고 하였다. 둘째는 1766년에 쓴 답장으로 13년간 독서를 폐한 나머지 일 푼의 정력도 남지 않아 득실을 다투는 과장에 출입할 처지가 아니며,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명성에 대해서는 개의하지 않는다는 소신을 피력하였다. 셋째는 1767년에 쓴 답장으로 어린 자식의 병에 대해 걱정하면서 과거에 응시하라는 권유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5 6년 이래로 세상 일이 차마 듣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되어 있어 도리어 입산이 깊지 않음을 한탄한 것이다. [答南野朴戚兄(1747)] : 척이 되는 남야 박손경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첫째는 1747년에 답한 것으로 비석을 세운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병세가 중하여 가서 거들지 못하게 된데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고 {주자서절요}의 의심나고 난해한 것에 대해 추후 질정할 것과 {강록간보}를 빌려 줄 것을 청한 것이다. 둘째는 {강록강보}를 빌려 독파하면서 한두 군데 요령을 얻게 된 것과 볼수록 글맛이 나서 {주자서}를 읽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고 평하고는 이 책을 널리 간행해서 유포시켜야 할 것을 시사했다.
[與白雲洞主權丈九淵(1754)] : 소수서원 원장이던 권구연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선조 눌재공이 풍기군수 재직 중에 순직하게 되자 소수서원의 어떤 유생이 제문을 지었는데 누구의 소작인지는 실전되어 알 수 없다고 하면서 {任司案}을 살펴보고 그 당시 동주와 재유사의 성명을 알려줄 것을 청한 것이다. [上大山李先生] : 대산 이상정에게 올린 서간문으로 모두 2편이다. 첫째는 1763년에 쓴 것으로 전에 질정을 구했던 구절에 대해서는 논변과 해석이 명쾌하고 절실하여 막힌 가슴이 트이게 된 것 같다고 진술하면서 그간 산더미처럼 쌓인 의난처는 필설로 다할 수가 없어 조만간에 찾아뵙고 질정을 구하겠다는 내용이다. 둘째는 1777년에 보낸 글로 先稿를 상세하게 교정해 줄 것과 유묵첩에 발문을 써줄 것, 그리고 {행당원고}의 서문을 써줄 것을 정중하게 청한 것이다. 이 글을 통해 행당은 이미 67세에 대산의 문하에 취학하려는 성의가 절실했고 임종에 미쳐서도 대산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答小山李先生(1784)] : 소산 이광정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삼성재의 본손과 달관자의 본손이 집사를 찾아 뵐테니 그 선조의 문집 교정과 서문을 맡아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이제 때를 놓치면 실전할 수도 있으니 두 원고를 함께 교정하여 연방집의 형태로 간행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答戰兢齋金丈瑞一書(1770)] : 풍산 미동에 거주하던 전긍재 김서일에게 답한 서간문이다. 전긍재가 仙會의 운자를 보내 시를 청하자, 자신은 본래 작시의 율법에 어두워 추위에 떠는 지렁이와 매미처럼 음향이 쉬이 끊기어 볼만한 것이 없으나 감히 거절할 수도 없는 처지이기에 원운과 차운시를 등사해서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與宗丈交河守百鍊(1761)] : 교하의 사또로 있는 종장 김백련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족보의 계보를 상의할 일로 절재 후손인 경조의 근황을 탐문해 줄 것과 고산에 거주한다고 하는 유공의 후손 홍기의 소재처를 알아보고 면식이 있으면 그 집에 소장하고 있는 보첩을 베껴 보내줄 것을 청한 것이다. [與李表兄宜時] : 외사촌형이 되는 이의시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2편이 있다. 첫째는 1757년에 작성된 것으로 12조의 별지가 첨부되어있다. 신주가 심하게 훼손되어 개조가 불가피한 경우의 조치와 절차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했는데 權丈을 뵙고 여쭈어본 것과 국창이 들은 것을 조목별로 정리한 것이다. 둘째는 상복에 대해 논했는데 참최 3년의 복을 마치고 담제를 지내지 않는 것은 천하 고금에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축문과 여러 절차를 한결같이 {주자가례}에 따라 시행해야 유감이 없다고 하였다. [答杏陰金子友弘輔] : 행음 김자우 홍보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모두 4편이다. 첫째는 1762년에 보낸 것으로 천리 먼 곳에 귀양 가 있는 행음을 곡진하게 위로했는데 사건의 전말에 대해 매우 원통해 하고 있는 국창의 심기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귀양으로 인해 관동의 산수를 두루 돌아보게 된 것을 하늘이 도와서 그런 것이라 하면서 풍악은 설경이 가장 좋다는 평까지 곁들였다.
둘째는 1788년에 보낸 것으로 상제에 대해 논한 것이다. "부친의 빈소를 치우기 전에 모친이 죽었을 경우에는 자최 3년을 입어야 한다"는 {우복집}의 문구를 인용하여 예를 실행할 때 의심스러우면 두터운 것을 따라야 할 것을 개진하였다. 상례는 모두 始禮를 표준으로 삼는 것이 원칙이나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것은 시의에 따라 적절하게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셋째는 1789년에 작성된 것으로 향당의 직임을 맡고 있는 행음에게 기강을 세우고 명분을 바로잡으며 염치를 권할 것 등을 주문하였다. 넷째는 1778년에 보낸 것인데 유림의 의견을 모아 눌은 선생 유집의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與守吾齋安訥甫敏修] : 수오재 안눌보 민수에게 보낸 서간문으로 모두 4편이다. 첫째는 1777년에 쓴 것으로 수오재가 지은 {행당원고} 발문에 대해 미진한 곳 3조목을 적어 보내 다시 개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둘째도 1777년에 보낸 것인데 유묵첩을 표구하여 보내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 한두 군데 개정한 것은 매우 온당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셋째는 1784년 한식에 쓴 것으로 무쇠처럼 차디찬 방에서 궁색하게 살지만 분수에 따라 국화를 따며 남산을 쳐다보면서 유연하게 사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다만 날로 새로워지는 공부가 없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라 고백하고 있다. 넷째는 1785년에 쓴 것인데 화초와 대를 가꾸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하면서 눌은 선생의 [구옥암]시 등을 보내주니 벽에 걸어 두고 보면서 마음을 잘 다스릴 것을 당부하였다. [答東皐金士重鼎東] : 동고 김사중 정동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모두 5편이다. 첫째는 1762년에 보낸 것인데 근래 {주서}를 보고 느낀 소회를 밝힌 것이다. {주서}의 언어와 문자를 끌어다가 문장을 수식하거나 현학의 자료로 삼는 것은 잘못이고 한결같이 몸과 마음으로 체험할 것을 강조한다. 둘째는 1764년에 보낸 글로 庭試日에 보소의 여러분이 구경삼아 응시를 독촉하기에 과장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애초에 지필묵을 휴대하지 않아 시제가 걸린 뒤 곧바로 나와 버린 사정을 서술하였다. 이때 주해와 자법이 볼만한 개원사 소장의 {천자문} 판본을 구입해 가지고 와서 어린 자식을 가르치는 교재로 삼았다. 셋째는 1765년에 쓴 글로 석과 갑이란 아동의 특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석과 갑은 동고의 자식으로 국창에게 보내 교육을 부탁한 것 같다. 석은 시가의 기질을 타고나 色態가 많으나 기력이 떨어지고, 석은 가끔 강건하고 기이한 구절을 내나 결구가 약한 게 흠인데 동네의 또래에 비교하면 뛰어난 편이라 평하였다. 넷째는 1766년에 쓴 글이다. 지난번에 항우의 죽음 여부는 범증과 관계가 없다고 논한 적이 있는데 참으로 의론문의 체재를 체득한 것이다. 다섯째는 1767년에 쓴 글로 동고 자신이 취중에 망발한 것에 대해 사과의 뜻을 담은 서신을 보내준데 대한 답장이다. 잘못을 후회하는 것이 善의 단서라 지적한 뒤, 도정절의 [지주]시 1편을 종신토록 마음에 새겨 잊지 말 것과 뜻을 오로지해서 심성을 다스리는 공부에 종사할 것을 충고하였다.
[與權其天思浩(1784)] : 권기천 사호에게 보낸 서신으로 스승의 팔질고 및 친우인 조영산의 서신, 삼의골에 갈 위문장을 아울러 보내니 확실한 인편을 통해 전달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答李戚丈溟] : 척장이 되는 야일 이명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모두 2편이다. 첫째는 1744년에 쓴 것으로 병든 누이의 약재를 보내준데 대해 매우 감사하다는 뜻을 밝힌 글이다. 둘째는 1747년에 쓴 것으로 천질에 약을 먹어도 뚜렷한 차도가 없는 것이 염려되고, 오래전에 문방사우가 떨어졌는데 마침 보내 주어 고마워하는 내용이다.
[答朴大憲弼載(1748)] : 박대헌 필재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백밀연담환을 보내 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전에 구하던 호격문과 기호설을 별지에 적어 보내주면서 [공중누각기], [귀대야유기], [구파설] 등의 글에 대해서는 고향에 돌아온 뒤 서신을 보내 토론할 계획임을 밝히는 내용이다. [答洪報恩侃戚丈(1748)] : 척장이 되는 홍보은 간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내일 광산에 근행하러 간다는 내용으로 보아 객지에서 작성된 글로 보인다. 홍간이 편지를 보내 "객지에서 병이 들면 제삿날을 당하더라도 素食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자, 기일을 당해서는 대체로 사흘을 소식하고, 친구의 부음을 들으면 하루나 이틀, 혹은 나흘을 소식하는 것이 가문의 범절이라 항변하고, 육식을 금한다는 내용이다. [答楊公輔埰(1748)] : 양공보 채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금성에서 돌아온 뒤 수삼일의 공력을 들여 작성한 글이다. 양공보가 질문한 수십 조의 문목에 대해 조목별로 열서한 장문으로 이중 서법에 대해 논술한 것이 주목된다. 한대의 서법은 수척하면서도 강경하여 정제된 맛을 풍기는 바 감정이 적고 골기가 많은 편이다. 당대의 서법은 넓으면서도 살이 찌고 요염하면서도 완만하여 골기가 적고 색태가 많은 편이다. 혹자는 당인의 서법은 굳세면서도 격식이 있어 송대의 글씨로는 따라갈 수 없다고 한다. 진무기는 위부인의 자인데 예서를 잘 써서 우군이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회소첩}을 어떤 총사가 수십 금을 주고 구입했다고 하는데 중국사람들의 호사가 심한 것을 볼수 있다. 소주의 독락사 편액은 이백이 쓴 것으로 필세가 날아오르는 듯 발랄한 생기가 돈다. 설암은 원대의 인물로 본래 승려였으나 그가 쓴 주점 글씨를 조송설이 보고서 환속을 권해 조정에 천거하여 관직을 주었으니 바로 이보광이다. 대체로 서법은 세업과 관계가 있다. 이지봉은 왕희지와 헌지, 구양순과 구양통 부자, 우리나라의 이암과 이강, 김희수와 김로 부자는 모두 글씨를 잘 썼으나 대체로 혈기에서 나온 것이라 논평하였다. [與朴?兄君源孝大(1745)] : 자형이 되는 박군원 효대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거촌에 도착한 뒤 내일 부중과 함께 눌은 선생이 계신 각화사로 공부하러 가야 될 형편이기에 부석사에 가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옛날 사람들은 천리를 걸어와서 스승을 모셨는데 이제 백리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헛되이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答宗叔?窩公震遠] : 종숙인 늑와 김진원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모두 3편이다. 첫째는 1754년에 쓴 것으로 부친의 명으로 상량문을 지었다는 것과 과거는 때가 되면 응시해 보겠다는 내용이다. 둘째는 1763년에 쓴 것이다. 선고 형제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 뒤 세상일에 대해서는 괘념치 않는다. 삼백년 간 이루지 못했던 족보의 편찬을 이제 시작하게 되어 구담재사에 보청을 설치했고, 서울에 거주하는 종친들도 남한 개원사에 보청을 설치하였다. 셋째는 1764년에 쓴 글이다. 혼사가 있는 집에서는 한결같이 치부에 뜻을 두어 문학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데 고가의 후손이라도 불학무식이면 무인과 다를 게 없다. 보사의 일로 개원사에 갔다가 본의는 아니나 과장에 출입했는데 과거생들이 의리는 전혀 알지 못하고 오직 과환으로 마음을 삼는게 매우 한심스럽다는 세태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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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