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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637 : 금당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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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실(金塘室 이엉한마당 잔치 열려 : 祖上들의 智慧가 깃든 이엉잇기 試演) [記事] : 금당실전통마을보존회(회장 김대기)가 주최하고 금당실정보화마을(위원장 안준식)이 후원하는『금당실 이엉한마당 잔치』가 2015년 2월 28일 오후 2시부터 금당실한옥체험관 일원에서 열렸다. 이날은 금당실전통마을보존회 회원과 주민, 관광객 등 1백여 명이 참석했으며 그 옛날 집집마다 초가지붕 이엉잇기로 봄을 맞았던 조상들의 지혜가 깃든 이엉잇기를 시연해 참석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이날 주요행사로 금당실머슴 선발대회를 열어 현장에서 참가자를 모집하여 이엉 멀리던지기, 이엉 들고 앉았다 일어서기로 우열을 가렸다. 또한, 「7080 코러스 공연」으로‘통기타의 향연 코러스 공연, 코러스와 어울렁 더울렁’등 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즐기며 이날 잔치를 마무리했다. 김대기 금당실전통마을보존회장은 “천하명당 십승지인 금당실 마을에서 올해 처음으로 이엉한마당 잔치를 개최하게 된 것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고 앞으로도 조상들의 지혜와 멋스러움이 깃든 이엉잇기 문화를 더 많은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醴泉뉴스 2015년 03월 02일)
금당실(醴泉 金塘室 秘境에 빠져보자 : 99칸 양주대감 邸宅 터 古家屋, 돌담길 兩班文化 그대로 간직) [記事] : “금당실은 우리나라 십승지의 하나로 병화가 들지 못한다.” 정감록(鄭鑑錄)에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꼽은 ‘십승지지’ 중 한 곳으로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만큼 경치가 빼어나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길 54 금당실마을. : 소백산 자락에 자리잡은 마을 옆으로는 금곡천이 흐르고 비옥한 농경지가 형성돼 있다. 특히 ‘충효마을’이라는 이름 아래 남녀노소를 불문한 자연과 문화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많은 전통 문화재가 산재돼 있다.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저택 터를 비롯한 고가옥, 인근에는 초간 권문해의 유적인 초간 종택과 초간정, 용문사 등의 문화유적이 많이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생활의 재현과 대동운부군옥(보물 제878호), 초간일기(보물 제879호) 등의 사료적 의미를 가진 유교문화자원을 통해 산실 교육의 장으로도 좋은 곳이다. 고가옥과 미로로 연결돼 있는 돌담길은 양반문화를 그대로 간직해 역사, 문화, 전통이 강하다. 함양 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숭모해 재향 올리는 ‘추원재’, 원주 변씨 변응녕을 기리는 ‘사괴당 고택’, 조선 숙종 때 도승지 김빈을 추모하는 ‘반송재 고택’ 등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매력은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반상의 문화가 공존했던 마을의 특성을 살린 다양한 고택 민박과 농촌 체험이 인기다. 소달구지를 타고 마을을 둘러볼 수도 있고 곡물 파종과 나무캐기도 할 수 있다. 채취한 산나물은 집으로 가져가도 된다. 직접 김장을 담궈 김치도 맛볼 수 있다. 장터 체험, 투호와 제기차기 등 전통놀이도 인기다. 또한 마을의 유래와 문화재의 의미를 배우며 양반 문화도 경험할 수 있다. 갓과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당시 양반들이 갖춰야 했던 예절ㆍ서예ㆍ다도를 익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밖에도 연못에 떠있는 연꽃을 상징하는 오미봉 공원과 마을의 서쪽으로부터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막아주고 마을을 보호해주는 2km의 울창한 소나무 숲은 금당실마을의 아름다운 자연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최근에는 영화 영어완전정복(2003), 나의 결혼원정기(2005), 그해 여름(2006), KBS 드라마 황진이(2006) 등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서도 명성을 얻고 있다. 이곳을 찾은 한 관광객은 “개인주의와 핵가족화로 잊히고 있는 이웃사촌간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지나가는 나그네라도 물 한 모금과 따뜻한 아랫목을 내어줄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을”이라며 “선조들의 지혜와 생활양식을 체험할 수 있어서 유익했다”고 말했다.(이부용 기자, 박기범 기자, 慶北道民日報 2015.03.20)
금당실(중은의 風水이야기(16) - 醴泉 金塘室 마을 : 外部 敵에게 쉽게 露出되지 않는 明堂 中의 明堂) [記事] : 금당실은 마을 내 고인돌 무덤이 산재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600여년 전 15세기 초 감천 문씨(문헌)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의 손자 문부경의 사위 박종린과 변응녕이 처향인 금당실에 터전을 잡으면서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큰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할 수 있는 땅! 흔히 이런 곳을 우리는 승지라고 일컫는다. 즉 이런 경치가 좋거나 지형이 뛰어난 곳, 10군데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 중 한 곳이 금당실이라고 한다.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곳이기도 하다. '금당실은 우리나라 십승지의 하나로 병화가 들지 못한다'고 하여 임진왜란 때 온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정감록(鄭鑑錄)에 남사고(南師古:1509~1571)가 꼽은 십승지지 가운데 한 곳으로서 '금당과 맛질을 합하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어 아쉽다'고 하였다. 마을 앞 금곡천에 사금이 생산되었다고 하여 '금당실'은 금당곡 혹은 금곡이라고 한다. 또한 감천 문씨가 이곳을 개척했고 사위인 박종린과 변응녕이 정착하여 지형을 보니 풍수지리적으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형국을 하고 있으며 북쪽의 매봉, 서쪽의 국사봉, 동쪽의 옥녀봉, 남쪽의 백마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지형으로 매봉이 조산(組山)이 되고 그 뒤로 길게 뻗은 소백산 줄기가 내룡(來龍)이 되어 연못을 상징해서 금당이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군지에 따르면 이곳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달구리재(학명현)'가 앞에 있고 '개우리재(견곡현)'가 오른쪽에 있으니 중국의 양양 금곡과 지형이 같다고 하여 '금곡'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금당실 마을은 조선시대 고가옥과 미로로 연결되어 있는 돌담길이 양반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전통마을로서 역사, 문화, 전통이 강한 곳이다. 함양 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숭모하여 재향 올리는 추원재, 원주 변씨 변응녕을 기리는 사괴당 고택,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고택터, 조선 숙종 때 도승지 김빈을 추모하는 반송재 고택 등 이외에도 개량된 고택들이 자리하고 있어 전통생활양식을 직접 느낄 수 있는 마을이다. 그리고 연못에 떠있는 연꽃을 상징하는 오미봉 공원과 마을의 서쪽으로부터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막아주고(裨補風水) 마을을 보호해주는 금당실 송림은 금당실 사람들은 예부터 소나무를 베는 사람을 우물에 빠뜨릴 정도로 소나무를 아끼고 소중하게 보호하여 왔다. 금당실 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도 금당실 마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쑤'라고 불리는 이곳은 내륙지방에서는 흔하지 않은 소나무 방풍림이다. 예전에는 그 길이가 2km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800m 정도만이 남아있는데, 방풍림이 이렇게 줄어든 것은 금당리 마을에 숨겨진 슬픈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892년 마을 뒷산인 오미봉에서 몰래 금을 채취하던 러시아 광부 두 사람을 마을 주민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조선과 러시아간 외교문제로 비화되어 마을의 존립자체가 위태로워지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말았다. 마을주민들은 고심 끝에 마을의 공동재산이었던 이 소나무를 베어 러시아 측에서 요구하는 배상금을 충당하게 되었고, 그렇게 베어내고 남은 것이 지금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오랜 세월 천재(天災)와 인재(人災)로부터 마을을 지켜준 송림에 대한 마을주민들의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풍수지리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금당실 마을(예천군 용문면)로 이어지는 산맥(龍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 지세의 척추역할을 하는 백두대간에서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 되는 산이 태백산(1,567m)이며 이곳에서 청옥산(1,277m)을 내어주면서 크게 용이 꿈틀거리듯 산세가 변화하는데 청옥산은 남으로 뻗어나가 낙동정맥의 본산이 되며 백두대간은 남서쪽으로 그 맥을 이어가는데 옥석산(1,242m)에서 서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용이 고개를 크게 처들 듯 선달산(1,236m)을 만들고 서쪽으로 뻗어가다가 마대산(1,052m)를 내어 용맥은 다시 남서쪽으로 진행한다. 백두대간 용맥은 잠시 숨을 고르고 쉬어 가는 듯 하며 형제봉(1,178m)을 만들고 진행하면서 소백산(1,439m)에 이르러 크게 일어나 성봉을 하였다. 소백산에서 흰봉산(1,261m)으로 이어지는 용맥은 남으로 뻗어있는데 지금의 중앙고속도로와 영주와 단양으로 이어지는 철도 그리고 국도5호선이 연결된 재를 내어주고 흰봉산에서 문복대(1,074m)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다시 도약하기 위하여 움츠리는 모습으로 크게 서쪽으로 감아 진행하여 황장산(1,077m)을 성봉하였다. 문복대에서 남으로 가지맥을 내어 용맥의 높이를 낮추면서 진행하여 성봉된 산이 금당실마을의 조산(祖山)이 되는 매봉(865.3m)이다. 매봉은 용문사의 주산이 되는데 용문사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윤장대가 남아 있으며 용문사는 870년 신라 경문왕 때 두운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용문사를 오른쪽으로 두고 용맥은 숫한 변화를 거듭하여 순한 산세와 풍수지리적 지세를 갖춘 용맥으로 진행하여 금당실 마을 뒤에 이르러 표고 300m에서 남으로 뚝 떨어지면서 좌우로 가지맥을 내어 호종보호사(護從保護砂)을 만들고 그 중심맥은 간결하면서도 뚜렷하게 낮게 이어지는데 이곳에서 모든 살기(殺氣)를 다 털어내고 다시 성봉하여 만들어진 산이 금당실 마을의 주산(主山)되는 오미봉(200m)을 형성하였다. 금당실 마을의 주산인 오미봉을 중심으로 좌우에 산맥들이 금당실 마을을 포함한 용문면 중심으로 기운을 모아주는 국세(局勢)를 하고 있으며 마을을 형성하는 내명당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토가 있는 외명당이 같이 있는 살기 좋은 양기(陽氣)터라 할 수 있다. 또한 외침으로부터 침범을 당하지 않은 곳으로 알려진 대는 풍수지리학적으로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금당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맥, 특히 문복대에서 뻗어 내려온 청룡맥이 지금의 금곡리 율곡리 제곡리로 이어지고 다시 용문면을 동에서 서쪽으로 감싸는 형국으로 용맥은 성현리와 옹산리, 덕신리와 성평리, 수심리와 광전리, 중평리와 고림리를 배산으로 하여 용문면 앞쪽 즉, 안산대(案山帶)를 형성하고 있어서 문경 예천 영주로 이어지는 교통로에서 벗어나 있는 곳이다. 따라서 금당실을 중심으로 한 용문면은 외침으로부터 쉽게 노출되지 않은 천하요지인 명당인 것이다. 예로부터 예천의 예(禮)의 고장이요. 충절의 고장이며 학풍의 고장이기에 조선중기 대학자인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 선생이 이곳에서 출생하였고 묘 또한 이곳이 있으며, 곳곳에 그의 유서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탁은 이황의 문인이었다. 1558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에까지 올랐으며, 임진왜란이 터지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다. 천문, 지리, 군사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며, 임진왜란 중에는 곽재우, 김덕령 등의 뛰어난 장수들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1597년 3월에 이순신이 옥중에서 죽게 되자 적극 말려 그를 구했다. 저서로 ‘약포집’, ‘용만문견록’ 등이 있다.(양동주 大邱韓醫大 大學院 兼任敎授 慶北日報 2015년 07월 07일)
금당실(新道廳時代 醴泉의 場所性과 人文魂을 찾아서. <6>金堂室의 風水 五美) [寄稿] : 이 땅에 풍수로 유명한 촌락은 많다. 한국 풍수의 비조(鼻祖)인 도선국사가 수백 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입적한 광양의 도선국사마을[양산마을]을 비롯하여, 영남 4대 길지[하회·양동·내앞·닭실]와 호남 3대 명촌[구림·금안·무성], 그리고 쌍둥이마을, 박사마을, 장수마을, 십승지(十勝地)마을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 제일의 풍수촌(風水村)'으로 금당실(金塘室: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을 꼽는다. 금당실은 우리 고유 전통지리학의 『정감록』'십승지' 모델과 『택리지』 '가거지(可居地)' 모델이 합쳐져 있는 예스럽고 소박한 멋을 지닌 촌락이다. 산·수·방위·인간을 풍수의 4대 요소라 할 때, 그들 요소 간의 음양 상배(相配)와 오행 상생(相生)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마을이다. 필자는 금당실의 살아 숨 쉬는 생기와 그 이면에 배어 있는 각별한 장소혼(魂)을 특히 높이 산다. 예전에는 금당실 터가 다산(多産) 운세의 기가 높다고 소문나 근동 마을 사람들이 이사를 오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건강을 잃은 사람이 그곳에 들어와 몇 년 머물면서 완전히 치유를 한 사례도 있다. 필자가 마을 안 곳곳을 둘러보면서 느낀 것은 그 터의 기운이 여전히 생생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풍수답사 일번지'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금당실에는 풍수적 길기(吉氣)가 충만해 있다. 금당실[상금곡리]의 주산은 오미봉(五美峯)이다. 해발 205m 정상에 오미정(五美亭)이 있다. 그곳에 올라서면 다섯 가지의 아름다운 풍경[五景]을 맛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들이다. 앞쪽[남쪽]으로 둘, 뒤쪽[북쪽]으로 둘, 옆[서쪽]으로 하나 해서 도합 다섯 가지다. 그 첫째는 남쪽 아미산에 걸린 반달[蛾眉半月]이요, 둘째는 해 질 무렵 버들밭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柳田暮煙]이며, 셋째는 뒤쪽[북쪽] 선동으로 떠가는 아름다운 구름[仙洞歸雲]이고, 넷째는 용문사에서 들려오는 새벽 종소리[龍寺曉鐘]이며, 마지막 다섯 번째는 서쪽 대수마을에서 불어오는 맑고 시원한 바람[竹林淸風]이다. 이 오미(五美) 트렌드에 맞추어 금당실이 지닌 풍수적 아름다움을 필자가 다섯 가지로 축약 정리해 보았다. 산세(山勢) 미(美)·수세(水勢) 미·비보(裨補) 미·형국(形局) 미·토의(土宜) 미로 일컬어지는 이른바 '풍수 오미'다. 이들 아름다움들을 알게 된 후 금당실 경관을 바라본다면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장소애(場所愛)가 용솟음칠 것이다. 장소 정체성[아이덴티티] 확립과 강화는 21세기 문화관광시대의 필수적 과제다. 그것은 내부적으로는 지역 발전과 주민 통합을 이루고, 외부적으로는 삶터를 한층 더 매력 있는 장소로 만들어 인구 유입과 방문객 중가로 인한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밑거름이 된다. 아무쪼록 이 글이 금당실의 정체성을 재수립하고 미래의 용문이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산세(山勢) 美 : 산세(山勢)는 풍수 용어가 아니다. 풍수에서는 용세(龍勢)와 국세(局勢)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 글에서는 금당실 일대의 산을 설명하기 위해 그 두 개념을 포괄하는 용어로 '산세'라는 말을 임시로 도입했다. 풍수에서는 천변만화하는 산의 모습을 용에 비유하는데, 용세는 산맥의 출발점인 태조산에서 발원한 기맥이 중조산과 소조산을 거쳐 혈장의 바로 뒤에 있는 주산(主山)까지 이어지는 산줄기 힘[세력]의 강약 변화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주산의 용맥 계보로서 사람으로 치자면 가문의 보첩과도 같다. 금당실의 용세는 무척 빼어나다. 태백산[太祖山]에서 서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소백산 도솔봉[中祖山]을 지나 저수령을 넘어 월악산으로 가는 중에 한 가지가 남으로 내려와 매봉[少祖山]이 되었는데, 거기에서 낙맥한 세 갈래 지맥 중 가운데 지맥[中出脈]이 금당실의 현무정(玄武頂)이자 주산인 오미봉까지 이어졌다. 특히 매봉에서 금곡분지를 향해 남쪽으로 내리뻗은 마지막 지맥은 네 개의 봉우리를 연이어 솟구쳐 놓고 마지막 다섯 번째로 오미봉이라는 옹골찬 봉우리를 금곡평야와 접맥해 놓았다. 오미봉은 정말 알토란같은 봉우리다. 똘똘 뭉쳐진 기(氣) 덩어리다. 마을 안에 지석묘가 있어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다고는 하지만, 이 오미봉을 눈여겨 본 것은 15세기 초에 감천문(文)씨 집안이 이곳을 세거지로 삼았을 때가 처음이었을 듯싶다. 오미봉의 내맥(來脈)과 기의 응결 상태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풍수를 약간이라도 아는 사람[양반]이라야 그 진면목을 발견하고 그 터를 차지할 수 있었지 않았겠는가. 금당실의 국세 역시 용세에 못지않게 빼어나다. 국세란, 혈장의 기운을 잘 갈무리하고 보호하기 위해 명당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보여주는 세력의 변화와 조화를 말한다. 청룡·백호·주작·현무의 사신사(四神砂)와 그 주변에 솟은 낙산·탁산 같은 연분사(緣分砂)들이 얼마만큼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명당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는가가 관건이 된다. 금당실의 경우, 오미봉을 주산으로, 마을 동쪽[좌측]의 망월봉에서 육녀봉으로 이어지는 지맥이 좌청룡이 되고, 서쪽[우측]의 국사봉 지맥이 우백호가 되며, 남쪽의 백마산 줄기는 안산(案山)이 되어 길격의 사신사 판국을 이룬다. 주산인 오미봉을 중심으로 좌우의 산맥들이 금당실[龍門面基]에 기운을 모아주는 형세다. 금당실 마을의 뒤를 지켜주고 있는 겹겹의 소백산 능선들과 오미봉의 아름다움은 그 터에 배어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소혼(魂)으로 인해 더욱 빛난다. 마을 북쪽을 횡축[동서축]으로 겹겹이 두른 소백산 골짝들은 국난기 때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보전해준 십승지 중의 하나였으며, 오미봉은 구한말 러시아가 전국적으로 '쇠 금(金)'자 땅이름을 가진 곳을 금광 채굴지로 집중 개발할 때도 주민들의 보살핌으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지금까지 금당실 터의 지킴이로서, 또한 금당실을 상징하는 영물(靈物)로서 절대적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오미봉은 우리 눈에 보이는 그저 작고 아담하게 생긴 단순한 산봉우리가 아니다. 금당실 조상들의 혼이 스며있는 성소다. 예나 지금이나 삼백(백두·태백·소백)의 무량한 기운은 마을 북쪽 매봉 중심 용맥 흐름을 타고 일단 오미봉에 저장되었다가 마을 터 안으로 흘러든다. 금당실 선조들의 삶터 사랑은 한 세기가 지난 후 전통문화마을 조성사업으로 이어져 금당실을 더욱 명기(名基)답게 만들고 있다. '되는 집안' 따로 있듯이, '되는 마을'도 역시 금당실 같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수세(水勢) 美 : 금당실은 두 계류수 사이에 입지해 있다. 앞내인 금곡천[용문천]과 뒷내인 선동천[仙里川] 사이다. 금곡천은 매봉 아래 용문사 계곡에서 발원해 마을 앞[서촌]을 흐르고, 선동천은 선리의 청룡사 협곡에서 발원해 마을 뒤[북촌·동촌·남촌]를 흘러 마을 동남쪽 용문교에서 합쳐진다. 이 일차 합수 지점 남쪽으로도 금곡천과 천내천이 합쳐지는 이차합수 지점, 또 금곡천과 한천이 합쳐지는 삼차합수 지점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물줄기는 역시 금당실 마을 터를 직접 둘러싸고 있는 1차수 하천인 앞내와 뒷내다. 금당실처럼 하천 상류에서 골짜기를 빠져 나온 물이 합쳐지는 곳에 자리 잡은 터를 '계간취회(溪澗聚會)' 명당 또는 '이수합금(二水合襟)' 명당이라고 한다. 산이 아닌 하천줄기에 초점을 맞추어 만들어진 형국 이름들이다. 보통 산줄기가 좌우로 옷깃처럼 놓이고 그 앞으로 물줄기가 허리띠처럼 두른 모습을 '산하금대(山河襟帶)'라고 일컫지만, 금당실은 두 가닥 물이 옷깃처럼 합류하는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수합금'의 터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줄기[水勢]의 합류는 금당실 터를 연화부수형이나 행주형과 같은 다양한 형국명으로 불리게 만든 바탕이 되기도 했다. '지기는 물을 만나야 더 이상 흐르지 않고[氣界水則止] 그 안쪽 명당에 축적된다'는 것은 불변의 풍수 논리다. 그래서 풍수 고전에서도 '풍수의 술법[風水之法]은 물을 얻는 것이 으뜸이요[得水爲上], 바람을 갈무리하는 것이 그 다음[藏風次之]이라'고 했다. 그 같은 형이상학적 풍수논리를 현실 지리세계로 끌어내려 물 기운[水氣]이 거주지 선정에 끼치는 직접적인 영향력을 밝힌 글이 바로 이중환의 『택리지』다. 산업화시대에는 도로가 부(富)의 근원이 되고, 정보화시대인 지금은 또 통신망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지만, 과거 농경시대에는 물이 부(富)의 근원이었다. 그런데 나라가 가난하다보니 하천변에 변변한 제방 하나 쌓지 못해 조금이라도 비가 많이 내리면 물가 마을들은 온통 물바다가 되기 일쑤였다. 『택리지』에 나오는 '바닷가의 삶은 강가에 사는 것만 못하고(海居不如江居), 강가의 삶은 시냇가에 사는 것만 못하다(江居不如溪居)'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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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