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도청신도시 예천 660 : 금리 하향...금석문
---
금리 하향 안정화 방안(金利 下向 安定化 方案) [冊] : 예천 출신인 남주하(南周廈, 1962- , 西江大 助敎授)의 저서로, 707쪽, 23cm, 서울 한국경제연구원에서 1997년에 출판하였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경기대(서울, 수원), 남서울대, 덕성여대, 동양대, 상명대(천안), 상지대, 서강대, 서울시립대, 성공회대, 숙명여대, 숭실대, 영남대, 이화여대, 중앙대(제2캠퍼스), 충북대, 평택대, 호남대이다.(keris 2003)
금마들 : →금맛들
금맛들, 금마들(金馬坪), 건맛들 [들] : 예천읍 고평리(高坪里) 부루실 앞에 있는 들로, 이 들을 만들 때 제방을 쌓는 도중에 거기서 아주 큰 뱀 또는 용(龍) 같은 것이 기구에 찍혀 죽었다. 그 자리를 지금도 용맥(龍脈)이라 한다.
금부처, 금불상(金佛像) [佛像] : 1) 용문면 선1리(仙一里) 두들마에서 1920년 경에 발견한 부처로, 장치산이 자기 집 담을 허물어 옮겨 쌓으려다 발견하였다. 그러기에 이 곳의 사찰 이름이나 내력이 문자로 기록되거나 전설로 내려온 바는 없다. 다만 이 곳에 옛날에 큰 사찰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뿐이다. 장치산은 이 금부처를 발견하자, 그 집에 큰 괴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집 뒤 밭 가운에 있는 큰 돌 밑에 이 금부처를 묻고 찬물을 떠다 놓고 매일 기도하였다. 그 집에 안녕이 있기를 정성스럽게 기도하였다. 이 금부처를 이웃 마을의 어느 노인이 몰래 파내어 서울로 갖고 가서 많은 돈을 받고 팔아버렸다고 한다. 2) 용문면 선1리(仙一里)에서 1977년에 발견된 부처로, '이 선동(李仙洞) 어른'이라는 택호(宅號)를 가진 분이 그의 집(現 이덕현 씨댁) 마당에서 일하던 중 발견하였다. 여기에 무슨 부정(不淨)이 있을까 겁(怯)을 내어 손으로 만지지 못하고 삽으로 떠서 담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하룻밤을 자고 나니, 금부처는 온데간데 없더라는 것이다. 뒷이야기로는 강원도에서 노다지를 찾아 금광에서 일하던 사람이 이 곳 성줏골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금부처를 몰래 갖고 서울에 가서 처분한 후 대구에서 살다가 1970년 경에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두들마을의 중앙을 파보면 옛 기왓장이 나오고 있다.
금북골 : →검북골
금불상 : →금부처
금불초 [植物] : 예천군의 들에 흔히 자생하는 다년생 초본으로, 학명은 Inula japonica Thunb이고, 국화과(菊花科)에 속한다.
금산(琴山), 매봉, 매봉산, 내봉산, 내봉재, 응봉산(鷹峰山) [山] : 호명면 종산리(宗山里) 종미 남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 161m이다. 봉우리가 매처럼 생겼고, 매우 아름다워서 충절공 이동표(忠節公李東標, 1644-1700)가 거문고를 타며 즐겼다는 수려한 산이다. 금씨(琴氏)들 조상 분묘가 있다.
금산 : 금산/ 주소(지번) 경북 예천군 호명면 종산리/ 카테고리 지명(daum 2016)
금산 : →대금터[마을], →포금산[山]
금산군소재각둔전답자호복수두수작인성명성책(金山郡所在各屯田畓字號卜數斗數作人姓名成冊) : 날짜: 1899-01-01/ 발행자: 금산군/ 분류: 연구자료 > 학진 기초학문자료센터 역사학 연구성과/ 제공: 한국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예천 관련 기록이 있다.//
금산만업 : ヘイタイサンノオデムカエ / 신문명 매일신보 1942/ 분류 연속간행물 > 신문 > 每日申報/ 창간일 1905년 08월 11일 (一千九百五年八月十一日)/ 소장처 한국연구원/ 발간정보 부록 간기:일간 언어:국한문/ 일자(양력) 1942년 10월 04일/ 형태정보 크기: 면수:02 단수:16/ 기사위치 02면 06단/ 기사본문 : 金山萬業(醴泉郡醴泉邑路上洞)/ 제공 미디어가온 고신문(http://www.history.go.kr/2014)
금산미술관(金山 큰 스님 作品世界 한눈에 볼 수 있는 常設展示場 金山 美術館 開館(源泉湯) [記事] :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백지 위에 심중의 먹물을 뿌려 보았습니다." 女人天下의 노승 금산 큰스님 미술관(도자기 및 동양화) 개관식이 2008년 6월 10일 오후 2시 용궁면 무지리 현지에서 개관식을 갖고 일반에 공개됐다. 이날 행사에는 불교계의 큰스님, 최명환 예천교육장, 영화배우 김희라 씨와 평소 친분이 두터운 탤런트 정일모 씨 등 100여 명이 참석하여 금산(金山) 스님의 미술관 개관을 축하했다. 금산 큰스님은 개관 인사말에서 "삼보귀의옵고...소승 만갑(滿甲)의 사문을 모듬하여 수행(修行)의 장로(長路)에서 일필일필(一筆一筆)지었던 작품들을 모아 어려운 이웃을 위한 자선의 자리를 마련했다"고 소개했다. 금산 큰스님은 또 "낙엽은 떨어졌으나 그 몸체의 소중함을 생각하면서 이 시대의 어르신들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들이 현존(現存)하였겠습니까? 어르신들을 소외하며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과거를 뒤돌아보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이것이 곧 자비의 실천이요, 보시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미술관을 개관하게 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금산 큰스님(74세)은 1958년 양산 통도사에 입산 득도하며 고당 박생강 스님으로부터 단청을 사사받고, 1967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동양화 부문에서 특선, 문경 관음, 갈평 옛 질그릇 재형, 서울.부산 등 전국 대도시 순회 전시회 개최, 영주 소년소녀가장돕기 자서전 등 수십 회의 전시회를 개최하여 불우한 이웃을 돕고 있다. 현재, 대한불무도협회 기술고문, 세계 소림사 선무도무술 방장 겸 사범, 대한불교 범종단 최고원로회 대표의장, 운부암 조실, 국제불교미술문화협회 총재 등의 직함을 갖고 있는 금산 큰스님은 무술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SBS 여인천하 등에 출연한 배우로도 유명하다. 금산 큰스님은 예천인터넷뉴스 기자에게 "용궁 원천탕 입구에 전시관이 개관된 것을 널리 홍보해 줄 것"을 당부하고 "예천군은 지역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이 회룡포~금산미술관~예천우주천문과학관~예천온천을 연결하여 관광할 수 있도록 관광밸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8-06-10)
금산사(金山寺) [터] : 풍양면 와룡1리(臥龍一里) 사정리 뒷산 탑골(塔谷)에 있던 사찰로, 1860년경에 발견된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1기(羅末麗初)와 와편(瓦片)이 산재되어 있다. [傳說] : 통일신라 때 창건되었으나,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유추(類推)하여 보면, 고려 중엽에 없어졌다. 절에 빈대가 많아서 승려들이 살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였다. 석조여래입상이 발굴될 때 '기자(奇子)'라고 쓰인 돌이 있었다 한다. 또한 목탑(木塔)도 있었다고 한다.
금산사(金山寺) [터] : 풍양면 와룡1리 41번지 모라몰 마을 뒷산에 있던 사찰로, 여기에는 고려 초기에 조선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여래입상 1구가 노천에 현존하고 있는데, 두부가 떨어져 없어졌다.(龍宮鄕校誌 上卷 2005)
금산사 목탑(金山寺木塔) [터] : 풍양면 와룡1리(臥龍一里) 사정리 뒷산 탑골(塔谷) 금산사(金山寺) 경내에 있던 목탑(木塔)으로, 그 규모가 매우 컸다고 한다. [傳說] : 뒤의 덕산(德山)을 넘어갈 만큼 높아 그 그늘 때문에 부근의 농사가 잘 되지 않아서 화가 난 농부들이 탑을 무너뜨리자 탑신(塔身)의 절반은 덕산(德山)을 넘어가고, 그 안에서 '기자(奇子)'라고 쓴 글자가 나왔다고 한다. 금산사는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유추(類推)하여 보면, 고려 중엽에 없어졌다. 그래서 지금도 이 곳을 탑골이라고 한다.
금산사 석조여래입상 : →예천와룡리 석조여래입상
금산사지(金山寺址) [절터] : 풍양면 와룡리 산23-4번지(林) 일대에 있는 절터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전해지며 일대에서 절터의 유구(遺構)와 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절터는 몇 개의 단을 이루며, 장방형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축대는 석축으로 추정되나 붕괴와 무성한 넝쿨 때문에 정확한 높이와 모양은 확인할 수 없다. 현재 불두(佛頭)가 잘린 와룡동석조여래입상(마을에서 불두를 신석으로 조성하여 얹어 놓았다)이 유존하고 있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금서유고(琴棲遺稿) [冊] : 권주환(權冑煥; 1825~1893, 本貫 醴泉)의 문집이다. 권주환의 자는 희직(希直), 호는 금서(琴棲)이다.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대학(大學)』, 『서명(西銘)』등을 배웠다. 김흥락(金興洛)과 도의를 묻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문집의 시는 서정적인 것들로, 주로 친지들과 화답한 것이다. 서(書)는 대부분이 예설(禮說)을 중심으로 하였다. 비록 학문적인 내용을 주고받은 것일지라도 개인 간의 친분을 유려한 필치로 잘 나타내고 있다. 잡저(雜著)에는 「성학십도의의(聖學十圖疑義)」가 있다.(韓國國學振興院 嶺南士林文集 2004)
금서유집(琴棲遺集) [冊] : 본관인 예천인 금서 권주환(權冑煥, 1825-1893)의 시문집으로, 6권 3책, 31.4x21.2cm, 목활자본(木活字本), 조선조 말기(朝鮮朝末期)에 간행되었다.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은 20.7×16.2㎝, 유계(有界), 10행(行) 20자(字), 주쌍행(註雙行), 판심(版心)은 상하 내향 이엽 화문 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서문(序文)은 1952년 정월에 엽채(葉采)가 썼다. 권주환의 자는 희직(希直), 호는 금서(琴棲), 본관은 예천(醴泉)이다.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대학(大學)』,『서명(西銘)』등을 배웠다. 김흥락(金興洛)과 도의를 묻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문집의 시는 서정적인 것들로, 주로 친지들과 화답한 것이다. 서(書)는 대부분이 예설(禮說)을 중심으로 하였다. 비록 학문적인 내용을 주고받은 것일지라도 개인 간의 친분을 유려한 필치로 잘 나타내고 있다. 잡저(雜著)에는「성학십도의의(聖學十圖疑義)」가 있다. 목차는, 서(序 ; 李晩규), 권1에 시(詩 : 59首), 만사(輓詞 : 37), 권2에 서(書 ; 上定齋先生(3), 上定齋先生問目, 與李丈(晩斗), 與이齋權丈, 與宜菴李公(2), 與金德文, 答金德文, 與李侯國明, 與箕疇鄭丈, 答金西山繼孟(興洛)(3), 與金西山, 上洛坡柳相公(厚祚), 與山泉朴丈, 答山泉, 與李判書(承輔), 與柳元佐(止鎬)(2), 答柳元直(廷鎬), 答柳敏兼(烋睦), 答李君宅(2), 答金正伯(養鎭), 答宋進士源如, 答鄭士文(昌世昌顯昌範)擎國, 答李子精(炳淵), 答靜村李公, 與北溪堂中, 與焰畢齋金先生後孫, 與柳應春(東植), 答權濟亨, 與李斷, 答李愼菴, 答金仲賢, 答金聖玉(輝昱)問目, 答李安未(炳厦), 答金說初(商學)允先(商覺), 答李彛會), 권3에 서 (書 ; 與聯芳世稿重刊所(爲鄕士林), 上金巡相(明鎭), 答金啓周別紙, 答族姪國明(聲遠), 答族姪德夫(馨遠)(2), 答德夫別紙, 答族姪德謙(柄遠), 答德謙, 答族姪孟穆(聲駿)), 소(疏 ; 請復祠院儒疏), 제문(祭文 ; 祭定齋先生文, 祭外舅桐巢金公(重夏)文, 祭荷未朴公(箕寧)文, 祭李愼菴文, 祭宜菴李公文, 祭進士權公(世永)文, 祭素軒權公(人夏)文, 祭參判金公(奎運)文, 祭洪進士(淳學)文, 祭內舅金公(樂後)文, 祭李內兄(晩栢)文, 祭山泉朴丈文, 祭李丈(晩斗)文, 祭族兄(人煥)文, 祭申公(浩運)文, 祭三從叔新溪公文, 祭族兄(周煥)文, 祭族兄(有煥)文, 祭族叔輔卿文, 祭伯兄文, 哭李壻文, 祭室人豊山金氏文), 애사(哀辭 ; 長女李氏婦短招哀辭, 再從姪聲鎬哀辭), 뇌사(뇌辭 ; 曹司諫景年(錫萬)뇌辭, 新溪公뇌辭, 金德文뇌辭, 李羲則(龍河)뇌辭), 권4에 축문(祝文 ; 先祖判書公墓改床石告由文, 新齋金公(爾甲)墓安石告由文, 通德郞金公(濟萬)墓安石), 고유문( 告由文), 잡저(雜著 ; 燈火銘, 漢說, 聖學十圖疑義, 戒鶯說), 서(序 ; 命山續계序, 金海金氏族譜序, 學계案序), 기(記 ; 龍門齋舍記, 塔洞齋舍記, 草澗亭廚舍上樑記事記), 상량문(上梁文 ; 能川書堂重修上梁文, 觀察使丁公(胤祐)別廟重修上梁文, 竹林書室上梁文), 시장(諡狀 ; 贈資憲大夫工曹判書寧越嚴公諡狀, 貞窩先生黃公請 贈上言諡狀, 孫孝子請 贈上言諡狀, 金孝子金孝婦請 旌閭上言諡狀), 권5에 행장(行狀 ; 祖考通德郞府君遺事, 本生考成均生員府君遺事, 齊平公松堂先生遺事, 睡軒先生遺事略, 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東岡鄭公行狀, 廳澗權公家狀, 孺人羅州丁氏事狀), 묘지(墓誌 ; 長子鼎遠廣誌, 族姪弘遠廣誌), 권6에 부록(附錄 ; 行狀, 墓碣銘, 輓詞(38), 뇌文, 祭文(6))이다.(韓國國學振興院 嶺南士林文集 2004)
금서유집(琴棲遺集) [冊] : 예천인 권주환(權冑煥 ; 1825~1893)의 문집이다. 권주환의 자는 희직(希直), 호는 금서(琴棲), 본관은 예천(醴泉)이다.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대학(大學)』, 『서명(西銘)』등을 배웠다. 김흥락(金興洛)과 도의를 묻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문집의 시는 서정적인 것들로, 주로 친지들과 화답한 것이다. 서(書)는 대부분이 예설(禮說)을 중심으로 하였다. 비록 학문적인 내용을 주고받은 것일지라도 개인간의 친분을 유려한 필치로 잘 나타내고 있다. 잡저(雜著)에는 「성학십도의의(聖學十圖疑義)」가 있다.(http://www.koreastudy.or.kr 2005)
금석문(金石文)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석비(石碑)는 서기 85년 후한 때의 점제현신사비이고, 그 다음이 고구려의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이다. 광개토왕비와 함께 광개토왕호우(廣開土王壺杆)와 연수명은합우(延壽銘銀合杆)에 보이는 명은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료이다. 신라 진흥왕비(眞興王碑)와 백제의 무령왕릉(武寧王陵)의 묘지(墓誌)의 기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과 일치하는 곳이 있어 금석문에서 문헌 사료의 신빙성을 높여 주었다. 또 백제의 독자적인 연호가 나타난 건흥(建興) 5년명 불상광배(佛像光背)와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등은 지배의 실상을 기록한 비명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금석 문자의 서체(書體)에는 행서(行書)․해서(楷書)․예서(隸書) 등이 있는데, 해서가 가장 많고 다음이 행서이며, 전서(篆書)는 조선 시대에 허목(許穆)이 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하나 뿐이다. 문체에는 운문(韻文)․고문(古文)이 있으며, 당 나라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가 한국에서는 신라 이후 금석문의 정식(定式)으로 되었는데, 통일신라 이후의 사륙변려체로 특히 유명한 것은 최치원(崔致遠)의 사산비(四山碑)이다.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의 문체는 한국식의 산문이고, 특히 창녕(昌寧)의 척경비문(拓境碑文)과 경주 남산성석각 및 고구려 성벽석각 등에는 한국 고유 명칭과 이두(吏讀)가 나타난다. 동양의 금석문은 대부분 한자(漢字)인데, 한국에는 해주(海州)․용천(龍川)․개성․평양에 범자(梵字) 석각이 있고, 북청(北靑)의 여진문자석각 및 경감(鏡鑑)의 배면(背面)에 주자(鑄字)한 여진자경(女眞字鏡)이 있다. 이두를 사용한 신라의 금석문으로는 평창(平昌)의 상원사종기(上院寺鐘記), 담양(潭陽)의 개선사석등기(開仙寺石燈記), 경주(慶州)의 갈항사석탑기(葛項寺石塔記), 시흥(始興)의 중초사당간석주(中初寺幢竿石柱) 등과 일본에 있는 조선종기(朝鮮鍾記)가 있다.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예천군 상리면의 경청선원자적선사청운탑비(境淸禪院慈寂禪師淸雪塔碑), 예천읍 남본2리의 개심사석탑기(開心寺石塔記) 등이 있다. 한국 금석문은 만주(滿洲) 지안현[輯安縣]에서도 발견되는데, 이는 고구려의 도읍지가 이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라와 고려의 금석문이 새겨진 범종(梵鐘)이 일본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한국에서 금석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곳은 경주․부여․평양․개성 등 도읍지였던 지역들이며, 연대가 올라갈수록 그 수효가 적고 연대가 내려올수록 많다.(다음 百科事典 2004)
본 공공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