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도청신도시 예천 750 : 남본리...(부, 정학진 예천군문화관광해설사, 23일 경북도청 동락관에서 도지사표창을 수상함...축하합니다.)
---
남본리 : 르노삼성자동차 경상북도 지역 서비스센터 연락.../ 2008.09.24./ 692-1 20 영창카센터(협력) 영천시 문외동 5-40, 21 나래카서비스(협력) 예천군 예천읍 남본리 246-8, 22 북대구자동차정비(협력) 울진군 죽변면 후정1리 671-4 23 부산밧데리(협력).../ 114motors.tistory.com/ Motors(daum 2016)
남본리 : [예천/맛집] 궁중비빕밥, 황태구이정식, 예천궁!!/ 2013.10.16./ 좋았구요. 음식맛도 너무너무 좋았답니다... 시간되시면 예천관광하시고 식사는 예천궁으로 들러주세요~~ 정말 기분 좋은 한 끼 드시고 가실 겁니다!!^^ 예천궁 예천읍 남본리 233-2 신주소는 예천읍 효자로 64-1.../ blog.naver.com/sm_7979/ (주)SM 에스엠 각종..(daum 2016)
남본리 : 여성사회적기업 리스트(경북,대구)/ 2011.12.07./ 범물동 1262-2, 인증번호 제2011-049호 기관명 주식회사 행복드림 대표자 정인순, 윤영순 청소 및 위생 주소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남본리 88-4.../ wsen.tistory.com/ 여성사회적기업네트..(daum 2016)
남본리 : 동예천역/ 동예천역(東醴泉驛)은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남본리에 있었으며, 학생들의 통학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임시승강장이다. 현재 폐역되어 그 터조차 남아있지 않다. 1966년 12월 12일 : 임시승강장으로 영업 개시, 1974년 6월 1일 : 폐역, 2016년 4월 28일 : 예천역 ~ 어등역 구간 이설로 선로 폐지/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daum 2016)
남본리([우리동네-예천군 예천읍 남본리] 예천 원도심 중심 남본리 이야기 : - [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8 안동·예천 근대기행(8)) [기사] : ▲ 예천 관문 역할을 하는 굴머리 수양버들과 남본1리의 중심을 지나는 시장로 : 예천 원도심, 남본리 이야기/ 예천읍 굴머리 수양버들은 예천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부터 시장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예천읍 원도심이 남본(南本)1리다. 예천읍사무소와는 500m 거리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중앙사거리와 교육청까지 동본1리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굴머리와 경계를 이룬다. 효자로를 경계로 하여 서본1,2리와 나뉘며 한천을 경계로 남본2리와 나뉜다. 남본리는 예천군 남읍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남산동(南山洞)과 본동(本洞)을 병합하여 남본동이 되었다. 한천을 중심으로 내남본동과 외남본동으로 구분되었는데 내남본동은 남본1리가 되고 외남본동은 남본2리가 되었다. 외남본동이 원래 남읍내면의 소재지였던 곳이며 내남본동은 한천이 흐르던 늪지대였다. 1919년 이범익 군수 재직 시에 서본2리 굴머리에 60m 삼익수도를 개통하여 예천읍 늪지대의 물이 빠지면서 늪지대를 매립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1937년에 남본동으로 승격되었고 1971년 1월 1일 남본1,2동으로 분리되었다. 남본1리는 따로 자연마을명이 없다. 도청 신도시 형성과 예천 군청 이전에 따라 예천읍 원도심 상권의 경기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골목상권, 토속 음식점, 재래시장 육성 등 도심 재생 해결책들을 마련하려는 노력들도 진행 중이다. 원도심의 중심지였던 남본1리 상가 터줏대감들을 찾아 그들의 애환과 마을의 변천사를 들어보자.
▲ 예천 구시장 ; 협신신발 새댁, 정옥자 : 정옥자. 1944년생으로 예천군 개포면이 고향이다. 스무 살이던 1963년에 41년생 이부영과 결혼하면서 남본1리 주민이 되었다. 스물한 살에 첫딸을 낳고 남편과 함께 신발 가게 일을 했다. 처음에 결혼해서 왔을 때는 시부모에 시동생 넷, 시고모, 시고모 딸까지 있었으니 말 그대로 대식구였다. 거기에 딸 넷에 아들 하나, 본인의 아이가 5남매였으니 스스로의 표현처럼 참으로 거북한 시절이었다. “우리 시어머니는 참 훌륭했지만은 그래도 옛날 어른들은 맹 어른이잖아. 처음 집짓기 전에 신용조합 앞에 병원이 있었는데 몸이 아파 거기 가니까 의사가 식구가 몇이냐, 몇 시에 일어나서 몇 시까지 일 하느냐, 물어서 답하니까 그러면은 병나는 게 당연하다 하더라고.” 몸이 쉽게 회복되지 않아 안동에 있는 큰 병원에 갔다. 그때는 서른 안쪽이었는데 병원에서 신경성이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안동댐을 구경 시켜 주었다. 신기하게도 한 바퀴 구경을 하고 나니 정말로 마음이 툭 트였다. 그래서 정옥자 씨는 마음속으로 신경성인가보다 생각했다. “집에 와서 시어머니께 전하니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뭐 해서 신경이래. 촌에서는 일을 글키 하고도 괜찮은데.’ 이래 나왔어. 그 시절에는 거의 다 그랬지만은 항상 집에서 가게만 보고 어디 갈 데도 없어. 지금이야 모임이 많애 가지고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배우는 데도 많고 한데 그 시절에는 갈 데도 없고 그랬어.”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는 소풍이며 운동회도 마음대로 따라나서지를 못했다. 가게를 지키는 것도 일이었지만 젊은 시어머니가 계시니 늘 그런 행사에 참석하는 건 아이들 할머니 몫이었다. “나는 한 번도 못 갔어. 우리 시어머님이 만날 따라가지. 운동회 한다 카면 나는 밥 해가주고 갖다 주고 우리 (아이들) 할매는 미리 가가주고 좌석 딱 지키고 아이들 뛰는 거 다 보고 이랬거든.” 그러다가 마침내 기회가 왔다. 큰 딸의 초등학교 소풍이었는데 시어머니가 장사 나가시고 안 계신 차에 처음으로 아이들 소풍을 따라 나선 것이다. “우리 큰 딸이 예천여고 뒤에 소풍을 갔어. 우리 시아버님 들에 일하시는 거만 밥해서 가져다 드리고 우리 현성이(아들)는 업고 나섰지. 하이고! 얼매나 좋은지. 그 시절에는 내가 선생님도 한 번 찾아보지도 못하고 학교도 한 번 안 가고 이랬어. 그래 옆집이 담배가게랬는데 선생님 담배라도 한 갑 사줘야 되겠다 싶어가 아리랑인가 한 갑하고 선생님 도시락을 하나 더 쌌어. 그래 갔디마는, 아이고! 마침 우리 선생님 도시락을 싸가주고 온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래가지고 내 도시락을 한 개 드렸지. 소풍 한 번을 못 따라가다가 그때 가보이 얼마나 좋은지. 거북한 건 한 개도 없고.” 그 날의 해방감을 떠올리면 정옥자 씨는 지금도 마음이 좋아진다. 60년대에는 기차표 고무신이 대세였다. 가게 이름은 ‘협신신발’이었다. “당시 요 밑에 협동고무신, 국제신발이 있었고 일흥신발은 아직도 있어. 협신신발일 때 소매로 하다가 기차표 동양고무 대리점을 한 삼십년 했지.” 1989년도에 남편이 태어나서 줄곧 살아온 안태고향인 옛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지금의 3층짜리 새 건물을 올렸다. 전부터 해오던 월드컵, 프로월드컵 대리점 간판을 그대로 달았다. 1997년도에 결혼한 아들 현성 씨 며느리 소연 씨 내외가 가업을 이어 프로월드컵 대리점을 운영했다. 2011년부터는 의류로 업종을 변경해 웰메이드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다. 주변 가게들도 이들처럼 주인은 그대로인데 시류에 따라 업종을 변경한 경우가 많다.
▲ 남일상회는 모자점이면서 속옷 등을 취급한다. “BYC도 그 자리에서 새로 집 지어서 하고 있고 남일상회도 그렇고. 대 이어서 하는 집은 광신상회라고 지업사도 하고 농약, 씨앗도 팔고 하는데 3대가 대를 이어서 해.” 요즘 정옥자 씨는 오전에 운동을 다녀오면 오후에는 소일로 사군자도 치면서 젊은 시절 가게에 묶여 하지 못했던 일을 하며 지낸다. “야들 시아버님도 동네일을 많이 봤거든. 그런데 기억을 다 할라는지 모르겠네.” 며느리가 골라준 빨간 모자와 점퍼만큼이나 화사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정옥자 씨는 남편 이부영 씨에게 다음 이야기를 넘겼다.
▲ 남본리 상가 터줏대감, 이부영 : 이부영 씨는 1941년생으로 안태고향인 남본1리 222-43번지에서 평생을 살고 있다. 예천서부국민학교와 예천중학교, 예천농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37년에 예천이 읍이 됐어. 일제 때 웃골목이 곡물시장이랬는데 그때부터 남본리래. 옛날에 어른들이 여기가 소(沼)였던 모양이라 그랬어. 읍이 되고 보이 우리 집 같은 데는 조금만 파도 모래가 나와, 백모래. 같은 늪이라도 옆집에는 물이 안 나와도 우리 집에는 물이 나와. 옆집 펌프도 우리 집에 박으라 하고 비가 오면 우리 집 부엌에 물이 얼마나 나왔는지 몰라. 펌프 샘이 가만 앉았어도 물이 올라올 정도였어.” 어느 해는 예천 방천에 물이 많아서 둑을 터뜨린 적이 있다. 그 아래 이부영 씨네 논이 있었는데 자갈이 많이 유입되어 모를 못 심은 적도 있다. 그때는 농사도 짓고 집에서 소를 먹이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1961년, 이부영 씨가 제대하고 돌아왔을 때는 예천 인구가 16만에 육박할 정도로 번성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로 봐서는 해방되고 6.25사변 나고, 내가 보니까 이 근방에서는 안동이 제일 낫고 영주, 점촌은 예천만 못했는데 화폐 개헌 할 때 보니까 점촌이 탄광이 있으니 점촌으로 많이 쏠리고 이랬거든.” 제대한 이듬해인 1962년에 장사를 시작했다. 첫 장사는 고무신 장사였다. 협신신발을 가게 이름으로 썼다. 그러다가 1971년 2월 1일부터 1981년 8월 10일 까지 십년 간 남본1리 이장을 하며 마을일을 보았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시기였다. “(예천)농림학교 다닐 때 규율부장을 하면서도 읍에만 나오면 부끄러워서 완장을 벗어내비리고 다닜어. 나는 이장 안하려고 도망 다녔는데……. 그때는 동서기 둔 사람은 예천읍에 나 하나 밖에 없었어. 예천서 남본리가 제일 컸거든.” 십년 간 동네 일 보면서 신발 장사를 하는데 죽도 밥도 안돼서 ‘이러다간 우리 집 망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부가세 신고할 적에 신발 도매 하던 분이 저 위에 살았는데 연세가 많아 세금 물기 싫다고 장사를 안 하려고 해. 그럼 나를 주소, 해서 부산을 따라갔어. 그때 부산 가이께 국제상사 뭐 이런 데가 전부 다 벌판이랬어. 그때 땅 사놔도 부자가 됐을 기라.” 그때 따라나선 곳이 부산의 동양고무 본사였다. 동양고무 본사에서 도매점 결정을 위해 예천에 와보더니 지역이 좁고 초라하다며 부산 당감동에서 장사 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부영 씨는 설득 끝에 마침내 예천에 도매점을 가져왔다. 당시 신발 업체는 국제고무와 동양고무가 라이벌이었다.
이부영 씨의 협신신발은 동양고무를, 노하동에서 현재도 영업 중인 국제신발은 국제고무를 취급했다. 장사도 잘됐다. 안동도 영주도 대리점이 맥을 못 추는데 예천은 예외였다. “안동에는 대리점이 없고 예천에 왜 대리점이 있냐 그래. 내가 사업 수완이 좀 있었던 모양이래. 본사하고 잘 맞아서 양반 소리를 좀 들었지. 당시 신발 가게들이 어음장도 제대로 못쓰고 그랬어. 다들 어디 가서 써가지고 왔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쓰고 그러니 사람들이 좋아했어.” 도매업을 하니 소매보다 나아서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됐다. 가게가 좁아서 지금은 마트가 들어선 기차역 앞 양조장 터에 신발 창고를 얻었다. 80년대 중반 어느 해에는 창고에 보관 중이던 신발들이 침수 되는 수해를 입기도 했다. 그 창고에는 도둑이 네 번이나 들었다. 신발이 돈이 되던 시절이었다. 89년에 옛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3층 건물을 올렸다. 월드컵과 프로월드컵 매장을 같이 하면서 영주, 예천, 점촌, 안동까지 물건을 댔다. 1997년에 결혼한 아들 부부와 함께 가게 일을 보다가 환갑 때 아들 부부에게 장사를 모두 넘겼다. 2011년 며느리가 취미 있어 하는 의류로 업종을 변경했다. 지금의 웰메이드 예천점이다. “지금 현재 상설시장이 우시장 할 적에는 장날로 이 골목에 술 취한 사람이 참 많았어. 구시장은 쌀시장, 곡물시장이랬는데 상설시장으로 올라가면서 장사가 잘 안됐어. 사람도 없고. 지금은 고추전하고 마늘전만 있어. 지금 농협 앞이 구시장인데 예전에는 거기가 번화가랬어. 당시에는 남본동이 제일 컸고, 지금은 아파트촌이 자꾸 생기니 대심동, 동본동도 커졌지만. 아파트도 생긴 지 얼마 안됐어. 예천도 인구가 자꾸 줄대.” 예천 구시장은 1921년 늪지대를 매립한 후에 생겨난 시장이다. 1955년 12월 20일 예천읍 공설시장이 신축 개설되었는데 목조 단층 14동, 정건평 515평에 61가구가 입주했다고 한다. 미곡, 잡곡 등을 판매하며 시장이 점차 커짐에 따라 장소가 협소하여 1970년대에 동본리 상설시장으로 이전되었다. 현재는 마늘시장과 고추시장만 이루어지고 있다. 옛 기억 속에서 함께 했던 이웃들은 이제 대체로 사라지고 없다. 건물도 사람도 바뀌었지만 쉽게 바뀌지 않는 건 기억일 것이다. 기억 속에 참 좋았던 이웃으로 이부영, 정옥자 부부는 옛 협동농공사 부부를 떠올린다. 지금도 여전히 좋은 이웃으로 정을 나누며 살고 있다. “예전에 한 계원이래서 놀러도 같이 다니고 그랬어. 지금 세아아파트가 있는 청복동에서 농사짓고 살 적에 상추 하나라도 우리가 얻어먹은 집은 그 집이래. 그 집 아주머니가 권점숙 씨라고 군의원도 하고 그랬는데 사람이 참 좋아.” “참 나도 어지간하지. 딸내미들 학교 다닐 때 한 번도 안 가봤거든. 맨날 점방 보느라 바빠서 가보지도 못했어. 그런데 딸들이 모범생인기라. 언니가 모범생이니 동생들도 덩달아 그랬나봐. 선생들이 나를 보고 우리 딸내미들 얘길 하곤 해. 미안치 뭐. 우리 집에 시집 온 사람들도 다 고생했지. 점방에 있으니 꼼짝도 못하고.” 침전된 기억을 조금씩 흔들어 옛 일들을 들려주려 애쓰는 시아버지와 그 모습이 안쓰러운 며느리, 시어른이 미처 기억해내지 못한 일들은 그간 이야기로만 들어온 것을 정리해서 며느리 소연 씨가 들려주었다. 대를 이어 한 공간을 가꾸고 지켜내며 그 공간에서의 시간들을 따로 또 함께 엮어내어 공유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본다.(FMTV 표준방송 2018-11-21 15:40:45)
남본리([우리동네-예천군 예천읍 남본리] 나무전봇대가 우뚝 서있는 마을 : - [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8 안동·예천 근대기행(9)) [기사] : 예천 원도심의 중심 남본리/ 철물점으로 자식 건사한 권점숙/ 고추전으로 유명한 예천 구시장/ 도청 신도시 형성과 예천군청 이전에 따라 예천읍 원도심 상권의 경기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골목상권, 토속 음식점, 재래시장 육성 등 도심 재생 해결책들을 마련하려는 노력들도 진행 중이다. 원도심의 중심지였던 남본1리와 구시장 상가 터줏대감을 찾아 그들의 애환과 마을의 변천사를 들어보자.
▲ 1972년 11월 1일 봉화 닭실 친정에서 결혼식을 올린 권점숙 부부/ 협동농공사를 운영한 권점숙/ 권점숙 씨는 1947년 봉화 닭실 출신으로 안동여고와 안동교대를 졸업했다. 고향 봉화에서 4년간 교직 생활을 하다가 결혼하면서 퇴직했다. 결혼식은 봉화 친정에서 전통혼례로 치렀는데, 당시 남편이 군인 신분이어서 휴가 날짜를 가늠할 수 없으니 예식장을 잡는 게 불가능했다. 마침 사진관을 하는 남편 친구가 있어서 결혼식 사진은 칼라로 남길 수 있었다. ▲ 1974년 2월 안동 영호루에서 남편이 군대동기들과 결혼 전 원래 시댁은 청복동이었다. 시어른이 농협 구판장 쪽에서 장사를 하다가 현재 집이 있는 남본1리 쪽으로 이사를 했는데 권점숙(47년생) 씨가 시집을 온 건 그때였다. 그녀가 결혼할 무렵 시어른은 철물점을 하고 있었다. 그 철물점 이름이 협동농공사였다. 40년을 넘게 장사를 했으니 협동농공사는 예천에서는 꽤 유명한 집이다.
▲ 예천 남산에서 시누이와 함께, 오른쪽이 권점숙 씨다. 뒤로 충혼탑이 보인다. “우리 시어른이 참 잘생기셨어요. 늘 빙그레 잘 웃으셔서 인상이 좋았지요. 도시 손님들이 이 집 할아버지 보고 싶어서 벌초할 때마다 한 번씩 낫도 사러온다고 그랬는걸!” 권점숙씨는 슬하에 형제를 두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갈 데가 남산 밖에 없었어. 놀러간다 하면 애들 데리고 남산에 가거나 다리 밑에 가서 놀았지.” ▲ 1984년 5월 1일 예천국민학교 어머니회장 시절의 권점숙 씨 형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전교 어머니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고맙게도 둘 다 공부를 꽤 잘했다. 고심 끝에 시어른과 남편은 남본리에서 철물점 운영을 계속 하기로 하고 권점숙 씨는 두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대구로 이사를 나갔다. ▲ 작은 아들 예천유치원 졸업식에서 시부모님과 가족이 차례로 떠나갔지만 계속 이어진 가업, 그러나 살다보면 미처 예측하지 못한 큰일들을 겪어내야 하는 때가 있다. “1993년 아이들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어. 큰애 고3 때야. 큰애 대학 입학 시켜놓고, 둘째 고3 때 대구에서 돌아왔지. 시어른하고 같이 장사하다가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시아버지와 둘이서 10년을 철물점을 했어. 애들 대학 졸업하고 2003년에 아버님도 돌아가시고 내 혼자 또 한 10년 했지.” ▲ 1977년 1월 14일 국회의사당 관람기념. 중간줄 왼쪽에서 여섯번째가 권점숙 씨/ 권점숙 씨는 가게 일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돈 모으는 재미도 별로 알지 못했다. 돈이 많지는 않아도 욕심을 내본 적이 없다. 있는 만큼만 쓰고 있는 만큼만 하자는 주의였다. “봉화서 교직생활 4년 하다가 시집오면서 그만뒀지. 68년도에 교대 나와서 71년까지 4년 한 게 다고 시집 와서 그전까지는 사회생활을 안했어. 아이들 아버지 일찍 돌아가셔서 나는 멋도 별로 안내고 아이들 건사하고 시어른들 수발하느라 경황이 없었지. 꼼짝을 못하니까. 나는 장사를 할 체질이 안됐어.” ▲ 예천청년회의소 78년 제1회 정기총회 및 77년 전역식. 남편은 예천청년회의소 활동을 했다. 철물점 사장에서 예천군의회 의장으로/ 권점숙 씨는 2010년 예천군의원에 비례대표로 진출하여 2012년에서 2014년까지 군 의장을 역임했다. 역시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내가 이걸(철물점) 하다가 갑자기 의회를 나가게 됐잖아. 그때 우리 손자가 나왔어. 아들 며느리가 서울에 있었는데 아이를 감당을 못해. 며느리 친정도 여기고, 나도 여기 있고 해서 내려오라 했지. 그래서 이 일을 했어.” 의원 시절은 말 그대로 경황이 없을 만큼 바쁘게 지냈다. 초선의원 시절 1년 동안은 지켜보며 공부했다. 그리고 의원들 만장일치로 의장이 됐다. 전국에서도 비례대표가, 그것도 여자 비례대표가 의장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보통 7월에 임기가 시작되는데 의회 사정으로 10월에 임기가 시작됐다.
---
◆ 정학진 예천군문화관광해설사, 23일 경북도청 동락관에서 도지사표창을 수상함...축하합니다.
정학진(대구 경북 관광의 해 맞아 역할 확장하는 경북문화관광해설사, - 경북문화관광해설사회 정기총회 개최) [기사] : 경북도는 2019년 12월 23일 도청 동락관에서 경북문화관광해설사 회원 300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해를 마무리하는 ‘2019 경북문화관광해설사회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이날 총회에서는 2019년의 추진 성과를 결산하고 우수해설사, 단체에게 도지사 표창을 수여했다. 우수 해설사 단체는 청도군 문화관광해설사회, 개인표창은 경주시 이경미, 안동시 최영자, 구미시 최미숙, 칠곡군 여환숙, 예천군 정학진 문화관광해설사가 수상했다...(영남이코노믹 2019-12-24)
본 공공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