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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751:남본리...남본리 연혁
작성자장병창 @ 2020.01.07 06:05:38

  도청신도시 예천 751 : 남본리...남본리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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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2년 10월 예천국민학교 운동회/ ▲ 1982년 10월 예천국민학교 운동회/ ▲ 1984년 예천국민학교 가을운동회/ 큰 손주를 세 살 쯤 키워놓고 며느리가 운영할 약국을 계약을 해두었는데 둘째가 들어섰다. 하는 수 없이 계약한 약국을 비워두었다가 둘째 손주가 백일을 지내고 나서야 아들, 며느리가 약국 문을 열었다. 의회 일 하는 동안은 철물점 문은 닫아 놓았다. 의장하면서 가게 일을 하면 혹여나 말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의장할 때는 정신없이 돌아다니느라 머리 할 시간도 없었어. 경황 없이 하고 나왔지. 일이 많았어. 의회는 집행부 견제 기관이잖아. 예산이 올라오면 견제하고 의결하고 조례 결정하고. 그게 의원들의 활동이니까. 나는 의장할 생각도 없었고 할 수도 없고. 사실 시골이다 보니 할 사람이 없다하니 들어갔지. 비례대표가 의장을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지역구 의원들이 있으니 사실 비례의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적어. 내가 지역구에 나서면 월권이 되잖아. 당시에 복잡한 일이 있어서 의장을 맡을 수밖에 없었지만은.”/

 

  ▲ 협동농공사가 있던 자리. 지금은 덕흥사로 변했다. 40년 세월을 정리하고 사라진 협동농공사/ 의원이 끝나자 의장 임기도 끝났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러니 무사히 임기를 마칠 수 있었던 거 같다고. 그러고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가게를 정리 했다. 40여년 쌓아온 물건이 살아온 내력만큼이나 많았다. 지금의 건물을 새 단장하고 1층은 세를 줬다. 그 자리에 전기재료업체인 덕흥사가 들어와 있다. 권점숙 씨는 남본1리 상가 터줏대감으로 광신상회와 파크랜드를 꼽았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이웃으로 동아당약방을 떠올렸다. “기억에 남는 이웃은 지금 크로커다일 자리에 동아당약방이라고 있었는데 그 댁 아주머니가 조산원이었어. 내가 시집오니까 정말 예쁘게 해놓고 살더라고. 수석 좋은 걸 해가지고 2층에 전시를 해놓고 그랬어. 안에도 정원이 정말 예뻐서 구경 오는 사람도 많고 그랬지.” 71년 갓 결혼해서 왔을 때는 남본동 구시장이 더 컸다고 한다. “진폐증 환자들 치료하던 권병원이 동본동 상설시장 쪽으로 옮겨갔어. 병원이 가니까, 큰 병원 따라서 상권이 형성되니까 1975년에 구시장 상권이 상설시장으로 옮겨갔어. 그때 옮겨간 상인들이 아직도 거기 그대로 있어.” “사람이 변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어” 군청 이전과 도청 신도시 형성으로 위축된 원도심 상권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상가의 외형적 정비와 더불어 상인들의 친절교육과 서비스 정신을 꼽았다. 아무리 예산을 쓰고 단발성 이벤트를 진행하여 시선을 끈다고 해도 안에 있는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노인 인구의 증가에 따른 노인 대상 사업을 구상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의견을 냈다. “맛고을도 도로는 예쁘게 해놨어. 처음에는 도청 사람들이 제법 왔어. 그런데 신 도청에 상가가 형성되면서 예천 젊은 사람들이 그리로 많이 옮겨갔어. 빈집도 많고. 예천이나 안동이나 같애요. 문제는 사람들이 변해야 돼. 사람이 변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어.” 지금은 손주들 보는 일이 그의 주된 일이다. 그게 제일 큰 기쁨이고 보람이다. 손주들이 초등학교 3학년, 1학년이다. 아들 내외가 서울에서 내려 온지도 어느덧 10년이 되었다. 그는 군 의원 임기를 끝낸 후 마음이 편해져서 체중이 불었다며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본인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으려고 작정을 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모습을 찍히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나 그가 들려준 앞선 말들과 실행들은 뒷사람들에게 오래 남아 기억될 것 같다. 그러니 그의 바람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 올해 준공된 남본리 222-104번지의 남본1리 마을문화쉼터 : 올해 준공된 남본1리 마을문화쉼터/ 최근 남본1리에는 동민들의 오랜 숙원이던 마을회관이 설립되었다. 예천읍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에 선정되어 ‘남본1리 마을문화쉼터’ 라는 이름으로 지난 7월에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연면적 218m2의 2층 건물로 1층은 경로당으로, 2층은 회의실로 쓰인다. 경로당을 찾았을 때 주민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낯선 방문객에게도 함께 할 것을 권하는 인심은 이곳도 예외가 아니구나 싶었다. ▲ 남본1리 이장 유영화씨가 운영하는 예일종합건재/ 남본1리 유영화 이장이 운영하는 예일종합건재로 찾아갔다. 마을회관 건립이 그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다는 것을 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는 예천읍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 추진위원장을 맡아 마을문화쉼터 건립을 이뤄냈다. 유영화 이장은 마을문화쉼터 개소식 때의 인사말이 적힌 자료를 보여주며 마을 역사에 관한 기록이 따로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 옛 뉴영제사(주)에 있던 나무전봇대 1기가 보존되어 있다. 옛 뉴영제사 터에 우뚝 선 나무전봇대/ 그가 운영하는 예일종합건재사 내에는 특이하게도 나무전봇대 1기가 보존 되어 있다. 예천의 상징 기업체였던 뉴영제사(주) 건물 내에 있던 것이다. 뉴영제사(주)는 1947년 3월 15일에 예천제사회사(醴泉製絲會社)로 설립되었는데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재건하였다고 한다. 양잠업 전성기였던 1980년에는 일본 등 외국으로 생사를 수출하며 연간 500만 불의 수출 실적을 올리기도 했으며 종업원이 300여명으로 예천 경제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곳이었다. 뉴영제사(주) 터에는 현재 로얄캐슬 아파트와 국민건강보험공단 예천출장소, 유영화 이장이 운영하는 예일종합건재가 들어서 있다. 예천 상징물 중의 하나인 예천제사회사 굴뚝은 한국시설안전공단의 붕괴 위험 결정에 따라 안타깝게도 2013년 2월 7일 철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나무전봇대는 살아남아 한 시대를 묵묵히 중언하고 있다. ▲ 영진상회, 예천 구시장 본토박이 가게 영진상회 : 예일종합건재를 나와 예천 구시장을 다시 찾았다. 장날 농협 앞 도로가에 펼쳐졌던 마늘전, 고추전 대신 구시장 도로가에는 겨울이 왔음을 실감케 하는 붕어빵 포장마차가 등장했다. 영진상회 바로 앞이다. 영진상회는 구시장 본토박이 어르신이 운영하고 있는 방앗간이다. 마침 어르신이 자리를 비운 터라 대를 이어 방앗간과 고추상회를 운영하고 있는 아들과 함께 어르신을 찾아 나섰다. 그 사이 그가 알고 있는 구시장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여기 온 거는 46년 됐거든요. 그전에는 저 우에는 마당이었고 저기서부터 여 까지는 안에 기둥이 있고 시장인데 온갖 장이 다 열렸지. 곡물도 있고 전부 다 취급했지. 저 위에 상설시장이 생기고는 여기는 고추, 마늘만 있고.” 고향은 노하동 시장통이다. 그가 구시장으로 온 건 열한 살 때지만 아버지는 60여년 가까이 구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지금은 보수해서 그렇지만 안에는 다 일제 강점기 건물이라. 다 나무로 돼있지요. 건물 뜯어보면 전부 갈대하고 나무하고 엮어서 만들어 놨어요. 지붕만 새로 위로 올리고. 옛날에는 사람들이 다 살았는데 지금은 가게 세를 많이 줬지. 실지로 열세가구만 살고 나머지는 자기 건물도 있지만 거의 세를 줬는데 점포수는 헤아려 보이 스물다섯 쯤 되네요.” 전성기 때는 점포수가 60개 정도일 때도 있었다. 한 칸이 5평인데 좁아서 지금은 보통 두 칸을 터서 하나의 점포로 쓰고 있다.

 

  ▲ 영진상회 내부/ 김치 잘 안 먹는 요즘, 고추는 사양사업/ “우리 어릴 때는 겨울에 주식이 김치였지만 지금은 아이들이 김치를 잘 안 먹으니 이 일도 이제는 사양사업이래. 김치공장도 많이 들어섰고. 시골에는 어르신들만 살아서 고추 농사도 잘 안 되고 지금은 애들 울음소리 듣기도 어려워요. 우리 클 때만 해도 애들이 많았어요. 한집에 여섯 일곱씩은 있었으니까. 실례로 내가 예천초등학교 나왔는데 그때 3천 명 이랬다고. 시골에서 애들 보기가 드물어요.” 예천 구시장에도 베트남에서 온 이주민과 결혼한 집에만 어린 아이가 둘 있을 뿐이다. “시장 활성화가 지금은 힘든 게 거래가 안 되는데 뭐. 장사라는 건 올랐다 내렸다 하기 여사니 어느 때가 전성기였다 할 게 따로 없어요. 호황이라는 건 고추파동 났을 때지요. 그때는 금추라 했지. 전국에서 고추가 가장 먼저 나는 곳이 여기라. 여기 나고 한 달 지내야 영주, 봉화, 영양이 나와요.”

 

  ▲ 고추전으로 유명한 예천 구시장/ 고추 거래로 유명한 예천 구시장/ 예전에 시골에서 고추는 현금과 같은 것이었다. 팔면 바로 돈을 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성기라고 부를 수 있었을 때는 고추 양이 많을 때였다. 예천 구시장 고추전이 다른 지역에 비해 먼저 시작되고 물량도 많으니 이곳이 고추로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인근 김천이나 상주, 진천 이런 데서 상인들이 와서 물건을 사서 서울로 보내는 거라. 물론 여기서 서울로 바로 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안동도 지금은 고추 판매장이 생겼지만 여기보다 늦었지.” 농촌은 고령화 되고 젊은이들은 밖으로 다 나가버렸으니 농사 양이 줄어드는 건 당연한 결과다. 이제는 고추 농사를 하는 집도 드물다. “촌에서 고추농사는 둘 내외가 살아계실 때는 가능하지만 한 분이 돌아가시면 지을 수가 없어요. 할머니들은 밖에서 고추를 따고 할아버지들은 경운기로 실어 날라서 기계 돌려가지고 굽고 해야 가능하지. 제일 더울 때 고추를 따야 하니 힘든 작업이래요. 지금은 기계로 다 하지만 옛날에는 연탄으로 다 했다고. 창고에다가 선반을 가로지르고 차례대로 말려서 올리고 했는데 지금은 기계화가 되서 스위치 하나로 전자동으로 다 되지만.” 경기가 좋을 때는 삼양라면에 이곳 고추가 납품이 되기도 했다. 그때는 고추 꼭지 따는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점포마다 그득했다. 아버지가 하는 방앗간이 잘 될 때는 따로 점원을 두기도 했었는데 주변에 영진상회 말고는 방앗간이 아예 없을 때였다. 명절에는 방앗간 앞에 줄 선 사람이 끝이 안보일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경기가 짐작이 간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지난 이야기가 되었다. 건물은 쇠락하고 인적은 드물어 겨울 초입의 날씨처럼 스산하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시장 통에도 어린 아이들이 태어나고 있고 활성화를 위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수소문하던 영진상회 어르신은 세종목욕탕에 가서 돌아오려면 멀었다는 전갈이 왔다. ▲ 예천축협에서 사용하던 창고에 지금은 천일카센타가 들어서 있다./ ▲ 예천극장(명천극장, 문화극장)이 있던 터에 세운 스카이뷰 아파트/ 개인의 역사가 곧 마을의 역사/ 옛 축협 창고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는 천일카센타를 지나 한천 강변로로 나오니 멀리 활 모양을 본뜬 예천교가 저녁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한천 옆 강변로를 따라 예천도서관과 예천교육지원청이 있다. 그 위로 예천극장(명천극장, 문화극장)이 있던 터에 세운 스카이뷰 아파트도 보인다. 예천농협과 KT 예천지사, 예천 구시장도 멀리 보인다. 정옥자, 이부영 부부의 집도, 권점숙 씨의 집도, 유영화 이장의 상점도 가늠이 간다. ▲ 예천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인 동산약국/ 마을을 지키며 써내려온 개인의 역사가 곧 마을의 역사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일몰에 물드는 하늘 아래 각양각색의 집들이 펼쳐져 있다. 그 안에 저마다의 사연들로 색색이 물들어온 사람들이 살고 있다. 물든다는 건 내 안에 다른 것을 들여와 함께 젖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젖어본 사람들이 아름답다.(권기상 기자 FMTV표준방송 2018-11-29)

 

  남본리 : →남본리 마을의 구성, →남본리 연혁

 

  남본리(南本里) 마을의 구성, 남본리 [里] : 남본리는 예천읍(醴泉邑) 행정 동리 중의 하나로, 활의 고장이기도 하다. 남본리 245번지 구시장(舊市場)에는 인간문화재 제47호인 권영록(權寧祿)이 살았는데, 국궁(國弓)을 만들 뿐 아니라 이 활로써 남산공원 무학정(南山公園武學亭)에서 훈련을 쌓아 전국국궁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한 사람들도 있다. 권영록은 TV방송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다. 활 만드는 과정은 소등심줄, 박달나무가 필요한데, 소등심줄은 나무망치로 여러 번 굴려서 그 실을 손으로 하나하나 걸쳐내어야 되고, 박달나무는 물에 삶은 다음 그것을 반원형(半圓形)으로 구부려서 새끼줄로 매어놓아야 한다. 물소뿔에 풀칠을 여러 번해서 6개월만에 하나의 완성된 활이 만들어진다. 이 활이 완성되기까지는 너무나 고된 작업이 거쳐져야 한다. 지방문화재인 권우갑(權又甲)과 그 아들 권영학(權寧鶴)이 외남본(外南本) 새동네에 살고 있고, 아시안게임, 베를린세계양궁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김진호(金珍浩, 동본리에서 1979년에 외남본동으로 이거), 황숙주(黃淑珠) 등의 집이 있기도 하다. 남본리를 관통하는 한천(漢川)에는 첸피리, 떵어리, 꺽지, 은어(銀魚), 미기 등 물고기들이 놀고 있고, 아이들의 수영장, 아낙네들의 빨래장, 청소년들의 스케이트장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넓은 모래사장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으나, 1990년 대 초 한천둔치를 체육공원화한 이후부터는 여러 가지 체육 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구시장(舊市場)에는 지금도 5일마다 한 번씩 쌀시장이 열리고 있다. 외남본동(外南本洞)에는 덕일두부공장 앞으로 네거리가 있고 예천중학교, 예천여자중학교, 예천남부초등학교, 농지개량조합(農地改良組合)도 있다. 남산공원(南山公園) 입구에는 향군회관(鄕軍會館), 산림조합(山林組合) 등의 건물이 있기도 하다. [南本1里] : 4개 마을이라고 하나, 어디를 구획 지울 수는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 곳의 지하수는 차고 맛있기로 유명하다. 여름철에 이 곳의 물을 마시면 시원하다. 그러나 상수도가 들어오면서 지하수 이용은 요즈음 없어졌다. 총 464가구(1980) 2,344명 중 안동 金 36가구, 밀양 朴 19가구, 안동 權 19가구, 창원黃 18가구, 기타 전주 李, 인동 張, 평해 黃 등 372가구가 집단 부락을 이루는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었는데, 현재는 총 17개 반(班), 432가구(1993) 1,507명(男 718名, 女 789名) 중 안동 金이 49가구로 가장 많고, 김해 金 29가구, 밀양 朴 28가구, 경주 李 25가구, 안동 權 19가구, 창원 黃 18가구, 전주 李 18가구, 인동 張 18가구, 경주 崔 11가구, 평해 黃 9가구 등이다. 예천교육청에서부터 굴모리 사이가 그 경계이며, 의료보험조합(醫療保險組合), 한국통신공사(韓國通信公社), 농어촌진흥공사(農漁村振興公社) 예천출장소 등 10여 개의 공공 기관과 의료 기관이 들어 서 있고, 대중 편의 시설을 비롯 의류, 가구점 등이 밀집된 읍내 중심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1960년대 초까지 읍내 상권(商權)의 중심 역할을 해왔던 구시장(舊市場)은 곡물 시장이 동본리(東本里)로 이전되면서 쇠퇴, 현재는 고추와 마늘 시장만 남았을 뿐이다. 고추 시장은 읍내 물량의 80% 이상 유통될 만큼 유통 중심지로 발돋음해 있지만 구시장 내부의 주거 환경이 매우 열악해 이 곳 주민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5일마다 열리는 장에는 주차난(駐車難)이 매우 심각해서 타지역 상인들을 위한 주차공간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이 곳 상권(商權)마저 외부에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 인근 주민들의 한결같은 여론이자 숙원 사업이다. 또한 예천읍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굴모리에서 전화국 구간에 인도(人道)는 커녕 아스팔트 옆 부분의 포장이 전혀 이뤄져 있지 않아 진흙 부분을 피해 아스팔트로 보행하던 주민의 사망 사고가 1993년 여름에만도 2건이나 발생되었다. 따라서 이 구간의 포장도 남본1리의 최우선적 숙원 사업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한 지역적인 특성으로 다소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곳이지만 물자 절약하기 등 새마을부녀회의 왕성한 활동으로 주민 화합에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南本2里] : 총 212가구(1980) 중 안동 金 49가구, 밀양 朴 28가구, 경주 李 25가구, 경주 崔 11가구, 기타 순흥 安, 파평 尹 등 소수 성 25가구를 이루고 있다. 주민들의 협동심이 강하고, 특히 새마을사업에 참여 의식이 높아 1979년도에는 우수 마을로 지정되어, 대통령 하사금 150만원을 받기도 했고, 원예 작물 재배에 뛰어난 기술을 보여 군내에서 월동기 농가 소득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남본동(外南本洞) 솔개들에는 고려 현종 때 창건된 개심사지오층석탑(開心寺址五層石塔)이 있고, 남산공원(南山公園)에는 충혼탑(忠魂塔)과 김순흠의사비(金舜欽義士碑)가 있고, 체육공원(體育公園)으로 조성하여 각종 체육 시설을 갖추어 예천읍민들의 등산, 조깅 코스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남산공원 아래 도로변에 단양 장씨 정려각(丹陽張氏旌閭閣)이 있다.

 

  남본리(南本里) 연혁, 남본리 [里] : 남본리는 예천읍(醴泉邑) 행정 동리 중의 하나로, 신라 때 수주촌(水酒村) 소속이었고, 658년(무열왕 5)에 수주군(水酒郡) 소속이었다. 757년(통일신라 경덕왕 16)에 예천군(醴泉郡) 소속이었고, 936년(고려 태조 18)에 보주(甫州) 소속이었다. 1172년(명종 2)에 기양현(基陽縣) 소속이었고, 1204년(신종 7)에 보주(甫州) 소속이었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 보천군(甫川郡) 소속이었고, 1416년(태종 16)에 예천군(醴泉郡) 소속이었고, 임진왜란(1592) 직후에 예천군 남읍내면(醴泉郡南邑內面) 소속이었다. 1728년(영조 4) 예천현 남읍내면(醴泉縣南邑內面) 소속이었고, 1738년(영조 14) 예천군 남읍내면(醴泉郡南邑內面) 남산동(南山洞)과 본동(本洞)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 때 남산동(南山洞)과 본동(本洞)을 병합하여 예천군 예천면 남본동(醴泉郡醴泉面南本洞)이 되었다. 그 후 한천(漢川)을 중심으로 외남본동(外南本洞)과 남본동(南本洞, 內南本洞)으로 구분되었다. 외남본동이 본래 남읍내면(南邑內面)의 소재지였던 지역인데, 내남본동(內南本洞)은 한천(漢川)이 흐르던 늪지대였으나 1919년 이범익 군수(李範益郡守)가 서본2리 굴모리에 60m의 땅굴 수로(水路)를 개통함으로 예천읍 늪지대의 물이 빠지게 되었고, 그 후 1921년 김병태 군수(金秉泰郡守)가 늪지대를 매립함으로써 마을이 이루어져 지금은 예천읍의 중심가이고 상가(商街)가 되어 있다. 지금도 이 지대를 1m만 파도 물이 나오고, 흰모래가 있다. 그래서 매립지(埋立地)라고도 한다. 1937년 예천면(醴泉面)이 읍(邑)으로 승격되매 예천읍 남본동(南本洞)이 되었다. 1971년 1월 1일 1,2동으로 분동(分洞)이 되어 외남본동(外南本洞)이 남본2리(南本二里)가 되었고, 1988년 동(洞)이 리(里)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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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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