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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757 : 남산공원...(부, 예천군(군수 김학동), 행정안정부 주관 2019 지자체혁신평가 2년 연속 우수가관에 선정됨...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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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비보 : 현재 예천읍에는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 사찰[절집]이 포진해 있다. 동쪽의 냉정산 동악사(1934년 복원), 서쪽의 봉덕산 서악사(1701년 초창), 북쪽의 흑응산 연방사(용문사 예천 포교원: 1930년 창건), 남쪽의 남산 남산사(1947년 창건)가 그것이다.
혹자는 석조여래입상과 삼층석탑이 서있는 동본리 탑들[塔野]의 통일신라시대 절터를 중악사 터로 비정해 예천읍기가 오악사(五嶽寺) 배치를 갖추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절들이 방위에 맞춰 배치돼 있다 보니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악사를 뺀 나머지 절들이 모두 일제강점기 때 지어지고 또 소속 종파도 셋으로 갈라져 있는 점을 고려하면 오악사라는 말은 아예 쓰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다. 그런 엉뚱한 공간 감각은 오히려 지리적 장소성을 왜곡시켜 예천읍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혼란만 초래할 뿐이다. 예천읍기 안에 있는 사찰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구별된다. 하나는 통일신라에서 고려초기에 조성됐던 동본리 탑들과 남본리 송포들[솔개들]에 있는 사찰 유적지 두 군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읍기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동·남·북 방향의 세 사찰과 서악사다. 나말여초의 동본리 절터와 남산 밑의 남본리 개심사지 터는 하천 변에 위치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현재는 하천제방이 구축돼 있어서 홍수시 범람 위험에서 벗어나 있지만 예전에는 한천 강변에 그대로 노출돼 있어 그만큼 침수 피해를 입기 쉬운 곳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런 곳에다 절집을 짓고 석탑을 세웠다는 말이던가. 풍수 사찰은 크게 봐서 명당 사찰과 비보 사찰로 대별된다. 좋은 터에 자리 잡는 명당 사찰과 달리 비보 사찰은 상대적으로 결함이 있는 터에 절을 세움으로써 그 땅이 지닌 결함을 불력(佛力)으로 보완하거나 치료한다는 배경 논리를 갖는다. 동본리 삼층석탑(보물 제426호)과 남본리 개심사지 오층석탑(보물 제53호) 같은 것을 풍수 비보탑이라고 한다. 그 탑들은 불력으로 자연 재앙을 막기 위해 세웠던 일종의 풍수 비보물이었다. 동본리 탑들(塔野)은 원래 천변 습지대였으며, 개심사 터였던 송포들(松浦들:솔개들)도 지명 그대로 그 일대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는 가운데 냇물이 넘나들며 ‘개(浦)’를 이루고 있던 곳이었다. 남산의 수목들과 연결되어 넓은 녹지대를 이루고 있었던 송포의 소나무숲은 그 남쪽의 넓은 유정들 천변에 있었던 유정수(柳汀藪 또는 柳亭藪)와 연결되어 아름다운 한천변 풍광을 연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의종 때 과거에 급제해 좨주(祭酒: 후일의 司成職) 벼슬을 지낸 예천임문의 임유정(林惟正)이 읍기의 물이 빠져나가는 그곳 수구(水口)에 버드나무숲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그때가 대략 개심사 비보탑이 세워진 1010년으로부터 약 2백년이 지난 뒤였다. ‘남산 남산사’가 듣기 어색하므로 ‘목탁산 남산사’나 ‘잠두산 남산사’로 이름지어 볼 만하다. 나말여초 때는 불교가 워낙 성행해서 경주에서 보는 바와 같이 평지에 민가와 절집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하천변에 비보사찰을 세우면 나무를 심고, 관리하고, 또 홍수시 재난 방지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스님들의 집단적인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한천변에 위치한 동본리 사찰 터와 남본리 개심사 터가 그런 경우인데, 그 두 사찰은 일차적으로 예천고을 삶터의 지킴이 역할을 해준 비보사찰이었던 게 확실하다. 그런데 개심사지 오층석탑의 상층기단 갑석 아랫면에 사방으로 돌아가며 단정하게 새겨져 있는 해서체 글자로 된 조성기(造成記) 중에 '위국정공덕(爲國正功德)'이라는 말이 나온다. '나라를 위하고 공덕을 바르게 하기 위하여'라는 뜻이다. 고려시대 산천비보의 극치를 보여준다. 산천비보란 국가 왕업의 중흥을 위해 절과 불상, 불탑 같은 것을 세우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석탑에 새겨진 '오십인 상원갑자 사십칠 통화이십칠 경술이월일일(五十人 上元甲子四十七統和二十七庚戌二月一日)'이라는 명문(銘文)에 당시 거란이 사용하던 연호인 통화(統和)가 기재돼 있다.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의 군대를 서희가 외교로 물리친 이후 고려는 송(宋)과 국교를 단절하고, 약속대로 거란 연호 사용하고 있었던 때임을 추측케 한다. 그런데 '나라를 위하고 공덕을 바르게 하기 위하여' 탑을 세운다고 한 것은 곧 거란[요나라]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의도를 함축하고 있어서 개심사가 일종의 호국 비보사찰로서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것은 7세기경 신라가 불력으로 이웃하고 있는 아홉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고자 일종의 호국 비보사탑으로 건조했던 황룡사구층탑의 조성 의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탑의 외관도 미려할뿐더러 그 속에 내재된 인문혼이 그 정도라면 정말 우리 국민들로부터 사랑받고 대접 받아야 할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산의 비보 사찰은 고려 초기의 이 개심사 외에도 일제 강점기 때 창건된 남산사가 또 있다. 남산공원길 11번지에 있는 그 절은 최용구(崔龍龜:법명은 화운)가 1947년 10월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 주지 해동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그 절은 그보다 예닐곱 해 이전인 1940년경부터 이미 불자들의 기도도량 기능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내막은 대략 다음과 같다. 태평양전쟁(1941~1945)이 한창일 때 화운스님은 학가산 보문사 주지의 아드님으로서 20대의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예천읍장(일본인)이 보문사를 찾아와서 작은 절이라도 좋으니 남산에 절을 하나 세우면 어떻겠느냐고 자꾸만 부추기더라는 거다. 당시는 이미 조선 후기부터 있었던 서악사에다 연방사(1930년)와 동악사(1934년)가 연이어 세워져 예천읍기의 북·동·서쪽에 세 개의 절이 있고 오직 남쪽 방위에만 절집이 없었다고 한다. 읍장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일본에서는 '큰 일'을 맞았을 때 만사형통을 위해 동서남북 모든 방위에서 간절히 기도를 올리는 전통이 있는데, 지금 예천읍에는 오직 남쪽 방위에만 절이 없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으니, 남산 기슭의 터도 좋고 하니 그곳에 절집 하나를 세워 달라고 신신당부하더라는 거다.
그래서 보문사 주지가 자신의 아들인 최용구를 그곳으로 보내 작은 절집을 열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남산사의 전신(前身)이었다는 것이다. 동악사와 연방사가 일제강점기 때 비슷한 까닭으로 창건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산사의 전신이었던 그 작은 절집은 어찌됐든 당시 예천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의 사방 기도를 위해 창건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만약 그들이 예천읍기를 둘러싸고 있는 네 군데의 절을 순례하며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승전하기를 간절히 빌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네 개의 절 모두가 그들에게는 방위비보 사찰로 인식되었던 게 틀림없는 것이다. 물론 같은 시기에 같은 절집을 찾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은 그와는 정반대였을 것이다. 일본의 패망을 간절히 기원했을 것인즉 그때는 또 그 절집이 우리 민족을 위한 호국불교적인 비보사찰의 기능을 한 것이 된다. 절집이 비보 사찰 역할을 한 점은 같았지만 일본국이라는 대상체에 대한 기원 내용은 두 국민 간에 영 판이했던 것이다. 하기야 땅이 무슨 죄가 있으랴, 절집이 무슨 잘못이 있으랴. 땅 위에, 집 속에 깃드는 사람의 마음이 언제나 문제인 게다. 남산사의 창건 내력을 아는 순간 필자의 뇌리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불교 금언과 '명당은 마음속에 있다'는 풍수 금언이 번갈아 떠오른 것도 아마 그런 까닭에서였을 것이다. 남산의 풍수 비보 문화지층은 상상 밖으로 두텁다. 그러나 예천인이면 누구나 알아두어야 할 보물 같은 장소성이라고 생각된다. 매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예천불교총연합회에서 '예천 개심사지 연등회'를 열고 있고, 또한 예천군에서 개심사지 일대를 관광 명소화하고 있지만 보다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그 장소 문화에 다가가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때 조성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27호). 입지상 한천의 수마를 제압하기 위해 세운 비보 석불로 보인다. 동본리 탑들의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27호)과 남본리 솔개들의 개심사지 오층석탑은 신라와 고려 불교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는 꽃과도 같은 걸작품이다. 외면도 아름답지만 내면에 담겨 있는 인문혼은 더욱 빼어나다. 달빛이 교교하게 흐르는 맑은 가을밤에 그 꽃과 눈맞춤을 하고 입맞춤도 한 번 해보라. 저녁노을에 황금색으로 변한 개심사지 오층석탑(보물 제53호)의 고결한 모습. 고려초기에 풍수 비보와 호국비보를 겸해 세워졌던 탑이다. 고즈넉한 새벽녘에 반월성을 걸을 때 묻어 나오는 신라인의 향기처럼 나말여초에 예천 땅을 살다간 예천인의 숨결이 가슴속을 파고들 것이다. 그때가 바로 허(虛)한 우리의 마음이 재충전되고 자존감 있는 향토애가 품어지는 순간이다. 그야말로 최고의 마음 비보법이 우리의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찰나인 것이다. [이몽일 경북환경연수원 객원교수·풍수학박사](정차모 기자 예천인터넷뉴스 2019-08-28)
남산공원(신도청시대 예천의 장소성과 인문魂을 찾아서 <9>남산의 풍수 비보(하)) [기고] : 풍수의 핵심은 '좋은 터'다. 도읍터든 마을터든, 집터든 묘터든 일단은 '좋은 터'라는 평가가 최우선이다. 그런데 실제 지리 답사를 해보면 자연적으로 성국(成局)을 이룬 '좋은 터'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점은 부족하고 또 다른 어떤 점은 넘칠 정도로 과(過)한 곳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생겨난 게 바로 비보(裨補)풍수와 염승(厭勝)풍수다. 비보는 부족한 풍수 조건을 더하고 북돋는 것이요, 염승은 과하거나 흉한 풍수 여건을 빼고 누르는 것이다. 이 비보와 염승풍수가 부각되면서 한국풍수는 구태의연한 운명론적인 환경결정론적 사고방식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히려 흠결이 있는 자연을 고치거나 보완해 쓰는 능동적인 환경가능론적 사상에 가까운 것으로 재조명된다. 아니, 이제는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풍수는 아예 서양의 생태학적 인식론과 바로 직결될 수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수의 이론적 바탕이 되는 음양오행론은 하늘과 땅 사이[天地間], 하늘과 사람 사이[天人間], 땅과 사람 사이[地人間]의 공간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해석하는 기준이 되는 동양의 오래된 전통철학이다. 하늘의 사신[청룡·백호·주작·현무]이 땅에 내려와 사신사(四神砂: 명당을 둘러싼 동서남북의 산)가 되고, 또 그 사신사의 각 산에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장자, 차남 같은 인문학적인 상징 의미가 배당된다. 결국 이 지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살아 숨 쉬는 음양오행론적 생태계로 존립하게 되는 것이다.
비보풍수에 대해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땅을 고친다고 해서 본래부터 나쁜 터가 좋은 터로 바뀌는 것도 아니고 특히 두꺼비, 돼지 같은 특정 조형물을 음양오행론의 상생상극 원리에 따라 배치한 후, 터의 결함이 다 치유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혹세무민이나 다름없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풍수 비보 행위는 정녕 아무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부질없는 짓일까. 비보숲을 만들거나 물길의 방향을 바꾸는 것과 같은 실질적인 비보법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비보 조형물을 설치하거나 지명을 바꾸는 것과 같은 관념적인 비보행위도 환경심리적으로 적지 않은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러 사례연구에서 확인되고 있다. 뱀 머리 형상을 한 앞산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창원시 불모산 성주사 입구에 비보해 놓은 돼지석상. 뱀과 돼지는 상극이다. 문제는 풍수 비보로 볼 수 행위의 범주다. 요즘 많은 지자체들이 쓰레기매립장을 공원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것을 한 번 예로 들어보자. 사람들은 그것을 일종의 환경 개선 사업으로 생각할 뿐 풍수비보 행위로 보지 않는다. 사업 시작 때부터 풍수 비보라는 말이 붙여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나무와 꽃을 심을 때 그 어떤 풍수 원리를 적용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풍수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그것을 풍수 비보행위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한데, 그것은 아마도 용(龍)·혈(穴)·사(砂)·수(水)를 중심으로 하는 풍수 형기론이나 향(向)을 중심으로 하는 풍수 이기론에 너무 정신을 빼앗긴 탓일 것이다. 풍수의 법은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복잡해져 만약 어느 누가 말기(末技)에 사로잡혀 미세한 부분만 들여다보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필히 대강(大綱)을 놓쳐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돼있다. 명의는 환자를 치료할 때, 국소요법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인체 전체의 밸런스를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강은 바로 풍수의 본령으로서 기(氣)를 가리킨다. 필자가 보기에 수천 년 풍수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비보풍수책이 실현되고 있는 시점은 바로 지금이다. 예전에는 자본과 중장비가 갖춰지지 않아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큰 토목공사와 환경개선 행위가 단시일에 이루어진다. 현재 청계천을 흐르는 맑은 물을 한 번 바라보라. 조선 세종조에 집현전 수찬 이선로와 어효첨이 한양도성 명당수였던 청계천 오염 문제를 놓고 도성내 주민들에게 금(禁)하는 체벌을 해야 한다느니, 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하면서 옥신각신했던 시절과 큰 격세지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예천 남산에는 비보 풍수의 유적물도 있고, 현대에 와서 비보해 놓은 각종 시설물들도 있다. 누각, 정자, 돌자라, 꽃나무, 운동시설, 시판(詩板), 인공폭포 등 수도 없이 많다. ‘기’풍수론적 입장에서 그 모든 시설물들은 그곳을 찾는 이들의 신체와 정신적인 기운의 흐름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 있는 비보물들이다. 남산의 ‘기 교감’ 비보 풍수세계의 특징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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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군수 김학동), 행정안정부 주관 2019 지자체혁신평가 2년 연속 우수가관에 선정됨...축하합니다.
예천군 선정(예천군, 2019 지자체 혁신평가 ‘우수기관’ 선정 : 올해 상반기 재정 인센티브 확보) [기사] : 행정안전부 주관 ‘2019년 지방자치단체 혁신평가’에서 예천군(군수 김학동)이 지난해(2019년)에 이어 2년 연속 ‘우수기관’으로 선정됐다. 특히, 이번 평가는 전국 243개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를 대상으로 ‘2019년 정부혁신 종합추진계획’ 3개 항목 14개 지표에 대해 공정성과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전문평가단과 국민평가단을 구성하여 243개 전국 지자체 중 62개 우수기관을 선정했다. 예천군은 2018년도에 이어 2년 연속 우수기관으로 선정돼 올해 상반기 재정인센티브(특별교부세)를 확보하였으며, 특히 2019년도에는 경상북도 23개 시ㆍ군 중 유일하게 우수기관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급변하는 시대에 ‘변화와 혁신’이라는 비전을 중심으로 혁신 중점과제 3가지(사회적가치, 참여와 협력, 낡은 관행 혁신)를 선정하고 발굴ㆍ추진해 왔으며 특히, 전통시장 인근 노점상을 시장으로 유입하고 예천 퀵서비스 사업단 창업, 전통시장 및 소상공인 종합 지원사업 등 다양한 사회적 가치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것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학동 예천군수는 “이번 혁신평가 수상은 주민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군정을 추진한 결과”라면서 “내년에도 주민들이 공감하는 행적혁신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열린행정을 구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예천뉴스 2020.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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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