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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796 : 노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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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宮浮翠樓重修記 : 용궁(龍宮) 부취루(浮翠樓, 龍宮面 鄕石里 所在)에 대한 중수기(重修記)이다. 1692년(숙종 18) 10월 공이 용성현(龍城縣)을 지나다가 부관(副官) 한상고(韓相皐)의 입을 통해 이 고을의 명승지인 부취루(浮翠樓)의 소재를 알게 되었는데, 부취루라 이름한 것은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龍宮縣人)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누대는 세월이 오래되어 피폐되고 그 규모 또한 나지막하고도 비좁아 놀러온 사람이나 부임해 온 지방관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공 역시 용성(龍城)에 부임한 이래로 늘 가슴 아프게 여기다가 수년에 걸쳐 새롭게 보수하였다. 외형이 지난날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확 트인 느낌이 들어 괜찮다고 적고 있다.
忠孝堂記 : 충효당(忠孝堂)은 익찬공(翊贊公) 유의하(柳宜河)가 지었다. 충효당에 대한 기문이다. 공이 사인(士人) 유성화(柳聖和)의 입을 통해 그의 조부 익찬공(翊贊公) 유의하(柳宜河)가 하회(河回, 安東 所在)의 구가(舊家)를 확장하여 충효당을 짓게 된 내력을 듣게 되었다. 충효당이라 명명한 것은 선조(先祖)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훈계시(訓戒詩) 중, "자손을 면려(勉勵)함에는 모름지기 신중해야 하니, 충효(忠孝) 외에 다른 것은 없도다."(勉爾子孫須愼전, 忠孝之外無事業)라고 한 구절에서 따온 것임을 적고 있다.
勿溪書院移建記 : 물계서원(勿溪書院, 甘泉面 所在) 이건(移建)에 대한 기문(記文)이다. 물계서원은 충열공(忠烈公) 김양진(金楊震, 1467~1535)을 제향하기 위해 후손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의 발의로 세워졌으며 후에 학사(鶴沙) 자신도 병향(竝享)되었다. 서원의 구기(舊基)가 감천현(甘泉縣) 서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고 터 또한 평은(平穩)하지 않아 영구히 보존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어 마침내 이건(移建)을 논의하였다. 이광두(李光斗)가 풍광이 빼어난 현의 서쪽 2~3리 부근 산록(山麓)에 터를 정하고 전 군수 이후영(李後榮)이 산장(山長)이 되어, 1697년(숙종 23) 2월에 이건하게 된 사실을 적고 있다.
思過齋記 : 사과재(思過齋)에 대한 기문(記文)이다. 군수(郡守) 신(申) 아무개가 고을에 부임해 온 지 4년이 되었는데, 지극한 정성으로 군민(郡民)들을 아껴주었다. 그런데 내리 3년 동안 극심한 흉년이 들어 군민이 굶어죽을 지경에 놓이자 군수는 노심초사하며 애간장을 태웠다. 이에 매년 조세를 면제해주고 곡식을 내어 기민(飢民)을 구휼하는 방법으로 빈사(瀕死) 상태에 처한 수많은 군민을 구제해 주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아헌(衙軒)의 북쪽 빈터에 세 칸짜리 소재(小齋)를 짓고는 '방안에 칩거하여 자기의 잘못을 생각한'(閉閤思過) 한대(漢代) 한연수(韓延壽)의 고사를 빌어 '사과(思過)'을 재실명(齋室名)으로 삼았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負暄堂記 : 부훤당(負暄堂)에 대한 기문(記文)이다. 공의 친구 김정칙(金正則)이 작은 집을 지어 '부훤(負暄)'이라 이름하고 [부훤당고풍(負暄堂古風)] 60운(韻)을 보여주면서 공에게 기문을 부탁하자, 김정칙은 평생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인(仁)을 힘쓰는데 게을리하지 않으며, 검박하게 꾸민 깨끗한 방에서 책을 대함에 밝은 해가 등에 있으면 '햇볕을 쬐는[負暄]'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부훤(負暄)'이란 편액이 잘 어울린다고 하였다.
跋 : 書蓮桂會詩帖後 : 단양(丹陽) 지역 선비들의 시회(詩會)인 연계회(蓮桂會)에서 남긴 시첩(詩帖)에 대한 발문(跋文)이다. 공이 단양 군수로 있을 때 권득초(權得初)가 단양군은 대소과(大小科)에 급제한 사람만 해도 15인이나 되니 오래 전에 없어진 연계회(蓮桂會)를 다시 부활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시회(詩會)를 만들어 시첩(試帖)을 남기니, 이 지역에 인재가 많음을 징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적고 있다.
鄭統制(起龍)事蹟跋 : 정기룡(鄭起龍, 1562~1622)의 사적에 대한 발문(跋文)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토왜 대장(討倭大將)이 되어 많은 전공을 세운 정기룡은 그의 대부분의 사적이 조공(曺公)이 쓴 사적기(事蹟記)에 상세하게 실려있다. 지금 공이 죽은 지 70년이 지나 공의 손자 정선영(鄭善영)이 조부의 사적을 판목(版木)으로 새기면서 발문을 써 줄 것을 청하기에, 만인의 존경을 받는 공의 행적을 간략하게 적게 되었다고 하였다.
崔直提學出處事蹟後 : 문종(文宗) 때의 문신인 최덕지(崔德之, 1384~1455)의 출처(出處) 사적에 대한 발문(跋文)이다. 1691년(숙종 17) 초여름 공이 영암 군수(靈巖郡守)로 부임하자 연촌서원(煙邨書院)의 유생(儒生) 두 명이 최덕지의 출처(出處) 사적이 기록된 책 한 권을 가지고 와서 보게 되었다. 책에는 선생의 출처 사적 및 입사 전말(立祠 顚末), 관직에서 물러날 때 명공거경(名公鉅卿)들의 송별시(送別詩) 및 서발(序跋), 그리고 선생이 머물렀던 존양루(存養樓)의 기문(記文) 및 제영시편(題詠詩篇)이 실려 있었고, 말미에는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시 한 수와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의 문(文) 한 편이 실려 있었다. 이를 통해 선생의 출처의 대강을 알 수 있었으니, 선생은 백세(百世)의 사표(師表)로서 당대 및 후세 제현(諸賢)들의 추앙을 받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하였다.
銘 : 木枕銘 : 정산서원(鼎山書院, 醴泉邑 生川里 所在)에 가운데는 텅 비고 겉은 모가 난 오동나무로 만든 목침(木枕)이 있는데, 이 목침에 대한 느낌을 피력한 명문(銘文)이다. 군자는 중허외방(中虛外方)의 이치로써 자신을 단속해야 한다고 하였다.
祝文 : 近암書院追享時告由文 : 근암서원(近암書院)에 홍여하(洪汝河, 龍宮縣 出身)와 김홍민(金弘敏) 두 분을 추향(追享)할 때 지은 고유문(告由文)이다. 경북 문경(聞慶)에 위치한 근암서원은 1665년(현종 6)에 창건되어 먼저 홍언충(洪彦忠, 龍宮縣 出身)과 이덕형(李德馨) 두 분을 제향해 오다가, 후에 홍여하, 김홍민 두 분을 추향하게 되었다. 지금 두 분을 추향함은 실로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으로,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의 충효(忠孝)는 세상에서 추앙하는 바라고 하였다.
陶溪里社奉安文 및 常享文 : 도계리사(陶溪里社) 봉안문(奉安文) 및 상향축문(常享祝文)이다. 함녕현(咸寧縣) 도곡인리(陶谷仁里)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군현(群賢)들의 발자취가 아름다우니, 사우(祠宇)를 지어 현령 유공(縣令 柳公), 생원 유공(生員 柳公), 취수 이공(醉睡 李公), 서귀 정공(鋤歸 鄭公), 야옹 이공(野翁 李公) 등 다섯 어진이를 봉안(奉安)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祭文 : 始祖墓望祭文 : 시조(始祖)의 묘소(墓所)는 예안(禮安)에 있다. 시조묘(始祖墓)의 망제(望祭) 때 지은 제문이다. 시조의 위패(位牌)를 이 산자락에 편안하게 모신 이래로 세월이 바뀌어 향불도 끊어지고 산소를 살피는 일 역시 없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못난 후손대에 와서는 선영(先塋)의 위치조차 알지 못하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음을 가슴 아파하였다.
祭聘君朴公文 : 장인 박공(朴公)에 대한 제문이다. 공의 가슴은 옥과 얼음처럼 맑고 깨끗하여 외물(外物)에 걸림이 없고, 공의 마음은 비단에 놓은 수와 같아서 아름다운 문장이 거침없이 나온다고 하였다.
祭伯氏砥南公文 : 백씨(伯氏) 지남공(砥南公)에 대한 제문이다. 어릴 때부터 형제간에 서로 의(義)로써 격려하며 사이좋게 지냈다. 아우들이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으로 나아간 반면 형은 기재(奇才)를 가지고도 운이 나빠 누차 향시(鄕試)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삼켰다. 다행히 늙으막에 관직에 나아가 군수(郡守)가 되어 청백리(淸白吏)로써 좋은 평판을 들었음을 적고 있다. 祭再從弟(遇一)文 : 단성 현감(丹城縣監)으로 관직을 마친 재종제(再從弟) 김우일(金遇一)에 대한 제문이다. 비록 재종형제 간에 서로 나이는 차이가 나지만 정은 실로 친형제와 같았으며, 지난 날 경사(京師)에서 함께 벼슬살이할 때 아침저녁으로 서로 의지하며 여수(旅愁)를 잊었다고 회상하였다.
祭金參奉(球)文 : 향교 유생(鄕校 儒生)들을 대신하여 짓다. 김구(金球)에 대한 제문이다. 공은 재주를 지니고도 운이 따르지 않아 전오(典午)라는 미관(微官)에 머물렀지만 마음에 원망함이 없었고, 평생 책을 읽으며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祭亡弟後一文(1662) : 죽은 동생 김후일(金後一)에 대한 제문이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와 형제를 남겨둔 채 먼저 떠난 동생에 대한 슬픔을 적고 있다. 후일(後一) 아우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영민함을 타고났는데, 그런 재능을 펼 기회도 갖지 못하고 요절한 것은 조물주의 시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祭權子韜文 : 권자도(權子韜)에 대한 제문이다. 젊어서부터 남다른 재주를 지니고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자, 평생 경사(經史)를 궁구하며 성현의 가르침을 좇은 그의 행적을 적고 있다.
祭鄭景瞻文 : 정경첨(鄭景瞻)에 대한 제문이다. 공은 병든 부모의 시탕(侍湯)으로 평생을 보냈다. 그의 부음(訃音)을 듣고 마땅히 힘을 다하여 서둘러야 하였거늘 관직에 쫓기다 보니 벌써 일 년이 지났다고 회상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祭從兄(宗河)文 : 종형(從兄) 김종하(金宗河)에 대한 제문이다. 질직(質直)한 성격과 인후(仁厚)한 마음을 지닌 종형은 같은 마을에서 조석(朝夕)으로 서로 따르며 기쁜 일 슬픈 일을 함께 하였다. 이제 형이 저 세상으로 떠나가니 애통하기 그지없다고 하였다.
八公山祈雨祭文 : 팔공산(八公山) 기우제(祈雨祭) 때 올린 제문이다. 이 제문은 공이 1674년(현종 15) 달성 순찰사(達城 巡察使)로 있을 때 지었다. 산신(山神)이 신령스럽지 않고 어질지 않으면 어찌 신이 될 수 있겠느냐고 책망하였다.
月牙山祈雨祭文 : 월아산(月牙山) 기우제(祈雨祭) 때 올린 제문이다. 이 제문은 공이 진주(晉州)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 백성은 먹을 것에 의지하고 신(神)은 인간에 의지하니, 먹을 것이 없고 백성이 없으면 신이 될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
社稷壇祈雨祭文 : 사직단(社稷壇) 기우제(祈雨祭) 때 올린 제문이다. 이 제문은 공이 영해(寧海)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사(社)는 땅을 관장하고 직(稷)은 곡식을 관장하니, 땅은 사람을 기르고 곡식은 백성의 양식이 된다고 하면서 신의 은덕(恩德)으로 우택(雨澤)을 내려주기를 기원하였다.
雜著 : 犬吠鷄聲說 :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그 이치를 설명한 글이다. 새벽에 닭이 울면 개가 갑자기 떼 지어 짖는 것은 개가 닭 울음소리에 놀라 짖는 것이며, 닭이 울음을 그치는 것은 개 짖는 소리 때문이 아니라 저절로 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甲子記事 : 공이 1684년(숙종 10) 갑자년(甲子年) 가을 국자 사예(國子司藝)를 제수받고 경사(京師)로 가던 중 가흥(可興) 강변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촌사(邨舍)에서 묵었는데, 꿈에 선군(先君)께서 나타났다. 이에 선군께 절하고 깨어나 꿈의 내용을 기억하면서 선군께서 평소 아들이 벼슬을 얻으면 관직이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기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노라고 말한 사실을 회상하면서, 지금 상황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즉, 관직에 오르면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지나 관직에서 물러나면 편안해진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卷4 : 上樑文
鳳山書院祠宇上樑文 : 봉산서원(鳳山書院) 사우(祠宇) 상량문(上樑文)이다. 예천에 소재한 봉산서원은 우암(寓庵) 권장(權檣, 1489~1529, 龍門面 下鶴里 入鄕祖)을 제향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권 선생은 집안이 누대에 걸쳐 관직을 지냈고 문헌이 대대로 전해졌다. 영민한 자질로 문장을 짓고 강직한 절개로 품행이 방정하였다. 사우(師友)로는 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과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 등이 있으며, 그의 고매한 품격은 종종 '경송한옥(勁松寒玉)'의 기풍에 비유된다. 봉산서원의 사우(祠宇)를 세워 권 선생을 봉향하는 것은 실로 유림(儒林)의 자랑거리라고 하였다.
翼洞精舍上樑文 : 익동정사(翼洞精舍) 상량문(上樑文)이다. 익동정사는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1619~1672)을 제향하기 위해 지은 묘우(廟宇)이다. 이공은 성정이 영민하고 자질이 순수하여 일찍이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외조부 장흥효(張興孝)가 그의 재주를 인정하였다. 그는 수심양성(修心養性)의 언행에서 시작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학문에 힘을 쏟았으며, 들어서는 효행을 다하고 나가서는 공경을 다하였다.
碣誌 : 贈都承旨行坡州牧使黃公墓碣銘(竝序) : 황서(黃曙)의 묘갈명(墓碣銘)이다. 공의 휘는 서(曙)이고 자는 광원(光遠)이며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공은 1554년(명종 9)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민하였고 커서는 문사(文詞)에 뛰어났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구차히 다른 사람에게 영합하지 않았다. 1576년(선조 9) 진사(進士)가 되고 1580년(선조 13)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올랐다. 입조(立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재상과 마찰을 빚게 되자 홀연히 떨쳐버리고 귀향하여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웅곡재(雲谷齋)를 지어 제생(諸生)과 학문을 논구하였다. 1589년(선조 22)에 비로소 수성 찰방(輸城察訪)에 제수되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다. 1594년(선조 27) 전적(典籍)으로 신녕 현감(新寧縣監)으로 나갔으며, 다시 지부 정랑(地部正郞)으로 상주 목사(尙州牧使)를 역임하였다. 1598년(선조 31) 당시 병란으로 온 나라가 도탄에 빠지자 공은 힘을 다해 안집계(安集計)를 마련하였으나 마침 뜻이 맞지 않은 무리가 있어 그만두고 돌아왔다. 1601년(선조 34) 사섬 정(司贍正)을 제수받고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나갔으나 얼마 후에 그만 두었다. 1603년(선조 36) 여름 집에서 세상을 하직하니, 공의 나이 50세였다. 공은 문장이 뛰어나고 품행이 방정하였으며, 젊어서 여러 전적(典籍)에 두루 통달하였다. 강개(剛介)하여 시류(時流)에 영합하지 않았고, 하위(下位)를 맴돌다가 끝내 뜻한 바를 펼치지 못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오!
從祖處士公墓碣銘 : 종조부(從祖父) 김취선(金取善)의 묘갈명(墓碣銘)이다. 공의 휘는 취선(取善)이고 자는 여숙(與叔)이며 성은 김씨(金氏)이고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고조부의 휘는 만평(萬秤)이며 좌통례(左通禮)로 증직되었고, 증조부의 휘는 우(佑)이며 좌승지(左承旨)로 증직되었다. 조부의 휘는 사희(士熙)이며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으로 증직되었고, 부친의 휘는 윤안(胤安)이며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증직되었다. 모친은 영해 신씨(寧海申氏) 신언(申언)의 딸이다. 공은 1586년(선조 19)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었고 커서는 용의(容儀)가 단정하고 도량이 넓어 인인군자(仁人君子)의 기품을 지녔다. 4형제 중 셋째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외롭게 성장하며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또한 자식의 직분을 다하여 두 형을 아버지처럼 섬기니, 효제(孝悌)로 이름이 높아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다. 성품이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책읽기를 좋아하여 손에 책을 놓은 적이 없었고, 문장을 지음에 이치(理致)와 문사(文辭)가 겸비되니 일시에 거벽(巨擘)으로 추존되었다. 누차 대소과(大小科) 향시(鄕試)에 응시하였지만 끝내 급제하지 못하니 애석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636년(인조 14) 5월 5일 병환으로 세상을 하직하니, 공의 나이 51세였다.
舍弟承旨君墓碣銘 : 아우 김해일(金海一, 開浦面 京津里 劍岩 出身)의 묘갈명(墓碣銘)이다. 군(君)의 이름은 해일(海一)이고 자는 종백(宗伯)이며 성은 김씨(金氏)이고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군은 1640년(인조 18)에 태어났으며 용모가 옥과 같았다. 일찍이 문예(文藝)를 이루어 나이 21세에 경자 사마시(庚子 司馬試)에 급제하고, 24세에 계묘 식년시(癸卯 式年試)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으로 형(刑) 호(戶) 병(兵) 3조(三曹)의 낭(郞)을 두루 역임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지평(持平), 장령(掌令), 집의(執義)를 맡았고, 사간원(司諫院)에서는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맡았으며,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는 사서(司書), 문학(文學)을 담당하였다. 1673년(현종 14)에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나갔으나 오래지 않아 곧 물러났다. 1678년(숙종 4) 조정에서 억울한 일을 밝히려고 사자(使者)를 연경(燕京)에 파견함에 군이 서장관(書狀官)의 직책으로 선발되어 일을 잘 마무리하고 돌아오니 조정에서 크게 기뻐하여 당상(堂上)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제수하였다. 이 후 성주 목사(星州牧使)와 병(兵)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냈다. 1689년(숙종 15) 다시 진향 부사(進香副使)의 자격으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전대 속에는 몇 권의 서적뿐이었으니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이를 만 하다. 1690년(숙종 16) 7월 좌승지(左承旨)로 옮겨가자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가고자 힘을 쏟았다. 당시 삼남(三南) 지역은 기근이 들었는데 경주가 특히 심하였다. 군은 온힘을 다해 일하고 마음을 다하여 구휼하니, 기민(飢民) 7만여 명 중 유랑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에 경주 사람들이 그의 은덕에 감복하여 그의 공로를 바위에 새기고 기렸다. 1691년(숙종 17) 9월 17일 병으로 세상을 하직하니, 군의 나이 5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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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