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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797 : 노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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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兄承議郞公墓誌銘 : 종형(從兄) 김종하(金宗河, 開浦面 京津里 劒岩 出身)의 묘지명(墓誌銘)이다. 공의 휘는 종하(宗河)이고 자는 청숙(淸叔)이며 성은 김씨(金氏)이고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부친의 휘는 오이며, 모친은 동래 정씨(東萊鄭氏) 판교(判校) 정언굉(鄭彦宏, 醴泉邑 上里 짓골 사람)의 딸이다. 공은 1629년(인조 7)에 태어났으며, 백부가 자식이 없자 강보에 쌓인 채 백부의 양자로 들어갔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질직(質直)하고 기품이 인후(仁厚)하며, 평생 동안 외물(外物)과 어그러짐 없이 태연자약하게 살았다. 조상을 봉양하는 데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니, 제사가 들면 제물을 씻고 자르고 익힘에 몸소 처리하지 않음이 없었고,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에 친지들과 이웃이 모두 '착한 사람'이라고 칭송하였다. 1700년(숙종 26) 9월 11일 병도 없이 편안하게 세상을 하직하니, 공의 나이 72세였다.
外王父處士사皐權公碣陰記 : 외조부 사고공(사皐公) 권극해(權克諧)의 갈음기(碣陰記)이다. 공의 휘는 극해(克諧)이고 자는 의숙(義叔)이며 성은 권씨(權氏)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증조부 재(載), 조부 관(寬), 부친 충효(忠孝) 모두 은일 처사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모친은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다. 공은 1585년(선조 18)에 태어났으며, 10여 세 때 부장공(部將公) 응기(應期)의 양자로 들어갔다. 공은 젊어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책을 한 번 보면 기억할 정도였다. 시문(詩文)을 지음에 조사(藻思)가 표일(飄逸)하여 번번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을 지어내니, 당시 무리들이 모두 스스로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성오당(省吾堂) 이개립(李介立, 醴泉 사람)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아 일찍부터 의(義)와 이(利)의 구분을 알게 되었다. 공은 본래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지만 부모의 권유로 누차 향시(鄕試)에 응시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뜻을 접고 집 가의 연못에 일초정(一草亭)을 짓고는 죽을 때까지 산수(山水)의 그윽한 풍광을 즐겼으니, 이로 인하여 '사고(사皐)'라고 자호(自號)하였다. 1673년(현종 14) 8월 5일 세상을 하직하니, 공의 나이 79세였다.
居昌縣監洪公碣陰記 : 홍언승(洪彦昇, 龍宮縣 出身)의 갈음기(碣陰記)이다. 공의 휘는 언승(彦昇)이고 자는 대요(大曜)이며 성은 홍씨(洪氏)이고 본관은 부계(缶溪)이다. 공은 연산군(燕山君) 때 좌찬성(左贊成)으로 증직되고 문광(文匡)의 시호를 받은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이다. 공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었으니 아우 언충(彦忠)과 함께 1495년(연산군 1) 진사(進士)가 되어 처음으로 선공 봉사(繕工奉事)를 역임하였다. 허백당이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화를 입자 형제들과 함께 섬으로 숨었다. 중종(中宗)이 유지(宥旨)를 내리니 관직이 거창 현감(居昌縣監)에 이르렀다. 배(配)는 경주 이씨(慶州李氏)로서 취수헌(醉睡軒) 이겸(李謙)의 딸이자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生先考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府君碣陰記 : 부친 김단(金단, 開浦面 京津里 劒岩 出身)의 갈음기(碣陰記)이다. 선군(先君)의 휘는 단이고, 자는 계정(季精)이며, 성은 김씨(金氏)이고,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선군(先君)께서는 1610년(광해군 2)에 태어났으며, 다섯 형제 중 막내이다. 천부적으로 인후(仁厚)함을 지녔으며 좋은 평판에 온화하고 단아하여 외물(外物)을 대함에 거스름이 없었다. 사람들과 교제함에 모두 좋아하니, 친척과 이웃 중 어진 이는 그를 가까이하고 어질지 못한 이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선(不善)함을 보면 끊는 물에 손을 넣듯 결연히 거부하였고, 재리(財利)에는 조금도 뜻을 두지 않아 늘 가난하였지만 근심하지 않았다. 과거에 대비한 공부를 그만두고 자식들을 가르쳐 대부분 훌륭하게 키우니 사람들마다 선행(善行)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庚申) 11월 30일에 세상을 하직하고, 상주(尙州) 산양현(山陽縣) 금룡산(金龍山) 기슭에 묻혔다. 부윤(府尹)의 관직에 오른 아들 해일(海一)의 은택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으로 증직되었다.
行狀 : 贈吏曹判書行咸陽郡守趙公諡狀 : 조종도(趙宗道)의 시장(諡狀)이다. 공의 휘는 종도(宗道)이고, 자는 백유(伯由)이며, 성은 조씨(趙氏)이고,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공은 1537년(중종 32) 2월 5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리하여 7~8세에 이미 문장을 지을 수 있었다. 후에 은군자(隱君子) 정두(鄭斗)에게 배웠고, 남명(南溟) 조식(曺植)과 옥계(玉溪) 노진(盧진)의 문하(門下)를 드나들면서 성리학을 체득하였다. 1558년(명종 13)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1573년(선조 6) 천거로 안기 찰방(安奇察訪)을 제수받았으며, 이 즈음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과 교우(交友)하였다. 그 후 사? 직장(司?直長), 상서 직장(尙瑞直長), 사의(司儀), 사평(司評)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 양지 현감(陽智縣監), 문경 현감(聞慶縣監)을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망이 높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격문을 내어 의병(義兵)을 모집하고 사재를 털어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을 규휼하는 데 힘을 쏟았다. 병신년(丙申年)에 함양 군수(咸陽郡守)가 되었는데, 이 때 천병(天兵)이 호남에서 영남 우도(右道)를 넘어오자 공은 힘을 다해 군량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안음 현감(安陰縣監) 곽준(郭준)과 함께 안의(安義)의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왜적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그를 위해 전(傳)을 지어 애도하였고, 동강(東崗) 김우옹(金宇옹) 역시 시를 지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木齋洪先生行狀 : 홍여하(洪汝河, 龍宮縣 出身)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여하(汝河)이고, 자는 응도(應圖)이며, 목재(木齋)로 자호(自號)하였다. 성은 홍씨(洪氏)이고, 본관은 부계(缶溪)이다. 공은 인조(仁祖) 때 대간(大諫)을 지낸 홍호(洪鎬, 1586~1646)의 아들로서, 1621년(광해군 13)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이기(理氣)의 분별을 알아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장래에 큰 그릇이 될 것임을 예견하였다. 인조 갑오년(仁祖 甲午年)의 사마시(司馬試)와 을미년(乙未年)의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효종(孝宗) 때 검열(檢閱), 한림 설서(翰林說書)를 거쳐 정언(正言)이 되어 시사(時事)를 논하다가 반대파의 배척으로 파면되었다. 그 후 경성 판관(鏡城判官)이 되었으나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으며, 1674년(숙종 원년)에 제2차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西人)이 실각하자 다시 등용되어 병조 좌랑(兵曹佐郞)과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1678년(숙종 4) 세상을 하직하니, 후에 상주(尙州)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공은 주자학에 밝아 사림(士林)의 종사(宗師)로 추존되었으며, 육왕학(陸王學)의 사이비(似而非)를 분별하고 예가(禮家)에서 발생하는 취송(聚訟)의 의심을 변증하였다. 저서에 {목재집(木齋集)}이 있고, 편저에 {주역구결(周易口訣)} {의례고증(儀禮考證)} {해동성원(海東姓苑)} {여사휘찬(麗史彙纂)}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경서해의(經書解義)}가 있는데, 모두 유도(儒道)에 도움이 되고 후학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다.
通訓大夫承文院判校朴公行狀 : 박한(朴한)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한이고, 자는 윤보(潤甫)이며, 성은 박씨(朴氏)이고, 본관은 무안(務安)이다. 공은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를 역임하고 후에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로 증직(贈職)된 박선장(朴善長)의 아들로서, 1576년(선조 9) 영천군(榮川郡) 화천리(花川里)에서 태어났다. 28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를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호조 좌랑(戶曹佐郞), 공조 좌랑(工曹佐郞), 예안 현감(禮安縣監), 울진 현령(蔚珍縣令)을 거쳐 호조 겸 기주관(戶曹兼記注官)에 올랐다. 당시 북병(北兵)이 쳐들어와 평양(平壤)에까지 이르자, 조정에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에게 영남 지역을 규합하라고 명하니, 공이 종사관(從事官)으로 참여하였다.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여 1652년(효종 3) 8월에 세상을 하직하니, 공의 나이 77세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온량(溫良)하고 도량이 단중(端重)하여 누차에 걸쳐 임자(任子)의 기회가 있었지만 끝내 하지 않았으며, 자식들이 장성하였어도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반드시 몸과 마음을 다하였다.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싫어하여 비록 관직에 있었지만 입고 쓰는 것이 한사(寒士)와 다를 바 없었다. 또한 목민관으로써 애민(愛民)에 온힘을 기울였다. 배(配)는 원성 변씨(原城 邊氏)이다.
成均進士張公行狀 : 장선(張璇)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선(璇)이고, 자는 중문(仲文)이며, 성은 장씨(張氏)이고,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장여(張汝)의 아들로 1631년(인조 9) 영천군(榮川郡, 現 榮州市) 전단리(箭丹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리하여 조부 충의공(忠義公)이 항상 곁에 두고 훈육(訓育)하였다. 32세 때 임인년(壬寅年)의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반중(泮中)에서 지내며 좋은 사람들을 많이 사귀었다. 그러나 이미 국론이 분별된 지 오래이고 사색당파(四色黨派)로 서로를 배척하는 경향이 갈수록 심해지자, 공은 그 사이에서 구차스럽게 눈치보고 싶지 않아 홀연히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이후로 비록 부모 때문에 억지로 과장(科場)에 나가기는 하였지만 급제하고자 하는 마음은 점점 없어졌다. 이렇게 십 수 년을 한거(閑居)하며 가난한 처지에서도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여 그 마음을 즐겁게 하며 지내다가, 1679년(숙종 5) 향년 49세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공은 산뜻하고 고운 날에는 반드시 세수하고 빗질한 채 검박하게 꾸민 깨끗한 방에서 경적(經籍)을 펴놓고 열람하였는데, 융통자재(融通自在)하여 조금의 속된 생각도 없었다. 일찍이 도연명(陶淵明)의 '동고(東皐)에 올라 휘파람을 분다'는 시어(詩語)를 서재의 편액으로 삼아 조용하고 한가한 풍취에 기탁하기도 하였다. 배(配)는 경주 이씨(慶州 李氏)이다.
梅堂權公行狀 : 권욱(權旭, 龍門面 渚谷里 出身)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욱(旭)이고, 자는 경초(景初)이며, 성은 권씨(權氏)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거창 현감(居昌縣監)을 지낸 권심언(權審言)의 아들로서, 1556년(명종 11) 예천군(醴泉郡) 북쪽 제곡리(渚谷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주가 있었으며, 8~9세에 이미 {효경(孝經)} {소학(小學)}에 통달하여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예절과 몸을 단속하고 행동을 자제하는 법도를 알았다. 일찍이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 들어가 {주서(朱書)} 및 {심경(心經)}을 공부하였고, 1590년(선조 23) 진사(進士)가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여 경성(京城)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같은 군의 역봉(역峯) 이개립(李介立), 양서(瀼西) 이광윤(李光胤)과 함께 정산서당(鼎山書堂, 醴泉邑 生川里 所在)에 들어가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곧 향중(鄕中)에서 격문(檄文)을 내어 의병 수 백 명을 모아 왜군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본도(本道)의 대부분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친정(親征)을 청하면서 공을 상소의 우두머리로 떠받든 것은 아마도 공의 충의(忠義)라야 임금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흥고 봉사(長興庫奉事)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대부인(大夫人)을 살피고는 단정하게 앉아 {주서(朱書)} 및 {심경(心經)} 공부에 침잠하니 침식(寢食)을 잊을 정도였다. 집 앞에 매화나무를 심어 '매당(梅堂)'이라 편액하고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1612년(광해군 4) 9월에 세상을 하직하니, 공의 나이 57세였다. 배(配)는 문소 김씨(聞韶 金氏)로서,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 김명일(金明一)의 딸이자 학봉(鶴峯)의 질녀이다.
通訓大夫承文院判校西溪鄭公行狀 : 정언굉(鄭彦宏, 醴泉邑 上里 짓골 사람)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언굉(彦宏)이고, 자는 여곽(汝廓)이며, 호는 서계(西溪)이며, 성은 정씨(鄭氏)이고,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공은 처사(處士) 정승조(鄭承祖)의 아들로서, 1569년(선조 2) 함창현(咸昌縣) 이안촌(利安邨)에서 태어났다. 약관의 나이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식구들이 난리를 피하느라 생활이 궁핍하였지만 마음은 늘 편안하게 가졌으니, 이는 평소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은 데 기인한 것이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1606년(선조 39) 식년시(式年試)에 발탁되어 전후로 학유(學諭), 학정(學正), 박사(博士), 승정원주서 겸 춘추관기사관(承政院注書兼春秋館記事官), 성환도 찰방(成歡道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고성 군수(高城郡守)로 있을 때 역적의 모반 소식을 듣고 향린(鄕린)의 동지를 규합하여 토벌하려 하자 모두가 공을 의병장(義兵將)으로 추대하였다. 군대가 조령(鳥嶺)을 넘을 즈음 역적의 괴수가 죽고 어가(御駕)는 환궁(還宮)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곧바로 군대를 해산하였다. 경사(京師)로 가서 선공 첨정(繕工僉正)을 제수받고 청송 부사(靑松府使)로 나갔으며, 1635년(인조 13)에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제수받았다. 1636년(인조 14)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전원(田園)과 강호(江湖)를 유랑하며 현남(峴南) 조우인(曺友仁, 開浦面 京津里 사람), 청풍(淸風) 정윤목(鄭允穆, 醴泉邑 高坪里 사람)과 교유하였다. 1640년(인조 18) 세상을 하직하니, 공의 나이 72세였다.
先考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府君家狀 : 의부(義父) 김곤(金곤, 開浦面 京津里 劒岩 出身)의 가장(家狀)이다. 선군(先君)의 휘는 곤이고, 자는 자진(子珍)이며, 성은 김씨(金氏)이고,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선군(先君)께서는 1596년(선조 29)에 태어났으며, 다섯 형제 중 둘째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였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성동(成童)의 나이에 경서(經書)를 두루 섭렵하였다. 사장(詞章)의 학문에 대해서는 크게 힘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문리(文理)가 쌓여 문장을 지어냄에 이조(理藻)가 함께 갖추어졌다. 누차 향시(鄕試)에 응시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40세에 비로소 생원(生員)이 되었다. 1648년(인조 26)에 문과에 급제하여 제용감 참봉(濟用監參奉)을 제수받고 다시 종묘서 봉사(宗廟署奉事)를 거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맡았으나 귀향하였다. 당시 공은 지천명(知天命)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팔순(八旬)이 넘는 노모(老母)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효우(孝友)가 남달랐기에 조정에서 특별히 통정대부 부호군(通政大夫 副護軍)을 제수하고, 1677년(숙종 3)에는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1678년(숙종 4) 8월에 조용히 세상을 하직하니, 공의 나이 83세였다. 공은 의리(義利)를 분별하고 시비(是非)를 판단함에 있어 언제나 일검양단(一劒兩段)하는 결연함을 보였기에 일찍이 '검암(劒巖)'으로 자호(自號)하였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풍산 유씨(豊山 柳氏)로서, 유맹심(柳猛심)의 딸이자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의 손녀이다.
卷5 : 附錄
行狀 : 조카인 김이만(金履萬, 開浦面 京津里 劒岩 出身)이 쓴 김태일(金兌一)의 행장이다. 휘는 태일(兌一)이고, 자는 추백(秋伯)이며, 성은 김씨(金氏)이고, 호는 노주(蘆洲)이며,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고조부 사희(士熙)는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을 역임하였고 증조부 윤안(胤安)은 사복시(司僕寺)에 증직되었는데 이 때 영천(榮川, 現 榮州)에서 예천 노포(醴泉 蘆浦, 現 劒岩)로 거주를 옮겼다. 조부 득선(得善)은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고, 부친 단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으니, 3대(三代)에 걸쳐 증직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아우 해일(海一)이 부윤(府尹)의 관직을 지냈기 때문이다. 부친 단은 천성이 독실(篤實)하고 행동거지가 순비(淳備)하여 족당(族黨)과 향리(鄕里)에서 모두 경복(敬服)하였다. 모친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 權氏)는 사고공(사皐公) 권극해(權克諧)의 딸이다. 공은 1637년(인조 15)에 태어났다. 참판공(參判公) 단은 예천군 화장리(花庄里, 現 聞慶市 山北面 所屬)에서 처가살이를 하다가 공의 나이 18세 되던 해에 공을 중부(仲父) 곤의 양자로 보냈다. 검암공(劒巖公) 곤은 늘그막에 과거에 급제하여 첨지중추(僉知中樞)에 오른 인물로서, 효우(孝友)가 남달랐고 영민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향리에서 두루 명망이 높았다. 의모(義母) 숙부인(淑夫人) 풍산 유씨(豊山 柳氏)는 유맹심(柳猛심)의 딸이자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의 손녀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었는데, 침정(沈靜)하였고 말수가 적고 웃음을 아꼈으니 신중(愼重)하기가 어른과 같았다. 향리의 아이들과 어울릴 때면 무익한 놀이는 하지 않았으며,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그어 번번이 글자를 만들어내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서는 형 군수공(郡守公), 아우 부윤공(府尹公)과 함께 외조부 사고공(사皐公) 권극해(權克諧)에게 수학하였다. 9세 때 [청총부(靑塚賦)]를 지어 산양(山陽)의 이구(李구)에게 보이자, 이공(李公)이 읽고는, "이는 왕안석(王安石)의 시의(詩意)를 뒤엎었다. 이 아이의 훗날 성취를 헤아릴 수 없구나[此反王介甫詩意, 是兒異日成就未可量也]"라고 찬탄하였다. 15~6세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하였고 틈틈이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의 역사서 및 제자서를 두루 섭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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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