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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798:노주집...(축,박덕용,권순녀)
작성자장병창 @ 2020.02.14 06:11:06

  도청신도시 예천 798 : 노주집...(부, 예천소방서 풍양의용소방대 박덕용과 권순녀, 13일 경북도지사 표창를 수상함...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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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0년(현종 원년) 공의 나이 24세에 향시(鄕試)에 2등으로 급제하여 국자학유 겸 봉상시 부봉사례(國子學諭兼奉常寺副奉事例)에 임명되었다가 학록(學錄), 학정(學正)으로 승진하였다. 1664년(현종 5) 박사(博士)로써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고, 또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승진하였으며, 1665년(현종 6) 가을 외직으로 흥덕 현감(興德縣監)을 맡았다. 1666년(현종 7) 봄 휴가를 청하여 집으로 돌아와 모친 권 부인의 상제 노릇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1671년(현종 12)에 의모(義母) 유부인 역시 돌림병으로 세상을 하직하니 공은 바쁜 와중에도 지극 정성으로 상을 치르자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1673년(현종 14) 탈상(脫喪)하고 곧바로 문신 겸 선전관(文臣兼宣傳官)을 제수받고 잠시 동안 성환 찰방(成歡察訪)을 맡기도 하였다. 1674년(현종 15) 봄에 승진하여 대구 판관(大丘判官)을 제수받았는데, 그 해 8월 현종(顯宗)이 승하하자 공은 조석으로 곡하며 그 슬픔을 다하였다. 1677년(숙종 3) 겨울 병조 좌랑(兵曹佐郞)를 제수받았으며, 1678년(숙종 4) 봄 외직으로 해서(海西)의 막료로 문화현(文化縣)에서 별시(別試)를 관장하면서 과장(科場)을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그 해 의부(義父) 검암공(劒巖公)의 상을 당하고, 경신년(庚申年)에 또 부친 참판공(參判公)의 상을 당하자 예제(禮制)를 좇아 슬픔을 다하였다. 10년 사이에 네 분 부모가 모두 세상을 뜨니 공은 극도로 실의한 나머지 더 이상 출세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685년(숙종 11) 봄에 진주 목사(晉州牧使)를 제수받았다. 당시 진주 지역은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하며, 강폭(强暴)하여 법을 두려워하지 않은 자들이 많아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공은 관대하고 공평한 마음으로 다스리니 진주 지역이 점차 평정을 되찾게 되었다. 1687년(숙종 13)에 영해 부사(寧海府使)를 제수받았다. 부임하자 고을의 학생들을 모아 예(藝)를 강학하며 일을 나누어 시키니, 영해(寧海)의 인사(人士)들 대부분이 공에 의해 문화적으로 훈습되었다. 1689년(숙종 15) 봄 숙종(肅宗)이 영해에 머물러 있던 지헌(持憲) 이현일(李玄逸)을 불러 국자 사업(國子司業)으로 삼으려 하자 영해 부사였던 공이 나서서 이공(李公)을 설득하여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그 해 가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승진되었다. 1694년(숙종 20)에 보덕(輔德)으로써 사간(司諫)으로 옮겼으며, 또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제수받았다. 명리(名利)를 좋아하지 않고, 외직에 있을 때 선정(善政)을 많이 베풀었던 공은 1702년(숙종 28) 9월 4일 술시(戌時)에 조용히 세상을 하직하니, 이때 공의 나이 66세였다. 공은 평생 동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니,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홀로 송독(誦讀)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 베껴 쓴 서책(書冊)만 해도 수 십 질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일찍이 {주역(周易)} 한 부를 베껴 그 속에 담겨있는 소장(消長)의 기미(幾微)와 진퇴(進退)의 도리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만년에는 특히 {주서절요(朱書節要)}에 침잠(沈潛)하였고, 해동 선현(海東先賢)들의 문집도 두루 섭렵하였다. 또한 {주자강목(朱子綱目)}을 숙독함으로써 고금(古今)의 치란(治亂) 및 인물(人物)의 현사(賢邪)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었다. 사장(詞章)에 대해서는 그렇게 공력을 쏟지 않았지만 자연히 정련(精鍊)되어 전범(典範)에 부합하였으니, 즉 인근의 몇몇 군자들과 시편 및 편지를 주고받았다.

 

  墓碣銘 : 이서우(李瑞雨)가 쓴 김태일(金兌一)의 묘갈명(墓碣銘)이다. 내가 젊어서 영남(嶺南)의 예천(醴泉)에 김추백(金秋伯)이란 자가 있는데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리었다고 들었다. 오래지 않아 추백(秋伯)은 과연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로서 경사(京師)에 이르니 내가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추백(秋伯)은 아직 젊었으나 노성(老成)한 명성이 있었기에 나는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비록 서로 만나기는 드물었지만 마음이 기울기는 얕지 않았다. 오호라! 추백은 이미 고인이 되었도다. 그의 맏아들 아무개가 전후로 계산(溪山) 아래에서 나에게 묻고는 예를 갖추어 묘갈명(墓碣銘)을 청하니, 내 비록 나이가 들고 병든 몸이나 추백을 깊이 추념하는 마음에 차마 고사할 수 없었기에 그의 행장(行狀)에 근거하여 써내려 가노라. 공은 천부적으로 수미(粹美)함을 타고난 데다가 가정의 가르침을 보태고 배움을 충실히 하였다. 어버이를 정성으로 공경하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직분을 다하였다. 젊어서 이미 갖가지 전적(典籍)을 두루 섭렵하였고, 명예가 자못 높았으나 항상 편안하고 고요하게 스스로를 지키면서 명리를 쫓지 않았다. 처음은 두각을 나타내었으나 마지막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이를 불만스레 여겼지만 공은 오히려 담담해 하였다. 명(銘)에 적어 이르노라. 어려서 깨우치고 젊어서 통달하니, 늙으막에 존귀하고 늙어서 여유롭네. 부모 섬김에 효도 다하고, 벼슬 맡아서는 헛되이 하지 않았네. 덕은 마음에 뿌리를 두었으니, 부끄러움에 그 낯을 피하네. 살아서든 죽어서든, 명예를 남겼으나 비방은 없어라. 다섯 아들 가업을 계승하니, 그 문채 빛나는도다. 나의 말이 아첨이 아닐진대, 명문(銘文)이 다산(茶山)에 있도다.

 

  또(又), 이광정(李光庭)이 쓴 김태일(金兌一)의 묘갈명(墓碣銘)이다. 명(銘)에 적어 이르노라. 선비가 해야 할 일은 명경(明經)이거늘, 항상 궁구하기 어려움을 걱정하도다. 혹 말년(末年)이 되어도, 저력을 보이지 않는구나. 마흔에 발탁되었으니, 세상에 그 누가 공과 같겠는가? 대저 공은 경전을 궁구하였지, 과거 급제에 뜻을 두지 않았다네. 그의 앎을 미루어 나라에 베풀고자 하였다네. 집안은 실로 나로 말미암으니, 나라는 어떠한가? 주현(州縣)에 거처를 정하니, 백성들 도리를 얻었도다. 늙으막에 대각(臺閣)에 오르니, 손수 조치한 바가 없도다. 시세(時勢)는 의지와 어그러지니, 마음에 품은 바는 있어도 떨쳐 없애지는 않았네. 나의 신령스러운 거북을 보존하여, 다가올 법도를 생각하도다. 끊임없이 효도를 행하니, 생각이 그 자취를 드러내었네. 사적(事跡)을 비석에 기록하여, 미래의 현명한 선비를 바로 잡노라.

 

  輓詞 : 이현일(李玄逸)이 쓴 김태일(金兌一)에 대한 만사(輓詞)이다. 번잡함을 다스림에 명성(名聲)과 공적(功績)이 드높고, 악을 바로잡음에 풍의(風儀)가 꿋꿋하다고 하였다.

 

  祭文 : 장진(張진)이 쓴 제문이다. 제자서(諸子書)에서 마음을 노닐게 하고 뭇 경전(經典)에서 뜻을 얻어, 전(傳) 술(述) 발(發) 명(明)을 시의 적절하게 하였다. 보취(步驟)가 문아(文雅)하여 후생의 모범이 되었다고 하였다.

 

  또(又), 이후영(李後榮)이 쓴 제문이다. 밖으로는 박소(朴素)함을 타고났고 안으로는 정신(精神)함을 간직하였다. 품행이 방정하고 돈독하였으며 여가가 있으면 문예(文藝)에 종사하여, 일찍부터 명성이 두루 퍼져 향공진사(鄕貢進士)로 빼어났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기를 등한시하여 관도(官途)가 좋지 않았으니, 마치 모난 구멍에 둥근 장부처럼 서로 맞지 않아 이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내려왔다. 영남과 호남에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은혜가 두루 미쳤으며 돈을 겁낼 정도로 청렴하였다. 돌아와서 유유자적하게 지내다가 시운(時運)을 틈타 중앙 정부로 나아가 지헌(持憲), 아간(亞諫)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에 정색(正色)이 조정에 서게 되었으니 세상에서 그를 '철면(鐵面)'으로 불렀다 라고 하였다.

 

  또(又), 권만제(權萬濟)가 쓴 제문이다. 공은 온정(溫精)함을 품부받고 효우(孝友)가 마음 속 가득하였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스스로 몸을 경계하고 삼가니, 조화롭기가 순주(醇酒)와 예주(醴酒) 같으며 온화하기가 봄바람과 같다. 얼굴에는 급한 기색이 없고 입으로는 말을 빨리 하지 않았다. 예로부터 "덕행이 있는 자 무엇을 더 보태겠는가?"라고 함이 바로 공을 두고 한 말이다 라고 하였다.

 

  또(又), 정유신(丁惟愼)이 쓴 제문이다. 경학(經學)에 뜻을 두고 문장 또한 저명하였으며,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간관(諫官)을 두루 지냈다. 그 청정(淸淨)함을 담아 대각(臺閣)에 떨치니, 논의(論議)가 공평하고도 바르며 진퇴영욕(進退榮辱)이 태연하여 여유가 있었다. 종족(宗族)과 향당(鄕黨)에서 모두 효제(孝悌)로 칭송하였다 라고 하였다.

 

  또(又), 김효기(金孝基)가 쓴 제문이다. 끊임없이 자손에게 이어지니 바로 시례(詩禮)의 가풍(家風)이다. 아득히 문절(文節)을 잇고 곁으로는 백옹(柏翁)을 거슬러 올라간다. 독후(篤厚)함을 타고나니 그릇이 깊고도 위대하다. 총명하고 재주가 넘쳐 무리 가운데 우뚝 빼어나니, 대저 경적(經籍)에서 유래하였다 라고 하였다.

 

  또(又), 홍대구(洪大龜)가 쓴 제문이다. 공은 어질면서도 공손함을 더한 까닭에 고귀하니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교만하지 않았다. 또한 검소하면서도 청렴함을 지킨 까닭에 빈한하니 일찍이 견지한 바를 바꾸지 않았다. 말은 무리에서 다르기를 구하지 않았고, 행동은 세속에서 고상하기를 얻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又), 홍상민(洪相民)이 쓴 제문이다. 공의 나이 이순(耳順)인데도 기운이 왕성하고 정신이 맑아 항상 말하기를, "사문(斯文)이 병들었도다. 해가 오고 달이 가며, 추위와 더위가 다시 바뀌는데도 덕의(德儀)의 아름다운 자태가 아득하구나. 경전을 부여잡고 무릎 꿇으며 묻는 자를 보기 어려우니,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 끝났도다! 끝났도다! 가슴이 아프구나! 가슴이 아프구나!"라고 슬퍼하였다고 하였다.

 

  또(又), 문생(門生) 박봉의(朴鳳儀) 등이 쓴 제문이다. 나아가 임금을 섬김에 충성과 공경을 다하였고, 들어와 어버이를 섬김에 얼굴빛을 살펴 공양함에 어그러짐이 없었다. 자상함으로 백성에게 다가가고 화순(和順)함으로 사람들을 대하였다. 향당(鄕黨)에서는 그의 신의(信義)에 감복하여 감동받았으며, 사림(士林)에서는 종장(宗匠)으로 추존하여 흥기시키니, 이른바 '필부로써 백세(百世)의 사표(師表)가 된다'함이 선생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또(又), 정석구(鄭碩耈)가 쓴 제문이다. 공의 가학(家學)은 연원에 그 유래가 있다. 멀리는 문절(文節)의 유서(遺緖)를 계승하였고, 곁으로는 백야(柏爺)의 여운(餘韻)을 잡았으니, 여섯 형제 가운데 셋이 사적(仕籍)에 오르고 한 명은 부윤(府尹)의 명예를 누려 찬란한 빛이 서로를 비추었다. 다섯 아들 역시 모두 빼어나 문장이 세상에 우뚝하였다고 하였다.(申載煥)(한국국학진흥원 소장 문집해제 2004)

 

  노주집(蘆洲集) [冊] : 蘆洲 金兌一의 문집. 5권 3책. 10行 20字 天 地 人 3冊의 활자본. 序文과 跋文이 없어 구체적으로 누구의 손에 의해 간행되었는지 알 수 없다. 전편은 賦 2편, 시 400여 수, 上疏 8편, 書 2편, 記 9편, 序跋 4편, 銘 1편, 祝文.../ 卷3/ 疏/ 辭司諫院獻納疏 : 司諫院獻納의 관직을 사양하는 상소이다. 무릇 나라에서 臺諫을 두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함인데, 자신은 지난날 논의해야 할 때 논의하지 않아 儒臣들에게 배척당하고,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아 公議에 비난받아 憲職을 더렵혔으니 관직을 맡을 수 없다고 하였다. 본 상소는 1690년(숙종 16) 7월에 다시 承政院에 올렸으나 반려되었다./ 再疏 : 司諫院獻納의 관직을 재차 사양하는 상소이다.

 

  司諫院獻納은 納言의 임무를 담당하며 司諫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함부로 제수받는 직책이 아니니, 자신과 같이 용렬한 사람은 감히 맡을 수 없다고 하였다. 본 상소는 1690년(숙종 16) 8월 1일에 내용을 고쳐 承政院에 올렸으나 반려되었다./ 辭掌令疏 : 司憲府掌令의 관직을 사양하는 상소이다. 작년 가을에 병이 들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힘겹게 지내고 있는 즈음, 자신에게 憲職을 제수하니 聖恩의 隆重함이 粉骨難報이나 상소를 올려 사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兩南 지역의 백성들이 飢荒으로 고생하니 조정에서 신속하게 많은 수의 御史를 파견하여 지방 수령의 직무를 꼼꼼하게 핵實하는 방향의 구휼정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본 상소는 1691년(숙종 17) 정월에 올렸다./ 再辭獻納疏 : 司諫院獻納의 관직을 재차 사양하는 상소이다. 聖旨를 받자와 병든 몸으로 힘겹게 풍基郡에 도착하였는데, 갑자기 어지럼증이 생겨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곤란하였다. 게다가 아우 府尹公 海一에 任地에서 객사한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장례를 치르느라 관직을 맡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본 상소는 1691년(숙종 17) 11월에 承政院에 올렸으나 반려되었다./ 辭司憲府執義疏 : 司憲府執義의 관직을 사양하는 상소이다. 司憲府는 風敎의 憲章이 있는 곳으로 매우 중요한 부서이다. 그 중 執義의 직책은 특히 막중하니, 설령 본래부터 風力을 갖춘 자라 하더라도 그 자리에 있게 되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힘든데, 아물며 자신과 같이 용렬한 사람이 어찌 榮華를 욕심내어 함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본 상소는 1693년(숙종 19) 10월에 承政院에 올렸으나 반려되었다./ 英陽英山書院請額疏 : 英山書院의 賜額을 청하는 상소이다. 英陽의 영산서원은 1653년(효종 4) 文純公 李滉을 主享, 鶴峯 金誠一을 配享으로 하여 세운 서원이다. 海東의 朱熹로 추존되는 이황이 제향된 서원 중 지금까지 사액을 청하여 사액되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이를테면 禮安의 陶山書院 安東의 虎溪書院 榮川의 伊山書院 醴泉의 鼎山書院 眞寶의 鳳覽書院 丹陽의 丹山書院이 그러하다. 따라서 英陽에 서원은 있으되 사액되지 않음은 어찌 昭代의 欠典이 아니겠느냐고 사액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大笑軒趙公請諡疏 : 大笑軒 趙宗道의 諡號를 청하는 상소이다. 조종도(1537~1595)는 壬辰倭亂이 발발하자 격문을 내어 義兵을 모집하고 사재를 털어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을 규휼하는데 힘을 쏟았으며, 丁酉再亂 때 安陰縣監 郭준과 함께 安義의 黃石山城에서 왜적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인물이다. 그런데 근자에 곽준에 대해서는 증직과 시호를 내려주었으니 조종도에 대해서도 당연히 시호를 내려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辨誣黃錦溪(俊良)疏 : 錦溪 黃俊良에 대한 誣言을 변명하는 상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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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천소방서 풍양의용소방대 박덕용과 권순녀, 13일 경북도지사 표창를 수상함...축하합니다.

 

  예천소방서(예천소방서(서장 박경욱) 풍양의소대 대장 이.취임식..박덕용 이임대장 도지사 표창!) [기사] : 예천소방서 풍양 남.여의용소방대 박덕용.권순녀 이임대장 및 이웅희.한부자 신임대장의 이.취임식이 2020년 2월 13일 오전 11시 풍양면 주민자치센터 2층 회의실에서 김학동 군수, 안희영 도의원, 이형식.정창우 군의원, 박경욱 예천소방서장, 관내 기관단체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박경욱 예천소방서장은 이임하는 박덕용 남대장과 권순녀 여대장에게 "귀하께서는 의용소방대장으로 재임하시면서 희생봉사 정신으로 도민의 생명과 재산보호에 헌신하여 도정발전에 기여하신 공이 크므로 그 뜻을 기리고자 이 패를 드린다."며 이철우 도지사 공로패를 전수했다. 박덕용 대장은 "지난 30여년 풍양의용소방대원과 대장으로 재임하면서 대원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대과없이 임무를 완수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이임을 축하해주시기 위해 참석해 주신 김학동 군수님과 내빈, 그리고 모든 참석자들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는 이임사를 했다. 박 대장은 또, "그동안 양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짐을 막상 내려놓으려니 홀가분한 기분도 들지만 한편으론 사뭇 밀려드는 후회와 아쉬움, 섭섭함이 많다"고 회고하고 "탁월한 리더십을 겸비한 신임 이웅희 대장과 대원들이 풍양면민들을 재난으로부터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 신임 이웅희 대장은 "풍양면 재해예방에 헌신 봉사하고 퇴임하는 박덕용 대장님께 그동안의 노고에 머리 숙여 감사드리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저의 임기 동안 풍양면 재해예방을 책임질 것"을 다짐하고 "동료 의소대원들과 힘을 모아 무재해 풍양의소대를 이끌겠다."고 말했다. 이웅희 대장은 특히 "의소대원은 지역사회에 봉사하며 소외되고 그늘진 곳에 계신 분들을 위로하고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대원들과 노력하고, 재해예방과 진압 복구 등 소방업무에 적극 협조하는 등으로 풍양면민의 안녕과 평화를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박경욱 예천소방서장은 축사에서 "30여년 의용소방대원으로 활동하다 퇴임하는 박덕용.권순녀 대장의 노고를 치하하고 새로 취임하는 이웅희.한부자 대장은 선배들이 닦아 놓은 터전위에서 재난예방 활동 및 화재 진압 등에 최선을 다해 줄 것"을 당부했다.김학동 군수는 격려사에서 "이임하는 박덕용.권순녀 남여 대장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고 신임 이웅희.한부자 남여 대장의 취임을 축하하는 동시에 앞으로 풍양의용소방대가 군민들의 안녕과 재산을 지키는 최일선 파수꾼 역할을 톡톡히 해 재난없는 풍양면을 만들어 달라"고 말했다. 이날 예천군의용소방대연합대 일동은 "풍양면의용소방대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대원 상호간 친목도모는 물론, 헌신적인 노력으로 열과 성을 다하여 물심양면으로 기여한 공이 지대하므로 전 대원의 뜻을 모아 이 패를 드린다."며 이임대장에게 감사패와 기념품을 전달했다. 풍양의용소방대는 "의용봉공정신(국가나 사회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있는 힘을 다한다는 뜻)의 정신으로 의용소방대의 존립근거란 것을 의용소방대원들은 명심하여야 한다"는 박경욱 예천소방서장의 당부를 근무 이념으로 풍양면을 사고 없는 고장으로 만들 것을 다짐했다. 신임 이웅희 남대장은 지난 1992년도에 입대하여 28년 동안 소방안전과 재난대응에 맡은바 소임을 다 한 결과 오늘 풍양면남성의용소방대장에 임명됐으며, 한부자 여 대장은 2001년도에 입대하여 18년 동안 소방안전과 재난대응 현장에서 솔선수범해 온 여걸로 통한다.(정차모 기자 예천인터넷뉴스 2020-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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