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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799:노주집...
작성자장병창 @ 2020.02.14 17:26:17

  도청신도시 예천 799 : 노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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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준량(1517~1563)은 조선 明宗 때의 문신이며 李滉의 문인이다. 李選이라는 자가 황준량이 文純公 李滉의 廟宇에 從享되는 것은 不可하다고 여기고 상소를 올려 黜享을 요구하자, 수령으로 있을 때 많은 치적을 올렸고 특히 학교와 교육 진흥에 전심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한 황준량이 이황과 나란히 제향되는 것은 公論이 찬동하는 바요, 지금 그에 대한 誣告를 변호하는 일 또한 士林의 뜻이라고 역설하였다./

 

  書/ 擬上眉수許先生書(1675) : 眉叟 許穆(1595~1682)에게 보낸 편지이다. 西厓 柳成龍의 손자인 柳元之가 지은 {尊堯錄}은 그가 만년에 부모상을 당하여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는 요량으로 禮書에 근거하여 지었는데, 愛君憂國의 정성이 담겨있다. 비록 지금 바로 시행할 수 없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후세의 公論이 될 것이다. 그러니 겨를이 있으면 한 번 펼쳐 보고 刪正해 주면 좋겠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與申退伯(弼成)書 : 退伯 申弼成에게 보낸 편지이다. 木齋 洪汝河(1621~1678) 선생을 尊享하는 일이 公議로 발의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미루고 실행되지 않으니, 이는 斯文의 欠典이요 嶺南 士林의 수치이다. 근자에 조정에서 비록 書院禁令을 내렸지만 그 당시 事目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지 書院의 新設과 疊設을 막는 데 있다. 따라서 홍 선생을 이미 설립된 尙州 近巖書院에 追享하는 일은 國禁에 조금도 위배되지 않으니 빨리 公議를 모아 실행에 옮기자는 내용을 적고 있다./ 序/ 族譜序 : 族譜에 붙힌 서문이다. 친족이 계통을 좇아 列記되는 이유는 세대를 밝히고 자손의 실마리를 잡으며 親疎의 차례를 매기는 데 있다. 나와 同宗의 사람들 중 이 族譜를 펼쳐 보는 이는 반드시 孝悌의 도리에 힘쓰고 親睦의 의리를 돈독히 하여 대대손손 멸하지 않아 서로 남남이 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임을 당부하고 있다./ 記/ 吏郞朴公別廟齋室營建記 : 吏曹正郞 朴公의 別廟 및 齋室에 대한 記文이다. 나의 外先祖 이조정량 朴公은 簪纓巨族으로 공의 형제 다섯 분 모두가 文科에 급제하니, 그 光榮이 當代에 빛났고 은택이 후세에까지 미쳤다. 공은 다섯 분 중 막내였다. 世代가 점차 멀어지니 공의 廟位도 장차 옮기려 한다. 이에 여러 자손들이 논의하여 別廟를 세워 移安하고 廟의 남쪽에 齋室 여섯 칸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공의 6대손인 正言 朴聖稱이 나에게 記文을 부탁하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짓게 되었노라고 적었다./ 二樂樓記 : 二樂樓에 대한 記文이다. 鼎山書院에는 예로부터 樓臺가 없었다. 1678년(숙종 4) 僉知 金 이 한 고을의 達尊으로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서원의 堂齋가 비좁아 많은 선비들이 모이기도 힘들고 또 쉴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는 서원의 東西齋 곁에 누대 하나를 세우자고 발의하자, 여러 父老들과 士林이 기꺼이 찬동하여 누대를 세우니 이것이 바로 二樂樓이다. 누대는 풍광이 빼어나 푸른 절벽을 마주하고 있으면서 맑은 냇물에 잇대어 있다. 창문을 열고 마음껏 보면 山勢가 우뚝 높이 솟고 냇물이 힘차게 흘러, 참으로 어진 이와 지혜로운 이가 즐기기에 알맞으니, '二樂'이라고 이름한 것도 바로 여기에서 취하였다고 하였다./ 重修琵琶記 : 琵琶를 고친 일에 대한 記文이다. 공의 외조부가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琵琶가 세월이 오래되어 훼손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外職으로 나갈 기회가 잦은 자신에게 수리를 당부하였다. 마침 공이 1685년(숙종 11) 봄 任地인 晉陽으로 가게 되었는데,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匠人에게 명하여 비파를 고치게 하였다. 자신은 본래 음률을 잘 알지 못하지만 비파를 고치고 나서는 대략이나마 음률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감회를 적고 있다./

 

  遊月出山記(1691) : 月出山 遊記文이다. 공이 靈巖郡 서남쪽 5리에 위치한 月出山을 유람하면서 지은 遊記文으로, 千峰萬壑의 山勢를 자세하고도 생동감 넘치게 그려내고 있다. 유람을 통해 일어나는 감흥을 시로 나타내기도 하였으니, 이를테면 龍巖寺에 이르러 "절은 명산의 가장 꼭대기에 있고"(寺在名山最上頭)라 하고, 九龍峯에 올라 "이 세상에 태어나, 九井峯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네."(世界抽身出, 登臨九井峯)라 하며, 道岬寺에 이르러 "30년 전에 이 곳을 지났거니, 禪房에서의 하루 밤에 維摩와 짝하네."(三十年前此地過, 禪房一夜伴維麻)라고 한 등이 그러하다./ 龍宮浮翠樓重修記 : 龍宮 浮翠樓에 대한 重修記이다. 1692년(숙종 18) 10월 공이 龍城縣을 지나다가 副官 韓相皐의 입을 통해 이 고을의 명승지인 浮翠樓의 소재를 알게 되었는데, 浮翠樓라 이름한 것은 虛白亭 洪貴達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누대는 세월이 오래되어 피폐되고 그 규모 또한 나지막하고도 비좁아 놀러온 사람이나 부임해 온 지방관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공 역시 龍城에 부임한 이래로 늘 가슴 아프게 여기다가 수년에 걸쳐 새롭게 보수하였다. 외형이 지난날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확 트인 느낌이 들어 괜찮다고 적고 있다./ 忠孝堂記 忠孝堂은 翊贊公 柳宜河가 지었다. : 忠孝堂에 대한 記文이다. 공이 士人 柳聖和의 입을 통해 그의 조부 翊贊公 柳宜河가 河回의 舊家를 확장하여 忠孝堂을 짓게 된 내력을 듣게 되었다. 忠孝堂이라 명명한 것은 先祖인 西厓 柳成龍의 訓戒詩 중 "자손을 勉勵함에는 모름지기 신중해야 하니, 忠孝 외에 다른 것은 없도다."(勉爾子孫須愼전, 忠孝之外無事業)라고 한 구절에서 따온 것임을 적고 있다./ 勿溪書院移建記 : 勿溪書院 移建에 대한 記文이다. 물계서원은 忠烈公 金楊震(1467~1535)을 제향하기 위해 후손 鶴沙 金應祖(1587~1667)의 발의로 세워졌으며 후에 鶴沙 자신도 竝享되었다. 서원의 舊基가 甘泉縣 서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고 터 또한 平穩하지 않아 영구히 보존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어 마침내 移建을 논의하였다. 李光斗가 풍광이 빼어난 현의 서쪽 2~3리 부근 山麓에 터를 정하고 전 군수 李後榮이 山長이 되어, 1697년(숙종 23) 2월에 이건하게 된 사실을 적고 있다./ 思過齋記 : 思過齋에 대한 記文이다. 郡守 申 아무개가 고을에 부임해 온 지 4년이 되었는데, 지극한 정성으로 郡民들을 아껴주었다. 그런데 내리 3년 동안 극심한 흉년이 들어 군민이 굶어죽을 지경에 놓이자 군수는 노심초사하며 애간장을 태웠다. 이에 매년 조세를 면제해주고 곡식을 내어 飢民을 구휼하는 방법으로 瀕死 상태에 처한 수많은 군민을 구제해 주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衙軒의 북쪽 빈터에 세 칸짜리 小齋를 짓고는 '방안에 칩거하여 자기의 잘못을 생각한'(閉閤思過) 漢代 韓延壽의 고사를 빌어 '思過'을 齋室名으로 삼았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負暄堂記 : 負暄堂에 대한 記文이다. 공의 친구 金正則이 작은 집을 지어 '負暄'이라 이름하고 [負暄堂古風] 60韻을 보여주면서 공에게 記文을 부탁하자, 김정칙은 평생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仁을 힘쓰는데 게을리하지 않으며, 검박하게 꾸민 깨끗한 방에서 책을 대함에 밝은 해가 등에 있으면 '햇볕을 쬐는[負暄]'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負暄'이란 편액이 잘 어울린다고 하였다./

 

  跋/ 書蓮桂會詩帖後 : 丹陽 지역 선비들의 詩會인 蓮桂會에서 남긴 詩帖에 대한 跋文이다. 공이 단양 군수로 있을 때 權得初가 단양군은 大小科에 급제한 사람만 해도 15인이나 되니 오래전에 없어진 蓮桂會를 다시 부활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詩會를 만들어 試帖을 남기니, 이 지역에 인재가 많음을 징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적고 있다./ 鄭統制(起龍)事蹟跋 : 鄭起龍(1562~1622)의 사적에 대한 跋文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討倭大將이 되어 많은 전공을 세운 정기룡은 그의 대부분의 사적이 曺公이 쓴 事蹟記에 상세하게 실려있다. 지금 공이 죽은 지 70년이 지나 공의 손자 鄭善영이 조부의 사적을 版木으로 새기면서 跋文을 써 줄 것을 청하기에, 만인의 존경을 받는 공의 행적을 간략하게 적게 되었다고 하였다./ 崔直提學出處事蹟後 : 文宗 때의 문신인 崔德之(1384~1455)의 出處 사적에 대한 跋文이다. 1691년(숙종 17) 초여름 공이 靈巖郡守로 부임하자 煙邨書院의 儒生 두 명이 崔德之의 出處 사적이 기록된 책 한 권을 가지고 와서 보게 되었다. 책에는 선생의 出處 사적 및 立祠 顚末, 관직에서 물러날 때 名公鉅卿들의 送別詩 및 序跋, 그리고 선생이 머물렀던 存養樓의 記文 및 題詠詩篇이 실려 있었고, 말미에는 遲川 崔鳴吉(1586~1647)의 시 한 수와 澤堂 李植(1584~1647)의  文 한 편이 실려 있었다. 이를 통해 선생의 출처의 대강을 알 수 있었으니, 선생은 百世의 師表로서 당대 및 후세 諸賢들의 추앙을 받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하였다./ 銘/ 木枕銘 : 鼎山書院에 가운데는 텅 비고 겉은 모가 난 오동나무로 만든 木枕이 있는데, 이 木枕에 대한 느낌을 피력한 銘文이다. 군자는 中虛外方의 이치로써 자신을 단속해야 한다고 하였다./ 祝文/ 近암書院追享時告由文 : 近암書院에 洪汝河와 金弘敏 두 분을 追享할 때 지은 告由文이다. 경북 聞慶에 위치한 근암서원은 1665년(현종 6)에 창건되어 먼저 洪彦忠과 李德馨 두 분을 제향해 오다가, 후에 洪汝河 金弘敏 두 분을 追享하게 되었다. 지금 두 분을 추향함은 실로 公議에서 나온 것으로, 沙潭 金弘敏의 忠孝는 세상에서 추앙하는 바라고 하였다./ 陶溪里社奉安文 및 常享文 : 陶溪里社 奉安文 및 常享祝文이다. 咸寧縣 陶谷仁里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群賢들의 발자취가 아름다우니, 祠宇를 지어 縣令 柳公 生員 柳公 醉睡 李公 鋤歸 鄭公 野翁 李公 등 다섯 어진 이를 奉安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祭文/ 始祖墓望祭文 始祖의 墓所는 禮安에 있다. : 始祖墓의 望祭 때 지은 제문이다. 시조의 位牌를 이 산자락에 편안하게 모신 이래로 세월이 바뀌어 향불도 끊어지고 산소를 살피는 일 역시 없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못난 후손대에 와서는 先塋의 위치조차 알지 못하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음을 가슴 아파 하였다./ 祭聘君朴公文 : 장인 朴公에 대한 제문이다. 공의 가슴은 옥과 얼음처럼 맑고 깨끗하여 外物에 걸림이 없고, 공의 마음은 비단에 놓은 수와 같아서 아름다운 문장이 거침없이 나온다고 하였다./ 祭伯氏砥南公文 : 伯氏 砥南公에 대한 제문이다. 어릴 때부터 형제간에 서로 義로써 격려하며 사이좋게 지냈다. 아우들이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으로 나아간 반면 형은 奇才를 가지고도 운이 나빠 누차 鄕試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삼켰다.

 

  다행히 늙으막에 관직에 나아가 郡守가 되어 淸白吏로써 좋은 평판을 들었음을 적고 있다./ 祭再從弟(遇一)文 丹城縣監으로 관직을 마쳤다. : 再從弟 金遇一에 대한 제문이다. 비록 再從 형제간에 서로 나이는 차이가 나지만 정은 실로 친형제와 같았으며, 지난날 京師에서 함께 벼슬살이 할 때 아침저녁으로 서로 의지하며 旅愁를 잊었다고 회상하였다./ 祭金參奉(球)文 鄕校 儒生들을 대신하여 짓다. : 金球에 대한 제문이다. 공은 재주를 지니고도 운이 따르지 않아 典午라는 微官에 머물렀지만 마음에 원망함이 없었고, 평생 책을 읽으며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祭亡弟後一文(1662) : 죽은 동생 金後一에 대한 제문이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와 형제를 남겨둔 채 먼저 떠난 동생에 대한 슬픔을 적고 있다. 後一 아우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영민함을 타고났는데, 그런 재능을 펼 기회도 갖지 못하고 요절한 것은 조물주의 시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祭權子韜文 : 權子韜에 대한 제문이다. 젊어서부터 남다른 재주를 지니고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자, 평생 經史를 궁구하며 성현의 가르침을 좇은 그의 행적을 적고 있다./ 祭鄭景瞻文 : 鄭景瞻에 대한 제문이다. 공은 병든 부모의 侍湯으로 평생을 보냈다. 그의 訃音을 듣고 마땅히 힘을 다하여 서둘러야 하였거늘 관직에 쫓기다 보니 벌써 일 년이 지났다고 회상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祭從兄(宗河)文 : 從兄 金宗河에 대한 제문이다. 質直한 성격과 仁厚한 마음을 지닌 從兄은 같은 마을에서 朝夕으로 서로 따르며 기쁜 일 슬픈 일을 함께 하였다. 이제 형이 저 세상으로 떠나가니 애통하기 그지없다고 하였다./ 八公山祈雨祭文 : 八公山 祈雨祭 때 올린 제문이다. 이 제문은 공이 1674년(현종 15) 達城 巡察使로 있을 때 지었다. 山神이 신령스럽지 않고 어질지 않으면 어찌 신이 될 수 있겠느냐고 책망하였다./ 月牙山祈雨祭文 : 月牙山 祈雨祭 때 올린 제문이다. 이 제문은 공이 晉州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 백성은 먹을 것에 의지하고 神은 인간에 의지하니, 먹을 것이 없고 백성이 없으면 신이 될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 社稷壇祈雨祭文 : 社稷壇 祈雨祭 때 올린 제문이다. 이 제문은 공이 寧海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 社는 땅을 관장하고 稷은 곡식을 관장하니, 땅은 사람을 기르고 곡식은 백성의 양식이 된다고 하면서 신의 恩德으로 雨澤을 내려주기를 기원하였다./ 雜著/ 犬吠鷄聲說 :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그 이치를 설명한 글이다. 새벽에 닭이 울면 개가 갑자기 떼를 지어 짖는 것은 개가 닭 울음소리에 놀라 짖는 것이며, 닭이 울음을 그치는 것은 개 짖는 소리 때문이 아니라 저절로 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甲子記事 : 공이 1684년(숙종 10) 甲子年 가을 國子司藝를 제수받고 京師로 가던 중 可興 강변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邨舍에서 묵었는데, 꿈에 先君께서 나타났다. 이에 先君께 절하고 깨어나 꿈의 내용을 기억하면서 선군께서 평소 아들이 벼슬을 얻으면 관직이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기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노라고 말한 사실을 회상하면서, 지금 상황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즉, 관직에 오르면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지나 관직에서 물러나면 편안해진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www.koreastudy.or.kr 2006)

 

  노주집(蘆洲集) [冊] : 개포면 경진리 검암 출신인 노주 김태일(金兌一, 1637-1702)의 문집으로, 5권 3책, 10行20字, 天 地 人 3冊의 활자본. 序文과 跋文이 없어 구체적으로 누구의 손에 의해 간행되었는지 알 수 없다. 전편은 賦 2편, 시 400여 수, 上疏 8편, 書 2편, 記 9편, 序跋 4편, 銘 1편, 祝文 2편, 祭文 12편, 雜著 2편, 上樑文 2편, 碣誌 7편, 行狀 7편으로 구성되었고, 부록으로 선생의 行狀 墓碣銘 輓詞 祭文이 수록되었다. 400여 수의 시 중 적지 않은 부분이 당시 교유한 인사들과의 次韻詩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그가 생전에 詞章之學에 대해서는 그렇게 공력을 쏟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책 卷1에 “...次韻, 殷栗觀稼樓次韻, 又次客舍韻, 豊川客舍次韻, 自豊川向長淵夾路紅綠?亂客思寓吟自嘲, 長淵客舍詠懷, 雨後吟,...”라는 글이 있다.(http://www.koreastudy.or.kr 2007)

 

  노주집 [記事] : 산수내회화 카페/ 노주집(蘆洲集) / 글쓴이: 김광수/ 2007.11.27 12:44/ 노주집(蘆洲集) : 蘆洲 金兌一의 문집. 5권 3책. 10行20字 天 地 人 3冊의 활자본. 序文과 跋文이 없어 구체적으로 누구의 손에 의해 간행되었는지 알 수 없다. 전편은 賦 2편, 시 400여 수, 上疏 8편, 書 2편, 記 9편, 序跋 4편, 銘 1편, 祝文 2편, 祭文 12편, 雜著 2편, 上樑文 2편, 碣誌 7편, 行狀 7편으로 구성되었고, 부록으로 선생의 行狀 墓碣銘 輓詞 祭文이 수록되었다. 400여 수의 시 중 적지 않은 부분이 당시 교유한 인사들과의 次韻詩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그가 생전에 詞章之學에 대해서는 그렇게 공력을 쏟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태일(金兌一)] : 1637~1702(인조15~숙종28). 字:秋伯, 號:蘆洲, 本貫:禮安, 父:?, 母:務安 朴氏, 居:醴泉. / 金兌一은 戶曹參判에 증직된 金?과 ?皐公 權克諧의 딸 사이에 1637년(인조 15)에 태어났다. 參判公 ?은 郡 서쪽 花庄里에서 처가살이를 하다가 공의 나이 18세 되던 해에 공을 仲父 ?의 양자로 보냈다. 공은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었는데, 沈靜하였고 말수가 적고 웃음을 아꼈으니 愼重하기가 어른과 같았다. 향리의 아이들과 어울릴 때면 무익한 놀이는 하지 않았으며,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그어 번번히 글자를 만들어내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서는 형 郡守公 아우 府尹公과 함께 외조부 ?皐公 權克諧에게 수학하였다. 9세 때 [靑塚賦]를 지어 山陽의 李?에게 보이자, 李公이 읽고는 "이는 王安石의 詩意를 뒤엎었다. 이 아이의 훗날 성취를 헤아릴 수 없구나."(此反王介甫詩意, 是兒異日成就未可量也)라고 찬탄하였다. 15~6세에 四書三經을 독파하였고 틈틈이 班固와 司馬遷의 역사서 및 제자서를 두루 섭렵하였다. 1660년(현종 원년) 공의 나이 24세에 鄕試에 2등으로 급제하여 國子學諭兼奉常寺副奉事例에 임명되었고 學錄學正으로 승진하였다. 1664년(현종 5) 博士로써 典籍으로 승진하였고, 또한 司憲府監察로 승진하였으며, 1665년(현종 6) 가을 외직으로 興德縣監을 맡았다. 1673년(현종 14) 文臣兼宣傳官에 제수되었고 잠시 동안 成歡察訪을 맡기도 하였다. 1674년(현종 15) 봄에 승진하여 大丘判官에 제수되었다. 1677년(숙종 3) 겨울 兵曹佐郞에 제수되었으며, 1678년(숙종 4) 봄 외직으로 海西의 막료로 文化縣에서 別試를 관장하면서 科場을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1685년(숙종 11) 봄에 晉州牧使를 제수받고, 1687년(숙종 13) 寧海府使를 제수받았다. 1689년(숙종 15) 봄 肅宗이 영해에 머물러 있던 持憲 李玄逸을 불러 國子司業으로 삼으려 하자 영해부사였던 공이 나서서 李公을 설득하여 進講하게 하였다. 그 해 가을 司憲府掌令으로 승진되었다. 1694년(숙종 20) 輔德으로써 司諫으로 옮겼으며, 또 司僕寺正을 제수받았다. 名利를 좋아하지 않고, 외직에 있을 때 善政을 많이 베풀었던 공은 1702년(숙종 28) 9월 4일 戌時에 66세의 나이로 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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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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