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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801:노주집...
작성자장병창 @ 2020.02.16 06:06:20

  도청신도시 예천 801 : 노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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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忠孝堂記 忠孝堂은 翊贊公 柳宜河가 지었다. 忠孝堂에 대한 記文이다. 공이 士人 柳聖和의 입을 통해 그의 조부 翊贊公 柳宜河가 河回의 舊家를 확장하여 忠孝堂을 짓게 된 내력을 듣게 되었다. 忠孝堂이라 명명한 것은 先祖인 西厓 柳成龍의 訓戒詩 중 "자손을 勉勵함에는 모름지기 신중해야 하니, 忠孝 외에 다른 것은 없도다."(勉爾子孫須愼전, 忠孝之外無事業)라고 한 구절에서 따온 것임을 적고 있다./ 勿溪書院移建記 / 勿溪書院 移建에 대한 記文이다. 물계서원은 忠烈公???楊震(1467~1535)을 제향하기 위해 후손 鶴沙 金應祖(1587~1667)의 발의로 세워졌으며 후에 鶴沙 자신도 竝享되었다. 서원의 舊基가 甘泉縣 서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고 터 또한 平穩하지 않아 영구히 보존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어 마침내 移建을 논의하였다. 李光斗가 풍광이 빼어난 현의 서쪽 2~3리 부근 山麓에 터를 정하고 전 군수 李後榮이 山長이 되어, 1697년(숙종 23) 2월에 이건하게 된 사실을 적고 있다. / 思過齋記 / 思過齋에 대한 記文이다. 郡守 申 아무개가 고을에 부임해 온 지 4년이 되었는데, 지극한 정성으로 郡民들을 아껴주었다. 그런데 내리 3년 동안 극심한 흉년이 들어 군민이 굶어죽을 지경에 놓이자 군수는 노심초사하며 애간장을 태웠다. 이에 매년 조세를 면제해주고 곡식을 내어 飢民을 구휼하는 방법으로 瀕死 상태에 처한 수많은 군민을 구제해 주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衙軒의 북쪽 빈터에 세 칸짜리 小齋를 짓고는 '방안에 칩거하여 자기의 잘못을 생각한'(閉閤思過) 漢代 韓延壽의 고사를 빌어 '思過'을 齋室名으로 삼았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 負暄堂記 / 負暄堂에 대한 記文이다. 공의 친구 金正則이 작은 집을 지어 '負暄'이라 이름하고 [負暄堂古風] 60韻을 보여주면서 공에게 記文을 부탁하자, 김정칙은 평생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仁을 힘쓰는데 게을리 하지 않으며, 검박하게 꾸민 깨끗한 방에서 책을 대함에 밝은 해가 등에 있으면 '햇볕을 쬐는[負暄]'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負暄'이란 편액이 잘 어울린다고 하였다. /

 

  跋 : 書蓮桂會詩帖後 / 丹陽 지역 선비들의 詩會인 蓮桂會에서 남긴 詩帖에 대한 跋文이다. 공이 단양 군수로 있을 때 權得初가 단양군은 大小科에 급제한 사람만 해도 15인이나 되니 오래 전에 없어진 蓮桂會를 다시 부활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詩會를 만들어 試帖을 남기니, 이 지역에 인재가 많음을 징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적고 있다. / 鄭統制(起龍)事蹟跋 / 鄭起龍(1562~1622)의 사적에 대한 跋文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討倭大將이 되어 많은 전공을 세운 정기룡은 그의 대부분의 사적이 曺公이 쓴 事蹟記에 상세하게 실려있다. 지금 공이 죽은 지 70년이 지나 공의 손자 鄭善영이 조부의 사적을 版木으로 새기면서 跋文을 써 줄 것을 청하기에, 만인의 존경을 받는 공의 행적을 간략하게 적게 되었다고 하였다. / 崔直提學出處事蹟後  / 文宗 때의 문신인 崔德之(1384~1455)의 出處 사적에 대한 跋文이다. 1691년(숙종 17) 초여름 공이 靈巖郡守로 부임하자 煙邨書院의 儒生 두 명이 崔德之의 出處 사적이 기록된 책 한 권을 가지고 와서 보게 되었다. 책에는 선생의 出處 사적 및 立祠 顚末, 관직에서 물러날 때 名公鉅卿들의 送別詩 및 序跋, 그리고 선생이 머물렀던 存養樓의 記文 및 題詠詩篇이 실려 있었고, 말미에는 遲川 崔鳴吉(1586~1647)의 시 한 수와 澤堂 李植(1584~1647)의 文 한 편이 실려 있었다. 이를 통해 선생의 출처의 대강을 알 수 있었으니, 선생은 百世의 師表로서 당대 및 후세 諸賢들의 추앙을 받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하였다./

 

  銘 : 木枕銘 / 鼎山書院에 가운데는 텅 비고 겉은 모가 난 오동나무로 만든 木枕이 있는데, 이 木枕에 대한 느낌을 피력한 銘文이다. 군자는 中虛外方의 이치로써 자신을 단속해야 한다고 하였다./ 祝文 : 近암書院追享時告由文 / 近암書院에 洪汝河와 金弘敏 두 분을 追享할 때 지은 告由文이다. 경북 聞慶에 위치한 근암서원은 1665년(현종 6)에 창건되어 먼저 洪彦忠과 李德馨 두 분을 제향해 오다가, 후에 洪汝河 金弘敏 두 분을 追享하게 되었다. 지금 두 분을 추향함은 실로 公議에서 나온 것으로, 沙潭 金弘敏의 忠孝는 세상에서 추앙하는 바라고 하였다./ 陶溪里社奉安文 및 常享文 / 陶溪里社 奉安文 및 常享祝文이다. 咸寧縣 陶谷仁里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群賢들의 발자취가 아름다우니, 祠宇를 지어 縣令 柳公 生員 柳公 醉睡 李公 鋤歸 鄭公 野翁 李公 등 다섯 어진 이를 奉安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祭文 : 始祖墓望祭文 始祖의 墓所는 禮安에 있다. 始祖墓의 望祭 때 지은 제문이다. 시조의 位牌를 이 산자락에 편안하게 모신 이래로 세월이 바뀌어 향불도 끊어지고 산소를 살피는 일 역시 없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못난 후손대에 와서는 先塋의 위치조차 알지 못하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음을 가슴 아파 하였다. / 祭聘君朴公文 / 장인 朴公에 대한 제문이다. 공의 가슴은 옥과 얼음처럼 맑고 깨끗하여 外物에 걸림이 없고, 공의 마음은 비단에 놓은 수와 같아서 아름다운 문장이 거침없이 나온다고 하였다./ 祭伯氏砥南公文 / 伯氏 砥南公에 대한 제문이다. 어릴 때부터 형제간에 서로 義로써 격려하며 사이좋게 지냈다. 아우들이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으로 나아간 반면 형은 奇才를 가지고도 운이 나빠 누차 鄕試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삼켰다. 다행히 늙으막에 관직에 나아가 郡守가 되어 淸白吏로써 좋은 평판을 들었음을 적고 있다. / 祭再從弟(遇一)文 丹城縣監으로 관직을 마쳤다. 再從弟 金遇一에 대한 제문이다. 비록 再從 형제간에 서로 나이는 차이가 나지만 정은 실로 친형제와 같았으며, 지난날 京師에서 함께 벼슬살이 할 때 아침저녁으로 서로 의지하며 旅愁를 잊었다고 회상하였다. / 祭金參奉(球)文 鄕校 儒生들을 대신하여 짓다. 金球에 대한 제문이다. 공은 재주를 지니고도 운이 따르지 않아 典午라는 微官에 머물렀지만 마음에 원망함이 없었고, 평생 책을 읽으며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祭亡弟後一文(1662) / 죽은 동생 金後一에 대한 제문이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와 형제를 남겨둔 채 먼저 떠난 동생에 대한 슬픔을 적고 있다. 後一 아우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영민함을 타고났는데, 그런 재능을 펼 기회도 갖지 못하고 요절한 것은 조물주의 시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祭權子韜文 / 權子韜에 대한 제문이다. 젊어서부터 남다른 재주를 지니고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자, 평생 經史를 궁구하며 성현의 가르침을 좇은 그의 행적을 적고 있다. / 祭鄭景瞻文 / 鄭景瞻에 대한 제문이다. 공은 병든 부모의 侍湯으로 평생을 보냈다. 그의 訃音을 듣고 마땅히 힘을 다하여 서둘러야 하였거늘 관직에 쫓기다 보니 벌써 일 년이 지났다고 회상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 祭從兄(宗河)文 / 從兄 金宗河에 대한 제문이다. 質直한 성격과 仁厚한 마음을 지닌 從兄은 같은 마을에서 朝夕으로 서로 따르며 기쁜 일 슬픈 일을 함께 하였다. 이제 형이 저 세상으로 떠나가니 애통하기 그지없다고 하였다. / 八公山祈雨祭文 / 八公山 祈雨祭 때 올린 제문이다. 이 제문은 공이 1674년(현종 15) 達城 巡察使로 있을 때 지었다. 山神이 신령스럽지 않고 어질지 않으면 어찌 신이 될 수 있겠느냐고 책망하였다./ 月牙山祈雨祭文 / 月牙山 祈雨祭 때 올린 제문이다. 이 제문은 공이 晉州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 백성은 먹을 것에 의지하고 神은 인간에 의지하니, 먹을 것이 없고 백성이 없으면 신이 될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

 

  社稷壇祈雨祭文 / 社稷壇 祈雨祭 때 올린 제문이다. 이 제문은 공이 寧海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 社는 땅을 관장하고 稷은 곡식을 관장하니, 땅은 사람을 기르고 곡식은 백성의 양식이 된다고 하면서 신의 恩德으로 雨澤을 내려주기를 기원하였다. / 雜著 : 犬吠鷄聲說 /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그 이치를 설명한 글이다. 새벽에 닭이 울면 개가 갑자기 떼를 지어 짖는 것은 개가 닭 울음소리에 놀라 짖는 것이며, 닭이 울음을 그치는 것은 개가 짖는 소리 때문이 아니라 저절로 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 甲子記事 / 공이 1684년(숙종 10) 甲子年 가을 國子司藝를 제수받고 京師로 가던 중 可興 강변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邨舍에서 묵었는데, 꿈에 先君께서 나타났다. 이에 先君께 절하고 깨어나 꿈의 내용을 기억하면서 선군께서 평소 아들이 벼슬을 얻으면 관직이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기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노라고 말한 사실을 회상하면서, 지금 상황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즉, 관직에 오르면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지나 관직에서 물러나면 편안해진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

 

  卷4 / 上樑文 : 鳳山書院祠宇上樑文 / 鳳山書院 祠宇 上樑文이다. 예천에 소재한 봉산서원은 寓庵 權檣(1489~1529)을 제향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권 선생은 집안이 누대에 걸쳐 관직을 지냈고 문헌이 대대로 전해졌다. 영민한 자질로 문장을 짓고 강직한 절개로 품행이 방정하였다. 師友로는  畢齋 金宗直(1431~1492)과 濯纓 金馹孫(1464~1498) 등이 있으며, 그의 고매한 품격은 종종 '勁松寒玉'의 기풍에 비유된다. 봉산서원의 祠宇를 세워 권 선생을 봉향하는 것은 실로 儒林의 자랑거리라고 하였다./ 翼洞精舍上樑文 / 翼洞精舍 上樑文이다. 익동정사는 存齋 李徽逸(1619~1672)을 제향하기 위해 지은 廟宇이다. 이공은 성정이 영민하고 자질이 순수하여 일찍이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외조부 張興孝가 그의 재주를 인정하였다. 그는 修心養性의 언행에서 시작하여 格物致知의 학문에 힘을 쏟았으며, 들어서는 효행을 다하고 나가서는 공경을 다하였다./

 

  碣誌 : 贈都承旨行坡州牧使黃公墓碣銘(竝序) / 黃曙의 墓碣銘이다. 공의 휘는 曙이고 자는 光遠이며 본관은 昌原이다. 공은 1554년(명종 9)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민하였고 커서는 文詞에 뛰어났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구차히 다른 사람에게 영합하지 않았다. 1576년(선조 9) 進士가 되고 1580년(선조 13) 謁聖文科에 올랐다. 立朝한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재상과 마찰을 빚게 되자 홀연히 떨쳐버리고 귀향하여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雲谷齋를 지어 諸生과 학문을 논구하였다. 1589년(선조 22)에 비로소 輸城察訪에 제수되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鄕兵을 규합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다. 1594년(선조 27) 典籍으로 新寧縣監으로 나갔으며, 다시 地部正郞으로 尙州牧使을 역임하였다. 1598년(선조 31) 당시 병란으로 온 나라가 도탄에 빠지자 공은 힘을 다해 安集計를 마련하였으나 마침 뜻이 맞지 않은 무리가 있어 그만두고 돌아왔다. 1601년(선조 34) 司贍正을 제수받고 坡州牧使로 나갔으나 얼마 후에 그만두었다. 1603년(선조 36) 여름 집에서 세상을 하직하니, 공의 나이 50세였다. 공은 문장이 뛰어나고 품행이 방정하였으며, 젊어서 여러 典籍에 두루 통달하였다. 剛介하여 時流에 영합하지 않았고, 下位를 맴돌다가 끝내 뜻한 바를 펼치지 못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오! / 從祖處士公墓碣銘 / 從祖父 金取善의 墓碣銘이다. 공의 휘는 取善이고 자는 與叔이며 성은 金氏이고 본관은 禮安이다. 고조부의 휘는 萬秤이며 左通禮로 증직되었고, 증조부의 휘는 佑이며 左承旨로 증직되었다. 조부의 휘는 士熙이며 軍資監副正으로 증직되었고, 부친의 휘는 胤安이며 司僕寺正으로 증직되었다. 모친은 寧海申氏 申언의 딸이다. 공은 1586년(선조 19)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었고 커서는 容儀가 단정하고 도량이 넓어 仁人君子의 기품을 지녔다. 4형제 중 셋째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외롭게 성장하며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또한 자식의 직분을 다하여 두 형을 아버지처럼 섬기니, 孝悌로 이름이 높아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다. 성품이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책읽기를 좋아하여 손에 책을 놓은 적이 없었고, 문장을 지음에 理致와 文辭가 겸비되니 일시에 巨擘으로 추존되었다. 누차 大小科 鄕試에 응시하였지만 끝내 급제하지 못하니 애석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636년(인조 14) 5월 5일 병환으로 세상을 하직하니, 공의 나이 51세였다. /

 

  舍弟承旨君墓碣銘 / 아우 金海一의 墓碣銘이다. 君의 이름은 海一이고 자는 宗伯이며 성은 金氏이고 본관은 禮安이다. 군은 1640년(인조 18)에 태어났으며 용모가 옥과 같았다. 일찍이 文藝를 이루어 나이 21세에 庚子 司馬試에 급제하고, 24세에 癸卯 式年試에 급제하여 典籍으로 刑 戶 兵 三曹의 郞을 두루 역임하였다. 司憲府에서는 持平 掌令 執義를 맡았고, 司諫院에서는 正言 獻納을 맡았으며, 世子侍講院에서는 司書 文學을 담당하였다. 1673년(현종 14)에 南原府使로 나갔으나 오래지 않아 곧 물러났다. 1678년(숙종 4) 조정에서 억울한 일을 밝히려고 使者를 燕京에 파견함에 군이 書狀官의 직책으로 선발되어 일을 잘 마무리하고 돌아오니 조성에서 크게 기뻐하여 堂上으로 同副承旨를 제수하였다. 이후 星州牧使와 兵 刑曹參議를 지냈다. 1689년(숙종 15) 다시 進香副使의 자격으로 燕京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전대 속에는 몇 권의 서적뿐이었으니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이를 만 하다. 1690년(숙종 16) 7월 左承旨로 옮겨가자 慶州府尹으로 나가고자 힘을 쏟았다. 당시 三南 지역은 기근이 들었는데 경주가 특히 심하였다. 군은 온힘을 다해 일하고 마음을 다하여 구휼하니, 飢民 7만여 명 중 유랑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에 경주 사람들이 그의 은덕에 감복하여 그의 공로를 바위에 새기고 기렸다. 1691년(숙종 17) 9월 17일 병으로 세상을 하직하니, 군의 나이 52세였다. / 從兄承議郞公墓誌銘 / 從兄 金宗河의 墓誌銘이다. 공의 휘는 宗河이고 자는 淸叔이며 성은 金氏이고 본관은 禮安이다. 부친의 휘는 오이며, 모친은 東萊鄭氏 判校 鄭彦宏의 딸이다. 공은 1629년(인조 7)에 태어났으며, 백부의 자식이 없자 강보에 쌓인 채 백부의 양자로 들어갔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質直하고 기품이 仁厚하며, 평생 동안 外物과 어그러짐 없이 태연자약하게 살았다. 조상을 봉양하는 데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니, 제사가 들면 제물을 씻고 자르고 익힘에 몸소 처리하지 않음이 없었고,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에 친지들과 이웃이 모두 '착한 사람'이라고 칭송하였다. 1700년(숙종 26) 9월 11일 병도 없이 편안하게 세상을 하직하니, 공의 나이 72세였다. /

 

  外王父處士사皐權公碣陰記 / 외조부 사皐公 權克諧의 碣陰記이다. 공의 휘는 克諧이고 자는 義叔이며 성은 權氏이고 본관은 安東이다. 증조부 載 조부 寬 부친 忠孝 모두 은일처사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모친은 文化柳氏이다. 공은 1585년(선조 18) 태어났으며, 10여 세 때 部將公 應期의 양자로 들어갔다. 공은 젊어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책을 한 번 보면 기억할 정도였다. 詩文을 지음에 藻思가 飄逸하여 번번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을 지어내니, 당시 무리들이 모두 스스로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省吾堂 李介立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아 일찍부터 義와 利의 구분을 알게 되었다. 공은 본래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지만 부모의 권유로 누차 鄕試에 응시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뜻을 접고 집 가의 연못에 一草亭을 짓고는 죽을 때까지 山水의 그윽한 풍광을 즐겼으니, 이로 인하여 '사皐'라고 自號하였다. 1673년(현종 14) 8월 5일 세상을 하직하니, 공의 나이 79세였다. / 居昌縣監洪公碣陰記 / 洪彦昇의 碣陰記이다. 공의 휘는 彦昇이고 자는 大曜이며 성은 洪氏이고 본관은 缶溪이다. 공은 燕山君 때 左贊成으로 증직되고 文匡의 시호를 받은 虛白堂 洪貴達(1438~1504)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이다. 공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었으니 아우 彦忠과 함께 1495년(연산군 1) 進士가 되어 처음으로 繕工奉事를 역임하였다. 허백당이 戊午士禍로 화를 입자 형제들과 함께 섬으로 숨었다. 中宗이 宥旨를 내리니 관직이 居昌縣監에 이르렀다. 配는 慶州李氏로서 醉睡軒 李謙의 딸이자 文忠公 李齊賢의 후손이다./ 生先考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府君碣陰記 / 부친 金단의 碣陰記이다. 先君의 휘는 단이고 자는 季精이며 성은 金氏이고 본관은 禮安이다. 先君께서는 1610년(광해군 2) 태어났으며, 다섯 형제 중 막내이다. 천부적으로 仁厚함을 지녔으며 좋은 평판에 온화하고 단아하여 外物을 대함에 거스름이 없었다. 사람들과 교제함에 모두 좋아하니, 친척과 이웃 중 어진 이는 그를 가까이하고 어질지 못한 이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不善함을 보면 끊는 물에 손을 넣듯 결연히 거부하였고, 財利에는 조금도 뜻을 두지 않아 늘 가난하였지만 근심하지 않았다. 과거에 대비한 공부를 그만두고 자식들을 가르쳐 대부분 훌륭하게 키우니 사람들마다 善行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였다. 1680년(숙종 6)庚申 11월 30일에 세상을 하직하고, 尙州 山陽縣 金龍山 기슭에 묻혔다. 府尹의 관직에 오른 아들 海一의 은택으로 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으로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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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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