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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802:노주집...(축,권영해/예천방문1.620)
작성자장병창 @ 2020.02.17 06:09:48

  도청신도시 예천 802 : 노주집...(부, 예천 출신 권영해, <고래에게는 터미널이 없다>를 출판함...축하합니다./예천방문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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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 贈吏曹判書行咸陽郡守趙公諡狀 / 趙宗道의 諡狀이다. 공의 휘는 宗道이고 자는 伯由이며 성은 趙氏이고 본관은 咸安이다. 공은 1537년(중종 32) 2월 5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리하여 7~8세에 이미 문장을 지을 수 있었다. 후에 隱君子 鄭斗에게 배웠고, 南溟 曺植과 玉溪 盧진의 門下를 드나들면서 성리학을 체득하였다. 1558년(명종 13) 生員試에 합격하였고, 1573년(선조 6) 천거로 安奇察訪을 제수받았으며, 이 즈음에 西厓 柳成龍 鶴峯 金誠一과 交友하였다. 그 후 司 直長 尙瑞直長 司儀 司評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 陽智縣監 聞慶縣監을 지내면서 善政을 베풀어 명망이 높았다. 壬辰倭亂이 발발하자 격문을 내어 義兵을 모집하고 사재를 털어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을 규휼하는데 힘을 쏟았다. 丙申년에 咸陽郡守가 되었는데, 이 때 天兵이 호남에서 영남 右道를 넘어오자 공은 힘을 다해 군량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丁酉再亂 때 安陰縣監 郭준과 함께 安義의 黃石山城에서 왜적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西厓 柳成龍은 그를 위해 傳을 지어 애도하였고, 東崗 金宇옹 역시 시를 지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 木齋洪先生行狀 / 洪汝河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汝河이고 자는 應圖이며 木齋로 自號하였다. 성은 洪氏이고 본관은 缶溪이다. 공은 仁祖 때 大諫을 지낸 洪鎬(1586~1646)의 아들로서, 1621년(광해군 13) 安東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理氣의 분별을 알아 愚伏 鄭經世가 장래에 큰 그릇이 될 것임을 예견하였다. 仁祖 甲午年의 司馬試와 乙未年의 文科에 급제하였으며, 孝宗 때 檢閱 翰林說書를 거쳐 正言이 되어 時事를 논하다가 반대파의 배척으로 파면되었다. 그 후 鏡城判官이 되었으나 宋時烈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으며, 1674년(숙종 원년)에 제2차 服喪問題로 西人이 실각하자 다시 등용되어 兵曹佐郞과 司諫을 역임하였다. 1678년(숙종 4) 세상을 하직하니, 후에 尙州 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공은 주자학에 밝아 士林의 宗師로 추존되었으며, 陸王學의 似而非를 분별하고 禮家에서 발생하는 聚訟의 의심을 변증하였다. 저서에 {木齋集}이 있고, 편저에 {周易口訣} {儀禮考證} {海東姓苑} {麗史彙纂} {東國通鑑提綱} {經書解義}가 있는데, 모두 儒道에 도움이 되고 후학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다./

 

  通訓大夫承文院判校朴公行狀 / 朴한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한이고 자는 潤甫이며 성은 朴氏이고 본관은 務安이다. 공은 慶尙道都事를 역임하고 후에 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로 贈職된 朴善長의 아들로서, 1576년(선조 9) 榮川郡 花川里에서 태어났다. 28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成均館學諭를 시작으로 司憲府監察 戶曹佐郞 工曹佐郞 禮安縣監 蔚珍縣令을 거쳐 戶曹兼記注官에 올랐다. 당시 北兵이 쳐들어와 平壤에까지 이르자, 조정에서 愚伏 鄭經世에게 영남지역을 규합하라고 명하니, 공이 從事官으로 참여하였다. 善山都護府使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여 1652년(효종 3) 8월에 세상을 하직하니, 공의 나이 77세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溫良하고 도량이 端重하여 누차에 걸쳐 任子의 기회가 있었지만 끝내 하지 않았으며, 자식들이 장성하였어도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반드시 몸과 마음을 다하였다.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싫어하여 비록 관직에 있었지만 입고 쓰는 것이 寒士와 다를 바 없었다. 또한 목민관으로써 愛民에 온힘을 기울였다. 配는 原城 邊氏이다. / 成均進士張公行狀 / 張璇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璇이고 자는 仲文이며 성은 張氏이고 본관은 仁同이다. 張汝의 아들로 1631년(인조 9) 榮川郡 箭丹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리하여 조부 忠義公이 항상 곁에 두고 訓育하였다. 32세 때 壬寅年의 司馬試에 급제하여 泮中에서 지내며 좋은 사람들을 많이 사귀었다. 그러나 이미 국론이 분별된 지 오래이고 四色黨派로 서로를 배척하는 경향이 갈수록 심해지자, 공은 그 사이에서 구차스럽게 눈치보고 싶지 않아 홀연히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이후로 비록 부모 때문에 억지로 科場에 나가기는 하였지만 급제하고자 하는 마음은 점점 없어졌다. 이렇게 10수년을 閑居하며 가난한 처지에서도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여 그 마음을 즐겁게 하며 지내다가, 1679년(숙종 5) 향년 49세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공은 산뜻하고 고운 날에는 반드시 세수하고 빗질한 채 검박하게 꾸민 깨끗한 방에서 經籍을 펴놓고 열람하였는데, 融通自在하여 조금의 속된 생각도 없었다. 일찍이 陶淵明의 '東皐에 올라 휘파람을 분다'는 詩語를 서재의 편액으로 삼아 조용하고 한가한 풍취에 기탁하기도 하였다. 配는 慶州 李氏이다. /

 

  梅堂權公行狀 / 權旭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旭이고 자는 景初이며 성은 權氏이고 본관은 安東이다. 居昌縣監을 지낸 權審言의 아들로서, 1556년(명종 11) 醴泉郡 北渚谷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주가 있었으며, 8~9세에 이미 {孝經} {小學}에 통달하여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예절과 몸을 단속하고 행동을 자제하는 법도를 알았다. 일찍이 鶴峯 金誠一의 문하에 들어가 {朱書} 및 {心經}을 공부하였고, 1590년(선조 23) 進士가 되었다. 壬辰倭亂이 발발하여 京城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같은 군의 역峯 李介立 양西 李光胤과 함께 鼎山書堂에 들어가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곧 鄕中에서 檄文을 내어 의병 수백 명을 모아 왜군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丁酉再亂이 일어나자 本道의 대부분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親征을 청하면서 공을 상소의 우두머리로 떠받든 것은 아마도 공의 忠義라야 임금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長興庫奉事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大夫人을 살피고는 단정하게 앉아 {朱書} 및 {心經} 공부에 침잠하니 寢食을 잊을 정도였다. 집 앞에 매화나무를 심어 '梅堂'이라 편액하고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1612년(광해군 4) 9월에 세상을 하직하니, 공의 나이 57세였다. 配는 聞韶 金氏로서, 成均館生員 金明一의 딸이자 鶴峯의 질녀이다./ 通訓大夫承文院判校西溪鄭公行狀 / 鄭彦宏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彦宏이고 자는 汝廓이며 호는 西溪이며 성은 鄭氏이고 본관은 東萊이다. 공은 處士 鄭承祖의 아들로서, 1569년(선조 2) 咸昌縣 利安邨에서 태어났다. 약관의 나이에 壬辰倭亂을 당하여 식구들이 난리를 피하느라 생활이 궁핍하였지만 마음은 늘 편안하게 가졌으니, 이는 평소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은 데 기인한 것이다. 1603년(선조 36) 司馬試에 급제하고, 1606년(선조 39) 式年試에 발탁되어 전후로 學諭 學正博士 承政院注書兼春秋館記事官 成歡道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高城郡守로 있을 때 역적의 모반 소식을 듣고 鄕린의 동지를 규합하여 토벌하려 하자 모두가 공을 義兵將으로 추대하였다. 군대가 鳥嶺을 넘을 즈음 역적의 괴수가 죽고 御駕는 還宮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곧바로 군대를 해산하였다. 京師로 가서 繕工僉正을 제수받고 靑松府使로 나갔으며, 1635년(인조 13)에 承文院判校를 제수받았다. 1636년(인조 14)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田園과 江湖를 유랑하며 峴南 曺友仁 淸風 鄭允穆과 교유하였다. 1640년(인조 18) 세상을 하직하니, 공의 나이 72세였다. /

 

  先考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府君家狀 / 義父 金곤의 家狀이다. 先君의 휘는 곤이고 자는 子珍이며 성은 金氏이고 본관은 禮安이다. 先君께서는 1596년(선조 29)에 태어났으며, 다섯 형제 중 둘째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였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成童의 나이에 經書를 두루 섭렵하였다. 詞章의 학문에 대해서는 크게 힘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文理가 쌓여 문장을 지어냄에 理藻가 함께 갖추어졌다. 누차 鄕試에 응시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40세에 비로소 生員이 되었다. 1648년(인조 26)에 문과에 급제하여 濟用監參奉을 제수받고 다시 宗廟署奉事를 거쳐 成均館典籍 司憲府監察을 맡았으나 귀향하였다. 당시 공은 知天命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八旬이 넘는 老母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였다. 孝友가 남달랐기에 조정에서 특별히 通政付副護軍을 제수하고, 1677년(숙종 3)에는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1678년(숙종 4) 8월에 조용히 세상을 하직하니, 공의 나이 83세였다. 공은 義利를 분별하고 是非를 판단함에 있어 언제나 一劒兩段하는 결연함을 보였기에 일찍이 '劒巖'으로 自號하였다. 配는 淑夫人 豊山 柳氏로서, 柳猛심의 딸이자 謙菴 柳雲龍의 손녀이다./

 

  卷5 / 附錄 : 行狀 / 조카인 金履萬이 쓴 金兌一의 행장이다. 휘는 兌一이고 자는 秋伯이며, 성은 金씨이고 호는 蘆洲이며, 본관은 禮安이다. 고조부 士熙는 軍資監副正을 역임하였고 증조부 胤安은 司僕寺에 증직되었는데 이 때 榮川에서 醴泉 蘆浦로 거주를 옮겼다. 조부 得善은 左承旨에 증직되었고 부친 단은 戶曹參判에 증직되었으니, 三代에 걸쳐 증직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아우 海一이 府尹의 관직을 지냈기 때문이다. 부친 단은 천성이 篤實하고 행동거지가 淳備하여 族黨과 鄕里에서 모두 敬服하였다. 모친 貞夫人 安東 權氏는 사皐公 權克諧의 딸이다. 공은 1637년(인조 15)에 태어났다. 參判公 단은郡 서쪽 花庄里에서 처가살이를 하다가 공의 나이 18세 되던 해에 공을 仲父 곤의 양자로 보냈다. 劒巖公 곤은 늘그막에 과거에 급제하여 僉知中樞에 오른 인물로서, 孝友가 남달랐고 영민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향리에서 두루 명망이 높았다. 義母 淑夫人 풍山 柳氏는 柳猛심의 딸이자 謙菴 柳雲龍의 손녀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었는데, 沈靜하였고 말수가 적고 웃음을 아꼈으니 愼重하기가 어른과 같았다. 향리의 아이들과 어울릴 때면 무익한 놀이는 하지 않았으며,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그어 번번이 글자를 만들어내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서는 형 郡守公 아우 府尹公과 함께 외조부 사皐公 權克諧에게 수학하였다. 9세 때 [靑塚賦]를 지어 山陽의 李구에게 보이자, 李公이 읽고는 "이는 王安石의 詩意를 뒤엎었다. 이 아이의 훗날 성취를 헤아릴 수 없구나[此反王介甫詩意, 是兒異日成就未可量也]"라고 찬탄하였다. 15~6세에 四書三經을 독파하였고 틈틈이 班固와 司馬遷의 역사서 및 제자서를 두루 섭렵하였다. 1660년(현종 원년) 공의 나이 24세에 鄕試에 2등으로 급제하여 國子學諭兼奉常寺副奉事例에 임명되었다가 學錄學正으로 승진하였다. 1664년(현종 5) 博士로써 典籍으로 승진하였고, 또한 司憲府監察로 승진하였으며, 1665년(현종 6) 가을 외직으로 興德縣監을 맡았다. 1666년(현종 7) 봄 휴가를 청하여 집으로 돌아와 모친 권부인의 상제 노릇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1671년(현종 12)에 義母 류부인 역시 돌림병으로 세상을 하직하니 공은 바쁜 와중에도 지극정성으로 상을 치르자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1673년(현종 14) 脫喪하고 곧바로 文臣兼宣傳官을 제수받고 잠시 동안 成歡察訪을 맡기도 하였다. 1674년(현종 15) 봄에 승진하여 大丘判官을 제수받았는데, 그 해 8월 顯宗이 승하하자 공은 조석으로 곡하며 그 슬픔을 다하였다. 1677년(숙종 3) 겨울 兵曹佐郞를 제수받았으며, 1678년(숙종 4) 봄 외직으로 海西의 막료로 文化縣에서 別試를 관장하면서 科場을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그 해 義父 劒巖公의 상을 당하고, 庚申年에 또 부친 參判公의 상을 당하자 禮制를 좇아 슬픔을 다하였다. 10년 사이에 네 분 부모가 모두 세상을 뜨니 공은 극도로 실의한 나머지 더 이상 출세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685년(숙종 11) 봄에 晉州牧使를 제수받았다. 당시 진주 지역은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하며, 强暴하여 법을 두려워하지 않은 자들이 많아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공은 관대하고 공평한 마음으로 다스리니 진주 지역이 점차 평정을 되찾게 되었다. 1687년(숙종 13)에 寧海府使를 제수받았다. 부임하자 고을의 학생들을 모아 藝를 강학하며 일을 나누어 시키니, 寧海의 人士들 대부분이 공에 의해 문화적으로 훈습되었다. 1689년(숙종 15) 봄 肅宗이 영해에 머물러 있던 持憲 李玄逸을 불러 國子司業으로 삼으려 하자 영해부사였던 공이 나서서 李公을 설득하여 進講하게 하였다. 그 해 가을 司憲府掌令으로 승진되었다. 1694년(숙종 20)에 輔德으로써 司諫으로 옮겼으며, 또 司僕寺正을 제수받았다. 名利를 좋아하지 않고, 외직에 있을 때 善政을 많이 베풀었던 공은 1702년(숙종 28) 9월 4일 戌時에 조용히 세상을 하직하니, 이 때 공의 나이 66세였다. 공은 평생 동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니,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홀로 誦讀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 베껴쓴 書冊만 해도 수십 질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일찍이 {周易} 한 부를 베껴 그 속에 담겨있는 消長의 幾微와 進退의 도리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만년에는 특히 {朱書節要}에 沈潛하였고, 海東先賢들의 문집도 두루 섭렵하였다. 또한 {朱子綱目}을 숙독함으로써 古今의 治亂 및 人物의 賢邪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었다. 詞章에 대해서는 그렇게 공력을 쏟지 않았지만 자연히 精鍊되어 典範에 부합하였으니, 즉 인근의 몇몇 군자들과 시편 및 편지를 주고받았다. /

 

  墓碣銘 / 李瑞雨가 쓴 金兌一의 墓碣銘이다. 내가 젊어서 嶺南의 醴泉에 金秋伯이란 자가 있는데 어려서부터 神童으로 불리었다고 들었다. 오래지 않아 秋伯은 과연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로서 京師에 이르니 내가 만날 수 있었다. 당시 秋伯은 아직 젊었으나 老成한 명성이 있었기에 나는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비록 서로 만나기는 드물었지만 마음이 기울기는 얕지 않았다. 오호라! 秋伯은 이미 고인이 되었도다. 그의 맏아들 아무개가 전후로 溪山 아래에서 나에게 묻고는 예를 갖추어 墓碣銘을 청하니, 내 비록 나이가 들고 병든 몸이나 秋伯을 깊이 추념하는 마음에 차마 고사할 수 없었기에 그의 行狀에 근거하여 써내려 가노라. 공은 천부적으로 粹美함을 타고난 데다가 가정의 가르침을 보태고 배움을 충실히 하였다. 어버이를 정성으로 공경하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직분을 다하였다. 젊어서 이미 갖가지 典籍을 두루 섭렵하였고, 명예가 자못 높았으나 항상 편안하고 고요하게 스스로를 지키면서 명리를 쫓지 않았다. 처음은 두각을 나타내었으나 마지막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이를 불만스레 여겼지만 공은 오히려 담담해 하였다. 銘에 적어 이르노라. 어려서 깨우치고 젊어서 통달하니, 늙으막에 존귀하고 늙어서 여유롭네. 부모 섬김에 효도 다하고, 벼슬 맡아서는 헛되이 하지 않았네. 덕은 마음에 뿌리를 두었으니, 부끄러움에 그 낯을 피하네. 살아서든 죽어서든, 명예를 남겼으나 비방은 없어라. 다섯 아들 가업을 계승하니, 그 문채 빛나는도다. 나의 말이 아첨이 아닐진대, 銘文이 茶山에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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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천 출신 권영해, <고래에게는 터미널이 없다>를 출판함...축하합니다.

 

  권영해([지역출판가] 고래에게는 터미널이 없다, 아빠가 육아를 시작한 후 바뀐 것들, 조합의 건강이 농어촌의 미래다) [기사] : ●고래에게는 터미널이 없다(권영해 지음/ 시와 표현/ 1만원)/ "너무 서두르지 마라/ 고래는 절대/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일렁이는 파도의 속살에는/ 날개 달린 포유류가 회유해야 할 항로는 닦여 있지만/ 그가 머무를 정거장은 어디에도 없다"(권영해 '고래에게는 터미널이 없다' 중) 예천 출신 권영해 시인이 세 번째 시집 '고래에게는 터미널이 없다'를 발간했다. 권 시인은 김춘수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해 울산에서 '수요시 포럼' 동인으로 활동하며 16권의 공동 시집 출간에 참여한 바 있다. 시집은 1부 '흔적기관', 2부 '혜국사에 절 한 채 짓기', 3부 '포정의 시론', 4부 '반복은 미덕이 아니다' 등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목련 지다' '세상에서 조금은 기구한 만남' '유사점과 차이점' '바퀴 아래의 생' '살아있는 동안 하게 되는 49가지' '방어진에서 길을 잃다' 등 60편 가까운 작품이 실려 있다. 구모룡 문학평론가는 시인의 표제시에 대해 "고래가 관광의 대상이 되는 현상을 그는 머물 정거장이 없다는 말로써 비판한다. 이같이 시인은 인간을 중심에 두고 사물을 소유하는 방식을 멀리 한다"고 해설했다. 권 시인은 서문에서 "나는 대중을 교화하는 고승의 오묘한 법문이나 명망있는 철학자의 잠언을 흉내내지 못한다. 단지 사람살이의 단편조각들을 가슴 속에 흘러가는 한 문장으로 여과하여 기록할 뿐이다"라고 했다.

 

  ▲ 시집<고래에는 터미널이 없다>. : 권영해 시인이 세 번째 시집 『고래에게는 터미널이 없다』(시와 표현)를 선보였다. 두 번째 시집 『봄은 경력사원』 발표이후 6년만이다. 시집은 1부 <흔적기관> 2부 <혜국사에 절 한 채 짓기>, 3부 <포정의 시론>, 4부 <반복은 미덕이 아니다> 총 4부로 엮었다. 이번 시집에서 권 시인은 자신의 내부를 향한 부단한 절차탁마의 정신과 세상에 대한 풍자를 드러내고 있다. ‘고래 바다 여행선을 타면/그를 꼭 만나야 한다고 기대하지 마라/그건 욕심이다’...‘바다의 까치놀 속을 낙타가 순례하듯/ 오늘도 고래는/ 해무 드리운 사막 위를 신기루처럼 걷고 있다’(시 ‘고래에게는 터미널이 없다’중에서)/ 표제시 ‘고래에게는 터미널이 없다’에 대해 구모룡 문학평론가는 “시인은 모래 위의 신기루와 같은 고래의 존재를 상정하고 바다를 사막과 병치함으로써 사람들이 품은 욕망의 허망함을 두드러지게 전경화하며 인간을 중심에 두고 사물을 소유하는 방식을 멀리한다”고 해설하고 있다. 덧붙여 그는 “권시인의 시는 가능한 일상의 사건 속에서 시적인 것을 찾아 발화해 독자를 억압하지 않고 소소한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평했다. 권영해 시인은 ‘작가의 말’을 통해 “나는 대중을 교화하는 고승의 오묘한 법문이나 명망 있는 철학자의 잠언을 흉내 내지 못한다”며 “단지 사람살이의 단편조각들을 가슴속에 흘러가는 문장으로 여과해 기록할 뿐이니 독자들은 단 것은 단맛대로 쓴 것을 쓴맛대로 음미해 주길 바란다”는 독자들에 대한 바람을 전했다. 권영해 시인은 경북 예천 출신으로 경북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현대시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와 울산시인협회·문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시집으로 『유월에 대파꽃을 따다』, 『봄은 경력사원』이 있다. 현재 <수요시 포럼> 동인으로 현대청운고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노진실 기자 울산매일 20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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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1.620

 

  회룡포(영남일보 CEO아카데미 산우회 예천 용궁 회룡포에서 시산제 가져) [기사] : 영남일보 CEO아카데미 총동창회 회원들로 구성된 산우회(회장 강동주)가 2020년 2월 16일 예천 회룡포 일대에서 노병수 아카데미 원장, 권오춘 총동창회장을 비롯한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업번창과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시산제를 올렸다. 이날 행사에는 이철우 경북도지사, 최교일 국회의원, 김학동 예천군수 등도 자리를 함께 했다. 산우회는 용궁회룡포 일대에서 산행을 마친 뒤 용궁순대축제관으로 이동해 시산제를 지낸 뒤 병산탈춤 공연과 각 기수별 장기자랑 등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행사를 주관한 강동주 회장(10기)은 "오늘 시산제는 매년 초 회원들의 발전을 기원하는 한편 산행을 통해 소통하는 장"이라며 "경자년 새해는 생동감 넘치는 왕성한 활동으로 아카데미 동창들이 큰 성과를 얻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영남일보 CEO아카데미는 총동창회 소속의 양대 동아리인 산우회와 골프회가 활발하게 운영되는 등 명실상부한 지역내 최고 CEO과정으로 평가받고 있다. 3월 10일 제21기 입학식이 예정된 가운데 현재 21기 모집 중이다.(장석원 기자 영남일보 2020-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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