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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803 : 노주집...노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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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 李光庭이 쓴 金兌一의 墓碣銘이다. 銘에 적어 이르노라. 선비가 해야 할 일은 明經이거늘, 항상 궁구하기 어려움을 걱정하도다. 혹 末年이 되어도, 저력을 보이지 않는구나. 마흔에 발탁되었으니, 세상에 그 누가 공과 같겠는가? 대저 공은 경전을 궁구하였지, 과거 급제에 뜻을 두지 않았다네. 그의 앎을 미루어 나라에 베풀고자 하였다네. 집안은 실로 나로 말미암으니, 나라는 어떠한가? 州縣에 거처를 정하니, 백성들 도리를 얻었도다. 늙으막에 臺閣에 오르니, 손수 조치한 바가 없도다. 時勢는 의지와 어그러지니, 마음에 품은 바는 있어도 떨쳐 없애지는 않았네. 나의 신령스러운 거북을 보존하여, 다가올 법도를 생각하도다. 끊임없이 효도를 행하니, 생각이 그 자취를 드러내었네. 事跡을 비석에 기록하여, 미래의 현명한 선비를 바로 잡노라./
輓詞 / 李玄逸이 쓴 金兌一에 대한 輓詞이다. 번잡함을 다스림에 名聲과 功績이 드높고, 악을 바로잡음에 風儀가 꿋꿋하다고 하였다./ 祭文 / 張진이 쓴 제문이다. 諸子書에서 마음을 노닐게 하고 뭇 經典에서 뜻을 얻어, 傳 述 發 明을 시의적절하게 하였다. 步驟가 文雅하여 후생의 모범이 되었다고 하였다. / 又/ 李後榮이 쓴 제문이다. 밖으로는 朴素함을 타고났고 안으로는 精神함을 간직하였다. 품행이 방정하고 돈독하였으며 여가가 있으면 文藝에 종사하여, 일찍부터 명성이 두루 퍼져 鄕貢進士로 빼어났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기를 등한시하여 官途가 좋지 않았으니, 마치 모난 구멍에 둥근 장부처럼 서로 맞지 않아 이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내려왔다. 영남과 호남에서 善政을 베풀어 은혜가 두루 미쳤으며 돈을 겁낼 정도로 청렴하였다. 돌아와서 유유자적하게 지내다가 時運을 틈타 중앙정부로 나아가 持憲 亞諫 등을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에 正色이 조정에 서게 되었으니 세상에서 그를 '鐵面'으로 불렀다 라고 하였다. / 又 / 權萬濟가 쓴 제문이다. 공은 溫精함을 품부받고 孝友가 마음 속 가득하였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스스로 몸을 경계하고 삼가니, 조화롭기가 醇酒와 醴酒 같으며 온화하기가 봄바람과 같다. 얼굴에는 급한 기색이 없고 입으로는 말을 빨리 하지 않았다. 예로부터 "덕행이 있는 자 무엇을 더 보태겠는가?"라고 함이 바로 공을 두고 한 말이다 라고 하였다. / 又 / 丁惟愼이 쓴 제문이다. 經學에 뜻을 두고 문장 또한 저명하였으며,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諫官을 두루 지냈다. 그 淸淨함을 담아 臺閣에 떨치니, 論議가 공평하고도 바르며 進退榮辱이 태연하여 여유가 있었다. 宗族과 鄕黨에서 모두 孝悌로 칭송하였다 라고 하였다. / 又 / 金孝基가 쓴 제문이다. 끊임없이 자손에게 이어지니 바로 詩禮의 家風이다. 아득히 文節을 잇고 곁으로는 柏翁을 거슬러 올라간다. 篤厚함을 타고나니 그릇이 깊고도 위대하다. 총명하고 재주가 넘쳐 무리 가운데 우뚝 빼어나니, 대저 經籍에서 유래하였다 라고 하였다./
又 / 洪大龜가 쓴 제문이다. 공은 어질면서도 공손함을 더한 까닭에 고귀하니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교만하지 않았다. 또한 검소하면서도 청렴함을 지킨 까닭에 빈한하니 일찍이 견지한 바를 바꾸지 않았다. 말은 무리에서 다르기를 구하지 않았고, 행동은 세속에서 고상하기를 얻지 않았다고 하였다. / 又 / 洪相民이 쓴 제문이다. 공의 나이 耳順인데도 기운이 왕성하고 정신이 맑아 항상 말하기를 "斯文이 병들었도다. 해가 오고 달이 가며, 추위와 더위가 다시 바뀌는데도 德儀의 아름다운 자태가 아득하구나. 경전을 부여잡고 무릎 꿇으며 묻는 자를 보기 어려우니,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 끝났도다! 끝났도다! 가슴이 아프구나! 가슴이 아프구나!"라고 슬퍼하였다고 하였다. / 又 / 門生 朴鳳儀 등이 쓴 제문이다. 나아가 임금을 섬김에 충성과 공경을 다하였고, 들어와 어버이를 섬김에 얼굴빛을 살펴 공양함에 어그러짐이 없었다. 자상함으로 백성에게 다가가고 和順함으로 사람들을 대하였다. 鄕黨에서는 그의 信義에 감복하여 감동받았으며, 士林에서는 宗匠으로 추존하여 흥기시키니, 이른바 '필부로써 百世의 師表가 된다'함이 선생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又 / 鄭碩耈가 쓴 제문이다. 공의 家學은 연원에 그 유래가 있다. 멀리는 文節의 遺緖를 계승하였고, 곁으로는 柏爺의 餘韻을 잡았으니, 여섯 형제 가운데 셋이 仕籍에 오르고 한 명은 府尹의 명예를 누려 찬란한 빛이 서로를 비추었다. 다섯 아들 역시 모두 빼어나 문장이 세상에 우뚝하였다고 하였다./ (申載煥)/ *예안김씨자료실 210번 글-叔榮/다시 옮김 / 출처 :禮安(宣城)金氏 인터넷 宗親會 원문보기 글쓴이 : 松河 李翰邦(daum 2009)
노주집(蘆洲集) : 볼륨:5권3책 권제목:卷3 / ...여 사액되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이를테면 禮安의 陶山書院 安東의 虎溪書院 榮川의 伊山書院 醴泉의 鼎山書院 .../ 예천 관련 내용이 수록된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문집상세해제이다.// 노주집 (蘆洲集) | 볼륨:5권3책 권제목:卷4 / ...고 본관은 安東이다. 居昌縣監을 지낸 權審言의 아들로서, 1556년(명종 11) 醴泉郡 北渚谷里에서 태어났다.../ 예천 관련 내용이 수록된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문집상세해제이다.// 노주집 (蘆洲集) | 볼륨:5권3책 권제목:卷5 / ...禮安이다. 고조부 士熙는 軍資監副正을 역임하였고 증조부 胤安은 司僕寺에 증직되었는데 이 때 榮川에서 醴泉 蘆.../ 예천 관련 내용이 수록된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문집상세해제이다.// 노주집 (蘆洲集) | 볼륨:5권3책 권제목:卷5 / ...李瑞雨가 쓴 金兌一의 墓碣銘이다. 내가 젊어서 嶺南의 醴泉에 金秋伯이란 자가 있는데 어려서부터 神童으로 불리.../ 예천 관련 내용이 수록된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문집상세해제이다.//
노주훈 효자비(魯周勛孝子碑) [터] : 예천읍 서본리 흑응산성(黑鷹山城) 서쪽 모퉁이에 있던 비로, 노서린효자비(魯瑞麟孝子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비명(碑銘)은, "고 효자 노서린 증손 주훈지 비(故孝子魯瑞麟曾孫周勛之碑)"였다. 노주훈은 서린(瑞麟)의 증손자로, 3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통역관(通譯官)과 문서(文書)를 맡은 공직자로서 성장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침저녁으로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뵈었다. 주훈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애통함이 매우 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주갑(周甲)이 되는 해인 1758년에 주훈은 63세가 되었다. 이 해 정월 초하루부터 상복(喪服)을 입고 평소의 슬픈 모습을 죽기 전 날까지 하였고, 어느 날부터는 3년 동안 빈소(殯所)를 모시고 가슴을 치면서 슬퍼하며, 정성과 순수한 효도를 하였다. 마침 군수 신경조(郡守申景祖)가 처음 부임하면서 충성과 효도를 권장하며 조상을 위하자고 하였다. 1764년 봄 예천 관리가 올린 장계(狀啓)를 보고 드디어 사람 앞으로 문안(文案)을 올려놓고 마침내 크게 외치면서 탄복하며 말하기를, "주훈의 걸출하고 특이한 행실이 이와 같고 사람의 공론이 이와 같으니 영문(營門)에서는 이를 남들에게 알림으로써 그가 존경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런 유(類)의 일이 사라진다면 안타깝지 아니할까?"라고 하였다. 어느 날, 군수가 수레를 타고 성의 서쪽을 지나 배회하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릴 때 어떤 이가 수레 앞 가로막이 나무에 손을 얹고 경의를 표하면서 비석을 가리키며 묻기를, "이 비석이 주훈의 증조인 효자 노서린(魯瑞麟)의 비석이라면 할아버지와 손자가 동일한 효도일 것인데, 정려문(旌閭門)은 그 손자에게는 없으니 할아버지와 함께 하기가 내키지 않는다면 어찌할 수 없으나, 주훈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 그 분이 실제 행하신 일을 이 비석 밑에 새겨 달고 주자양(朱紫陽)의 서문(序文)과 장확(張確)의 전(傳)도 함께 펼친다면 할아버지와 손자의 행실도 또한 아름답지 아니할까요?"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예천군 관리 김여찬(金麗粲)이 진사 권정옥(進士權正玉)에게 실기(實記)를 부탁하여 기록되었다.(襄陽耆舊錄 1792)
노처녀가(老處女歌) [內房歌辭] : 용문면 죽림리(竹林里)에 전승되어온 규방가사(閨房歌辭)이다. [內容] : 인간세상 사람들아 이내 말삼 들어 보소/ 인간 만물 생긴 후에 남자 부귀 자손갓건만은/ 아내 팔자 억울하여 날갓튼 것 또 인난가/ 백년을 다사려야 삼만육천 날이로다/ 혼자 살면 천년돼고 천년살면 만년살가/ 답답한 우리 부모 가난한 양반이라/ 양반인 채 도울차려 처사가 불민하여/ 집안을 일삼은니 다만한딸 늘거간다./(以下 省略, <郡誌(1988)> 629쪽에 全文 실려 있음)
노천명 시의 전통성 연구(盧天命 詩의 傳統性 硏究) [論文] : 풍양면 청운리 출신인 장영희(張永熙, 憂忘初, 豊壤中, 朝鮮大 國語敎育科 卒業, 韓國敎員大 碩士, 釜山大 國語國文學 博士, 釜山 데레사女高 敎師, 釜山가톨릭大 文學 講師, 文學家)의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국어교육과 1996년 석사학위 논문으로, v,102쪽, 한국교원대학교에서 1996년에 발행하였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강릉대(중앙), 강원대(중앙), 경성대, 계명대(동산), 공주교대, 군산대, 대구교대, 목포대, 서울교대, 서울시립대, 순천대, 원광대, 전북대, 전주교대, 제주교대, 제주대, 창원대, 청주교대, 춘천교대, 충북대, 한국교원대, 홍익대이다.(keris 2003 2005)
노천정(蘆川亭) [亭子] : 감천면 증거리 중미(中山) 남쪽에 있는 정자로, 한양인 노천 조협(蘆川趙俠, 1863-?)의 유덕(遺德)을 추모하여 1956년에 후손들이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 목조 와즙 평가건(木造瓦葺平家建)이다. 현내저수지(縣內貯水地)를 눈앞에 두고 좌우에 매암대(梅岩臺), 화석정(花石亭)의 두 암산(岩山)이 있어 경관이 매우 좋다. 조협(趙俠)은 천성이 청렴하고 봉선사효(奉先事孝)에 독실했으므로 옥천집(玉川集)에 찬양사(讚揚辭)가 실려 있다.(醴泉大觀 1982)
노천정(蘆川亭) [亭子] : 감천면 증거리 중산(中山)마을에 있는 정자로, 한양인 노천 조협(趙悏)을 위해 1956년에 세웠다. 정면 2칸, 측면 2칸, 목조와가 팔작지붕이다.(醴泉鄕校誌 2004)
노천정(蘆川亭) [亭子] : 감천면 증거리 산283번지 소재, 한양인 노천 조협(趙협)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6년에 건립한 정자로, 현내못 옆에 위치하고 있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주위에는 토석담장을 둘렀고, 전면에는 사주문을 세워 출입케 하였다. 평면은 전면 칸에는 마루를 깔고, 후면 칸에는 온돌방을 두었다.(醴泉郡誌 2005)
노천정 : 양경공 병참공파 경북 예천군 감천면 중산리 마을.../ 2009.01.03./ 10세 참의공(형완) 후손 세거지=감천면 중산리 盧川亭(노천정), 花石亭(화석정), 不亦齋(부역재), 放汕處士(방산처사), 三乎處士 <22세放汕公(방산공諱國遠字鳳遠).../ blog.daum.net/hanyangcho/ 晛溪亭(daum 2016)
노천정 : 예천군 감천면 돈산종중 : 팔우헌정, 임천서원, 노천정, 화석정/ 2009.02.14./ blog.daum.net/hanyangcho/ 晛溪亭(daum 2016)
노천정 : 2015년 다우회(茶雨會) 제31차(2/4분기) 정기 모임/ 2015.04.13./ (2/4분기) 정기 모임, 일시 : 4월 11일 토요일 낮 12시), 장소 : 예천군 감천면 증거리 284(노천정), 참석 회원: 12명, 안동 : 권영숙, 류경희, 김경숙, 강병두, 봉화.../ blog.daum.net/nanudang/ 난우당(daum 2016)
노천정 : 예천/ 2010.03.31./ 상리면 도은정(道隱) 하리면 죽일정(竹日) 청수정(淸修) 감천면 노초정(魯焦) 도암대(陶巖臺) 둔암정(鈍巖) 노천정(盧川) 호남정(湖南) 만포정(晩圃) 낙양정사(洛陽精舍.../ blog.daum.net/dd-tksdnffla/ 산울림블로그임다(daum 2016)
노천정 : 양경공 병참공파 경북 예천군 감천면 중산리 마을.../ 2009.01.05./ 10세 참의공(형완) 후손 세거지=감천면 중산리 盧川亭(노천정), 花石亭(화석정), 不亦齋(부역재), 放汕處士(방산처사), 三乎處士 <22세放汕公(방산공諱國遠字鳳遠)유허비.../ cafe.daum.net/daejongwhee/4t67/ 한양조씨 대종회(daum 2016)
노천정 : 선유회 유적비(五老三山仙遊會 遺蹟碑)를 세웠다. 비는 예천군 감천면 증거리 중산 마을 앞 화석정과 노천정 사이에 있다. 현내지(池)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요, 고요히.../ cafe.daum.net/jumamt/P8MM/ 달리는 말(daum 2016)
노천정 : 예천의 자랑 2204 : 권이강 參判 2(祝 공군/독립운동사와 누정록)/ 작성 장병창/ 옥산정 =88/ 오미정 =91/ [상리면] : 도은정 =95/ [하리면] : 죽일정 =101/ 청수정 =104/ [감천면] : 노초정 =109/ 도암대 =112/ 둔암정 =115/ 노천정 =118/ 호남정 =121/ 만포정 =124/ 삼산정 =127/ 낙양정사 =130/ 화석정 =133.../ www.ycg.kr/open.content/ko/participate/free.bulletin (daum 2016)
노천정 : 예천의 자랑 2253 : 권진 右議政 4(祝 장용호. 예천누정록/예천방문 639)/ 작성 장병창/ (道隱亭) = 95// 하리면/ 죽일정(竹日亭) = 101/ 청수정(淸修亭) = 104// 감천면/ 노초정(魯樵亭) = 109/ 도암대(陶巖臺) = 112/ 둔암정(鈍巖亭) = 115/ 노천정(蘆川亭) = 118/ 호남정(湖南亭) = 121/ 만포정(晩圃亭) = 124/ 삼산.../ www.ycg.kr/open.content/ko/participate/free.bulletin (daum 2016)
노초정(魯樵亭) [亭子] : 감천면 포리 429번지 할미성 서남쪽 새터에 있는 정자로, 안동인 노초 권달문(魯樵權達文, 五衛副護軍, 1832-1880)의 유덕(遺德)을 추모하여 1979년 8월 15일에 후손 오창(五昌)이 건립했다. 목조와가 평가건(木造瓦家平家建)이고, 부연(附椽)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 팔작(八作)지붕이다.
노초정(魯樵亭) [亭子] : 감천면 포리에 있는 정자로, 노초 권달문(權達文)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 오창(五昌)이 세웠다.(醴泉鄕校誌 2004)
노초정(魯樵亭) [亭子] : 감천면 포리 429번지 소재, 안동인 권달문(權達文)을 추모하기 위하여 1939년에 건립한 정자이다. 1977년에 중건하였다. 주위에는 방형의 블록담장을 둘렀으며 담장의 좌측에는 일각문을 세워 출입케 하였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어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설치하였다. 기둥은 전면에만 원주를 세웠는데, 기둥의 하부에는 팔각형의 석간주를 세워 전면의 마루는 누마루를 이루게 하였다. 오량가(五樑架)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醴泉郡誌 2005)
노초정(醴泉浦里 魯樵亭) : *위치 : 예천군 감천면 포리 428-2(충효로 1369-14), *연대 : 1977년 중건, *규모 : ‘-’자형 정자 1채, 일각문 1채/ 노초정은 감천면 포리 산자락에 위치하며, 순조 때 호군(護軍)을 역임한 노초 권달문(權達文, 1832-1911)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후손 권오창(權五昌)이 1977년에 지은 정자이다. 처마도리에는 ‘魯樵亭’ 편액이 걸려 있고, 전면 마루간에는 ‘魯樵亭記’ 편액이 걸려 있다.
상량대 밑에는 ‘太歲丁巳七月初二日乙巳申時開基同月初五日戊申申時定礎同月十四日丁巳午時立柱上樑丙坐壬向 應天上之三光 備人間之五福 龜龍’이라고 쓰여 있다. 노초정 뒤 산정에는 권극관(權克寬)을 기리는 사천정(斜川亭)이 있고, 산자락 끝 바위 위에는 산수정기념비(山水亭紀念碑)가 있다. 노초정기에 의하면, 노초는 겸손의 뜻으로 너무 총명함으로 인하여 후회되는 일을 만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순박하고 노둔(魯鈍)함이 낫고, 세상에 나가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농사짓는 초부(樵夫)가 낫다는 뜻에서 안동인 권달문이 호로 삼았다고 한다. 권달문은 호를 노초라고 했는데, 그것을 통해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경서·역사·문학에 능통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학문을 했다고 말하지 못하고, 오직 소학(小學) 일부만 알 따름이다‘라고 할 만큼 겸손하였다. 노초정이 있는 포리는 예천읍과 감천면, 영주 장수면을 연결하는 충효로를 따라 접근하는데, 충효로가 감천면사무소 지역으로 진입하기 전 도로변 마을이다. 노초정은 감천면사무소 입구의 충효로에서 서남측으로 난 마을의 안길을 따라 접근하며, 다시 이 안길에서 북측 경사면을 향해 조성된 마을 골목을 따라 출입하고 있다. 노초정은 대 여섯 채의 이웃 가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웃과 이웃 사이는 시멘트블럭 담장을 쌓아 외부와 선을 그었다. 담장 안은 현재 관리를 하지 않아 잡목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현재 노초정은 마을 중심에 터를 마련하고 동남향을 하고 있으며, ‘-’자형 정자 1채, 일각문 1채로 구성되어 있다. 노초정은 전퇴가 있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의 ‘-’자형의 누정 건축물로, 후면 열의 중앙 마루간을 중심을 좌우에 온돌방이 있다. 전면 툇마루는 전면 기둥 밖으로 마루 끝을 확장한 후 마루 끝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후면 열 마루간은 전면 열 마루처럼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후면에는 머름을 꾸민 두 짝 여닫이 우리판문을 달아 놓았다. 좌우 온돌방은 마루간 쪽에 머름을 꾸미고, 외여닫이문을 달아 출입하고 있으며, 튓마루 쪽에도 머름을 꾸미고 두 짝 여닫이 띠살창문을 달아 외부를 조망하도록 했다. 그리고 우측 온돌방은 측면에 외여닫이창문을 달았다. 천정은 고미반자로 마감했다. 좌우 온돌방의 아궁이는 전면 툇마루 아래에 있으며, 굴뚝은 후면 기단 앞에 있다. 노초정의 기단은 상하 두 단으로 되어 있고, 자연석과 시멘트모르탈로 축조했으며, 기단 위 주초도 자연석주초이다. 하단 기단 위에는 8각형 석주를 세우고, 상부에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상단 위에는 자연석 주초를 놓고 사각기둥을 세웠다. 전면의 원기둥 상부는 직절익공방식을 짜 맞춤을 했으며, 좌우측면과 배면 기둥 상부는 납도리형식을 짜 맞춤을 했다. 가구는 오량이며, 마루간 상부는 연등천장으로 열려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처마 끝은 와구토로 마감했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린 팔작지붕이다. 벽면은 회바름으로 마감했고, 앙토는 개판으로 마감했다. 노초정은 전혀 유지관리를 하지 않고 방치하여 훼손 상태가 심각하다. 따라서 노초정은 주변 환경을 고려한 보존 및 활용, 유지관리계획을 세운 후, 이에 따라 정비 및 활용을 한다면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지속될 것이다.(예천군 건축문화유산 조사연구 2013년, 157-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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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