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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849 : 능인골...능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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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인굴 : 학가산/ 2008.02.29./ (882m) 소재지: 안동시 서후 북후면, 예천 보문면 산행코스: 광흥사 - 천주마을 - 마당바위 - 동학가산성 - 국사봉(정상) - 능인굴 - 애련사 - 광흥사 산행시간: 4시간정도/ cafe.daum.net/dlfwhtk/... 안동껑꺼이 | 댓글 1(daum 2016)
능인굴 : *^^산행예정지-학가산(882m)/ 2010.08.26./ 산행지 학가산(882m) # 안동시 서후면 북후면 예천군 보문면 소재 # 산행코스: 광흥사-천주마을-애련사-능인굴-정상-어풍대-상사바위-당재-천주마을 다녀오신 분.../ cafe.daum.net/ds3kch/IU... HAM & Mt.(daum 2016)
능인굴 : [안동·예천 특집ㅣ학기산 르포] 영남 내륙을 지켜온 정신문화의 산실이자.../ 2016.08.29 | 월간산 | 다음뉴스/ 예천군(보문면)의 경계를 이루는 학가산은 조망만... 보석 같다 하여 아침 욱(旭)자와 정상 절벽 아래 능인굴의 물 수(水)자를 이름 삼아 ‘旭水峰(욱수봉...(daum 2016)
능인굴 : [최원식의 산] 학가산(鶴駕山 해발 870m·안동시·예천군)/ 2015.06.05 | 영남일보/ 산행 길잡이 천주마을~(30분)~애련사~(50분)~능인굴~(5분)~국사봉~(5분)~유선봉~(50분)~신선바위~(1... 서후면과 북후면, 예천군 보문면의 경계를 이루고...(daum 2016)
능인굴 : 학가산 등산대회/ 2006.11.17 | 연합뉴스 | 다음뉴스/ 서후면과 북후면, 풍산읍, 예천군 보문면 등 4개 읍면에 걸쳐 있으며 나라의 제사를 올렸던 국사봉(해발 882m)과 신라 신문왕 때 능인대사가 수행과 포교를 했던 능인굴, 청음 김상헌이 청나...(daum 2016)
능인굴 석탑(能仁窟石塔), 탑(塔) [塔] : 보문면 산성리(山城里) 학가산(鶴駕山)의 능인굴(能仁窟) 앞에 있는 탑이다. [傳說] : 신라 때 학덕이 매우 높은 능인이라는 스님이 속된 세상과 아주 인연을 끊고 학가산 속에 있는 조그만 굴속에서 수도를 하고 있은 지 오래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주시 부석사(榮州市浮石寺)의 스님 수천 명이 손에 돌멩이 한 개씩을 쥐고, 능인(能仁)이 수도하고 있는 이 굴 앞으로 오는 것은 보았는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떠난다고 인사를 하러왔기에 살펴보니, 자기가 수도하고 있던 굴 앞에 커다란 석탑이 쌓여졌더라고 한다.
능인노동야학 : 能仁勞夜 開設(醴泉)/ 신문명: 동아일보 1926년/ 날짜: 1926-12-18/ 분류: 연속간행물 > 신문 > 동아일보/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 신문자료/ 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能仁勞夜開設(醴泉)/ 발행년월일 1926-12-18/ 발행구분 무/ 면수 04/ 단수 03/ 표제어 야학(夜學)//
능인학원(能仁學院) [터] : 1921-1927, 1) 예천불교노동야학(醴泉佛敎勞動夜學)으로 출발 : 3.1운동이 일어난 후 우리나라에서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민족 교육이었다. 예천에서도 보통학교(普通學校)에 입학하지도 못하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아동들을 안타깝게 생각한 청년들이 노동야학회(勞動夜學會)를 설립코자 고심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예천 청년들은 1921년 4월에 예천문화단(醴泉文化團)을 조직하고, 동아일보 예천분국(東亞日報醴泉分局)의 후원을 얻어 여러 가지 종류의 소인극(素人劇)을 만들어 여러 곳에 순회 공연하여 이의 수입금 전부를 이 회의 학비에 쓰고자 열심히 연습을 하였다.
오국영(吳國泳), 장동호(張東濩), 정종덕(鄭鍾德), 황철수(黃哲洙), 박경한(朴景漢), 이재덕(李載德), 최경호(崔京浩), 조석암(趙石岩), 황병구(黃柄九), 정용운(鄭龍雲)으로 구성된 예천문화단원들은 1921년 5월 10일에 예천을 출발하여 안동, 예안, 영양, 영해(寧海), 영덕, 청하(淸河), 흥해(興海), 영일(延日), 경주, 영천, 대구, 왜관, 성주, 김천, 선산, 의성을 순회하며 공연하였는데, 특히 구습(舊習)을 타파하고, 신사상을 고취함을 목적으로 한, '누구의 허물, 고목봉춘 고학생(枯木逢春苦學生)'이라는 예제(藝題)의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었고, 가는 곳마다 만장의 관중이 있었다. 1921년 6월 10일에 안강(安康)에 도착했을 때는 수야(水野) 정무총감(政務總監)이 이곳을 순시한다 하여 경찰이 집회를 금지시키므로 같은 달 15일까지 무료 유숙(無聊留宿)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1921년 7월 5일에야 예정된 순회 공연을 마치고 예천으로 돌아와 즉시 예천불교당(醴泉佛敎堂)과 연합하여 예천노동야학회(醴泉勞動夜學會)를 준비하였고, 같은 해 8월 8일 오후 9시에는 그 불교당 내에서 개학식을 거행하였는데, 정환수(鄭煥樹)의 간단한 식사(式辭)와 이상우(李尙雨)의 취지 설명이 있은 후에 내빈 이돈영(李敦英)의 축사가 있었다. 명칭은 예천불교노동야학회(醴泉佛敎勞動夜學會)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개학된 이 야학회는 매일 밤 2시간씩 조선어(朝鮮語), 한문(漢文), 산술(算術), 작문(作文), 일본어(日本語) 등을 가르쳤는데, 주관자들의 헌신적 활동에 의하여 그 내용이 점차 충실해지자 개교 6개월 후인 1921년 12월 11일 경에는 학생이 갑을 2반(甲乙二班)으로 나누어 100여 명에 이르렀고, 입학 지원자가 계속 끊어지지 않으나, 교실이 협소하여 어쩔 수 없는 형편이었다. 교사는 곽기종(郭琪宗), 정종덕(鄭鍾德), 장동호(張東濩), 정인길(鄭寅吉), 김상기(金相起) 등이 무급(無給)으로 순차 교대하여 가르쳤다. 1922년 3월 15일에는 제1회 졸업생을 내보내게 되었고, 신입생 모집 때는 다시 병반(丙班)을 설치하여 3학급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재정 곤란과 혹서(酷暑), 농가의 분망(奔忙) 등으로 1922년 6월 27일부터 휴교를 하고 말았다. 2) 불교유일야학회(佛敎唯一夜學會, 唯一學院)로 다시 개학 : 예천불교노동야학회(醴泉佛敎勞動夜學會)가 문을 닫은 후에도 포교사(布敎師) 곽기종(郭琪宗)이 다시 불교청년회(佛敎靑年會)를 조직하여 교리를 기르치는 동시에 이 야학을 불교청년회의 사업으로 영구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10월 12일에 예천면 노하동(醴泉面路下洞)에서 다시 개학하여 그 명칭을 불교유일야학회(佛敎唯一夜學會, 唯一學院)라 개칭하고, 학생은 100여 명에 교사는 곽기종(郭琪宗), 정종덕(鄭鍾德), 김상기(金相起), 장동호(張東濩), 안석연(安錫淵), 배형재(裵炯載) 등이 무보수(無報酬)로 가르쳤다. 1924년 1월 13일 오후 8시에는 불교유일학원(佛敎唯一學院) 주최로 석가(釋迦)의 성도 기념(成道紀念)으로 '미(迷)의 각(覺)'이라는 예제(藝題)로 연극을 공연하였는데, 관중이 800명에 이르러 성황을 이루었다.
이 불교유일학원(佛敎唯一學院)도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재정 곤란을 당하여 완전한 교실도 세우지 못하고 월급 교사도 초빙하지 못하여, 원장 김석희(金碩熙), 학감 정종덕(鄭鍾德) 등이 이에 대한 선후책을 강구 중이다가 김룡본말사(金龍本末寺)에 이 사유를 진정하여 이 사찰 공동 사업비 중에 2천원을 얻어 1924년 5월 14일 예천면 노하동(醴泉面路下洞)에 13칸의 교실을 신축 중이고 여러 가지 비품을 확장하고 있는데, 학생은 남자가 31명, 여자가 29명이었다.
그 후 교사(校舍)가 완비되어지자, 1925년 3월에는 학생수도 100여 명으로 늘어났는데, 주간(晝間)에는 여직원으로 하여금 유치 아동(幼稚兒童)을 가르치고, 야간에는 남자 교원이 일반 노동 청년에게 보통학과(普通學科)를 가르쳤다. 교원의 수는 남녀 각 12명이었다. 3) 예천 능인학원(醴泉能仁學院)으로 개칭 : 불교유일학원(佛敎唯一學院)이 1926년 5월에 도지사의 인가를 받아 예천군 내에 있는 용문사(龍門寺), 명봉사(鳴鳳寺) 등 6개 사찰의 공동 경영이 되어 다시 예천능인학원(醴泉能仁學院)이라 개칭하였다. 그러나 노동자 야학(勞動者夜學)도 없을 뿐 아니라 단순한 유치원 사업(幼稚園事業, 園兒 50餘 名)을 하는 중이었는데, 그 후 경영자 되는 각 사찰의 의견이 항상 일치되지 않아 학원의 앞날을 낙관하기 어려웠다. 1926년 7월 24일에 예천불교진흥회(醴泉佛敎振興會, 會長 金碩熙)와 군내 사찰 대표 등 20여 명이 능인학원 내에서 연합회의를 열고 능인학원의 존폐(存廢)에 대하여 토의한 바 있었으나, 갑론을박적(甲論乙駁的)으로 결국 아무런 결의 없이 폐회하였고, 다음날 25일에는 군내 6개 사찰 대표 14명이 모여 군내 사찰연합회(寺刹聯合會)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능인학원 직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원장(院長) 최취허(崔就墟), 원감(院監) 최성환(崔成煥), 학감(學監) 서만준(徐萬俊), 교사(敎師) 김숙영(金淑英), 학무위원(學務委員) 황학수(黃學洙) 외 4명이다. 이 능인학원이 군내 6개 사찰의 공동 경영이라고는 하나, 그 경비의 대부분이 용문, 명봉 양사(兩寺)에서 나오는 바, 여러 가지 난관이 많아 학원 당국자로서는 여간 곤란이 아니던 바, 1926년 8월 28일에는 용문사 주지 최용명(崔龍鳴)의 명의로 "학원 경영에 용문사는 탈퇴한다."라고 하며, "1926년 9월 5일까지 각 사찰이 어떤 회답이 없으면 학원 폐지계(廢止屆)를 당국에 제출하겠다."라는 성명서를 군내 사찰연합회(寺刹聯合會)와 6개 사찰 측에 발송하였으므로 연합회 측에서는 군내 각 사찰이 합의한 후가 아니면 회답할 수 없다 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9월 상순 김룡사본말사(金龍寺本末寺) 임시총회 때 원만히 해결되는 듯 하더니, 그 후 1926년 9월 30일 군내 사찰연합회의(邑內 佛敎堂)를 열 때 다시 원만치 못하여서 같은 해 10월 2일 용문사 측에서는 경영자 대표 최용명(崔龍鳴) 명의로 학감(學監)과 교사(敎師)에게 사직 권고서(辭職勸告書)를 발송한 다음 날 3일부로 면직 처분서(免職處分書)를 배송(拜送)하고, 다음날 4일에는 역시 전기(前記) 최용명(崔龍鳴) 명의로 아동 학부형에게 휴학 통지서(休學通知書)를 발송함과 동시 당일부터 아동을 귀가시켜 휴교하려 하였다. 이에 대하여 명봉사(鳴鳳寺) 측에서는 평소 용문사(龍門寺)와 사이가 좋지 못하던 차에 더욱 감정이 높아져 용문사 측에서 전기(前記)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은 원장(院長)과 원감(院監)을 무시한 것이고, 이 때까지 경비의 태반을 지출하는 명봉사와 용문사 양사(兩寺)의 동의가 없이 이루어진 월권 행위라 하여 반항하였다. 또한 원장 최취허(崔就墟)는 같은 달 4일부로 면직 처분서(免職處分書) 등을 용문사에 되돌려 보냈으나, 용문사 측에서는 원장을 계속 부인(否認)하면서 서류를 받지 않고, 또 월권적행위가 아니라 하였다.
또 학감(學監) 서만준(徐萬俊)은 이르기를, "여하튼 사직은 하겠으나, 부정당한 처분에는 결코 굴복할 수 없고, 또 학감(學監) 1명으로 인하여, 별로 잘못이 없는 여교사 김숙영(金淑英)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4) 능인노동야학(能仁勞動夜學)의 개설 : 능인학원(能仁學院)은 재단측의 분규에도 학원 당사자들의 노력으로 계속되어 1926년 12월 6일부터는 노동야학(勞動夜學)을 개설(開設)하고 매일 밤 2시간씩 가르쳤는데, 1926학년도에는 특히 노동자를 위하여 수업료를 받지 않았다. 5) 능인학원(能仁學院)의 폐지 : 능인학원을 경영하던 예천군 내의 6개 사찰은 모두 문경군 산북면 김룡사(聞慶郡山北面金龍寺)의 말사(末寺)였다. 김룡사는 소속 말사로 25개 사(寺)를 갖고 있고, 막대한 재산과 많은 승려를 가진 조선 30본산(本山) 중 유명한 대찰(大刹)이었다. 예천능인학원(醴泉能仁學院)의 경영 사찰들 간의 분규가 계속되자, 김룡본말사(金龍本末寺)에서는 1927년 3월 2일부터 3일 간 김룡사 내에서 이 본말사(本末寺) 25개사(個寺) 총회를 열고 능인학원을 경영 관계상 폐지할 것을 결의하였다.
능인학원 : 能仁學院의 前途가 憂慮? 龍門寺 脫退로(醴泉)/ 신문명: 동아일보 1926년/ 날짜: 1926-09-10/ 분류: 연속간행물 > 신문 > 동아일보/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 신문자료/ 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能仁學院의 前途가 憂慮? 龍門寺 脫退로(醴泉)/ 발행년월일 1926-09-10/ 발행구분 무/ 면수 04/ 단수 02/ 표제어 강습소․학원//
능인학원 : 龍門寺 脫退는 其實 校長 排斥, 何如튼 能仁校 存廢問題/ 신문명: 동아일보 1926년/ 날짜: 1926-10-03/ 분류: 연속간행물 > 신문 > 동아일보/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 신문자료/ 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龍門寺脫退는 其實校長排斥, 何如튼 能仁校存廢問題/ 발행년월일 1926-10-03/ 발행구분 무/ 면수 04/ 단수 08/ 표제어 능인학교(能仁學校, 醴泉)//
능인학원 : 職員 陶汰와 休校로 龍門 嗚鳳 兩寺益 葛藤, 醴泉 能仁學校 事件 後報/ 신문명: 동아일보 1926년/ 날짜: 1926-10-08/ 분류: 연속간행물 > 신문 > 동아일보/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 신문자료/ 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職員陶汰와 休校로 龍門 嗚鳳兩寺益葛藤, 醴泉能仁學校事件後報/ 발행년월일 1926-10-08/ 발행구분 무/ 면수 04/ 단수 07/ 표제어 능인학교(能仁學校, 醴泉)//
능인학원 : 能仁學院(醴泉)/ 신문명: 동아일보 1926년/ 날짜: 1926-10-24/ 분류: 연속간행물 > 신문 > 동아일보/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 신문자료/ 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能仁學院(醴泉)/ 발행년월일 1926-10-24/ 발행구분 무/면수 04/ 단수 04/ 표제어 강습소․학원//
능인학원 : 能仁學院 開校? 日字는 尙未定(醴泉)/ 신문명: 동아일보 1927년/ 날짜: 1927-01-24/ 분류: 연속간행물 > 신문 > 동아일보/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 신문자료/ 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能仁學院 開校? 日字는 尙未定(醴泉)/ 발행년월일 1927-01-24/ 발행구분 무/ 면수 04/ 단수 03/ 표제어 강습소․학원//
능천 : →아릇마
능천리(醴泉 龍門 能川 메주, 간장, 된장 名品化한다) [記事] : 예로부터 예천군 용문면 능천리는 ‘메주마을’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전통방식으로 메주를 띄우고, 기후, 토양 등 자연 환경이 전통 메주를 생산하는데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용문 능천 메주마을은 소백산 자락 300m에 위치해 일교차가 크고, 토양이 비옥하며 배수가 잘돼 잡곡을 재배하기에 안성맞춤인 지역이다. 그래서 조선시대부터 이 지역 대부분 농가는 잡곡을 재배해 왔다. 현재도 전체 45농가 가운데 35농가가 백태와 서목태, 울콩 등 콩류와 수수, 율무 등의 친환경 농산물을 짓고 있다. 능천 ‘메주’ 만드는 방법은 다른 지역보다 2~3배 이상 ‘품’ 과 ‘정성’이 들어간다. 전통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이곳 메주마을은 메주의 주재료가 되는 콩의 선택도 깐깐하다. 능천리에서 친환경으로 재배된 콩만 고집하고, 그 중에서도 최상급으로만 메주를 띄운다. 이 마을의 메주 띄우기와 된장 담그는 방식은 독특하다. 먼저 콩을 무쇠 가마솥에 넣고 장작불을 피워 은은한 향이 날 때까지 푹 삶는다. 이어 재래식 온돌방으로 옮겨 한 달 가량 잘 말린다. 마지막으로 장독에 말린 메주와 숯, 고추, 대추, 음나무 등을 이 마을에만 전해오는 비법에 따라 함께 넣고 보름간 익히는 방식을 고수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만든 메주와 된장, 간장 맛은 ‘일품’이다. 능천 메주가 이렇게 어려운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지리적 특성과 유교적인 학맥과 깊은 관련이 있다. 능천리는 평야가 넓고 산세가 수려해 조선시대 10승지 가운데 한 곳으로 지정될 만큼 우리나라의 명승지로 이름이 나 있다. 이런 까닭에 이곳에서는 ‘대동운부국온’을 남긴 초간 권문해 선생을 비롯한 남야 박손경 선생, 정난공 박종린 선생 등 대유학자가 많이 탄생했고, 자연스럽게 전통 유교 음식 문화가 발달돼 왔으며, 종가를 중심으로 대대로 그 비법이 전수된 영향으로 보인다. 이에 예천군은 용문 능천 메주의 ‘명품화’에 나선다. 5,000만원의 사업비를 투입, 작업장을 새로 짓고 메주의 생산과 가공, 판매 등을 전문화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또 전문 컨설팅 기관에 의뢰해 소비자들에게 맞는 제품을 개발하고 주기적으로 경영, 마케팅 등의 컨설팅을 지원한다. 군 관계자는 “이 사업이 완료되면 농가에서는 농산물의 안정적인 판로 확보는 물론 농한기 일자리 창출과 농산물의 명품화로 고소득 기대된다.”고 말했다.(醴泉뉴스 2012년 07월 05일)
능천리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능천리 [能川里, Neungcheon-ri]/ 2016.07.23./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에 있는 리(里)이다. <... 능천리 마을이 산 밑에 자리잡고 있으며 방구지, 죽림지가.../ blog.naver.com/hmi0419/ 세상의 모든 이야기..(daum 2016)
능천리 :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사람 "용문면 손지영 씨"/ 2006.04.10./ 사 경을 헤메고 있는 최지우(용문면 능천리) 양과 교통사고로 한 쪽 다리가 절단된 체 수술비가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던 최상두(용문면 능천리)에게 도움을 준 일이다.../ blog.daum.net/ps9350/ 내고향 예천 사랑(daum 2016)
능천리 : [예천] 표절사(表節祠)/ 2016.05.26./ 날아와서, ‘고려충(高麗忠)’이라고 3번 울었다고 합니다. 이후 아들 전과 손자 두도 자결하여 절의를 지켰습니다. 부근 용문면 능천리 능내 동쪽 언덕에 김저의 묘가.../ blog.naver.com/ohmark/ 여행은 행복이다(daum 2016)
능천리 : 십승지 산행 예천 금당실을 찾아서....첫번째 이야기/ 2012.09.26./ 마을 입구 우측에 새로 짓는 절 입구... 입구의 소나무가 인상적입니다 예천군 용문면 능천리 윗능내 마을 마을 앞에서 우측으로 오르면서 망월봉 갈림길을 만납니다. 이.../ blog.daum.net/pbw65/ 사중사(朴 倍雨)의 ..(daum 2016)
능천리 : 한국사찰(韓國寺刹) 편액(扁額) 사진모음(2)/ 2013.06.24./ 김룡사 -초정 권창륜(艸丁 權昌倫)書- 1943~ 예천 용문면 능천리(국제 서법연합회 한국본부 이사장) 예천군은 용문면 능천리에 ‘전통서예체험관’을 건립. 초정 선생은.../ blog.daum.net/missoro/ 푸른 하늘(daum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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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