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제목예천855:다바우못...다산정약용의...
작성자장병창 @ 2020.03.28 06:18:41

  도청신도시 예천 855 : 다바우못...다산 정약용의...

---

 

  다바우못, 다암지(多岩池), 샘못 [못] : 지보면 어신리 다바우(多岩) 남쪽에 있는 저수지로, 저수량은 54,000ton이다. [傳說] : 옛날 어느 두 사람이 술이 취해서 걸어가다가 한 사람이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사람이 죽고 난 후로는 못의 물이 가물지 않고, 늘 맑은 물이 고인다. 그래서 다바우 마을 사람들이 이 못을 샘못이라고 한다.

 

  다발성 경화증(多發性 硬化症(M.S)) [學術저널] : 예천읍 우계리 출신인 박충서(朴忠緖, 1926- , 嶺南大 敎授)의 논문으로, 의약계사(醫藥係社)에서 1960년에 발행한 <종합의학(綜合醫學)> Vol.5 No.12 45-53쪽(9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keris 2006)

 

  다발성 정신염의 치료(多發性 精神炎의 治療) [學術저널] : 예천읍 우계리 출신인 박충서(朴忠緖, 1926- , 嶺南大 敎授)의 논문으로, 중앙의학사(中央醫學社)에서 1968년에 발행한 <중앙의학(中央醫學 =The korean Central Journal of Medicine)> Vol.15 No.5 383-384쪽(2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keris 2006)

 

  다발성정신염의 치료(多發性精神炎의 治療) [學術저널] : 예천읍 우계리 출신 박충서(朴忠緖, 1926- , 醴泉公立普通學校 卒業, 嶺南大 敎授)의 논문으로, 中央醫學社에서 1968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9)

 

  다변수 통계법을 이용한 조리 식품의 관능 특성 연구(多變數 統計法을 利用한 調理 食品의 官能 特性 硏究 =Application of Multivariate Statistics for Characterization of Sensory Properties in Pre-Cooked Foods) [學術저널] : 유천면 화지리 출신인 윤희남(1957- , 미주리大 食品工學 博士, 第一製糖 食品硏 硏究委員, 同 常務)의 논문으로, 한국식품과학회에서 1991년에 발행한 <한국식품과학회지> Vol.23 No.6 711-716쪽(6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서울여대(중앙), 연세대, 전주대(학술정보관)이다.(keris 2003 2005)

 

  다보탑(多寶塔(五川年의 힘 2)) [冊] : 대구 MBC의 저서로, 이른아침에서 2004년 2월 27일에 발행하였다. 153쪽에 “...해인사 길상탑 개성 불일사 5층석탑 예천 개심사지 5층석탑 대구 동화사 금당암 3층석탑 남양주 수...”가 수록되어 있고, 156쪽에 “...유일한 다각다층탑. 국보 제48호. 예천 개심사지5층석탑(1010년, 현종 1) 상층 기단 위...”가 수록되어 있다.(http//book.daum.net 2006)

 

  다보탑(多寶塔(五千年의 힘 2)) [韓國史書] : 대구 MBC의 저서로, 186쪽, 규격外, 이른아침에서 2004년 2월 27일에 발행하였다. 153쪽에 “ ..해인사 길상탑, 개성 불일사 5층석탑, 예천 개심사지 5층석탑, 대구 동화사 금당암 3층석탑, 남양주 수종사 8각5층석탑, 공주 대통사지 목탑, 보은 법주사 5층목탑, 익산 미륵사지 석탑, 구례 화엄사 4사자3층석탑, 화순 쌍봉사 4층목탑, 경주석장사지 전탑, 분황사 석탑, 황룡사지 9층목탑, 사천왕사지 목탑, 감은사지 3층석탑, 망덕사지 목탑, 고선사지 3층.. ”, 156쪽에 “ ..유일한 다각다층탑. 국보 제48호. 예천 개심사지5층석탑(1010년, 현종 1) 상층 기단 위에 연꽃무늬의 굄돌을 설치한 석탑. 보물 제53호. 장풍 현화사지 7층석탑 (1020년, 현종 11) 균형감을 주는 탑신에 연꽃과 불상을 정교하게 새긴 석탑. 북한 국보 제41호. 제천 사자빈신사지9층석탑(1022년, 현종 ..”이 수록되어 있다.(daum 2008)

 

  다분산 고분자의 점탄성에 대한 분자 이론(多分散 高分子의 점탄性에 對한 分子 理論) [論文] : 예천 출신인 정인재(鄭寅載, 1942- , 韓國科學技術院 敎授) 등의 논문으로, 한국고분자학회에서 1989년에 발행한 <폴리머> 13권 5호 392-404쪽(13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가톨릭대(성심), 서강대, 서울대(중앙), 서울여대, 연세대, 중앙대(제1캠퍼스)이다.(keris 2003)

 

  다분산성이 신형 고분자의 점탄성에 미치는 영향(다분산성이 新型 高分子의 점탄성에 미치는 影響 : 1. 이성분 블랜드의 分子 모델) [論文] : 예천 출신인 정인재(鄭寅載, 1942- , 韓國科學技術院 敎授) 등의 논문으로, 한국고분자학회에서 1987년에 발행한 <폴리머> 11권 1호 34-41쪽(8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가톨릭대(성심), 서강대, 서울대(중앙), 서울여대(중앙), 연세대, 중앙대(제1캠퍼스)이다.(keris 2003)

 

  WTO TRIPs 협정과 국내 실시에 대한 비판적 검토(WTO TRIPs 協定과 國內 實施에 對한 批判的 檢討 : 知的財産權法의 觀點에서) [論文] : 예천 출신인 윤선희(尹宣熙, 1957- , 漢陽大 副敎授)의 논문으로, 세창출판사에서 1996년에 발행한 <계간 창작과 권리> 5호 86-108쪽(23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keris 2003)

 

  Double Cavity 주위의 비정상 초음속 유동 수치 해석(Double Cavity 周圍의 非正常 超音速 流動 數値 解析) [學術저널] : 호명면 출신 노오현(盧五鉉, 1939- , 서울大 敎授) 등의 논문으로, 한국항공우주학회에서 1994년에 출판한 <한국항공우주학회지> 22권 5호 5010-5019쪽(10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서울대(중앙)이다.(keris 2003)

 

  다비드((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Louis David) [冊] : 하리면 우곡리 133번지 출신인 박서보(朴栖甫, 1931- , 弘益大 敎授) 등(David, Jacques-Louis, 오광수)의 저서로, 63쪽, 전부채색삽도, 27cm, 서울 재원에서 2004년에 발행한 <Jaewon art book> 16권에 수록되어 있다. 다비드의 작품집이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건국대(충주), 경기대(수원), 경원대, 국민대, 명지대(서울), 상명대(천안), 서울대(중앙), 세종대, 연세대, 전남대, 한국교원대, 한남대, 한양대(안산), 홍익대(서울, 조치원)이다.(keris 2006)

 

  다비들 [들] : 지보면 신풍리(新豊里) 방아골 앞에 있는 들이다.

 

  다산 정약용과 고향 예천(茶山 丁若鏞과 故鄕 醴泉) [記事] : 보문면 출신인 안승욱(韓國道路公社 勤務)의 기사로, 예천문학회(會長 金敎容)에서 2001년에 발행한 <예천문학(醴泉文學)> 24호 가을호 191-196쪽(6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茶山 丁若鏞 流配地에서 만나다) [冊] : 박석무의 저서로, 한길사에서 2003년 10월 15일에 발행하였다. 113쪽에 "...왔다. 아버지가 경상도의 예천 군수로 전임된 것이다. 경자년(1780) 2월 어느 봄날 열..."이 수록되어 있고, 83쪽에 "정재원은... 화순(和順) 현감, 경상도의 예천(醴泉) 군수, 울산 도호부사, 진주(晋州) 목사 등을 지내..."가 수록되어 있고, 116쪽에 "...정재원은 화순 현감에서 예천 군수로 승진해 봄에서 겨울까지130___ 내 의지를 밝히다..."가 수록되어 있다. 377쪽에 "...나는 경자년(1780) 가을에 예천 군청의 관사에서 낙태를 한 때부터 시작하여 신..."이 수록되어 있고, 518쪽에 "...되었다. 1780(정조 4, 19세) 예천 현감으로 있는 아버지를 찾아뵙고 반학정에..."가 수록되어 있다.(http//book.daum.net 2006)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茶山 丁若鏞 流配地에서 만나다) [冊] : 박석무의 저서로, 558쪽, B5, 한길사에서 2003년 10월 15일에 발행하였다. 377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나는 경자년(1780) 가을에 예천군청의 관사에서 낙태를 한 때부터 시작하여 신축년(1781) 7월에 아내가 애를 밴채 학질을 앓다가 팔삭둥이 딸 하나를 낳아 4일 만에 죽었는데 이름도 짓지 못한 채 와서(瓦署)의 언덕배기에다 묻었다. 그 다음은 무장과 문장을 낳아 다행히 키워냈다. 그 다음에는 구장(懼...”(daum 2007)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茶山 丁若鏞 流配地에서 만나다) [東洋哲學書] : 박석무의 저서로, 558쪽, B5, 한길사에서 2003년 10월 15일에 발행하였다. 113쪽에 “ ..왔다. 아버지가 경상도의 예천 군수로 전임된 것이다. 경자년(1780) 2월 어느 봄날 열아홉 살인 다산은 장인 홍화보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재직 중인 진주를 거쳐 예천으로 가려고 아내와 함께 길을 떠났다. 그는 특히 진사 조익현과 헤어지는 것을 무척 애석해했다. 얼마 전만 해도 화순에서는 다산의 흔적을 찾..”, 83쪽에 “ ..화순(和順) 현감, 경상도의 예천(醴泉) 군수, 울산도호부사, 진주(晋州) 목사 등을 지내고 진주의 임소에서 예순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다산의 중부(仲父) 정재운은 자신의 중부에게 입양되었고 진사과에 장원하여 여러 고을의 원님을 지내고 교하(交河) 군수에 이른다. 세월이 그 집안에 벼슬자리를 얻을 만한 기..”, 116쪽에 “ ..정재원은 화순 현감에서 예천 군수로 승진해 봄에서 겨울까지...”, 377쪽에 “ ..나는 경자년(1780) 가을에 예천 군청의 관사에서 낙태를 한 때부터 시작하여 신축년(1781) 7월에 아내가 애를 밴채 학질을 앓다가 팔삭둥이 딸 하나를 낳아 4일 만에 죽었는데 이름도 짓지 못한 채 와서(瓦署)의 언덕배기에다 묻었다. 그 다음은 무장과 문장을 낳아 다행히 키워냈다. 그 다음에는 구장(懼...”, 518쪽에 “ ..되었다. 1780(정조 4, 19세) 예천 현감으로 있는 아버지를 찾아뵙고 반학정에서 글을 읽으며「반학정기」를 지었다. 촉석루를 유람하며「진주의기사기」를 지었다. 겨울에 아버지가 어사의 모함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로 돌아오게 되어 모시고 왔다. 1781(정조 5, 20세) 서울에 살면서 과시(科詩)를 익혔..”이 수록되어 있다.(daum 2008)

 

  다산 정약용의 사상과 철학(茶山 丁若鏞의 思想과 哲學) [大學報告書] : 레포트월드에서 2008년 1월 9일에 발행하였다. 10쪽 분량이다. [목차] : 1. 다산의 생애/ 2. 다산의 사상 및 철학/ 3. 다산의 저술활동/ 4. 다산 정약용에 관한 소고 / [본문 요약] : 1. 다산의 생애 : 정약용(1762~1836) 선생은 당쟁의 희생양이 되어 귀양생활(1801~1818년 /40~57세)을 했는데, 그는 끝까지 좌절하지 않았고 실의에 빠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단한 귀양살이에도 늘 자신을 채찍질하며 열성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낮을 짧다 여기며 밤새우고 열심히 공부했던 그의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벼슬길을 차단당하고 온갖 수모와 고난을 무릅쓰고, 오히려 이제야 겨를을 얻었다고 즐거워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다산은 스스로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제법 문자를 알았다”고 회고했다. 9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10세부터 과예(課藝)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침 아버지가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 경전(經典)과 사서(史書), 고문(古文)을 매우 부지런히 읽었으며, 또 시율(詩律)을 잘 짓는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이 무렵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을 만들었다(현재 전하지 않음). 삼미(三眉)의 뜻은 유년시절에 마마를 앓아 눈썹에 마마 자국이 있어 눈썹이 셋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다산은 15세에 홍화보의 딸(풍산 홍씨)과 결혼했다. 마침 아버지가 호조좌랑으로 다시 벼슬에 나가게 되어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살게 되었다. 이것은 지방수재에 불과했던 그에게 세상과 학문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다산은 이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때 서울에는 이가환(李家煥) 공이 문학으로써 일세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자형인 이승훈(李承薰)도 또한 몸을 가다듬고 학문에 힘쓰고 있었는데, 모두가 성호 이익(星湖 李瀷)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약용도 성호 선생이 남기신 글들을 얻어 보게 되자 흔연히 학문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16세 때(정조 원년, 丁酉, 1777)에 아버지가 화순(和順)현감으로 나가게 됐다. 다산도 따라가서 그 이듬해에는 동림사(東林寺)에서 독서를 했다(〈동림사독서기〉 참조). 19세(庚子年, 1780) 봄에는 아버지께서 예천(醴泉)군수로 옮겼다. 다산은 진주(晉州)에 들러 노닐다가 예천으로 가서 쓰러져 가는 관청집에서 공부를 했다. 21세(壬寅年, 1782) 가을에는 봉은사에 머물면서 경의과(經義科)의 과목을 공부했다. 22세(癸卯年, 1783) 봄에는 경의과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됐다.(daum 2008)

 

  다산 정약용의 생애 그리고 목민심서에 대한 소론(茶山 丁若鏞의 生涯 그리고 牧民心書에 對한 小論) [大學報告書] : 레포트월드에서 2007년 10월 1일에 발행하였다. 10쪽 분량이다. [목차] : Ⅰ. 다산 정약용의 생애/ 1. 출생과 가족관계/ 2. 성장기와 청년기/ 3. 벼슬시절/ 4. 유배시절/ 5. 만년/ Ⅱ. 다산 정약용의 사상/ Ⅲ. 牧民心書의 내용 및 구성/ 1. 구성 / 2. 저작목적 / 3. 내용 / Ⅳ. 小論/ [본문 요약] : 1. 출생과 가족관계 : 다산 정약용은 1762년(임오년, 영조38년) 음력 6월 16일, 아버지 정재원(荷石 丁載遠)과 어머니 해남 윤씨(海南 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한강 강변 마현 마을이다. 당시로는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이고,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정씨 집안의 본관은 나주(螺舟 : 押海)다. 고려 말에 배천(白川)에서 살다가 조선왕조를 세울 무렵부터 서울에서 살았다. 맨처음 벼슬을 한 선조는 승문원(承文院) 교리를 지낸 자급(子伋)으로 이때부터 쭉 이어져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의정부 좌찬성 응두(應斗), 사헌부 대사헌 윤복(胤福), 강원도 관찰사 호선(好善), 홍문관 교리 언벽(彦璧), 병조 참의를 지낸 시윤(時潤)은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었다. 5대조 정시윤은 만년에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근처인 󰡐마재󰡑에 터를 잡아 은거했다. 정약용의 고조부, 증조부, 조부의 3대는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고조의 이름은 도태(道泰), 증조의 이름은 항신(恒愼), 조부의 이름은 지해(志諧), 오직 증조만이 진사였다. 아버지 정재원은 대과에 급제하지 않았지만 영조 임금의 특별한 지시(음사; 蔭仕)로 벼슬에 나갔다. 연천현감, 화순현감, 예천군수 등 고을 수령을 지냈고, 조정에 들어와 호조좌랑과 한성서윤을 지내고, 다시 수령으로 나가 울산부사를 거쳐 진주 목사(晉州牧使)까지 지냈다. 외가는 해남 윤씨, 학문과 예술의 집안 어머니는 숙인(淑人) 해남 윤씨(海南 尹氏)로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후손이요,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손녀였다.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는 한국 회화사에 유명한 자화상을 남긴 화가로 유명하다. 아버지 정재원은 세부인 사이에 모두 5남 5녀의 10남매가 있었다. 첫 부인은 24세로 요절한 의령 남씨(宜寧 南氏: 1729-1752)이다. 소생으로 큰아들 약현(若鉉)이 있다. 둘째 부인 해남 윤씨((海南尹氏: 1728-1770)와 사이에 약전(若銓), 약종(若鍾), 약용(若鏞) 3형제와 딸을 두었다. 이 딸이 나중에 이승훈에게 시집간다. 다산 정약용의 나이 9세 때(1770년) 어머니 해남 윤씨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12살 때(1773년) 서울에서 20세의 김씨(1754-1813)를 데려왔다. 어린 다산을 친자식처럼 돌봐준 그가 서모 김씨다. 서모 김씨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김의택(金宜澤)의 딸로서 슬하에 삼녀 일남(약횡)을 두었다. 큰딸은 채제공의 서자인 채홍근(蔡弘謹)에게, 다음은 나주목사를 지낸 이인섭의 서자 이중식(李重植)에게 시집갔다. 다산의 집안은 혼맥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익 계열의 학통을 계승하고, 서학(천주학)에 관련을 맺게 된다. 다산의 누이는 조선 최초의 영세교인인 만천 이승훈(蔓川 李承薰 : 1756-1801)에게 시집갔고, 다산 자신은 이승훈의 누이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daum 2008)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페이지만족도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성에 만족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