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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881 : 당촌교회...대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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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촌교회 : 풍양면 부활절 연합예배/ 2011.04.25./ 풍양교회당 풍양교회 찬양단 풍양면 부활절 연합예배 순서 맡은 이들 인도 : 박성욱 목사(풍양제일교회/부회장) 기도 : 김영진 장로(당촌교회/부회장) 성경 : 서준호 목사.../ cafe.daum.net/dangchun/... 당촌교회(daum 2016)
당촌교회 : 감사합니다 & 교회소식/ 2016.01.17./ 교회가 부흥 발전하기를 기도 드립니다. 살롬 당촌교회 교우 일동 1.영주노회 2016년 제직세미나 예천지역... 26(2) 1/28(3) 1/29(4) 4.풍양면기독교교회연합회 총회.../ cafe.daum.net/dangchun/... 당촌교회(daum 2016)
당촌교회 : 滿秋 전원풍경/ 2010.11.01./ 은혜! 멀리서 바라본 풍양면 소재지 괴당, 효제... 늘 ?아가는 덕산 석양이 넘어가는 들판 풍경 속에 당촌교회가 우뚝 솟아 있다. 비봉산(자미산) 어머니의 품속.../ cafe.daum.net/dangchun/... 당촌교회 | 댓글 2(daum 2016)
대가리 : →큰가릿골
대각국사 문집(大覺國師文集, 虛應堂集, 懶庵雜著) [冊] : 대각국사 의천(義天)에 대한 문집을 예천 출신인 이창섭(1926-2000, 天台宗 譯經院者) 등이 번역한 책으로, 678쪽, 23cm, 서울 동국대학교 부설 동국역경원(東國譯經院)에서 1994년, 1996년, 2001년에 출판한 <한글대장경> 139권에 수록되어 있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강릉대, 경남대, 경희대, 동국대(경주, 중앙), 동아대, 부경대, 부산외대, 상주대, 수원가톨릭대, 영산원불교대, 울산대, 원광대, 위덕대, 인제대, 한국방통대, 한국외대, 홍익대이다.(keris 2003)
대곡 : →한골
대곡걸나루 : →지보나루
대곡로(大谷路), 대곡사로(大谷寺路) [道路] ; 예천군 다인현 대곡(醴泉郡多仁縣大谷)에 있는 도로로, 용궁현 관문(鄕石里) 동쪽 40리에 있다. 나부산(羅浮山, 20里)을 거쳐서 다인현(多仁縣, 現 義城郡 多仁面) 대곡사(大谷寺), 비안(比安)으로 넘어간다. 대곡사에서 비안군(比安郡) 경계까지 20리에 이른다.(醴泉郡邑誌 1770 1780 1895, 醴泉郡誌 1939, 龍宮縣邑誌 1780)
대곡사 [記事] : 한국문집총간(129_568a) 분애유고(汾厓遺稿, 1734)에 실린 신정(申晸)의 기사로, 그 내용은, “南行日錄/ ... 初十日。晴。與主守李君敏道。從容打話。聞淸道之喪。來過邑底。往弔棘人兪士謙。夕投醴泉 大谷寺。比安 之子...”이다.(www.minchu.or.kr 2006)
대곡사(大谷寺), 대국사(大國寺), 절 [寺刹] : 예천군 현동면(醴泉郡縣東面, 多仁縣, 現 義城郡 多仁面 鳳井里 山 894) 비봉산(飛鳳山)에 있는 사찰로, 대곡절마을에서 비봉산(飛鳳山)을 향해 600m를 올라가면 우거진 숲 속에서 우연히 모습이 나타난다. 1368년(공민왕 17)에 왕사(王師)인 지공 선사(指空禪師)와 나옹 선사(懶翁禪師)가 창건, 대국사(大國寺)라 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전소(全燒)되어 1605년(선조 38)에 원유 대사(垣裕大師)가 중창(重創)하였고, 향적전(香寂殿, 1623), 범종루(泛鍾樓, 1650, 地方有形文化財 161號), 명부전(冥府殿, 1658)이 세워지고, 1687년(숙종 13)에 태전 대사(太顚大師)가 중건(重建)하고, 대곡사(大谷寺)라 개칭하였다. 1743년(영조 19)에 대웅전 삼존불상(大雄殿三尊佛像)을 개금(改金)하였고, 1751년(영조 27)에 대웅전(大雄殿, 地方有形文化財 第160號)을 번와(飜瓦)하였다. 1847년(헌종 13)에 구포루(九苞樓)를 세웠다. 1976년 신도회(信徒會)에서 28평의 요사채를 세웠다. 1988년에 신도 권회준(權會俊)의 성금으로 나한전(羅漢殿)을 복원(復元)하고, 같은 해 신도 엄희섭(嚴熙燮)의 성금으로 산신각(山神閣)이 복원되었다. 고려 때 이규보(李奎報)가 시(詩)로써 이르기를, "돌길이 높고 낮아서, 평탄하기도 평탄하지 않기도 하니, 한가한 손이 조랑말을 타고 채찍을 늘어뜨리고 가네. 가벼운 바람은 고요히 연기 빛을 쓸어가고, 넘어가는 달 때로는 새벽빛을 겸하여 밝다. 짧은 산기슭 앞머리에는 절의 현판을 보고, 배를 옆 언덕에 가로 대고는 여울 이름을 묻는다. 외로운 마을 어디에서 차가운 피리를 부는가. 타향에서 병들어 있는 사람의 심정은 괴로워지기 쉬운데."라고 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醴泉郡邑誌 1780 1841 1895, 醴泉郡誌 1939, 嶠南誌 1937, 多仁面誌 1992)
[인터넷 야후] : 예천군 다인현(현 의성군 다인면 봉정리) 비봉산에 있는 사찰로, 1368년(공민왕 17)에 왕사인 지공 선사와 나옹 선사가 창건하였다. 산내에는 본원을 비롯 구암을 지어 불교를 숭상하게 하여 호국 불교 정신으로 많은 불제자를 배출한 고려시대의 대찰이다. 경내에는 대곡사 대웅전(지방유형문화재 160호), 대곡사 법종각(지방유형문화재 161호)의 지정 문화재가 있다. [正門] : 이 절의 정문은 현재 없으나 지금 송덕비가 서있는 곳이 정문이 있는 위치라고 한다. 때문에 그 앞 들 이름을 정문들이라고 한다. 정문으로부터 약 300m 올라가서 수로가통(水路架通)이 있는 부근에 장승이 있었으니 정문의 위치를 더욱 확인해 준다. 장승은 이 곳에 묻혀있던 것을 한 개 찾아서 보존하고 있다. [創建] : 1687년(숙종 13)에 태전 대사(太顚大師)가 대국사(大國寺)를 중건할 때 태전 대사가 이 곳 태행봉(太行峰)에 올라 지형을 살펴본 즉 100리나 되는 긴 계곡이 절을 감싼 채 돌아가고 있어 대곡사(大谷寺)라고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향토사연구회 <향토사연구> 제1집(1989.11)에서는 창건 연대를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창건되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탑밭에서 출토한 금동불상과 13층 청석탑, 그리고 이규보의 '17일 대곡사 탐방시'를 들고 있다. [伽藍 配置] : 절 전방에 누각 형식의 범종루가 있고, 그 뒤 한 층 높은 대지 위에 탑신이 없는 다층석탑을 중심으로 좌측(南)에 요사채, 우측(北)에 명부전이 마주 보고 서 있으며, 탑의 뒷쪽 높은 석대의 기단 위에 대웅전이 세워져 있는 입 구(口) 자 형의 가람 배치를 이루고 있다. 즉 대웅전, 석탑, 범종루 등이 동서 축상(軸上)에 놓이고 축이 좌우 대칭적 요사체와 명부전이 자리잡고 있어 13층 청석탑(靑石塔)을 중심으로 한 단탑식(單塔式) 가람에 속한다. 이것은 신라 시대의 일반적인 가람 배치가 금당(金堂)과 탑이 남부 자오선상(子午線上)에 일직선으로 놓이는 데 비하여 남북이 협소한 지세의 조건에서 동서축 선상에 이루어진 산지 가람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木造建築物] : 1) 대웅전(大雄殿, 地方有形文化財 第160號) : 자연석을 막돌 쌓기한 높은 기단 위에 동향하고 있다. 기둥 위에 평방(平枋)을 돌리고, 기둥 위와 그 중간에 각각 공포(공包)를 배치한 다포계(多包系) 양식(內外 3出目)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8작 지붕을 하고 있다. 내부는 대들보 밑까지 초각(草刻)으로 연결하였고, 내부 상부는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건물 양식의 세부를 종합해 보면, 조선 중기의 특색을 많이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대웅전 지붕의 암막새에 나타난 명문(銘文)인 "萬曆 三十二年"(1604, 宣祖 37)에서도 중창 때의 양식이 그대로 잘 보존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2) 범종각(梵鍾閣, 地方有形文化財 第161號) : 이는 다포계 양식의 8작 지붕으로 건축된 중층(重層)의 누각이며, 정면과 측면이 각 3칸이다. 공포는 외2출목(外二出目)을 두었고, 외부 제공(諸工)은 앙설형(仰舌形)으로 되었으나 앙설 윗몸에 연꽃을 조각하였고, 내부 제공은 한몸으로 연결하여 조각하였다. 범종각은 외부에서 돌출된 쇠서의 형상으로 보아서는 대웅전보다 시대가 약간 떨어지는 건물로 대웅전의 조각 수법을 모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다포계 건물로서 좁은 측간에는 주간포작(柱間包作)이 1기(基) 놓여 있는데도 넓은 중앙 칸에는 포작이 놓여지지 않고 있는 점이다. 귀포에서는 외부 2출목에 한 칸을 더 출목시켜 3출목으로 외목 도리를 한 칸 더 돌출시켜 서까래를 받게 한 것 등은 특이한 기법으로 생각된다. 3) 요사(寮舍) : 정면과 측면이 각 3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한 주포(柱包) 건물로, 원래는 명부전과 대응되는 규모를 가진 건물이었던 것을 좌측 1칸이 부엌칸으로 개축된 것으로 생각된다. 첨차의 외단부(外短部)에 돌출된 쇠서의 형상이 다포계 건물의 앙설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어 조선 후기에 개조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가지 만 전체적인 가구(架構) 수법은 명부전보다도 격이 높은 조선 중기의 기법을 보이고 있다. 4) 명부전(冥府殿) :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고 있는 주심포(柱心包) 집이다. 요사채의 건축 양식과 비슷한 건물로 주심포계의 조선 후기 양식을 보이고 있어 1687년(숙종 13)에 중건할 때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遺物] : 1) 금동불상(金銅佛像) : 이는 1960년 여름에 절앞 탑밭에서 출토되었는데, 대좌 일부와 두광(頭光)이 결실되고, 두정(頭頂)이 손상된 보살입상이다. 높이가 9.4cm이다. 머리 뒷면에 두광의 흔적인 돌기가 남아있으나 두정은 손상되어 어떤 보살불상인지 알 수 없다. 법의(法衣)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이며 길게 드리워져 왼쪽 무릎을 덮었고, 가슴에는 영락(瓔珞)을 둘렀는데 가락을 무릎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구슬을 잡았고, 왼손 또한 아래로 내려 반장(反掌)하였다. 대좌는 원판형(圓板形)에 소문(素文)이고, 신대(身臺)는 불에 그을려 검은 빛을 띄고 있으나 얼굴 부분과 법의 사이로 도금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으며 장신(長身)이다.
이 불상의 조성 연대는 조각 기법이 섬세하고 법의의 주름, 소문한 원판형 대좌 양식 등에서 살펴볼 때 통일신라 후기로 추정된다. 2) 13층 청석탑(靑石塔) : 이는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대웅전 앞에 있다. 이는 기단중석 옥신, 상륜부 등을 결실하였는데, 옥신석이 없는 방형의 옥개석 12개만이 중석을 잃고 서로 포개고 있는 위아래의 연화대석 위에 중첩되어 있다. 지대석(地臺石)은 점판암제의 탑신부와는 달리 화강석으로 3단을 놓았는데 현재 맨 아랫부분은 시멘트로 넓게 덮고 있어 원형을 잃고 있다. 단판(單辦)의 앙복(仰覆) 연화문을 각각 24판씩을 조각한 단층 기단의 상하 돌이 중석을 결한 체 중첩되어 있다. 이 탑과 유형이 같은 해인사 원당암(願堂庵) 다층석탑의 기단 형식으로 볼 때 복련석(覆蓮石)과 앙련석(仰蓮石) 사이에 우주(隅柱)를 대리석으로 하고 면석(面石)을 점판암으로 만들어 끼운 단층 기단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탑신부에는 12매의 옥개석만이 중첩되어 있고, 옥신석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옥개석의 추녀 밑에는 반전(反轉)이 있고 얕은 3단의 각형(角形) 밭침이 있는데 위의 몇 층은 옥개 받침이 파손되어 1단(9번째) 혹은 2단(10번째)만 남아있는 것도 있다. 이 탑은 현재 12층을 이루고 있지만 6번째와 7번째 옥개석의 크기가 다른 옥개석간의 체감 비율에 비해 급격한 차이를 이루고 있어 그 사이의 옥개석(본래의 7층)이 없어진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 탑은 13층이라고 할 수 있다. 옥신석은 전부 망실되어 알 수 없으나 옥개석의 평면도와 단면도에서 살펴볼 것 같으면 기단의 면석과 같이 대리석 우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4매의 면석을 끼운 방형의 옥신을 한 것 같다. 금산사(金山寺) 6각다층석탑의 유례로 보아 면석에는 여래좌상 혹은 다른 화려한 조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층 옥개석부터 12층 옥개석까지 중앙에 7.5cm의 찰주공(擦柱孔)이 관통하고 있다. 이 탑은 석질이 연한 점판암으로 제작되었을 뿐 아니라 기단부와 옥신의 면석에 여래상을 비롯한 아름다운 문양이 조각되어 있었으므로 자연적 파손과 도굴로 인해 현재 옥개석만 남게 된 것으로 사료된다. 이 청석탑의 특징은 탑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 지대석은 두텁게 대리석으로 한 점, 그리고 기단부와 옥신부의 우주를 대리석으로 하고, 그 위의 기단과 옥신의 면석 및 옥개석 등을 점판암으로 축조한 점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석탑은 특수한 석재를 사용한 점에서 이색적인 감을 자아내고 있는 반면 각 층의 체감 비례가 일정하게 점차적이고 옥개석의 두께가 얇고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며 네 모서리의 전각이 심하게 반전하여 매우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어서 이 탑을 한결 더 우미하게 만들고 있다. 이 탑의 조성 시기는 기단의 상하 대석의 연화무늬나 각 층 옥개석의 조각 수법 등에서 신라시대의 예를 찾아볼 수 있어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의 축조 시기와 같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인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의 사용된 석재가 크지 못하므로 소규모의 석판뿐인데 석질이 또한 연하여서 각 부재(部材)가 파손되거나 훼손되고 있어 완형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 탑의 지대석과 기단부 및 옥신부의 우주석에만 화강석으로 조성되고 그 외는 모두 점판암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이것도 아마 석재의 결핍 때문일 것이다. 3) 석등(石燈) : 이는 대웅전 앞뜰 13층 청석탑 앞에 있다. 하대석, 간주석, 그리고 상대석 일부만 남아있을 뿐 화사석(火舍石) 이상은 결실되어 있다. 조선 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4) 기타 : 범종각에서 대웅전에 오르는 돌계단의 좌측과 우측에 석재, 석등재, 부도재, 대석 등 여러 종류의 석물을 탑처럼 만들어 놓고 있다. 이들은 절 경내외에 흩어져 있는 것을 모아둔 것이다(인터넷 야후 2001). [인터넷] : 대곡절 마을에서 비봉산(飛鳳山)을 향해 600m 올라가면 우거진 숲 속에 모습이 나타난다. 이 절의 정문은 없으나, 지금 송덕비(頌德碑)가 있는 곳이 정문이 있던 위치라 한다. 절에 비치한 연혁에 의하면, 1368년(공민왕 17) 왕사 지공 선사와 나옹 선사가 창건한 가람으로, 처음에는 대국사(大國寺)라 불렀다(my.netian.com 2002). [慶北道廳 홈페이지] : 관리 기관은 다인면사무소이고, 다인면은 의성군과 인접하고 있는 상주시, 예천군, 안동시 등 4개 시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신도수가 1,200여 명이나 된다. 지공 선사와 나옹 선사가 원(元) 나라에서 수도를 할 때, ‘영남 예천 땅 자징산 남쪽 기슭에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포교하면 대성한다.’라는 계시를 받고 귀국하여 이 사실을 국왕에게 고하였다. 국왕은 이 두 국사의 도력이 높은 것을 알고 나라 군병들에게 명하여 두 선사로 하여금 이 곳에 사찰을 창건하게 하고 사찰의 이름을 대국사(大國寺)라 불렀다 한다. 이 때부터 이 곳에 불교를 공부하는 승려들이 모여들어 수도를 하였으며, 사내에는 봉원을 비롯 아홉 암자(九庵)를 지었다. 그 후 정유재란 와중인 1598년(선조 31)에 본원과 암자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원우(垣祐) 대사가 소실된 사찰을 새로이 세우고, 선객들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숙종 때 태전(太顚) 선사는 지방민들에게 불교를 숭상하게 하여 그 호국불교 정신으로 많은 불제자를 배출하였다. 당시의 명칭은 ‘예천군 대행산 대국사(醴泉郡 太行山 大國寺)’였으나 태전 선사가 이 곳 태행봉(太行峰)에 올라 사방의 지형을 살펴본 즉 백 리나 되는 긴 계곡이 있으므로 대곡사(大谷寺)라 개칭하고, 산 이름도 비봉산(飛鳳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온갖 풍상과 전란을 겪으면서 유지되어 왔으나 그 옛날의 영화롭던 옛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황폐되었다. 지금은 큰 사원과 암자들이 정치적 혼란과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의 다 없어지고 1650년에 새운 대웅전과 1623년에 세운 향적전, 1650년에 세운 범종루, 1656년에 세운 명부전이 있고, 아홉 암자 중 1647년에 세운 적조암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뿐이다. 석축, 석화대, 13층석탑 등이 연구 자료로 그 가치가 인정되며, 현재의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며, 범종루는 정면과 측면이 각 3칸이며 중층으로 팔작지붕이다. 불전상에 닫집 같은 것이나 법종루 같은 것을 보면 연대가 오래된 것만은 사실이다. 범종루에 봉안되어 있던 홍규와 종은 예천 용문사로 가져갔다고 한다. 현재 대곡사에는 지방유형문화재 제160호 대웅전과 161호인 범종각 등 2점의 지방 지정 문화재가 있다.(慶尙北道 홈페이지 2002)
대곡사 [記事] : 유교기록자료관/ 명문가고문서 : 예천(醴泉) 대곡사(大谷寺)와의 분쟁과 관련된 소지초(所志草) (豊山柳氏 河回마을 和敬堂(北村宅) 所志155 (草)[11511])/ 문서형태 : 단일문서/ 발급자 : 발급자 미상(發給者 未詳)/ 수급자 : #/ ...(缺)矣。第其圖尺中。所謂影子菴者。泰永原情之所不提及者。而混同圖尺。實是題 外語也。蓋影子之爲菴。年久空虛。上雨傍風。...(www.koreastudy.or.kr 2007)
대곡사 [記事] : 유교기록자료관/ 명문가고문서 : 1861년에 발급자미상이 예천 대곡사에 보낸 관문(關文) (豊山柳氏 河回마을 和敬堂(北村宅) 關文18[11543])/ 문서형태 : 단일문서/ 발급자 : 발급자 미상(發給者 未詳)/ 수급자 : #(醴泉 大谷寺)/ ...嶺南都摠攝兼?大將爲相考事。 今聞則該寺立案龍虎之處。入葬之事 義有申飭。而尙不掘移云。聞不勝可痛 事當報營門。嚴治照律...(www.koreastudy.or.kr 2007)
대곡사 [記事] : 유교기록자료관/ 명문가고문서 : 예천(醴泉) 대곡사(大谷寺)와 유씨가(柳氏家)가 관련된 검안(檢案) (豊山柳氏 河回마을 和敬堂(北村宅) 檢案004 (査案)[11502])/ 문서형태 : 단일문서/ 발급자 : 발급자 미상(發給者 未詳)/ 수급자 : #(柳氏家)(www.koreastudy.or.kr 2007)
대곡사 [記事] : 유교기록자료관/ 명문가고문서 : 예천(醴泉) 대곡사(大谷寺) 승려 태영(泰永) 등이 제기한 산송(山訟)과 관련된 검안(檢案) (豊山柳氏 河回마을 和敬堂(北村宅) 檢案010 (供招)[11508])/ 문서형태 : 단일문서/ 발급자 : 대곡사 승 태영(大谷寺僧 泰永)/ 수급자 : #(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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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