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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910:대죽리...
작성자장병창 @ 2020.05.09 06:22:26

  도청신도시 예천 910 : 대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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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죽리 : 새단장한 예천 '말(言)무덤'/ 2013.04.23 | 연합뉴스 | 다음뉴스 (예천=연합뉴스) 이덕기 기자 =/ 경북 예천군은 지보면 대죽리 한대마을 입구에 전해 내려오는 '말무덤(言塚)'을 새단장했다고 23일 밝혔다. 2013.4.23 < ...// 관련기사// 예천군 '말 무덤' 새단장 2013.04.23 | 연합뉴스 | 다음뉴스// 경북 예천군, '말 무덤' 새단장 2013.04.23 | 세계일보 | 다음뉴스// 험한 말(言)들 파묻은 예천 말무덤, 말과 관련한 산교육장으로 단장 2013.04.29 | 경향신문 | 다음뉴스// 관련기사 6건(daum 2016)

 

  대죽리 : 예천군, 푸른농촌 희망 찾기 운동 적극 추진/ 2009.11.05 | 뉴시스 | 다음뉴스/ 경북 예천군은 5일 농촌진흥청이 추진하고 있는 푸른농촌 희망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지보면 대죽리와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유전자원센터간의 자매결연식을 갖는다고 밝혔다. 푸...(daum 2016)

 

  대죽리 : 옛 지혜 묻힌 '말' 무덤 아시나요/ 2013.04.26 | 중앙일보 | 다음뉴스/ 예천군 대죽리 한대마을 입구에 새로 조성된 말 무덤과 말 관련 격언비. [사진 예천군]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한대마을 앞에는 말무덤이란 게 있다....(daum 2016)

 

  대죽리 : 예천 말무덤에 교육장 조성한다./ 2012.10.17 | 영남일보/ 예천군은 선조들의 지혜가 묻어 있는 지보면 대죽리 말무덤(言塚)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에 나선다. 군은 이를 위해 2억 원의 ... 교육장을 조성하기로 했다. 지보면 대죽리 한대마을의 말무덤...(daum 2016)

 

  대죽리 : 칼럼-화목한 이웃을 위한 조상들의 슬기/ 2013.09.12 | 김천신문/ 후손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말무덤 공원의 전해오는 일화에 의하면 500여 년 전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한대마을)는 항상 시끄럽고 어수선하여 이웃 간에 갈등과 싸움이 거치지를 않았다...(daum 2016)

 

  대죽리 : [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말을 파묻다/ 2013.04.29 | 한국일보 | 다음뉴스/ 드물다. 경북 예천에는 길게 발음해야 하는 말의 무덤이 있다. 이른바 언총(言塚)이다.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한대마을의 이 특별한 무덤은 400~500년 전에 조성됐다는데, 말을 담은 사발들이...(daum 2016)

 

  대죽리 : 병환으로 수확기 놓친 농가 일손 도와 화제/ 2014.12.14 | 경안일보/ 예천군 지보면사무소(면장 엄상흠)는 지난 12일 21개 기관·단체 회원들과 대죽리 마을주민 15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병환으로 입원 중인 농가를 찾아가 2.2ha의 콩 수확 및 탈곡을 돕는데 힘...(daum 2016)

 

  대죽리 : 예천군, 3년간 농작업 안전모델 시범사업 추진/ 2009.06.12 | 뉴시스 | 다음뉴스 【예천=뉴시스】/ 경북 예천군은 지보면 대죽리 주민 93명을 대상으로 농작업 안전모델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12일 밝혔다. 농작업 안전모델 시범사업은 농업인의 농작업 관련 재해를 줄...(daum 2016)

 

  대죽리 : 예천군, 문화관광 활성화 위한 다양한 시책 추진/ 2012.01.26 | 뉴시스 | 다음뉴스/ 놀이시설과 휴게시설을 마련해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를 제공할 계획이다. 지보면 대죽리에 소재한 말무덤(言塚)을 정비해 말 실수로 인해 각종 문제를 일으키는 현대인들에게...// 관련기사// 【예천】문화관광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시책 추진 2012.01.26 | 영남타임즈// 예천군, 문화관광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시책 추진 2012.01.26 | GBN 경북방송// [대구경북]예천군, 문화관광 활성화 총력 2012.01.26 | CNB뉴스// 관련기사 4건(daum 2016)

 

  대죽리 : 말씀무덤인 언총(言塚)과 소통(疏通)/ 2013.01.30 | 중부매일/ 가슴에는 비수가 되어 평생 머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한대마을에는 말무덤이 있다고 한다. 말(馬)을 묻은 곳이 아니라 말...(daum 2016)

 

  대죽리 : [기획특집]예천만의 특징 살려 문화예술 저변확대/ 2012.02.03 | 전국매일신문/ 휴게시설을 마련해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거리를 제공할 계획이다. 군은 지보면 대죽리에 소재한 말무덤(言塚))을 정비해 말 실수로 인해 각종 문제를 일으키는 현대인들에게 산 ...(daum 2016)

 

  대죽리 : 경북 문경.예천 `4대강 사업'에 2천억 원 투입/ 2009.07.05 | 연합뉴스 | 다음뉴스/ 통과하는 32㎞의 낙동강 유역 퇴적토를 준설하고, 강변에 자전거 도로를 조성하며,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인근에는 보를 건설할 예정이다. 또 지방하천인 문경의 영강 바닥을 준설 정비하고,...(daum 2016)

 

  대죽리 : 국회에 말무덤(言塚) 조성하라/ 2012.06.13 | 세종데일리/ 말로 인해 일어나는 분쟁을 막기 위한 `말 무덤(言塚)`이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한대마을에 존재한다. 이 말 무덤은 400~500년 전으로 추정되는 시기...(daum 2016)

 

  대죽리 : [책]조상의 깊은 뜻 담긴 지명 유래/ 2006.07.28 | 세계일보 | 다음뉴스/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에 가면 '말 무덤'이 있다. 그러나 이 무덤은 '말(馬) 무덤'이 아니라, '말(言) 무덤'이다. 말싸움이 잦아 고심하던 마을 사람...(daum 2016)

 

  대죽리 : 지보면 知保面, Jibo-myeon/ 새겨져 있다. 영주-군위를 잇는 국도가 면의 중부를 지난다. 행정구역은 소화리·마전리·지보리·도장리·도화리·신풍리·대죽리·암천리·어신리·송평리·수월리·상월리·만화리·매창리·마산리 등 15개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은 24개리). 면사무소 소재지는 지보면 지보로 126-5이다. 면적 78.47㎢, 인구 3,130(2016)./ 행정구역 : 24개리 105개반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사이트 : http://city.ycg.kr/ko/jibo/ 도서 다음백과 | 태그 경상북도(daum 2016)

 

  대죽리 : 대죽리/ 대죽리는 다음 지역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리이다.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대죽리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대죽리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대죽리 전라남도 광양시 옥곡면 대죽리,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대죽동/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daum 2016)

 

  대죽리 : 지보면/ 이속시켜서 지보면을 설치함. 면사무소 소재지는 지보리에 둠. 1923년 : 면사무소를 지보리에서 소화리로 옮김. 1952년 : 면의회 의원선거에 따라 면 의회 설치 1956년 8월 : 면장이 선출 1971년 12월 31일 : 예천군행정운영동리설치조례 제280조에 의해 24개 행정리로 분리하여 운영 법정리 행정리 비고 대죽리 대죽리 도장리.../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daum 2016)

 

  대죽리 : 지방도 제916호선/ 청곡리 의성군 다인면 용곡리 - 용곡삼거리 - 지인교 예천군 지보면 지인교 - (구마전) - 마전삼거리 - 지보리 - 도장리 - 도화리 - 신풍리 - 대죽리 - 암천리 - (구담교 북단)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 - 장천교 - 도양리... 중복 예천군 풍양면 (새마을휴게실) ~ 예천군 지보면 마전삼거리 : 지방도 제923호선과 중복 예천군.../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daum 2016)

 

  대죽리 : 예천군의 행정 구역/ 953 1,922 36.22 금리, 경진리, 동송리, 이사리, 우감리, 신음리, 가곡리, 황산리, 장송리, 입압리, 갈마리, 풍정리 지보면 知保面 1,701 3,473 78.44 소화리, 마전리, 지보리, 도장리, 도화리, 신풍리, 대죽리, 암천리, 어신리, 송평리, 수월리, 상월리, 만화리, 매창리, 마산리 풍양면 豊壤面 1,881 4,176 63.23 우망리, 청곡리.../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daum 2016)

 

  대죽리 : Yecheon County/ myeon(용궁면) Gaepo-myeon(개포면) Jibo-myeon(지보면) Pungyang-myeon(풍양면) The eup and myeon... ri (풍정리) Jibo-myeon(지보면) - Sohwa-ri(소화리), Majeon-ri(마전리), Jipo-ri(지보리), Dojang-ri(도장리), Dohwa-ri(도화리), Sinpung-ri(신풍리), Daejuk-ri( 대죽리), Amcheon-ri(암천리), Eosin.../ 출처 영어 위키백과(daum 2016)

 

  대죽리(新道廳時代 醴泉의 場所性과 人文魂을 찾아서<11>말무덤 한대마을 風水의 正反合) [寄稿] ; 풍수는 분명 진리의 영역이 있다. 그러나 그 세계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대다수의 풍수 연구자들이 땅 자체를 보고 뭔가를 깨달으려 하지 않고 예부터 전해오는 지리학설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전통풍수론에서는 진리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땅을 물화(物貨)로 보는 서양식 토지관과 대조되는, 물활론적인 땅을 상정하는 동양식 토지관만 존재할 뿐이다. 절대적 진리도 아닌 그런 상대적 토지관 수준의 알량한 풍수 지식을 가지고 제멋대로 땅을 평가하고 폄훼하는 이가 요즘도 적지 않다. 그것은 실거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는 환경심리적으로 불안감을 조성하는 테러와 같은 행위다. 예천군 지보면 한대마을[대죽리의 옛 이름]에 우주에서 하나뿐인 ‘말무덤[言塚]’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소[牛] 무덤, 개[狗] 무덤, 말[馬] 무덤, 시총(詩塚:시 무덤), 의총(衣塚:옷 무덤), 발총(髮塚:머리털 무덤) 같은 무덤 얘기는 들어본 적 있지만 사람의 말[言]을 묻은 ‘말무덤’은 처음 듣는다는 사람이 꽤 있을 법하다. 말은 풍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말은 파동이요, 파동은 기이며, 기는 풍수이기 때문에 말은 곧 풍수다. 이 ‘말 풍수’의 참 진리 세계는 깨달은 이가 드물기도 하거니와, 이 글이 일반인을 위한 글임을 감안해 여기에서는 팩트에 입각한 ‘말무덤’ 얘기만 논하기로 한다. ‘말’ 자체의 ‘기 풍수’를 살펴보는 것이 아닌 ‘말무덤’이라는 유적 경관(景觀)의 생성 배경과 그 이후의 전개 과정, 그리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안 같은 것을 한 번 알아보자는 말이다. 조선 십명지(十名地) 중의 한 곳으로서 이름을 날렸던 대죽리는, ‘반풍수 집안 망친다’는 말 그대로 얼풍수의 하찮은 막말 때문에 ‘개 주둥이 터’로 전락한 안타까운 삶터다. 인터넷 검색창에 ‘말무덤’을 입력하면 온통 ‘개 주둥이’와 ‘개의 입에 물린 재갈’ 같은 얘기들뿐이다. 이 또한 정보화시대의 일종의 환경심리적 사이버 테러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고유의 한반도 호랑이 형상을 희생물을 상징하는 토끼 형국으로 비하하면서 황국신민화정책을 꾀했던 악랄한 술책과 하등 다르지 않다. 지난 밤 천둥 번개와 폭우가 쏟아지고 다음날 아침 일찍 밝은 햇살 아래 필자와 조우한 대죽리 마을 터는 옛 모습 그대로 땅 기운이 생생했다. 필자가 이 나라 안에서 언제든지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명당 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칠팔십대의 마을 촌로들은 말무덤으로 인해 자신들의 삶터가 ‘개 주둥이 터’로 전락한 데 대해 실망하고 있었다. 그 순간 헤겔의 변증법인 정반합(正反合) 논리가 문득 필자의 뇌리를 스쳤다. 한때 조선의 명형국지로 위세당당했던 정(正)의 강촌(江村)마을이 말무덤이 만들어지는 ‘반(反)’의 단계로 돌아선 후 수백 년 동안 거기에서 멈춰 새로운 합(合)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대죽리 마을 터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과 주민들의 떨어진 사기(士氣) 회복이 절실해 보였다. 세상은 정립(定立)-반정립(反定立)-종합(綜合)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한다. ‘부정의 부정’ 과정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진보한다. 어느 한 과정에서 멈추면 안 된다. 새로운 ‘합’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정’이 된 후, 또 그에 ‘반’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제기돼야 한다. 사람도, 학문도, 공간도, 장소도 다 그렇게 발전한다. 이 글이 대죽리 명기성(明氣性)의 역사적 변천과 그 실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합(合)의 글’인 동시에 ‘정(正)의 글’이 되기를 기대하며, 하루 속히 이에 대한 또 다른 발전적인 ‘반(反)의 글’이 제시되기를 소망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한대(閒大)’라는 지명이 나온다. 지금의 대죽리와 신풍리를 합쳐 부른 마을 이름이었다.

 

  효종 때 파평 윤씨가 아랫한대에 세거하면서 신풍리(新豊里)로 개명해 독립해 나가고, 남아 있던 웃한대는 대죽리(大竹里)가 되었다. 한대마을은 조선 십명지 중의 한 곳으로 이름을 떨쳤다. 비봉형(飛鳳形) 명당설과 풍취나대형(風吹羅帶形) 명당설이 그 당시 한대마을 터의 정체성(正體性)을 규정한 2대 명당설이었다. 행정적으로 분리돼 나간 신풍리는 후일 와우형(臥牛形) 길지라는 독자적인 명당설을 구축했다. 한대마을은 신라 때부터 사람이 모여 살며 마을을 형성했으며, 마을 앞쪽으로 낙동강이 장유수(長流水)를 이루며 흐르고 마을 뒤편에는 봉두령(鳳逗嶺)이 우뚝 솟아 그야말로 산 좋고 물 좋은 고장이었다. 다만 큰물이 질 때면 하천 유수의 공격[침식]사면 쪽에 놓여 있던 마을 앞 웃개들[上浦野]과 아랫개들[下浦野]이 물에 잠기는 폐단이 있었을 뿐, 지명 그대로 한가하고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는 강촌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한대’라는 한자 지명의 한글 어의(語義)가 순 우리말인 ‘클’ ‘한’ 및 ‘대나무’ ‘대’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마을 촌로들은 지금도 ‘한대’의 뜻을 그저 ‘큰 대나무[대죽]’ 쯤으로 받아들일 뿐 ‘한가하고 편안하다’는 뜻을 지닌 한자어 ‘한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마을 뒤를 받쳐주고 있는 종산(宗山)격인 봉두령과의 풍수적 연관성 때문인 듯하다. 봉두령은 봉황이 머문다는 뜻을 지닌 최상격의 명산을 상징한다. 봉황의 먹이는 대나무 열매다. 현재도 마을 곳곳에 대나무숲이 남아있지만 마을 이름을 ‘대죽리’로 비보(裨補:보완)해 줌으로써 비봉형 명당터[鳳凰之地]로서의 위상을 좀더 확실하게 갖추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봉황 터의 핵심부에 자리한 대죽리 마을의 주산(主山) 이름은 원방산(圓方山)이다. 마을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지세가 원형에 가까워 그렇게 명명했을 수도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줄여서 ‘원방’이라 했을 성싶다. 그것은 곧 원방산이 ‘천지산’과 같은 뜻의 땅이름이며, 또한 천지는 음양이요 음양은 태극이니 원방산이 만물의 시원이 되는 태극산과도 의미 상통하는 명산이라는 것을 뜻한다. 크기에 비해 그 함축된 상징성이 그토록 원대한 산은 아마 이 땅 안에서 원방산이 유일할 것이다. 대죽리의 또 다른 명기설(明基說)인 ‘풍취나대형’은 마을을 둘러싼 둥근 산세를 바람에 날리는 비단 띠, 즉 옥대(玉帶)와 같은 형국으로 본 것이다. 옥대는 비단으로 싸고 옥으로 된 장식을 붙여 꾸민 띠로서 왕이나 조정 신하가 공복(公服)을 입을 때 허리에 둘렀던 허리띠의 일종이다. 이 형국은 자손들이 높은 벼슬에 올라 부귀공명을 누린다고 알려져 왔다. 띠는 바람이 불어야 나부끼기 때문에 남쪽에 나부끼는 모습의 산인 표풍(飄風)의 산 형태가 있는 게 최상격이다. 대죽리에서는 옥대형 원방산의 서쪽 골짜기 이름을 바람실[風谷:風室]로 지어 부름으로써 풍취나대의 규국(規局) 성립 조건을 충족시키고자 했다. 풍취나대형의 묘지[음택] 터는 양쪽 띠를 묶는 매듭 자리가 혈처(穴處)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죽리에는 마을 뒷산에 있는 평산 신씨 묘가 이 형국의 대명당 터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해온다. 그렇다면 조선 10대 명형국지로서의 ‘풍취나대형’ 한대마을 터[陽基]의 풍수 유적물로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동네 입구[洞口]를 지키고 있는 두 개의 돌[石]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돌 자체도 예전의 그 돌이 아니고 또한 경지정리로 인해 놓인 위치도 다소 바뀌었겠지만 그 상징성만은 변함이 없다. 마을 안팎 어디에서 보든지 비단 허리띠의 앞부분[남쪽]이 연결되지 못하고 벌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을 돌[玉帶砂]을 놓아 이은 것이다.

 

  현대식 요대(腰帶:벨트)에 비유하자면 허리띠를 둥글게 연결해주는 고리, 즉 버클(buckle:죔쇠)에 해당하는 것이 곧 그 돌들이다. 현재 주민들이 마을 안에서 밖을 향해 볼 때 왼편[동쪽]에 서 있는 돌을 숫바위, 오른편[서쪽]에 서 있는 돌을 암바위로 부르고 있지만 그리되면 돌의 정체성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옥대사가 아닌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는 일종의 수살막이[수구막이] 돌로 바뀌기 때문에 풍수적인 차원에서 세워진 비보석(裨補石:보완 돌)이 아닌 민속학적 주술 차원의 돌로 변질돼 버리는 것이다. 어찌됐든 대죽리의 명당성이 그같이 ‘봉황의 땅’ 내지 ‘옥대형’의 대길지로 알려지게 되니 전국 도처에서 명당 발복의 기운을 받으러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 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닌 게 아니라 김녕 김씨, 춘천 박씨, 안동 권씨, 경주 이씨, 밀양 박씨, 김해 김씨, 진주 류씨, 경주 최씨, 인천 채씨 등 성(姓)이 다른 여러 명문가 사람들이 대죽리에 함께 모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각성바지 촌(村)을 이루었다는 것인데, 그런 마을은 대개 동족촌처럼 위계질서나 끈끈한 정이 없기 때문에 성씨 간 알력이나 말다툼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대죽리 마을에 많은 성씨의 사람들이 살러 들어오기도 하고 또 이주해 나가기도 한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전설에 따르면 한 과객이 대죽리에 들렀을 때도 동네 사람끼리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는데 그것이 ‘말무덤’이 만들어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도대체 대죽리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우리의 전설에 등장하는 과객은 대부분 똑똑한 사람들이다. 아는 것도 많고 처방에도 능숙해서 가는 곳마다 마을사람들이 안고 있는 난제들을 척척 해결해 준다. 대죽리 말무덤 전설에 등장하는 과객도 예외는 아니다. 우연히 대죽리에 들렀는데 때마침 동네 사람들 간에 싸움이 붙어 욕지거리가 오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개 주둥이’를 닮았으니 동네 사람끼리 늘 옥신각신 말다툼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개주둥산’에 ‘말무덤’을 만들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는 거다. 아마도 그 과객은 아주 얕은 풍수 지식을 습득한 선비나 스님이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진정한 풍수 고수였다면 대죽리 터의 ‘풍취나대형[옥대형]’ 형국을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며, 그랬다면 땅의 생김새와 사람의 싸우는 입 모양새를 유비(類比)시키는 유감주술(類感呪術) 같은 저급한 풍수론을 펼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그런 얼풍수를 만나는 것이 대죽리의 운명이었던지, 아니면 당시의 사회풍토가 땅의 길흉과 사람의 길흉을 동일시하는 음양오행론적 풍수론을 일반상식으로 생각하던 때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죽리[한대마을] 사람들은 의논 끝에 과객의 처방대로 평소에 내뱉은 상스러운 말들을 그릇에 담아 ‘주둥개산’에 묻었다고 한다. 말을 그릇에 담은 방법도, ‘그릇 뚜껑을 열고 말을 뱉은 후 다시 닫고 묻었다’는 얘기도 있고, 또 지방(紙榜)을 쓰듯 상스러운 말들을 글자로 적은 종이를 그릇에 담은 후 묻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거나 일종의 ‘말 장례식’을 치른 ‘말무덤’을 만든 이후로는 마을이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마을주민들이 욱하고 화가 치밀어도 마을 어귀에 있는 말무덤을 생각해 참고 넘기는 경우가 많다고 얘기하는 것을 보면 오랜 세월 그 말무덤이 미친 긍정적인 효과가 적잖아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말무덤 효과 너머에 있는 풍수의 세계를 직시해 볼 필요가 있다. 주민들은 왜 과객이 조선 십명지로서 옥대형 대명당이었던 한대마을 터를 ‘개 주둥이’ 형국으로 폄훼하는 데도 가만히 있었을까. 혹여 주민들도 과객보다 먼저 마을 터를 ‘개 주둥이’와 같은 형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주둥개산’의 정체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주둥개산은 옥대형 원방산의 왼쪽 줄기, 즉 좌청룡 지맥 끝 산이다. 원래 이름은 ‘주등포산(舟登浦山)’이다. 말 그대로 ‘배를 타는 개[강이나 내에 조수가 드나드는 곳]가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강촌이었던 대죽리는 신풍제방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큰물이 질 때 주등포산 턱밑까지 강물이 닿은 곳이었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배를 타거나 내렸다. 지금 대죽리의 바깥들[외명당] 이름은 웃개들과 아랫개들이다. ‘개’가 ‘견(犬)이 아닌 ’포(浦)‘의 의미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주등포산’이 사람의 입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했을까. 네 글자 한자 중에서 가장 먼저 바뀐 게 바로 ‘포’다. 그것이 맨 먼저 순 우리말 ‘개’로 바뀌었다. 그리되면 ‘주등포산’이 ‘주등개산’이 된다. 그리고 ‘주등개산’이 자칫 잘못 발음되면 ‘주둥개산’으로 바뀐다. 이 ‘주둥개산’에서 ‘개[浦]’를 ‘개[dog·犬]’로 바꾸면 ‘주둥개산’이 되고 거기에서 최종적으로 의미를 확대 해석해 버리면 ‘개 주둥이 산’이 된다. 이 곡해된 ‘주둥개산’을 본래의 ‘주등포산’으로 일찍 바로잡았더라면 ‘개 주둥이’ 이야기는 아마도 ‘말무덤’ 조형물만 남긴 채 오래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저 한 과객이 ‘주등포산’을 ‘주둥개산’으로 오해하여 마을 터 전체를 ‘개 주둥이’ 형상으로 잘못 말함으로써 생긴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을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그래도 그의 말 같잖은 처방책을 받아들여 말무덤을 만든 것은 그만큼 ‘말싸움 동네’라는 오명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강한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그 산에 ‘말무덤’을 만들어 압승함으로써 이제는 더 이상 주민들끼리 말싸움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믿게 됐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말무덤은 말무덤 대로 기능하고, 또 ‘옥대형’ 내지 ‘풍취나대형’이라는 전통적인 명형국지 정체성도 그대로 온전히 전승돼 내려왔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주민들은 ‘주둥개산’을 ‘개 주둥이 산’으로 인식하는 것을 너무 긴 세월 동안 그대로 방치해 버렸다.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하다. 불과 이삼십 년 전부터 원방산의 왼쪽지맥은 곧게 뻗은 개의 아래턱 모습이고, 우백호는 구부러져 길게 뻗은 위턱의 형상으로 마치 개가 짖어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마을의 안녕을 위해 개가 짖지 못하도록 앞니에 재갈을 물리고 송곳니를 누르는 돌을 세웠다고 하는, 실로 괴상망측한 풍수설이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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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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