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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911 : 대죽리...대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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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턱’, 아래턱‘, ‘재갈’, ‘송곳니’ 같은 말은 애초의 말무덤 전설에는 나오지 않던 말이다. 아마도 나쁜 기운을 누르는 풍수의 압승(壓勝) 내지 염승(厭勝) 술법을 아는 현대의 어떤 반풍수가 실상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주둥개산’ 전설에 자신의 생각을 마구 덧붙여 자의적으로 해석을 해버린 듯하다. 혹자는 어떤 교수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고, 또 다른 주민은 정(鄭) 모라는 향토사학자가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말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필자가 현장 확인해 본 결과, 재갈 돌은 예전의 풍취나대형 옥대사(玉帶砂)였고, 송곳니를 누른 돌은 칠성바위였다. 현재 마을회관 마당에 세워져 있는 경로당 표지석과, 작고한 김병오씨 댁 앞마당에 모아 놓은 돌 서너 개가 경지정리하기 전에 마을 어귀 검박들 논에 있었던 칠성바위돌이라고 한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과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신앙[북두칠성 믿음]에서 비롯된 유물이지 짖는 개의 나쁜 기운을 누르기 위해 장치한 풍수 압승물은 결코 아니다. ‘개 주둥이 산’은 물론 ‘재갈바위’ 같은 압승물 얘기는 모두 허구다. 지명도 왜곡됐고 경관물도 곡해됐다. 주민들이 전혀 그런 뜻으로 세워놓지도 않은 돌들을 제멋대로 개의 앞니와 송곳니 기운을 제압하는 풍수 압승물이니 뭐니 하면서 함부로 남의 삶의 터전을 폄훼한 것은 진리 추구는커녕 인간의 도리마저도 저버린 심각한 일탈 행위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인터넷에 얼토당토않은 그런 얘기들을 마구 퍼 담아 날라놓은 이들은 지금이라도 모두 삭제해 주기를 바란다. 그것은 진리도 아닐뿐더러 팩트도 아니다. 그저 일개 얼풍수가 왜곡된 ‘주둥개산’ 지명에 자신의 풍수적 상상력을 억지로 덧붙여 놓은 궤변일 따름이다. 그 얼풍수는 대죽리 전설에 나오는 조선 중기의 그 지나가는 과객 수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진실을 알고 싶으면 직접 한대마을[대죽리]을 찾으시라. 그리고 직접 몸으로 땅기운을 느껴보시라. 남이 어떻게 그 터를 생각하고 어떤 말을 했는 가에는 관심을 두지 말라. 풍수의 진리는 책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말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 터 자체에 있다. 참 진리는 때로는 햇빛[지식과 전통]이 가려질 때 진면목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잘 난 사람이 여러 개의 직함을 가지듯, 명기(明基)도 다양한 풍수 형국명을 갖는다. 사람들의 명당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는 방증이다. 대죽리 마을에 ‘풍취나대형[옥대형]’ 명당을 아는 이는 한둘밖에 없지만 사람들은 그 터를 ‘소쿠리’ 명당, ‘키[箕]’ 명당, ‘삼태기’ 명당, ‘바소구리’ 명당 등 온갖 소박한 명당명(明堂名)으로 의미를 둔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耳懸鈴鼻懸鈴]’식의 풍수 물형론[형국론]이 길지와 흉지(凶地)를 판별하는 절대 기준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물형론에 가장 열광한다. 풍수를 잘 몰라도 자신이 살고 있는 삶터의 윤곽 특성을 쉽게 이해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좋은 물형론이 곧 ‘내가 명당 안에 실존하고 있다’고 하는 일종의 ‘환경심리적인 자존감’을 고양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대죽리의 고전적인 풍취나대형 명당설에다 지금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또 다른 명형국지 이름을 덧붙이고자 하는 것도 물형론이 지닌 바로 그런 긍정적인 파급효과 때문이다. 대죽리는 강가 마을이다. 그런 곳은 땅기운[地氣]에 못잖게 물 기운[水氣]이 강하게 작용한다. 끊임없이 공급되고 있는 무량한 수기를 반영한 지세 형국명이 필요하다. 유관 적합한 이름이 딱 하나 있다. 바로 ‘해복형(蟹伏形)’이라는 명형국명(明形局名)이다. 대죽리 마을 터는 ‘방게’를 쏙 빼닮았다. 동쪽마와 서쪽마가 기대고 있는 곳은 ‘게[蟹]’의 몸통 부분이며, 동쪽의 주등포산은 왼쪽 집게발, 서쪽의 신풍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는 오른쪽 집게발이다. 게가 누워 있거나[蟹伏] 또는 게의 배[蟹腹]에 해당하는 터는 예부터 천자지지(天子之地) 내지 제왕지지(帝王之地)로 알려져 왔다. 주위의 산세가 언덕처럼 생긴 산이나 바위로 되어 있으면 극귀지지(極貴之地)로 치는데, 좌우의 구담리와 신풍리 쪽 야산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4대강 사업으로 신풍제방이 만들어지면서 낙동강물이 이제 더 이상 ‘방게형’ 터인 대죽리 앞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룡경(疑龍經)』에 따르면 해복형 터 앞에는 연못·늪·소·강 같은 것이 있어야 하며 바위까지 갖추면 품격이 더욱 높아진다고 했다. 전자는 게의 활동무대요, 후자는 게의 먹이다. 대죽리의 경우, 마을 어귀 한 쪽에 자그마한 연못 하나를 만들면 수량 확보와 유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예전의 옥대사[암바위·숫바위]가 먹이 역할을 해줄 수도 있지만 경지 정리할 때 모아둔 칠성바위들을 연못 둘레에 옮겨다 놓으면 금상첨화다. 이 해복형 명당 경관이 완성되면 이제는 마을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원방산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을 만들면 된다. 원방산 능선길 이름은 ‘원방길’이 좋다. 그 길이 상징하는 의미는 ‘음양길’이요, ‘천지길’이요, ‘태극길’이다. 동쪽의 말무덤이 있는 봉우리는 ‘말무덤봉’이나 ‘귀봉(貴峰)’으로 이름하라. ‘주등포산’이 ‘주둥개산’으로 변질되면서 마을에 큰 해악을 끼쳤으니 이제 그 이름은 문헌 속의 글자로만 남겨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주보고 있는 서쪽 끝 봉우리는 ‘소원봉’이나 ‘부봉(富峰)’으로 명명하라. 동양철학에서 동은 권(權)을, 서는 재(財)를 상징한다. ‘게’의 힘은 집게발에 집중돼 있다. 오른쪽 집게발의 힘이 왼쪽 집게발보다 크다. 공교롭게도 오른쪽 집게발인 원방산 서쪽 끝 봉우리가 신풍리 와우형 지세의 ‘소꼬리(牛尾)’와 일치한다. 와우형 터에서는 소의 꼬리가 되는 장소도 혈(穴)자리로 친다. 쇠파리를 쫓기 위해 늘 꼬리에 힘을 줘 휘두르기 때문이다. 자, 이제 그런 상태에서 원방산 탐방길의 ‘구경거리’들을 한 번 물색해보자. ‘좋은 집터와 묘터’도 있고, 고목도 있고, 정자도 있고, 고택도 있다. 마을 어귀 연못[만들어졌다고 가정함]에서 출발해 동쪽 말무덤봉[귀봉]을 거쳐 서쪽 소원봉[부봉]까지 이어지는 코스는, 해복형 지세와 비보 연못⇒귀봉의 말무덤⇒회화나무⇒영모정⇒만죽정⇒평산신씨 묘[풍취나대혈]와 매죽헌⇒퇴계 선생 외갓집 터⇒소원봉[부봉]이다. 이 원방길 코스는 거의 원형으로 되어 있어 마을 안은 물론 바깥쪽의 아름다운 산과 강, 그리고 들이 어우러진 풍광들을 마음껏 조망할 수 있다. ‘말무덤’은 이미 경북도청 신도시 둘레길 제4코스에 들어가 있는 탐방 명소다. 이 원방길이 완성되면 신도청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는 ‘풍취나대형’의 옛 명기는 ‘개 주둥이 터’로 추락한 아픈 역사를 뒤로 하고 ‘해복형’ 대길지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말무덤봉[귀봉] 한 쪽에 구멍 뚫린 상자 책상을 비치해 관광객들로 하여금 성찰함(省察函) 속에 평소 내뱉은 상스러운 말들을 적은 종이를 넣게 하면 어떠랴. 마을 둘레길의 최종 귀착지인 소원봉[부봉]에서 자신의 꿈과 희망 사항을 적은 쪽지를 소원함(所願函) 안에 넣게 하면 어떠랴. 정월대보름이나 아니면 어떤 좋은 때를, 그 ‘반성지(反省紙)’와 ‘소원지(所願紙)’를 불태우는 날로 정해 마을 축제를 열면 또 어떠랴. 많은 사람들이 한대마을 말무덤을 찾아 지난 세월을 치유[힐링]하고 희망찬 미래를 소원봉에서 꿈꾸게 하라. 최고의 장소성(場所性)은 하드웨어적인 물리적 경관을 넘어 사람의 가치관과 태도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요소가 그 장소에 녹아 있을 때 진정으로 완성된다. 해복형 힐링 명당, 그 빛나는 정체성을 지닌 한대마을[대죽리]의 무궁한 건승을 기원한다. ※현지조사에 도움을 주신 김녕 김씨 영사공파 김창빈(82세)님, 김경화(80세)님, 김국빈(73세)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몽일 경북환경연수원 객원교수·풍수학박사](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8-09-17)
대죽리(지보면 대죽리 주민화합 윷놀이) [기사] : 지보면 대죽리 주민들이 2019년 2월 18일 마을회관 마당에서 주민 화합 윷놀이 대회를 가졌다. 이날 윷놀이 대회는 대죽리 5개 반, 청년회, 부녀회, 노인회 등 8개 팀으로 나눠 치러졌다. 대죽리 주민들은 윷놀이에 이어 푸짐한 경품이 걸린 행운권 추첨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경기 결과> △1위(25만 원)뎳 4반, △2위(15만 원)뎳 1반, △공동3위(10만 원)뎳 5반, 청년회(예천신문 2019.02.27.)
대죽리 : →대죽리 마을의 구성, →대죽리 연혁
대죽리(大竹里) 마을의 구성, 대죽리 [里] : 대죽리는 지보면(知保面)의 행정 리동 중의 하나로, 면사무소의 동부에 있다. 구릉성 산지를 배경으로 앞으로는 넓은 들이 있고, 들 복판으로 상주(尙州)-풍산선(豊山線) 916호 지방도(地方道)가 통과하고, 들 끝으로 낙동강(洛東江)이 동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다. 그리하여 수리와 교통이 편리하다. 동은 안동군 풍천면(安東郡豊川面), 서는 지보면 신풍리(知保面新豊里), 남은 안동군 풍천면(安東郡豊川面), 북은 지보면 암천리(知保面岩川里)와 접경하고 있다. 대죽리(東便, 西便)의 면적은 251ha 중 밭 47ha, 논 95ha, 임야 109ha이다. 주산은 미곡이다. 150가구(1973) 중 김령 金을 비롯하여 밀양 朴 30가구, 진주 柳 20가구, 인천 蔡 10가구 등이 살다가, 135가구 637명(1980) 15성 중 김령 金 41가구, 밀양 朴 31가구, 진주 柳 13가구, 경주 崔 13가구, 김해 金 10가구, 인천 蔡 5가구, 기타 22가구가 살았다. 124가구 460명(1985, 남224, 여236) 중 농가 118가구, 비농가 6가구가 살다가, 126가구 458명(1986, 남233, 여225) 중 농가 120가구, 비농가는 6가구가 살고 있는데, 김령 金 40가구 152명, 밀양 朴 20가구 53명, 김해 金 11가구 30명, 진주 柳 10가구 22명, 경주 崔 10가구 28명, 안동 金 3가구 5명, 영일 鄭 3가구 9명, 인천 蔡 3가구 7명, 함안 趙 2가구 3명, 인동 張 1가구 4명, 파평 尹 1가구 3명, 동래 鄭 1가구 2명, 전주 李 1가구 3명, 함양 盧 1가구 2명, 의성 金 1가구 2명, 단양 禹 1가구 2명이 살고 있다.
대죽리(大竹里) 연혁, 대죽리 [里] : 대죽리는 지보면(知保面) 행정 리동 중의 하나로, 삼국시대 초까지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 소속이다가, 서기 9년(백제 온조 27)에 백제(百濟) 소속이 되었고, 그 후 신라(新羅) 소속이 되었다가 190년(백제 초고왕 25)에 백제(百濟) 소속, 3세기 첨해왕 때 신라(新羅) 소속이 되었다. 757년(통일신라 경덕왕 16)에 축산(竺山) 또는 원산(圓山) 소속이었고, 995년(고려 성종 14)에 영남도 용주(嶺南道龍州) 소속이 되었고, 1005년(목종 8)에 용주군(龍州郡) 소속, 1012년(현종 3)에 상주목 용궁군(尙州牧龍宮郡) 소속이 되었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 안동진 용궁현(安東鎭龍宮縣) 소속이 되었고, 임진왜란(1592) 직후에 용궁현 중상면(龍宮縣中上面) 소속이었다가 그 후 용궁현 신상면(龍宮縣申上面) 소속이 되었다. 1857년에 용궁현 신상면(龍宮縣 申上面) 대죽리(大竹里), 암천리(岩川里), 부항리(缶項里)로 나뉘어졌고, 1896년(건양 1) 용궁군 신상면 (龍宮郡申上面) 대죽리(大竹里), 암천리(岩川里)가 되었다. 1914년에 대죽리(大竹里)와 암천리 일부(岩川里一部)를 병합하여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醴泉郡知保面大竹里)가 되었다.(龍宮縣邑誌 1780, 竺山勝覽 1934)
대죽양수장(大竹揚水場) [灌漑] : 지보면 대죽리(大竹里)에 있는 양수장으로, 몽리 면적(蒙利面積)은 9.8ha이다.
대중불교의 빛을 찾아서(大衆佛敎의 빛을 찾아서 : 醴泉연꽃마을 정암 스님) [기사] : 김희균의 기사로, 서울 대원회에서 1991년 10월에 출판한 <대중불교> 107권 6-12쪽(7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중이발관(62년 이발사 외길 인생… "손님은 가족과 같아요") [기사] : 용문면 상금곡리 대중이발관 박용직 대표/ 단골손님들 하루 평균 4~5명 찾아/ 천직으로 알고 건강 허락하면 계속/ 가끔 길을 걷다가 빙글빙글 도는 이발소 삼색등이 보이면 반가울 때가 있다. 스킨로션과 비누향이 뒤섞인 묘한 냄새와 날카로운 면도칼, 작게 잘라놓은 신문지, 새하얀 위생복이 기억난다. 용문면 상금곡리에 '대중이발관'은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관이다. 박용직(78) 대표가 1960년부터 운영 중이다. 이발소에는 이발의자 3개, 수납장과 거울, 타일로 마감한 개수대, 연탄난로, 담배 진열장, 낡은 브라운관 TV가 있다. 거울 아래에는 손때 묻은 가위와 지금은 보기 힘든 면도기를 쓱쓱 문지르던 가죽피대가 걸려 있다. 개수대 옆에는 개업 때부터 함께한 나무의자가 있다. 그리고 수납장에는 오래된 바리깡이 놓여져 있다. 가게 안 물건들은 사용한 지 대략 20년 이상 되어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가 있다. 박 대표는 기술을 배워보라는 아버지의 조언으로 용문초, 대창중을 졸업한 뒤 신문광고를 보고 열일곱 나이에 곧장 서울에 있는 한미종합기술학교에 입학해 이발 기술을 배웠다. 서울에서 3~4년 정도 일을 하다가 그 후 고향에 내려와 대중이발관을 개업했다. 군 입대하게 되어 잠시 다른 사람에게 이발관을 맡겼지만 군 제대 후 지금까지 운영 중이다. 전에는 용문면에만 이발관이 13군데나 있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사람이 엄청 많아서 이발관에 발 디딜 틈도 없었고 아침에 문을 열면 밥도 못 먹어가며 해질 때까지 이발할 정도로 바빴다고 한다. 또한 이발 기술을 배우겠다며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주요 고객층은 용문주민과 인근 감천·유천·효자·은풍면 주민들이다. 단골들은 10~50년 정도 이발관을 이용한 학창시절 친구들과 동네 주민이며 오랫동안 보다보니 속속들이 알 정도이다. 또한 이발관을 찾은 손님들은 농사·자식이야기, 정치이야기를 서로 나눈다. 그럼 어느새 이발관은 동네 사랑방으로 바뀐다. 시간이 지나 인구감소로 인해 용문면에는 그 많던 이발관이 이제 2군데만 남았다. 현재는 하루 평균 4~5명 정도 단골손님들이 이발관을 들린다. 대중이발관 바로 옆이 집이다. 손님이 사정이 생겨 찾아오면 저녁에도 다시 문을 열어 이발한다고 한다. 박용직 대표는 "지금까지 62년째 이발사 일을 하고 있다. 이 직업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이 일이 나의 천직이라 생각하고 건강이 허락하는 그날까지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용문면 상금곡리에 살고 있으며 가족으로는 김신자(76) 씨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다. △주소: 용문면 상금시장길 6(용문초등학교 옆) △영업일: 연중무휴 △요금: 이발 7천 원(고교생 이하 5천 원), 면도 6천 원, 염색 7천 원, 세발(머리감기) 4천 원, 드라이 4천 원(예천신문 2019.04.29.)
대지(大地) [冊] : 퍼얼 벅(Buck, Pearl S.)의 저서를 지보면 지보리 상락(上洛) 출신인 조운제(趙雲濟, 1930-2002, 高麗大 敎授)가 번역한 책으로, 2책, 삽도, 24cm, 서울 금성출판사(金星出版社)에서 1982ㆍ1986년에 출판한 <애장판 세계문학대전집(愛壯版 世界文學大全集)> 50권(478쪽)과 51권(478쪽), 1989년에 출판한 <완역판(完譯版) 세계문학대전집> 47권(550쪽, 揷圖, 18cm)과 48권(541쪽, 揷圖, 18cm), 1990ㆍ1993ㆍ1995년에 출판한 <금성판(金星版) 세계문학대전집> 92권(550쪽)과 93권(541쪽)에 수록되어 있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강릉대, 경남대, 경북대, 계명대(동산), 공주교대, 관동대, 광주교대, 단국대(천안), 대구대, 덕성여대, 동국대(경주), 동서대, 목포해양대, 상명대(천안), 상지대, 서강대, 서울대(중앙), 성균관대(중앙), 수원대, 안동대, 우석대, 울산대, 원광대, 인제대, 인천대, 전북대, 중앙대(제1캠퍼스, 제2캠퍼스), 청주대, 충남대, 충북대, 포항공대, 한경대, 한국교원대, 한성대이다.(keris 2003)
대지도박도(大枝賭博圖) : [그림] : 호명면 직산리 행갈(大枝)에 있는 그림으로, 풍산 김씨들의 것이다. 어느 날, 진산군수 김휘손(金徽孫, 1438-1509)이 호명면 직산리(陰山里)에서 장기를 두게 되었는데, 상대방이 이르기를, "제가 지면 10리쯤 되는 대지산(大枝山) 한 자락을 바치겠습니다. 만약 공께서 지신다면 타고 오신 흰 나귀 한 필을 저에게 주시기를 약속합시다."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김휘손이 농담인 줄 알았는데, 첫판이 끝날 무렵에 일부러 져주면서 품고 있던 한 폭의 산도(山圖)를 굳이 바치기에, 김휘손도 그만 사양할 수 없어 받아들여 여러 대의 산소 터를 마련하게 되었다. 세속에 전하는 말이, 그 사람이 김휘손에게 이 산도를 바치면서 말하기를, "제가 살고 있는 이 산은 여러 가닥으로 된 등등마다 제대로 다 용호(龍虎)가 생겼으며 남향으로 좋은 판국이 이루어졌는데, 아주 명혈(名穴)이 많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여러 대를 이어 지키고 있으나 산소를 한 장도 쓰지 않은 것은 큰 행복을 누릴 만한 대인(大人)을 기다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 사람들을 많이 보고 겪었으나 일찍이 진사주(進賜主)같은 이를 보지 못했으니, 이제 공께서 주인공이 될 듯 합니다. 지금 한 번 받아들인 이후에는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다만 이 산도를 바치는 성의로써 별도로 한 폭 그림을 더 그려서 길이 잊을 수 없다는 정의를 표시하려 합니다."라고 하고, 또 별폭으로 그린 한 폭의 그림을 주더라고 한다. 그 후부터 대지산(大枝山, 廣石山) 여러 자락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고개를 장판재(將板峴)라고 하며, 또 이 대지산은 대개 학가산의 지맥으로서 사천(沙川, 乃城川)이란 냇가까지 이르렀는데, 북으로 뻗어가다가 또 동으로 뻗어서 학가산과 서로 마주 건너다보게 되어있다. 이러므로 술사(術士)들은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라고 하는데 제일 좋은 봉을 성주봉(聖住峰)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 대사와 의상 대사가 최고봉인 성주봉 남북쪽 바위 밑에서 각각 수도를 하였다고 한다.(虛白堂世蹟 1999)
대지못 : →행갈못
대지 바우 [바위] : 감천면 포리(浦里) 새터 앞 큰길가에 있는 바위로, 돼지처럼 생겼다.
대지별묘(大枝別廟) [不조廟] : 호명면 직산리 538번지 행갈(大枝)에 있는 허백당 김양진(虛白堂金楊震)의 사당으로, 대지재사(경북유형문화재 제173호) 경내에 있다. 풍산 김씨들이 1647년(인조 25)에 창건하였고, 1994년 8월에 중건하였다.(虛白堂世蹟 1999)
대지재(大枝齋) [齋舍] : 호명면 직산리 538번지, 학호정(鶴湖亭) 동남쪽에 있는 조선 중기의 건물로, 지방유형건조물(地方有形建造物) 제173호(1983.9.30 指定)이고, 정면 5칸, 측면 2칸, 팔작(八作)지붕이다. 그 외 강당(講堂, 正面 1칸, 側面 1칸, 맞배지붕), 주사(廚舍, 正面 6칸半, 側面 4칸, ᄃ字집, 박공지붕), 고방(庫房, 正面 2칸, 側面 1칸, 맞배, 양기와 이음)이 있다. 풍산인 허백당 김양진(虛白堂 金楊震, 1467-1535)을 추모하고 제향(祭享)하기 위해 안동시 풍천면 오미동(安東市豊川面五美洞)에 사는 후손들이 1670년경에 건립하였다. 뒷쪽으로 낮은 야산을 이용해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재사(齋舍)의 앞쪽에는 주사(廚舍)가 U자형(字形)으로 막아 서 있어 전체 배치는 튼口자(字)로 되어 있다. 주사(廚舍)에 달린 대문을 들어서면 방형(方形)의 안마당이 되는데, 마당 구석에는 큰 바윗돌들이 그대로 놓여져 있어 개기(開基) 때에 자연을 거역하지 않고 순응하려는 뜻이 엿보인다. [齋舍] : 정면(正面)은 막돌 허튼쌓기한 1m 가량의 하층 기단(下層基壇) 위에 표면에 몰탈도(塗)되어 있는 1m 가량의 이중 기단을 다시 쌓고 초석(礎石)은 큰 자연석을 놓았다. 양측 면은 방주(方柱), 전후면(前後面) 대청(大廳)쪽은 원주(圓柱)를 세웠다. 정면 5칸 중 중앙 3칸이 대청으로 우물마루를 깔았고, 양측 간(間)은 각 2칸의 온돌이다. 대청의 앞뒷 벽은 판벽(板壁)으로 되어 있는데, 앞쪽의 어간(御間)에는 쌍미닫이문을 달았던 홈만 아래위로 남아있고, 문은 없어졌다. 양협 간(兩夾間)은 이연 독창(二連獨窓)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중간창(中間窓) 설주는 없어지고 창문틀 아래 뒤에 중간창 설주가 끼워져 있던 홈만 남아 있다. 대청 상부(上部)는 5량가(樑架)로 연등천정이고, 전후 평주(平柱) 위에 주두(柱頭)를 놓아 뒷쪽으로 휘어진 들보를 얹고 안쪽이 밑으로 내려오면서 좁게 사절(斜切)된 판으로 된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종보를 받추었다. 종량(宗樑)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세워 마루에 장혀를 얹었는데 이 대공(臺工)의 모양이 의성 고운사 가운루(義城孤雲寺駕雲樓)의 모양과 흡사한 것이 16세기의 건축 양식으로 보여 진다. [祠堂] : 재사의 뒷편 언덕을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계단으로 10여 단을 오르면 우측으로 박공지붕의 사주문(四柱門)이 보이고, 토담을 쌓은 일곽(一郭)의 공간에 사당(祠堂)이 동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廚舍] : 자연석으로 테두리를 돌리고 흙을 채워 한 단을 만든 축대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웠는데, 벽은 부엌 일부만 돌을 쌓았을 뿐 전부 흙벽으로 되어 있다. 동향한 정면 6칸 반의 우측 2칸째에 대문이 달려 있다. 대문칸의 좌측으로는 대문칸과 뜰쪽으로 개방된 칸반 길이의 우물마루가 놓여져 있고, 연이어 칸반 크기의 온돌방이 꾸며져 있다. 온돌방의 좌측 건물의 꺾어지는 곳에 정면쪽 칸반 측면쪽 2칸의 부엌이 자리잡았고, 이 부엌의 서쪽 안마당 쪽으로 온돌 1칸이 놓여 ᄂ 자(字)를 이루고 있다. 대문칸의 우측에는 마구(馬廐) 한 칸이 놓이고, 마구간의 서쪽으로 부엌 1칸, 2칸 길이의 온돌이 연속 배치되어 주사(廚舍) 전체가 U자형(字形)으로 구성되어 있다. [庫房] : 뜰의 남쪽 재사와 주사(廚舍) 사이에 북향하여 서 있는데, 좌측이 고방(庫房), 우측이 뒤지 각 1칸으로 되어 있다.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판벽(板壁)의 지붕에는 양기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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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