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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1,054:동측류...동학농민운동...
작성자장병창 @ 2020.08.25 17:19:37

  도청신도시 예천 1,054 : 동측류...동학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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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축류 확산화염의 불안정성과 제어에 관한 실험적 연구(동축류 擴散火焰의 不安定性과 制御에 關한 實驗的 硏究 =An Experimental Study on Instability and Control of Co - Flow Diffusion Flames) [學術저널] : 예천 출신인 정석호(1954- , 서울大 敎授) 등(이현호, 황준영, 이원남)의 논문으로, 대한기계학회에서 1997년 1월에 발행한 <대한기계학회논문집 B권> 제21권 제1호 153~164쪽(12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8)

 

  동충하초의 힘 [冊] : 조세연 등의 저서로, 중앙생활사에서 2003년 12월 20일에 발행하였다. 227페이지에 “예천양잠농업협동조합 경북 예천군 예천읍 동본리 457...”이 수록되어 있다.(http//book.daum.net 2006)

 

  동태 : →다름탈

 

  동토 : →다름탈

 

  동토집 : 鄭醴泉 輓 [한국문집총간-동토집(童土集)]/ 윤순거 저 | 한국고전번역원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역사자료󰡑이다.///

 

  동편들(東便들) [들] : 유천면 사곡리 사곡(沙谷) 동쪽에 있는 들이다.

 

  동평 : →동녘들

 

  동포정(東浦亭) [亭子] : 예천읍 고평리(高坪里)에 있는 정자로, 야성인 찰방 송복기(察訪宋福基)가 세웠다. 백암 김륵(栢岩金륵)이 시로써 이르기를, "취해 서리 잎사귀 중정(中庭)에 나리는 것이 어여뻐, 한가한 사람을 지어 옛 정을 말하네. 먼 산에 거(居)한 곳을 점한 지 열 해라. 동화(東華)가 뻑뻑히 뜬 영화 쫓음을 웃으리." 라고 하였다. 또한 감사 이중량(監司李仲樑)의 시(東浦遊仙隱者流 遣閑何必役兩降 圖書左右高眠處 天借三山輿十洲)도 있다.(醴泉郡邑誌 1841 1895, 醴泉郡誌 1939, 嶠南誌 1937)

 

  동포정(東浦亭) [亭子] : 보문면 신월리 성적곡(聖積谷)에 있는 정자로, 야성인 매포(梅圃) 송복기(宋福基)가 시를 지으며 글씨를 쓰던 곳에 그의 문학과 이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650년에 세웠다.(醴泉鄕校誌 2004)

 

  동포정 : 옥천서원(玉川書院)/ 2013.11.30./ 신월리 성적골(聖積洞)의 옹정산(甕井山)에 있다. 예천읍 우계리의 광천(廣川)서원(1786), 보문면의 옥천(玉川)서원과 동포정(東浦亭), 봉화의 창계별사(昌溪別社)에 제향되었다. 건축물 옥천서원은 긴 진입로와 넓은 경내로.../ blog.daum.net/tsc9990/ 선의산산신령(daum 2017)

 

  동포정 : 송복기(宋福基)/ 있고, 무덤은 보문면 신월리 성적골(聖積洞)의 옹정산(甕井山)에 있다. 예천읍 우계리의 광천(廣川)서원(1786), 보문면의 옥천(玉川)서원과 동포정(東... 예천(醴泉) *옥천정사(玉川精舍) 현종정미건(顯宗丁未建) (1667) 보문면 .../ www.shinjongwoo.co.kr/name/sa/san/difh/di42.htm (daum 2017)

 

  동포정 : 옥천서원(玉川書院)3/ 받았는데 이들은 지금도 가보로 전해온다. 문집이 있고, 무덤은 보문면 신월리 성적골(聖積洞)의 옹정산(甕井山)에 있다. 예천읍 우계리의 광천(廣川)서원, 보문면의 옥천(玉川)서원과 동포정(東浦亭), 봉화의 창계별사(昌溪別社)에 제향되었다. 옥천서원.../ ainga.co.kr (daum 2017)

 

  동포정 : 옥천서원(玉川書院)/ 2016.08.22./ 문집이 있고, 무덤은 보문면 신월리 성적골(聖積洞)의 옹정산(甕井山)에 있다. 예천읍 우계리의 광천(廣川)서원(1786), 보문면의 옥천(玉川)서원과 동포정(東浦亭).../ cafe.daum.net/os9990/Dh2q/ 사랑하는 박근혜(daum 2017)

 

  동하의 계절('동하의 季節' 醴泉서 撮影 : 8月 25日 10時 50分 放映-동하의 어린 時節 이야기 담아) [記事] : 용궁면 `회룡포'를 비롯 옛 전통 취락의 정취를 엿볼 수 있는 용문면 `금당실마을', 그리고 문화 유적지 `초간정' 등 예천 지역 명소들이 드라마 배경지로 각광받고 있다. 현재 KBS-2TV에서 방영되고 있는 단막드라마 `드라마시티'의 25일 밤 10시 50분 방영 예정분(豫定分)인 `동하의 시절' 현지 촬영이 2002년 8월 4일부터 시작돼 8일까지 관내 회룡포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제국의 아침 혜종 왕비역인 탤런트 김현주를 비롯 이일웅 등 인기 배역이 출연하는 `동하의 시절'은 금당실마을과 회룡포 등 순수한 자연적 이미지를 담고 있는 예천 지역 명소를 배경으로 사춘기 소년 주인공 `동하'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주변 인물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내용이다.(醴泉新聞 2002-08-15)

 

  동하의 시절 [드라마] : 개포면 신음리 죽전마을에서 촬영한 KBS 드라마시티로, 연출에 이재영, 출연에 김현주, 장기용, 이일웅, 이병욱, 강민규이다. 병든 할아버지, 난봉꾼 아버지, 머리가 모자란 여동생 석미... 시골소년 동하에겐 주위의 모든 환경이 우울하기만 하다. 그러나 삶의 유일한 희망과도 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동네에서 가장 예쁜 순영이 누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학생운동 때문에 고문을 당해 폐인이 된 덕환이 고향에 돌아오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비극의 싹이 트기 시작하는데... 방송 날짜는 2002년 8월 25일 일요일 22:50-24:00 2TV이다.(김승년 醴泉郡廳 홈페이지 醴泉사랑運動參與 2002.8.28)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예천동학농민운동(醴泉東學農民運動), 예천갑오농민운동(醴泉甲午農民運動) [歷史] : 1984년에 예천군에 있던 동학교도들의 농민운동이다. [東學의 醴泉 傳來] : 예천 지방에 동학(東學)이 전해진 것은 1860년대부터 정부의 탄압을 받으면서 이루어졌다. 최시형(崔時亨)은 최제우(崔濟愚)의 명을 받아 1862년 3월 예천 등지를 순회하여 많은 도인(道人)을 얻었으며(天道敎 創建史 第2篇 第1章), 1864년 3월 도통(道通)을 전수받은 후에는 소백산맥 줄기의 양쪽인 예천 등지에서 수도와 전도에 전념하였다(第2篇 第2章). 이 지역이 후에 북접(北接)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게 되고 예천의 수접주(首接主) 최맹순(崔孟淳)이 최시형(崔時亨)의 '금석지전(金石之典)'을 적극적으로 따른 것도 그 때문으로 추측된다.

 

  한편, 강원도에 근거지를 둔 관동포(關東包)는 충청도를 거쳐서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에까지 조직을 확대하여 예천에도 접소(接所)를 설치하였다. 예천을 근거지로 한 관동포는 그 일대는 물론 감천(甘泉)과 충청도의 충주, 그리고 강원도 평창 등지까지 연관을 맺고 세력권을 넓혔다. 그 동안 예천에서 남모르게 동학을 전해준 사람은 예천군 동로소면 소야리(醴泉郡冬老所面蘇野里, 現 聞慶市 東魯面 昭野里)의 최맹순(崔孟淳)이었다. 그는 여러 해 옹기 장사꾼으로 가장하여 여러 곳의 동학신자들과 연락을 하고 있었다. 관청의 감독이 소홀해 지자, 최맹순(崔孟淳)은 1894년 3월 소야(蘇野)에서 드러내 놓고 접(接)이라는 동학 모임을 만들고, 농민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예천의 농민들은 여러 곳에 숨어있는 동학 신자들을 통해서 많이 모여 들었다. 불과 수개월이 지난 여름에 그 수가 7만여 명에 이르렀다. 최맹순은 면리까지 48개의 접으로 늘렸다. 예천의 동학군은 예천읍내가 무방비 상태로 있을 때 쉽게 점령할 수도 있었지만, 최맹순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뿐 아니라 동학농민군은 지주들과 싸우지 말라고까지 하였다. 소야 수접주(蘇野首接主) 예하의 동학농민군은 함창 태봉(咸昌胎峰)의 일본군 병참부(日本軍兵站部)를 위협하기 위해 일부는 산양취합(山陽聚合)에 참가하고 있었지만 그 주력은 예천읍내 공격의 중간 지점인 화지(花枝)와 금곡(金谷)에 집결했다... 호서충의 서상철(湖西忠義徐相轍)의 이름으로 1894년 8월25일을 기하여 안동부 명륜당(安東府明倫堂)에 도취하자는 포고문(布告文)이 각 읍에 보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포고문은 척왜(斥倭)의 기치 아래 유생의 봉기하는 내용으로서... 농민군의 산양취회(山陽聚會)와 서상철 격문(徐相轍檄文)의 척왜 문구는 이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을 크게 자극시켰다. 산양(山陽)과 인접한 태봉병참부 (胎封兵站部)는 독자적으로 농민군의 형세를 파악하려고 죽내 대위(竹內大尉)와 병정(兵丁) 2명으로 이루어진 일본군 정탐 1개 조를 파견했다. 이들은 동학농민군 집결지 부근을 배회하다가 용궁(龍宮) 근처에서 발각, 포위되어 죽내 대위는 피살되었고, 병정 2명은 할지 탈총(割指奪銃) 당하면서 근근히 도생(圖生) 태봉 병참부로 귀대했다. 이 사건은 동학농민전쟁기 농민군과 일본군 간 최초로 벌어진 충돌이다. 예천 일대의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인 최맹순은 유천접(柳川接)의 으뜸인 접주(接主)가 농민 7명과 더불어 지주집을 약탈했다고 하여 죄목을 만들어 관아에 보내어 처벌해 달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예천의 동학농민군은 최맹순의 이 같은 지시에 그대로 따르기만 하지 않았다. 예천의 23개 면 가운데 동학농민군에 비교적 많이 들어간 지역은 동로(冬老), 유천(柳川), 개포(開浦), 제곡면(渚谷面) 농민들이다. 이 지역의 농민들이 많이 동학군에 들어간 이유는 관아와 지주들의 착취로 인한 쌓이고 쌓인 불만 때문이었다. 읍내의 지주들 가운데는 소작료를 너무 심하게 받아서 농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다. 1894년 여름 경상도 북서부는 읍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이 동학농민군의 지배 아래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다스리는 곳에서는 동학에서 보낸 안렴사 안화산(按濂使安華山)이 돌고 있었다. 그의 임무는 관청과 지주들이 농민을 수탈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최맹순은 세금받는 것이 문란하고, 관아가 지나치게 수탈하고, 일부 양반 지주들이 너무 횡포를 부리기에 동학농민군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였다. 박기양(朴琦陽, 參奉), 이유태(李裕泰, 營將), 이삼문(李三文, 先達), 윤계선(尹啓善) 4명은 1894년 읍내에 거주하던 예천의 대지주였다.

 

  그래서 6.7월들어 예천의 동학농민군은 강하게 움직였다. 싸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부자들을 찾아가 돈이나 곡식을 강제로 요구했고, 동학농민군에 들지 않는 이들을 강제로 동학신자가 되게 하였다. 그런 중에 최맹순의 다스림을 벗어나서 약탈을 함부로 하는 동학농민군도 나타났다. 관아에서는 이 이상 그들을 그냥 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예천읍내(醴泉邑內)의 관아는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을 그때그때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막을 만한 힘도 갖지 못했다. 포 쏘는 군사가 20명 있었을 뿐, 군인들은 제도만 있을 뿐 실제로는 없는 상태였다. 7월로 접어들면서 예천의 동학농민군은 자주 읍내에 들어와 지주집을 약탈해 갔다. 5일 밤에는 동학교도 수 10명이 대지주인 이유태(李裕泰, 楊州大監 李裕寅의 同生)를 끌어내어 묶은 후 두들기어 거의 죽게 만들고, 돈과 재산을 약탈하여 갔고, 7일에는 읍의 관리 황준대(黃俊大)의 동생 무덤을 보복으로 몰래 파헤쳤고, 9일에는 읍의 관리 김병운(金炳運)이 매우 두들겨 차이고 그의 아버지 무덤까지 파헤쳐 졌다. 15일에는 우음동(于音洞)의 동학농민군 수 10명이 서울나들이(開浦面 京津)에서 안동 부사(安東府使)의 행차를 습격하여 옷과 모자를 빼앗고 마구 때렸다. 예천의 관아는 읍내로 동학군이 쳐들어오거나 읍내에서 높은 관리의 행차가 습격을 당해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읍민들이 스스로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그들이 갖고 있는 재산을 모두 잃게 될 형편이었다. 그것도 보통 때 그들이 다스려온 소작인, 종, 변두리 지역의 사람들에게 당할 것 같았다. 더욱이 전부터 알고 있던 동학교도한테 당할 것 같았다. 읍민 중에 지도자 격인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읍내를 지키고 동학군의 침입을 막을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래서 예천읍내의 동부(東部), 서부(西部), 남부(南部), 북부(北部) 등 4부의 부민(部民)들이 부병(部兵)을 만들어 읍내를 지키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일은 크나큰 위험이 뒤따를 수도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곳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조정이나 경상도 감영(慶尙道監營)의 군대가 예천까지 보내진다는 것은 기다릴 수 없었고, 이웃의 여러 군도 일이 있을 때 도와줄 형편이 아니었다. 수 없이 많은 농민군이 쳐들어와 읍내가 점령당하면 성주(星州)에서처럼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했다. 이런 위험이 있을 것 같은 데도 부병(部兵)을 만드는데 앞장선 이는 정대일(鄭戴一)이었다. 예천군내의 양반 지주들이 동학군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을 때 정대일은 읍내 부민(部民)들의 힘을 모아 부병(部兵)을 이루려 하였다. 그래서 읍내의 지도자 격인 사람들은 7월 24일 객관(客館)으로 모여 대책을 마련했다. 그리고 군수 조원하(郡守趙爰夏)의 도움을 받아 26일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집강소를 이끌어 갈 지도자들은 관아에서 뽑아내고 규약을 만들어 운영하도록 하였다. 이 집강소는 전라도에서 동학교도들이 만든 집강소와는 전연 반대되는 것이다. 즉 예천의 집강소는 동학교도들을 막기 위해 예천읍내 부민(部民)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醴泉邑民들, 東學軍을 막을 準備를 하다] : 예천읍민으로 이루어진 예천 집강소의 지도자들은 장문건(張文健), 황송해(黃松海) 등이었다. 힘세고 담력있는 사람 75명을 뽑아서 여러 가지 직책을 만들어 맡겼다. 그리고 읍내나 읍내에서 가까운 동리의 농민들로 부병으로 삼았다. 8월 1일 처음 실시한 인원 조사에서 부병의 수는 1,500여 명이었다. 읍내에서 부병을 만들던 7월 말은 동학농민군이 찾이한 곳이 읍내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 위에 농민들은 날이 갈수록 급속히 동학교도가 되던 때였다. 따라서 집강소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부병을 만들어 싸울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도 가리지 않고, 늙거나 약하지 않는 한 부병에 들게 하였다. 집강소는 이 부병을 다스리기 위해 모든 것을 군수의 허락으로서 하도록 하여 관아의 힘을 빌리려 하였다.

 

  읍내 이외 곳에도 따로 집강을 세우고 읍내와 마찬가지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점검을 한 후 집강소에 보고하도록 했는데, 군수조원하(趙爰夏)는 각 면에 오가작통(五家作統)을 만들라고 명령을 내려 이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에 대한 대답은 동부 이태환(東部李台煥)이 외동부면(外東部面, 東本2里), 승도지면(繩刀只面, 繩本里), 외북부면(外北部面)이 힘을 합쳐 동학군을 공격하자고 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부병에 드는 돈은 부자들의 찬조금과 관아에서 받은 세금으로 하였다. 만일 부병에 들어온 사람이 동학농민군으로 옮겨가면, 집을 헐고 군대의 법으로 처벌한다는 엄한 규정도 마련해 놓았다. 이에 따라 8월 9일 남부 청복정(南部淸福亭, 現 醴泉邑 淸福里) 사람 7명이 잡혀들고 그들의 집이 부서졌는데, 이는 그 뒤 읍민들이 집강소 말을 따르게 하는 데는 효과가 있었으나, 동학농민군과 서로 맞붙어 싸우게 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部兵과 東學農民軍이 邑內에서 싸우다] : 집강소는 7월 26일부터 관아를 대신하여 읍내의 치안 유지를 맡게 되었다. 부병에게도 무장을 시켰다. 군 창고에 있던 창과 칼을 나누어주고 언제든지 이를 지니고 다녀 동학농민군이 읍내에 쳐들어오면 싸우게 했다. 이 날 읍내 사정을 모르고 다시 이유태(李裕泰) 집을 쳐들어온 동학농민군 7명이 즉각 붙잡혔다. 그런데도 동학 지도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싸움을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예천의 동학농민군 중 일부는 집강소가 치안을 맡은 읍내에 들어올 수 없게 되자, 읍내로의 길을 막아 버렸다. 이에 따라 보통 때 매우 크게 열리던 예천읍내 장시는 장날이 되어도 사람이 뜸해졌고, 읍민에게 대어주는 식량이나 땔감이 모자라게 되었다. 그러던 중 8월 초 예천에서는 두 편이 심히 싸우게 될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그 하나는 동학농민군이 읍내에 사는 지주 4명을 보내라고 한 일이다. 8월 8일 적성(赤城)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권경함(權景咸)은 제곡면 금곡동(渚谷面金谷洞)에 접(接)을 세워 권순문(權順文)을 접주(接主)로 삼은 뒤 농민들을 모으는 한편 대지주들인 박기양(朴琦陽), 이유태(李裕泰), 이삼문(李三文), 윤계선(尹啓善) 4명을 보내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동학농민군과 싸우려고 만들어진 집강소가 그들이 원하는 지주 4명을 보내줄 수 없었다. 8월 9일 집강소는 지주 4명을 불러놓고 회의를 열어서 죽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을 보내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집강소의 보호를 받게된 지주 4명은 그 댓가로서 많은 돈을 군사비로 내놓겠다고 자원하였다. 또 하나의 사건은 집강소가 동학교도 11명을 붙잡아 도적죄를 지었다 하여 생매장하여 죽인 것이었다. 8월 9일 밤 3시쯤 도적 수 10명이 북부 구산(北部龜山, 現 醴泉邑 葛九里)에서 약탈을 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즉시 부병을 보내 감천(甘泉) 땅까지 추격하여 도적 11명을 잡아왔다. 이들이 갖고 있는 조총(鳥銃), 칼, 쇠몽두리도 빼앗았다. 잡혀온 동학농민군은 오히려 고문하는 부병에게 겁을 주려고 하였다. 동학농민군의 더 나은 힘에 자신을 갖는 태도였다. 즉, "우리는 모두 동학교도인데 우리를 죽인 후 너희들이 감히 살 수 있을 것 같으냐?"라는 것이었다. 수 백여 명의 부병들이 보는 자리에서 이같이 항의하자 일부 부병들은 너무나 분하여 즉시 한천(漢川) 가로 끌고가 모래에 그들을 묻어 버렸다. 산 채로 묻힌 도적들은 금곡(金谷)의 동학교도들이었다. 금곡접(金谷接)에서는 그날 즉시 편지를 보내, "지난 밤 붙잡은 11명을 석방해 달라."라고 하였다. 집강소는 무기를 가진 이들의 행동을 보면 도적임이 틀림없기 때문에 법에 의해 사는 곳과 이름도 묻지 않고 그 날로 땅에 묻어 죽였다고 회답하였다. 이 사건은 집강소 설치 후 불안하게 지켜온 예천의 평화를 깨트린 것이 되었다. 소야(蘇野)의 동학 지도자인 최맹순은 14,15일 연이어 편지를 보내 청복정 동학교도(淸福亭東學敎徒)의 사형(私刑)과 동학교도 11명의 파묻은 사건에 경고를 하였다.

 

  이 편지에서 최맹순은 새로 들어온 무뢰한들이 동학교도를 빙자하여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한 것을 알고 있지만, 죄의 있고 없음도 알아보지 않고 11명이나 한꺼번에 파묻어 죽인 것은 살인이니, 그 주모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집강소에 대한 경고 편지를 상주 동접(尙州東接)에도 보냈다. 그 때 경상도북서부의 가장 센 동학군인 상주의 동학군까지 겁을 주니까, 집강소는 굴복하여 곧 청복정 동학교도 7명을 풀어 주었다. 8월 중순 동학농민군은 예천을 먼저 점거하여 군 창고에 보관된 무기를 빼앗아 일본군을 치려고 하였다. 그래서 최맹순이 이끄는 농민군은 예천읍내 공격의 중간 지점인 화지(花枝)와 금곡(金谷)에 모였다. 예천의 집강소는 여러 곳에 비밀히 보낸 스파이의 보고를 통하여 때때로 변하는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 읍민의 흔들림은 심각했다. 읍의 변두리에서도 피난하는 사람이 산과 들을 덮었다. 8월 21일 경상도 북서부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13명이 모인 다음, 예천의 집강소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생매장한 주모자 몇 명을 보내지 않으면 읍내를 공격하여 보복하겠다는 것이었다. 일이 여기까지 이르자 집강소는 크게 당황하게 되었다. 뒤에 보내진 다른 편지에서 최맹순은 책임자를 2명으로 제한하는데, 이들은 집강 3명 가운데 9월 14일 병으로 사임한 박인문(朴仁文)을 제외한 장문건(張文健), 황송해(黃松海)로 보인다. 부병의 실제 지도자인 이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동학농민군이 법을 어겨가면서 도적을 위해 보복하여 우리를 죽이려 한다면 우리는 죽는 수밖에 없다는 슬픈 답장을 보내는 한편 안동도총소(安東都摠所)와 순영(巡營)에 매우 급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고립된 예천읍을 도울 수 있는 곳은 큰 읍인 안동뿐이었다. 안동에서 정면으로 쳐들어올 것을 알게 된 예천의 동학농민군은 장기전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미 패한 적이 있던 안동, 의성의 동학농민군은 화지접(花枝接)에 합류하여 읍내에 들어가는 길을 완전히 막으면 식량과 땔감이 들어가지 못해 1개월 이내에 예천읍을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화지의 동학농민군은 여러 곳에 연락하여 북쪽으로는 금곡(金谷), 은풍(殷豊), 송정(松亭), 동쪽으로는 도평(島坪), 감천(甘泉), 돌꼬지, 남쪽으로는 피실(稷谷), 서쪽으로는 화지(花枝)에 주둔하며 읍내를 포위하였다. 이렇게 되자, 읍내에서는 큰 일이 났다. 교통이 막힌 지 근 한 달이 지나 식량이 바닥을 드러냈는데, 동학농민군이 사방을 막고 땔감과 식량이 들어가는 것을 철저히 막고 있는 것을 보게 되자, 읍내의 민심은 더욱 술렁거렸다. 군수까지도 여러 날을 죽으로 끼니를 넘기는 형편이었다. 밤낮 방어에 지친 부병(部兵)도 피로가 쌓이고 쌓이었다. 집강소의 여러 임원들은 날이 갈수록 굶게 되면, 민심이 흐트러질 터이니, 지금 한 차례싸움을 치루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비록 수가 많으나, 부병이 강한 짜임새로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8월 21일 부병 300여 명은 읍내를 나와 화지(花枝) 1리 거리까지 쳐들어갔다. 화지 남산(南山)과 마을에 있는 수 천 동학농민군이 각기 무기를 들고 응하여 오자 짐짓 패하는 체 읍내로 돌아왔다. 부병에게 유리한 읍내로 동학농민군을 이끌어 들여 한바탕 싸우려는 작전이었다. 집강소의 이 작전은 성공했다. 보고를 들은 동학지도자 최맹순은 크게 노하여 그가 거느리던 각 접(接)에 읍내(邑內)로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동로(冬老)의 동학농민군도 화지에 합쳤다. 금곡(金谷)에도 각 접의 동학농민군이 모여들었다. 싸움에 대비하여 집강소는 읍 가까운 동리의 농민들을 총동원시켰다. 읍내 사람 중 살림이 조금 넉넉한 이에게는 돈이나 곡식을 내도록 하여 부병에게 든든히 먹이었다. 그리고 읍민의 단결을 위해 읍의 주산(主山)인 장군암(將軍岩)과 의충사(毅忠祠)에 '존귀한 영혼이여! 내려 오셔서 집강소를 도와 추한 무리들을 섬멸시켜 주소서' 라고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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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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