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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1,125:마약범죄학...마을이발관...
작성자장병창 @ 2020.10.19 06:07:30

  도청신도시 예천 1,125 : 마약범죄학...마을이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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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약범죄학 5 [冊] : 용궁면 무이리 출신인 전경수(1953- , 한국마약범죄학회 회장)의 저서로, 710쪽, B5, 한국마약범죄학회에서 2004년 9월 15일에 발행하였다. [책소개] : 마약류 범죄자 대체의료교정에 관한 책. 약학, 정신의학, 법학 등의 기초응용 학문을 토대로 마약범죄 수사현장 실무에서 응용될 수 있는 수사의 실제와 이론을 서술하였다. [목차] : 제1편 개황 / 제2편 정신 / 제3편 교도소 시설내 교정 / 제4편 대체의료 교도관 / 제5편 마약류 투약 범죄자 대체의료교정 / 부록 1. 법무부 공주치료감호소 N.A. / 부록 2. 상담교정의 기초이론 / 부록 3. 행형법(daum 2007)

 

  마약범죄학 개론 1(痲藥犯罪學 槪論 1) [學術저널] : 용궁면 가야리 출신인 전경수(全經壽, 1952- , 光云大 行政學 博士, 韓國痲藥犯罪學會 事務總長)의 논문으로, 한국마약범죄학회에서 1999년에 발행한 <마약범죄연구> Vol.2 22-26쪽(5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keris 2005)

 

  마약범죄학 개론 2(痲藥犯罪學 槪論 2) [學術저널] : 용궁면 가야리 출신인 전경수(全經壽, 1952- , 光云大 行政學 博士, 韓國痲藥犯罪學會 事務總長)의 논문으로, 한국마약범죄학회에서 1999년에 발행한 <마약범죄연구> Vol.3 24-27쪽(4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keris 2005)

 

  마약범죄학 개론 3(痲藥犯罪學 槪論 3) [學術저널] : 용궁면 가야리 출신인 전경수(全經壽, 1952- , 光云大 行政學 博士, 韓國痲藥犯罪學會 事務總長)의 논문으로, 한국마약범죄학회에서 1999년에 발행한 <마약범죄연구> Vol.4 24-33쪽(10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keris 2005)

 

  마약범죄학 개론 4(痲藥犯罪學 槪論 4) [學術저널] : 용궁면 가야리 출신인 전경수(全經壽, 1952- , 光云大 行政學 博士, 韓國痲藥犯罪學會 事務總長)의 논문으로, 한국마약범죄학회에서 2000년에 발행한 <마약범죄연구> Vol.6 46-61쪽(16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keris 2005)

 

  마우의방(馬牛醫方) [冊] : 예천백 권중화(醴泉伯權仲和)가 1399년(정종 1)에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부록으로 신편(新編)한 수의학 책으로, <신편 집성마의방 및 우의방(新篇集成馬醫方및牛醫方)>은 송, 원 시대의 마우방서(馬牛方書)와 고려인들의 경험들을 참작 수집한 고려 시대의 수의학적 지식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그 서(書)에 이 책의 성립에 관한 간단한 기사가 적혀 있고, 본문의 내용 중 <마의방(馬醫方)>은 '양마상도양마선모지도(良馬相圖良馬旋毛之圖)' 등을 비롯하여 오장병 증치(五臟病證治), 풍문(風門), 제황문(諸黃門), 제창문일개(諸脹門一疥), 창문(瘡門), 잡병문(雜病門) 등에 이르기까지 마상(馬相), 마병(馬病)에 관한 술법(術法)을 열거하였고, <우의방(牛醫方)>에도 앞서 기록한 서(書)와 비슷한 의미의 방사량 서(房士良序)가 붙어 있고, 상우법(相牛法)으로부터 온역문(瘟疫門), 안병문(眼病門), 산병문(産病門), 제병문(蹄病門), 잡병문(雜病門) 등에 이르기까지의 우상(牛相), 우병(牛病)에 관한 방법을 논하여 간략하나마 수의학으로서 일정한 체계를 세운 방서(方書)이다. 그런데 이 마의방(馬醫方) 중에 아래와 같은 동인 경험방(東人經驗方)이 수록되어 있다. ① 동인 경험 목양법(東人經驗牧養法), ② 동인 경험방(東人經驗方), 국구산(麴求散), 치마패위불조설사(治馬脾胃不調泄瀉), ③ 동인경험(東人經驗), 치창만방(治脹滿方), ④ 동인경험(東人經驗), 치마개(治馬疥)이다. 그리고 <우의방(牛醫方)>에도 일방(一方)이 기재되어 있는데, 동인경험 치졸서뢰(東人經驗治卒서뢰)이다. 이상에 기록한 동인 경험방(東人經驗方)은 고려인들의 전통적 경험방(傳統的經驗方)을 가리킨 것인 듯한데, 본 처방법(本處方法)이 고려 말 경에 성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동인 경험방(東人經驗方)' 중에서 인용된 것인지, 혹은 마우방(馬牛方)에 관한 고려인들의 경험방을 수집한 수의학의 전문 방서(方書)로 된 것인지 억단하기 어려우나, 고려 시대에 이미 수의학에 관한 전통적 경험방 처방이 많이 실용되어 온 것만은 확실하다. 이 방서는 1398년(태조 7)부터 그 다음해인 1399년(정종 1)에 성립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에 부간(附刊)된 것인데, 그것이 1580년(선조 13)에 전주부(全州府)에서 개간(改刊)되고, 그 후 1633년(인조 11)에 다시 제주(濟州)에서 개간되었다. 이 제주본(濟州本)은 기묘년 중하(己卯年仲夏)에 봉천 췌문재(奉天萃文齋)에서 영인(影印)되었다.(東文選 第103卷, 韓國醫學史 188쪽 189-190쪽)

 

  마을금고 이사장 인맥대관((全國)마을金庫理事長人脈大觀. 第1輯) [冊] : 마을금고이사장인맥대관 편찬위원회(마을金庫理事長人脈大觀編纂委員會) 편저로, 한밝펴냄터에서 1980년에 발행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1층 서고자료신청대에 소장되어 있다. 예천 관련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www.nl.go.kr 2006)

 

  마을백서(豊壤面 '마을帛書' 發刊) [記事] : 풍양면(면장 정석홍)에서는 마을별 내력과 관련 역대 인물, 변화된 모습 등 주민들이 자신의 마을에 대해 궁금해 하는 각종 행정 정보와 현황에 대해 수록한 `마을백서'를 제작 배포해 마을에 대한 자료를 필요로 하는 내방객이나 지역민은 물론 행정 정보를 필요로 하는 마을 이장, 주민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면사무소에서는 지난 상반기 중 면내 30개 마을별로 마을의 역사, 유래, 지도, 역대 이장, 지도자, 부녀회장, 문화재, 출향인, 사업 현황 및 계획, 특산물 등 다양한 정보를 모아 백서로 제작해 각 마을에 배포했다. `마을백서'는 자긍심을 고취하고 행정에 대한 신뢰를 이끌어 가는데도 한 몫을 다하고 있다.(醴泉新聞 2003-07-17)

 

  마을봉 : →망월봉

 

  마을이발관(理髮人生 60年 醴泉邑 이재원 氏 ; 別난 人生 외길 人生// 健康 許諾하는 한 繼續 할 生覺) [記事] : 대창중고등학교를 향해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마을이발관’. 이곳 주인은 올해 75세의 이재원 씨.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어린아이가 이발을 하고 있다. 일을 하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내가 15살 때부터 이 일을 시작했으니 60년 정도 되었네요.” 이재원 씨가 언제 이곳에서 이발관 문을 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토박이 40∼50대들은 “내가 어렸을 때도 있었다.”고 말한다. 굳이 정확한 연도를 묻자 1976년부터라고 했다. 이발관 내부는 업소 명칭이 대답하듯 한결 더 ‘마을이발관’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오래됐지만 제법 편안할 것 같은 낡은 의자, 앞으로 머리 숙여 감겨주는 옛날 세면대, 골동품 가게에나 있을 것 같은 바리캉, 그리고 적당히 야한(?) 달력까지……. 아직도 단골손님이 제법 있단다.

 

  동네 토박이가 주고객층인 데다 설령 이사를 가도 할아버지의 손맛을 잊지 못해 일부러 머리 깎으러 오는 사람도 많다. “아저씨, 상구도(아직도) 하니꺼?”라며 찾는 대창중고 졸업생도 가끔씩 있다고. 할아버지가 맞겠지만 이들에게는 아직도 ‘아저씨’이다. 이런 손님들은 20∼30년 단골은 기본이다. 이들은 단골이 아니라 이웃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오래하다 보니 자연스레 친구가 되고, 때론 형님이다. “내가 처음 이발을 배울 때는 하루에 물을 1백50통까지 져야 했고, 새벽 5시부터 일을 시작했어요.” 이유를 묻자 예전에는 지금처럼 상수도 시설이 없어 동네 우물가에 가서 물을 지고 와야 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처음 이발 기술을 배우던 곳은 지금은 사라진 예천읍 남본리 ‘동아이발관’이다. 현재 프로스펙스 근처인데 견습생의 신분이다 보니 이발은 어깨너머로 배우고 1년이 지나자 아이들의 이발만 하고 머리 감기는 일을 했다고 한다. 당시 이곳은 직원은 6명 정도가 되었단다. 요즘으로 따지면 중소기업 수준이 되지 않을까? 그때는 종일 이발을 하다보면 하루가 어떻게 간 지 모르게 정신없이 흘러갔고, 이것 말고 다른 일은 한 적이 없냐고 묻자 서울 종로5가에서 이발 일을 하다가 2년 남짓 농산물 유통 일을 했지만 그것도 맞지 않아 포기하고 다시 본업이자 천직인 이발을 하게 되었다고. 그 당시를 묻자 그는 털털한 웃음을 보이며 그 당시의 삶을 회상했다. “그때만 해도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힘들었지. 눈치껏 이용기술을 배우느라 참 힘들었었어.” 1976년부터 지금의 자리에서 이발관을 운영한 이재원 씨는 이용 일을 하면서 아들도 키웠다. 본래 ‘새마을이발관’으로 하고 싶었는데 당시에는 새마을이라는 이름을 자유롭게 쓰지 못해 ‘새’자는 빼고 ‘마을이발관’이라고 지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새마을이발관’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동네 구석이라서 ‘마을이발관’인데, 시대가 변해 지금은 이곳이 오히려 출발점이다. 이곳의 주소는 ‘중앙로 1-1‘번지이다. 대화 중 ‘최연소 손님’의 이발이 끝났다. 꼬맹이가 앉은 자리에는 예전에 보던 나무 송판이 있었다. 20여분 간 빠르게 움직이는 손과 세밀한 그의 행동은 세월의 내공이 쌓인 장인의 솜씨였다. 이재원 씨는 자주 찾아오는 ‘노인 단골손님’들이 어느 날부터 찾아오지 않으면 걱정이 된다고 한다. 그동안 오랫동안 단골손님으로 찾아왔던 사람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기 때문이다. 영업필증이 빛이 바랜 것처럼 6년 전에 잠시 일을 쉬어 봤지만 오히려 병이 나서 쉬지 못하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는 그는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계속할 계획이라고 말한다.(醴泉新聞 2013년 11월 14일)

 

  마을이발관(醴泉 '마을理髮館' 이재원 氏, 理髮 人生 60年…"健康 許諾하는 날까지 할 것") [記事] : 산중턱에 위치한 예천 대창중고등학교를 향해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마을이발관', 이 곳 주인은 올해 75세의 이재원 씨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어린아이가 이발을 하고 있다. 일을 하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내가 15살 때부터 이 일을 시작했으니 60년 정도 되었네요." 이재원 씨가 언제 이곳에서 이발관 문을 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토박이 40∼50대들은 "내가 어렸을 때도 있었다."고 말한다. 굳이 정확한 연도를 묻자 1976년부터라고 했다. 이발관 내부는 업소 명칭이 대답하듯 한결 더 '마을이발관'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오래됐지만 제법 편안할 것 같은 낡은 의자, 앞으로 머리 숙여 감겨주는 옛날 세면대, 골동품 가게에나 있을 것 같은 바리캉, 그리고 적당히 야한(?) 달력까지……. 아직도 단골손님이 제법 있단다.

 

  동네 토박이가 주고객층인 데다 설령 이사를 가도 할아버지의 손맛을 잊지 못해 일부러 머리 깎으러 오는 사람도 많다. "아저씨, 상구도(아직도) 하니껴?"라며 찾는 대창중고 졸업생도 가끔씩 있다고. 할아버지가 맞겠지만 이들에게는 아직도 '아저씨'이다. 이런 손님들은 20∼30년 단골은 기본이다. 이들은 단골이 아니라 이웃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오래하다 보니 자연스레 친구가 되고, 때론 형님이다. "내가 처음 이발을 배울 때는 하루에 물을 1백50통까지 져야 했고, 새벽 5시부터 일을 시작했어요." 이유를 묻자 예전에는 지금처럼 상수도 시설이 없어 동네 우물가에 가서 물을 지고 와야 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처음 이발 기술을 배우던 곳은 지금은 사라진 예천읍 남본리 '동아이발관'이다. 현재 프로스펙스 근처인데 견습생의 신분이다 보니 이발은 어깨너머로 배우고 1년이 지나자 아이들의 이발만 하고 머리 감기는 일을 했다고 한다. 당시 이곳은 직원은 6명 정도가 되었단다. 요즘으로 따지면 중소기업 수준이 되지 않을까? 그때는 종일 이발을 하다보면 하루가 어떻게 간 지 모르게 정신없이 흘러갔고, 이것 말고 다른 일은 한 적이 없냐고 묻자 서울 종로5가에서 이발 일을 하다가 2년 남짓 농산물 유통 일을 했지만 그것도 맞지 않아 포기하고 다시 본업이자 천직인 이발을 하게 되었다고. 그 당시를 묻자 그는 털털한 웃음을 보이며 그 당시의 삶을 회상했다. "그때만 해도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힘들었지. 눈치껏 이용기술을 배우느라 참 힘들었었어." 1976년부터 지금의 자리에서 이발관을 운영한 이재원 씨는 이용 일을 하면서 아들도 키웠다. 본래 '새마을이발관'으로 하고 싶었는데 당시에는 새마을이라는 이름을 자유롭게 쓰지 못해 '새'자는 빼고 '마을이발관'이라고 지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새마을이발관'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동네 구석이라서 '마을이발관'인데, 시대가 변해 지금은 이곳이 오히려 출발점이다. 이곳의 주소는 '중앙로 1-1'번지이다. 대화 중 '최연소 손님'의 이발이 끝났다. 꼬맹이가 앉은 자리에는 예전에 보던 나무 송판이 있었다. 20여분 간 빠르게 움직이는 손과 세밀한 그의 행동은 세월의 내공이 쌓인 장인의 솜씨였다. 이재원 씨는 자주 찾아오는 '노인 단골손님'들이 어느 날부터 찾아오지 않으면 걱정이 된다고 한다. 그동안 오랫동안 단골손님으로 찾아왔던 사람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기 때문이다. 영업필증이 빛이 바랜 것처럼 6년 전에 잠시 일을 쉬어 봤지만 오히려 병이 나서 쉬지 못하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는 그는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계속할 계획이라고 말한다.(醴泉新聞 2015년 03월 25일)

 

  마을이발관 : 마을이발관/ 주소 경북 예천군 예천읍 중앙로 1-1, (지번) 예천군 예천읍 노상리 42-1/ 카테고리 이발소(dau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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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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