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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1,136 : 마전리...마전정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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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麻田1里(市場, 陰地石溪, 陽地石溪)] : 마전시장이 서서 지보면의 중심지이다. 주민의 1/3 이상이 상업에 종사하고 있고, 1979년 대통령 하사금 150만 원과 자부담 400만 원으로 지보면민회관(知保面民會館)을 세웠다. 면적은 178ha 중 밭이 45ha, 논 48ha, 임야 85ha이다. 139가구 677명(1980) 중 한산 李 9가구, 연주 玄 8가구, 연안 車 8가구, 안동 金 7가구, 경주 崔 7가구, 기타 123가구가 살다가, 161가구 601명(1985, 남271,여330) 중 농가 80가구, 비농가 38가구가 살았다. 그 후 118가구 555명(1986, 남261,여294) 중 농가 80가구, 비농가 38가구가 살고, 한산 李 18가구 32명, 경주 崔 17가구 25명, 안동 金 14가구 20명, 동래 鄭 11가구 20명, 연주 玄 10가구 24명, 김해 金 10가구 18명, 연안 車 7가구 20명, 밀양 朴 5가구 12명, 풍산 柳 4가구 9명, 남원 梁 4가구 10명, 밀양 孫 4가구 8명, 안동 張 3가구 7명, 진주 姜 3가구 6명, 창원 黃 3가구 6명, 장흥 林 2가구 5명, 함안 趙 2가구 5명, 파평 尹 2가구 4명, 남양 洪 2가구 5명, 안동 權 2가구 4명, 순흥 安 2가구 4명, 충주 石 1가구 2명, 용궁 全 1가구 2명이 살고 있다. [麻田2里(원학, 구마전)] : 낙동강 변에 있어 토질이 비옥하여 채소류와 마늘이 특산물이다. 1970년대에 초가를 기와집으로 바꾸었고, 골목을 우마차길로 바꾸었다. 강둑을 막아 논밭을 개간하여 이 논밭을 마을 공동농장으로 하여 1980년에 처음으로 보리와 밀을 심었다. 면적은 160 ha 중 밭 38ha, 논 50ha, 임야 72ha이다. 87가구(1973)가 살고 있다가, 80가구 389 명(1980) 중 연주 玄 29가구, 밀양 朴 3가구, 함양 朴 3가구, 한산 李 5가구, 기타 40가구가 살았다. 82가구 356명(1985, 남176, 여180) 중 농가 72가구, 비농가 10가구가 살고 있다가, 71가구 306명(1986, 남155, 여151) 중 농가 64가구, 비농가 7가구가 살고, 연주 玄 25가구 60명, 밀양 朴 8가구 18명, 동래 鄭 4가구 10명, 경주 崔 3가구 6명, 안동 金 3가구 8명, 용궁 全 2가구 4명, 한산 李 2가구 3명, 김해 金 2가구 6명, 해주 崔 2가구 6명, 안동 權 2가구 6명, 경주 李 2가구 3명, 기타 15가구 18명이 살고 있다.
마전리(麻田里) 연혁, 마전리 [里] : 마전리는 지보면(知保面) 행정 리동 중의 하나로, 원래 삼국시대 초까지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 소속이다가, 서기 9년(백제 온조 27)에 백제(百濟) 소속이 되었고, 그 후 신라(新羅)의 소속이 되었다가 190년(백제 초고왕 25)에 백제(百濟) 소속, 3세기 첨해왕 때 신라(新羅) 소속이 되었다. 757년(통일신라 경덕왕 16)에 축산(竺山) 또는 원산(圓山) 소속이었고, 995년(고려 성종 14)에 영남도 용주(嶺南道龍州) 소속이 되었고, 1005년(목종 8)에 용주군(龍州郡) 소속, 1012년(현종 3)에 상주목 용궁군(尙州牧龍宮郡) 소속이 되었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 안동진 용궁현(安東鎭龍宮縣) 소속이 되었고, 임진왜란(1592) 직후에 용궁현 내하면(龍宮縣內下面) 소속이 되었다. 1857년에 용궁현 내하면 마전리(龍宮縣內下面麻田里)가 되었고, 1895년(고종 32)에 용궁군 내하면(龍宮郡內下面) 소속이 되었고, 1914년에 예천군 지보면(醴泉郡知保面) 소속이 되었는데, 내하면(內下面)의 마전리(麻田洞), 석계리(石溪里), 원학리(元鶴里)와 비안군 현내면 반룡동(比安郡縣內面蟠龍洞) 일부를 병합하여 마전리(麻田里)라고 하였다. 1962년 5월 10일 행정운영 이동 설치에 따라 1.2리로 분동(分洞)되었다.(竺山勝覽 1934)
마전시장 : →백곡장, →백골
마전1리(知保面 麻田1里) [記事] : 지보면 마전1리는 지보면의 남부에 속해 있으나, 일부는 시장에 편입돼 있다. 본래는 용궁면 내하면의 지역으로 조선시대 마위전(馬位田)이 있어 마전동(馬田洞)이라 했다.
하지만 그 글자가 좋지 않아 마(麻)를 많이 재배하여 마전(麻田)으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마전리는 28번 국도변에 8개 마을이 산재해 있고 마을 앞에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시계동이라고 불리는 석계리, 양지시끼동이라 불리는 양지석계, 삼밭나드리의 구마전, 월태이라 불리는 월탄, 워낙골로 불려지는 원학, 백골, 요성, 마전장터, 삼거리, 등말랭이, 비선등 등이 있다. 마전장터는 1934년 큰 장마로 낙동강이 넘쳐서 구마전에 있던 장터가 떠내려갔으므로 그 해 11월 장터 사람들이 이 곳으로 옮겨와서 마을이 번창해져 마전장터라 했으며 길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는 소화리 백골이 있다. 시계동이라 불리는 석계는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 마을로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돌과 쇳물이 늘 흐르므로 물고기가 깃들지 못한다고 하여 음지석계(陰地石溪)라고도 불리운다. 석계와 마주보고 있는 양지석계는 석계보다 늦게 개척되었으며 양지바른 남쪽에 있어 양지석계라 불리운다. 삼거리에는 대구 안동 예천으로 통하는 세 갈래 길목이 있다. 낙동강에 소금배가 오르내릴 때는 마전도방이라고 하여 소백산 이남의 물하집산지(物荷輯散地)였으나 1934년의 홍수 이후 마을이 줄어들었다. 이후 낙동강에 풍지교(豊知橋)가 개설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다. 등말랭이는 구마전 복판 등성이에 있는 마을이라 불려진 이름이며, 이 등말랭이는 옛부터 안동과 상주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알려져 있다. 마전리의 골짜기는 베락친골(백골장터에 있는 골), 산너멧 골(석계너머에 있는 골짜기), 시계골(석계 뒤에 있는 골짜기), 예상골(베락친 옆에 있는 골짜기), 원학골(요성 서쪽에 있는 마을이 있는 골짜기), 월탱이(구마전 동쪽에 있는 골짜기), 참샘골(시끝 막바지에 있는 골짜기), 천둥개골(구마전 못 미처에 있는 골짜기) 등이 있다. 마전리의 자랑거리 석계약수터는 땀띠나 옻, 부스럼이 많은 사람에게 특히 좋다 하여 상주, 다인, 예천 지역에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물을 길러 먹고 피부병이 나았다한다. 지금도 주말이면 약수를 담아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마전리(이장 유종원)는 지보중․고등학교와 보광의원 등이 있으며, 현재(2004) 105가구에 282명(남 143, 여 139)이 거주하고 있다.(윤현숙 醴泉인터넷뉴스 2004-11-29)
마전1리(知保面 마전1리, 民間社會安全網 誠金 寄託 : “어려은 이웃을 爲해 써 달라.”며 誠金 140萬원 寄託) [記事] : 지보면 마전1리(이장 유종원) 및 부녀회(회장 안순흠)는 마전1리 주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성금 1백40만원을 2016년 2월 17일 오전 “관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 달라”며 지보면민간사회안전망 추진위원회에 기탁해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마전1리 유종원 이장은 “경기가 좋지 않아 상가마다 수입이 줄어들었지만 찾아오는 고객들의 주머니 사정 또한 마찬가지이니 어려울 때 일수록 이웃을 돌아보고 정을 나누며 사는 게 이웃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며 어려운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주민들을 대표해 따뜻한 마음을 전했다. 이에 지보면민간사회안전망 윤기영 추진위원회장은 “모든 주민들이 마음을 모아 큰 성금을 내주신 데 깊은 감사를 드리고 지역사회와 주민이 서로 도와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밝은 지보면이 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보면 마전1리 주민들은 해마다 이웃돕기 성금모금 기탁 및 저소득 이웃들에게 경로잔치를 개최하는 등의 봉사활동을 펼쳐 이웃과 더불어 살기 좋은 지보면을 만들기 위해 앞장서고 있다.(醴泉뉴스 2016.02.18)
마전장(麻田場) [市場] : 지보면 마전리에서 열리는 5일장(五日場)으로, 1,6일장(매월 1.6.11.16.21.26일)이다. 1934년 큰 장마(甲戌洪水)로 낙동강 물이 범람하여 마전리 낙동강 변에 있던 장터가 지보면 소재지 이곳으로 옮겨 와서 마을이 번창해지자 마전장터라 했고, 소화리와 마전리로 나뉘어졌으나 한 마을이다. 장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오후 2-3시까지 장이 서며 지방특산물(참깨) 및 농·수산물이 주로 거래되고 있다.(인터넷 慶北our 2001, 인터넷 netian 2001)
마전장터 : →백골
마전재사(麻田齋舍) [建物] : 지보면 마전리 868번지에 풍산 김씨 학호문중에서 1822년(순조 22)에 창건한 건물로, 학호 김봉조(鶴湖金奉祖, 持平)의 묘소에 딸린 주소(廚所)를 겸하였다.(虛白堂世蹟 1999)
마전정미소(벼를 빻아 쌀을 만들고 나누고… 방앗간 3代 70年) [記事] : “밥 알 하나 우습게 보면 안된데이. 여든여덟 번의 손길과 여섯 달을 지내야 쌀 한 톨이 나온다카이. 쌀이 목숨이제. 방깐(방앗간)은 나락을 빠 쌀을 맹글고 쌀은 아(자식)를 안 키우나.” 경북 예천에서 마전정미소를 운영하는 윤상태(65) 씨는 군에 간 3년을 빼고 42년째 방앗간을 돌리고 있다. 그는 해방둥이다. 몇 해 전 그는 쌀가마를 옮기다 그만 앞으로 넘어졌다. 이때 애써 해 넣은 틀니가 망가져 앞니가 거의 없다. 무릎 관절도 닳고 닳았다. 간신히 걷지만 그렇다고 황급히 방아 찧으러 찾아오는 이웃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다.
방앗간도 주인을 닮았다. 예천읍에서 28번 국도를 타고 선산·구미 방향으로 16㎞ 지점, 지보면 아래 장터 어귀에 구부정하게 서있다. 얼마 전 양철 지붕에 달렸던 간판이 돌풍에 날아간 뒤로 새로 달지 않았다. 세월의 먼지는 켜켜이 쌓여있다. 안채를 새로 지어 지금은 흔적이 없지만 1969년까지만 해도 정미소 옆에는 교회가 있었다. 정미소 안에 교회가 있던 사례는 유일할 것 같다. 마전정미소 집은 평소엔 말소리가 담을 넘지 않는 차분한 가정이다. 원동기 돌아가는 소리와 주일에 들리는 찬송가 소리 외엔 말이다. 윤씨가는 근대화시절 범국민운동으로 펼쳐진 산아제한 정책도 따르지 않았다. 이웃들도 ‘둘만 낳고 그만 낳자’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걱정 마그래이. 지가 멀 거는 가지고 나온다는 말 맞는 기라.” 부친 해원(88)옹 부부는 7남매를 낳았다. 아들은 부친보다 한 명을 더 낳아 8남매를 뒀다. 올해 27세 된 쌍둥이 아들 위로 누나가 6명이다. “저러다가 또 지지바가 나오면 어쩔라고? 방깐집 미느리 참 안 됐대이.” 그러나 정작, 윤씨 어머니 김청자(87·지보교회 집사) 씨와 며느리 엄명옥(60·권사) 씨는 그냥 빙그레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이왕이면 7공주가 안 낫겠심니꺼? 6공주 보담은. 또 누가 알겠는교. 떡두꺼비 같은 고추 쌍디를 주실지?” 늦복이 터졌다. 82년 80마력 원동기를 세우고 동력을 전력으로 바꾸던 해였다. 석기·정기 쌍둥이가 태어났다. 쌍둥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각각 삼성과 LG계열사에 근무하고 있다. 윤씨는 지금도 64년 그해 겨울을 잊을 수 없다. 대구 대륜고등학교 졸업반 때였다. 반에서 1, 2등을 놓치지 않았다. 입시를 앞두고 서울대 농대 원서를 쓰러 집으로 내려왔다. “아부지요, 서울대 원서시더. 도장 좀 찍어 주이소.” “왔으면 일 아하고 뭐하노? 퍼떡 군복(작업복)으로 갈아 입거라.” 부자의 기 싸움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하늘이 무너져도 한 번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번복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날로부터 학업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70년 군 제대 후 돌아온 방앗간엔 온통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고모부와 공동으로 운영하던 정미소가 부도가 난 것이었다. 다행인 것은 땅이 부친의 소유라 기계 값만 지불하면 해결될 판이었다. 윤씨는 3년 동안 기계 값을 다 지불하겠다는 각서를 썼다. 남의 소유로 넘어 갈 위기를 간신히 면했다. 밤엔 농업관련 서적을 모조리 읽었다. 식량증대의 공신으로 불리는 통일벼가 나왔을 때 그의 실력은 입증됐다. 벼가 힘없이 쓰러지는 것을 막고 목도열병에도 잘 견디도록 처방한 것이다. 그런 그를 이웃들은 ‘농학박사’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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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