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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1,148 : 만송정...만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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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송정(醴泉憂忘里 晩松亭) : *위치 :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 366(우망길 267), *연대 : 1925년, *규모 : ‘-’자형 정자 1채/ 만송정은 풍양면 우망리에 있다. 만송 정원모(鄭瑗謨, 1883-1944)가 1925년에 건립하여 수양하던 곳이다. 정원모는 농사와 독서에 힘썼으며, 선조의 제사를 잘 받들고 형제 사이에 우애 있게 지냈다.
1924년 낙동강 대홍수를 꺾은 후에 다시 수해를 입지 않는 높은 곳에 정자를 지었는데, 산골짝의 소나무가 늘도록 푸르길 바라는 뜻에서 ‘晩松‘으로 편액했다. 만송정과 안채인 정진기 가옥은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내부에는 마지막 기거했던 사람의 체취가 물씬 풍긴다. 우망리 만송정은 정진기 가옥 동북측에서 동남향을 하고 있으며, 앞마당 앞에는 자그마한 텃밭을 꾸며 놓았으며, 텃밭 끝에 향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다. 이 정자는 동래인 만송 정원모가 1924년 낙동강 대홍수를 겪은 후 수해를 피해 높은 곳에 터를 잡아 1925년 봄에 건립하여 수양하던 정자이다. 정원모는 '간송만취(산골짝의 소나무가 늦도록 푸름)'라는 뜻에서 ‘만송’이라는 호를 짓고 정자의 이름으로 했다. 만송정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일반적인 주간 배열과 달리 정면의 중앙칸이 반 칸 규모이고, 배면의 좌측칸이 반칸 규모이다. 정면은 우측부터 우물마루를 한 1.5칸 규모의 마루칸이 있고, 다음으로 1칸의 온돌방이 있다. 배면은 우측부터 2칸 규모의 온돌방과 반 칸 규모의 아궁이칸이 있으며, 이들 온돌방의 굴뚝은 우측 기단 위에 있다. 아궁이칸은 좌측 기단 쪽으로 열려 있고, 아궁이칸 상부는 온돌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다락을 달아 놓았다. 전열의 온돌방 정면, 전열 마루칸의 정면과 측면, 후열 온돌방의 측면과 배면 기단 위에 쪽마루를 깔았다. 마루간은 정면에 유리의 미닫이문을 달았고, 측면에 머름을 꾸미고 유리의 미닫이문을 달았고, 배면열 온돌방 쪽에는 4짝의 들문과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는데, 중앙칸은 하부에 머름을 꾸미고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정면열 온돌방은 마루 쪽 중앙칸에 머름를 꾸미고 두 짝 외여닫이문을 달았고, 우측 칸에는 두 짝 여닫이문으로 출입하도록 했다. 만송정의 기단과 기단 바닥은 시멘트모르탈로 마감을 했으며, 기단 위 주초는 자연석으로 원기둥과 사각기둥의 하중을 받고 있다. 기둥 상부에는 납도리방식으로 보와 보아지와 도리받침장혀가 짜 맞춤을 하고 있다. 가구는 오량이며, 처마는 한식기와를 올린 홑처마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내부 서까래와 서까래 사이 앙토는 재사벽으로 미장을 한 후 회바름을 했지만 처마부문은 재사벽으로 마감했다. 현재 만송정은 정진기 가옥에 딸린 정자로서 내부 관리상태는 양호한데, 지붕의 누수가 진행되어 천막을 덮어 놓은 상태이다. 이 정자도 우망리에 있는 비지정 전통가옥과 누정을 연계한 활용 계획을 마련한다면 활용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예천군 건축문화유산 조사연구 2013년, 290-291쪽)
만송정 : 동래정씨(東萊鄭氏) 예천군(醴泉郡) 풍양면(豊壤面) 우망리(憂忘里) 마을/ 2014.07.10./ 정자인 만송정 등이 짧게는 100년, 길게는 수백 년 전 선비들의 덕망과 풍류를 기리고 있다. 마을 입향조가 세운 삼수정 인근 낙동강변의 바위절벽. 높고 가파른 이.../ blog.daum.net/wintertree50/ 紫霞皐(daum 2017)
만송정 : 만송정기(晩松亭記)/ 2015.06.06./ 만송정기(晩松亭記) {해설 : 만송정은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에 있는 정자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목조와가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동래정씨 만송(晩松).../ cafe.daum.net/jung1781/... 동래정씨 대구.. | 댓글 3(daum 2017)
만송정 : 예천의 자랑 3544 : 예천대사전 제158권 오늘 나와, 총 31,600쪽 돌파(祝 임상기, 라이온스클럽/ 장병창 편저/ 두은정(1957년, 총 3쪽), 둔암정(1900년), 마당, 만강정(1908년), 만귀정(1812년, 총 3쪽), 만송정(지보면, 1932년), 만송정(풍양면, 1925년), 만의정(1880년, 총 3쪽), 만죽정(1930년), 만파루(1988년), 맛질 서낭당, 매.../ www.ycg.kr/open.content/ko/participate/free.. (daum 2017)
만송정 팔경(晩松亭 八景) [景觀] : 풍양면 우망리 366번지에 있는 만송정(晩松亭) 앞의 여덟 곳의 경치(雲橋牧笛, 鵲浦歸雁, 落江風帆, 鳳山夏雲, 龍山蒼松, 三樹亭月, 馬嶺春花, 雲峰落照)이다.
만수재문집(晩修齋文集) [冊] : 용문면 제곡리 출신 만수재 권택모(權宅模, 1774-1829)의 문집으로, 영본(零本) 2권 1책, 30.9x20.4cm,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은 19.2x15.8cm, 유계(有界), 10행(行) 18자(字), 주소자쌍행(註小字雙行), 판심(版心)은 상하 내향 사판 화문 흑어미(上下內向四瓣花紋黑魚尾)이다. 발문은 병자년(丙子年)에 권정섭(權廷燮)이 썼다. 만수재(晩修齋)에서 1937년에 간행하였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경북대이다.(인터넷 야후 2001)
만수재문집(晩修齋文集) [冊] : 용문면 제곡리 출신 만수재 권택모(權宅模)의 문집(20판)으로, 한국문집편찬위원회에서 편집하여 서울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에서 1995년에 출판한 <한국역대문집총서>에 수록되었는데, <양몽재문집(養蒙齋文集)>(金在洛)과 합철하여 527쪽, 영인본(影印本), 24cm이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경남대, 경북대, 경산대, 경성대, 경원대, 계명대(중앙), 단국대(천안), 대구대, 대구가톨릭대, 동국대(경주, 서울), 동의대, 목포대, 부경대, 부산대(중앙), 부산외대, 상명대(서울), 서강대, 서원대, 성균관대(서울), 세종대, 순천향대, 영남대, 울산대(중앙), 원광대, 인제대(중앙), 전남대, 전북대(중앙), 중앙대(안성, 서울), 충남대, 한국외대(서울), 한양대(서울), 홍익대(서울)이다.(인터넷 야후 2001, keris 2001)
만수재문집(晩修齋文集) [冊] : 용문면 제곡리 출신 만수재 권택모(權宅模, 1774-1829)의 문집으로, 4권 2책, 31cm이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울산대(중앙)이다.(인터넷 야후 2001)
만수재문집(晩修齋文集) [冊] : 용문면 제곡리 출신인 만수재 권택모(權宅模, 1774-1829, 學者, 贈 吏曹參判)의 문집으로, 영본(零本) 2권 1책, 30.9x20.4cm,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은 19.2x15.8cm, 유계(有界), 10행(行) 18자(字), 소자쌍행(小字雙行), 판심(版心)은 상하 내향 사판 화문 흑어미(上下內向四瓣花紋黑魚尾)이다. 만수재(晩修齋)에서 1937년에 발행하였다. 발문은 권정섭(詞章之學盛 ...丙子 ... 權廷燮)이 썼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경북대이다.(keris 2005)
만수재문집(晩修齋文集) [冊] : 용문면 제곡리 출신인 만수재 권택모(權宅模, 1774-1829, 學者, 贈 吏曹參判)의 문집으로, 한국문집편찬위원회에서 편집하여 서울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에서 1996년에 출판한 <한국역대문집총서(韓國歷代文集叢書)> 1639권(527쪽, 23cm)에 <양몽재선생문집(養蒙齋先生文集)>(金在洛 著)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고려대이다.(keris 2005)
만수재집(晩修齋集) [冊] : 용문면 맛질 출신인 만수재 권택모(權宅模, 安東人)의 시문집으로, 2책 4권, 석판, 척암 김도화(1864-1912)가 1908년에 서문을 썼다. 권2의 끝 부분부터 권3까지에 걸친 잡저(雜著)에서 저자의 성리학에의 깊이를 알게 한다.(金塘ㆍ맛질의 歷史的 位相 2003)
만수정(萬樹亭) [亭子] : 용궁현 왕태(龍宮縣旺泰, 現 聞慶市)에 있는 정자이다.(竺山勝覽 1934, 嶠南誌 1937)
만수집(漫수集) [冊] : 풍양면 우망리 출신 만수 정노석(鄭老錫, 1810-1857)의 문집으로, 105장, 영인본(影印本), 27cm이다. 서울 동래정씨문집간행회에서 1995년에 간행한 <동래정씨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강릉대, 강원대, 경북대, 경상대, 계명대(중앙), 공주교대, 공주대(중앙), 관동대, 광주대, 금오공대, 단국대(서울), 목원대, 부산대(중앙), 상명대(서울), 상지대, 서울대(중앙), 서원대, 성균관대(서울), 신라대, 영산원불교대, 울산대(중앙), 원광대, 이화여대, 전남대, 청주대, 충남대, 충북대, 포항공대, 한국교원대, 한림대이다.(인터넷 야후 2001, keris 2001)
만수집(漫수集) [冊] : 풍양면 출신인 만수 정노석(鄭老錫, 1810-1857, 성리학자)의 문집으로, 동래정씨문집간행회(東萊鄭氏文集刊行會)에서 편집하여 대구(大邱) 효성인쇄사(曉星印刷社)에서 1995년에 출판한 <동래정씨문집(東萊鄭氏文集) 제4집(第4輯)(896쪽, 27cm) 중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雲南集(鄭載達 著), 屛巖集(鄭道應 著), 柳村集(鄭台耈 著), 炳燭齋集(鄭之鏶 著), 醉黙軒集(鄭益相 著), 南齋集(鄭彦衡 著), 卑窩集(鄭重岱 著), 紫峰集(鄭僑 著), 拙窩集(鄭光黙 著), 文菴集(鄭煥容 著), 滄皐集(鄭仁卓 著), 樵隱實記(鄭容泰 著), 石洲集(鄭浩 著), 漫수集(鄭老錫 著), 泰西集(鄭元錫 著), 竹圃集(鄭圭復 著)이다. DDC 897.8008이고,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고려대이다.(keris 2005)
만암대(晩巖臺) [바위] : 감천면 덕율리 돌꼬지(石串) 364호 군도 변에 있는 바위로, 1881년 예안인 만암 김저일(晩巖金箸一)이 자연을 음미하여 수도하던 바위에 음각하여 '만암대(晩巖臺)'라고 했다
만암대(晩巖臺) [터] : 감천면 덕율리 돌꼬지(石串) 바위 위에 있던 정자로, 예안인 진사 만암 김저일(進士晩岩金著一, 1663-1710)이 경관을 즐기며 수도 수학하였기로 1881년에 후손 국현(國鉉, 字 弼汝)이 그의 호를 따라 바위에 <만암대(晩巖臺)>라고 새기고 유덕을 추모하였다. <군지(1939)>에서는 정자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만암대(晩巖臺) [바위] : 감천면 덕율리 돌꼬지(石串)에 있는 바위로, 예안인 만암 김저일(金著一)이 자연을 음미하며 수도하던 곳이다. 후손들이 1881년에 이 바위에 ‘晩岩臺’라고 음각하였다.(醴泉鄕校誌 2004)
만암대 : →석곶
만암대유적비 : 김저일(金著一) 만암대(晩巖臺) 유적비 –예천 감천면/ 2016.06.13./ 진사 예안김공(저일) 만암대(晩巖臺) 유적비 하늘은 차마 거칠지 못하고 땅은 차마 황폐하지 못하므로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옛 감문현 화곡촌의 언덕과.../ cafe.daum.net/jangdalsoo/e0f0/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daum 2017)
만암대유적비 : 예천의 자랑 3480 : 김저(2)-김저일-김전-김정-김정구(1)/ 작성 장병창/ 에 1696년(숙종 22) 식년 진사시에 3등 41위로 합격하였다. 성리학에 뛰어났다. 만년에 지낸 만암대 유적비(晩巖臺遺蹟碑)는 감천면 석곶(石串)에 있는데, 1985년 인동 장건덕(張建德)이 지었다.(司馬榜目, 醴泉郡誌 1939, 嶠南誌.../ www.ycg.kr/open.content/ko/participate/free.bulletin (daum 2017)
만의동 : →마내동
만의서재(晩義書齋), 학위당(學偉堂), 창동의숙(彰東書塾), 만산서재(晩山書齋), 만의정(晩義亭) [敎育] : 지보면 만화리 402번지 만촌(晩村)에 있는 서당으로, 1880년(고종 17)에 세운 목조와가(木造瓦家)이다. 축산인 학고 전세삼(學古全世三, 1715-1789)이 만년(1780)에 만의산(晩義山) 중에 몇 칸의 초가를 창건하여 그의 아들 5형제를 교육하던 만의서재(晩義書齋)로 현판하였다. 1841 년(헌종 7)에 개축할 때 현판을 학위당(學偉堂)으로 하였다. 이것이 발전하여 사학의 요람이 되었다. 이 학위당 졸업생 중에는 장령 전홍교(掌令全洪敎, 1835-1893), 참봉 전홍우(參奉全洪佑), 주사 전병태(主事全昞泰), 석산 정승모(石山鄭升模) 등이 있다. 그 후 개와(改瓦) 중수 때는 창동의숙(彰東書塾)이라 개칭하고 의성 대곡사(大谷寺) 재목을 사들여 현 건물을 세웠다. 이 서숙은 일제 때도 계속, 많은 인사를 배출하였다. 국방장관 현석호(玄錫虎), 의사 전병표(義士全炳豹, 1876-1961), 자선가 전상조(全相朝, 字 忠河) 등은 이곳 졸업생이고, 국회의원 권상로(權相魯)와 만주 신흥무관학교(滿洲新興武官學校) 출신 전동진(全東震, 1899-?, 體操)은 교편을 잡았다. 당시 초등반(國,漢,數), 중등반(國,漢,英,數,地,歷,體操)으로 편성하였다. 이는 지보공립보통학교(知保公立普通學校)의 전신이고, 일제 말에는 문맹 퇴치(文盲 退治)를 위한 야학(夜學)을 실시하였다. 해방 후 건물이 퇴락하여 1972년에 중수하고 만산서재(晩山書齋)라 하다가 전병태(全炳泰)의 아호(雅號)와 같다 해서 만의정(晩義亭)으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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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