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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1,245 : 명봉리...명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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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봉리와 동사리(上里面 鳴鳳里, 下里面 東沙里 '2008年度 犯罪 없는 마을' 表彰 및 懸板式!) [記事] :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와 하리면 동사리가 "2008년도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돼 2009년 5월 19일 오전 11시 하리면 동사리 마을회관에서 김수남 군수, 정용삼 경찰서장, 김한수 대구지검 상주지청장, 이현준 도의원, 군의원, 주민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예천군과 대구지검 상주지청 공동 주관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서 상리면 명봉리장인 김병열 씨가 법무부장관 표창, 명봉리와 동사리에 대해서는 도지사·대구지검 검사장 훈격의 마을 표창이 수여됐다. 또한 2개 마을에는 상사업비 6천만 원이 지원되어 마을 숙원사업인 진입로 포장 및 하수도 설치 공사를 실시할 수 있게 됐다. 지난 2007년에 이어 2년 연속 선정된 상리면 명봉리는 61가구 134명이 거주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명봉사가 위치한 지역으로 6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주민들 대다수가 친인척 관계로 신의가 두텁고 예의 있는 살기 좋은 마을이다. 1997, 2005, 2006년에 이어 4번째 선정된 하리면 동사리는 38가구 87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임금님께 진상했다는 은풍준시를 지역 특산품으로 개발하여 매년 수량이 부족하여 전국에서 오는 주문량을 맞추지 못하고 있는 부자 마을이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5-19)
명봉분교 : →명봉초등학교
명봉사(잊혀진 文化遺産-醴泉 鳴鳳寺) [記事] : 예천읍에서 단양으로 넘어가는 927번 지방도를 따라 승용차로 25분 정도 가면 소백산 자락 해발 500m에 자리잡은 천년고찰 명봉사(鳴鳳寺)가 나타난다.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산1번지에 위치한 명봉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두운 선사(杜雲禪師)가 창건한 사찰로 창건 당시 깊은 산중에서 봉황이 울었다고 해서 명봉사로 불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명봉계곡의 울창한 수목과 맑은 물을 접하는 순간, 선경(仙境)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 사찰은 한창 때 100칸이나 되는 매우 큰 절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지난날의 번창했던 모습은 볼 수 없고, 법당과 요사채만 복원돼 있다. 대웅전 안에는 한국전쟁 때 유일하게 소실되지 않은 대세지보살상이 보관돼 있고 소나무, 전나무, 느티나무가 에워싸 듯 경내를 가려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낀다. 명봉사 대웅전 옆 모퉁이를 돌아서면 지난 1975년 2월 보물 제682호로 지정된 조선조 문종대왕(文宗大王) 태실비(胎室碑)가 자리하고 있다. 절 동쪽 숲 속에는 지난 1972년 12월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된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鏡淸禪院 慈寂禪師 凌雲塔碑)가 당시의 번성했던 사찰의 모습을 증언한다. [문종대왕(文宗大王) 태실비(胎室碑)] : 조선 왕실의 태(胎)를 명당이나 명산에 묻어 성장과 성공을 기원했다는 태실(胎室)과 태봉(胎封)은 왕족의 태반을 묻은 석실(石室)이다.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태실도감을 설치한 뒤 태실을 봉안하고 그 위에 비를 세웠다고 한다. 명봉사에 자리하고 있는 문종대왕태실비는 대구. 경북에 현존하는 몇 안 되는 태실비 중 하나다. 문종대왕태실비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명봉사사적비는 조선 500년 역사에서 비극의 주인공인 사도세자의 태실비를 각인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1840년에 세웠다는 명봉사사적비는 문종대왕태실비보다 조금 크지만 형상과 모양, 낡은 정도가 같고 비문을 다시 각인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도세자태실비의 비문을 깎고 그 위에 명봉사적 비문을 새로 새겼다는 것이다. 조동윤 예천군청 문화관광과장은, "전문가들은 명봉사사적비를 사도세자의 태실비로 추정하고 있다"며, "비극의 주인공이 또다시 비극을 맞은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영조 11년(1735년) 화강암으로 조성돼 현재 법당 옆에 서 있는 문종대왕태실비는 높이 2.46m, 비신높이 1.13m, 폭 0.57m, 두께 0.25m로 문종대왕의 태를 안치하고 세운 비석(碑石)이다. 원래 대웅전 뒤편 산봉우리에 있었으나 일제 때 이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이 비는 구질(龜跌) 위에 화강석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를 올려놓은 일반형으로 지대석과 귀부가 한 돌로 되어 있다.
귀두는 용머리 같이 하여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고, 이수는 방형으로 전면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엉켜있는 모습으로 양각해 놓았다. 몸체에 비해 귀부의 처리 기법이 둔중해 보이나 전체적인 구성과 조각 솜씨는 매우 섬세하다. 비신 앞면에 '문종대왕 태실(文宗大王 胎室)' 뒷면에 '숭정기원 후 일백팔 을묘(崇禎紀元後 一百八乙卯)'라 음각한 비명으로 보아 이 비의 건립 연대가 영조 11년(1735)임을 알 수 있다 [경천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鏡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 : 지방 유형문화재 제3호인 자적선사능운탑비는 자적 선사(慈寂禪師)의 부도탑비이다. 화강석으로 만들어 졌으며 전체 높이 2.91m, 좌대높이 0.52m, 비신높이 1.9m, 폭 0.96m, 두께 0.20m로 고려 태조 24년(941)에 건립됐다. 탑비는 귀부 위에 비좌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어 놓은 통일신라 이래의 전형적인 일반형 석비이다. 이두 문자(吏讀文字)로 새겨진 이 석비는 비바람에 마멸돼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1976년 단국대 남풍현 교수의 판독에 따르면, 신라에서 고려로 접어드는 시기의 과도기적 이두 문자로 당시 중앙 관서인 광평성에서 승도에게 내린 행정적인 공문서다. 이두가 행정적인 양식으로 쓰여진 것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경주 남산신성비와 일본 쇼수인 소장의 신라장적 정도다. 그러나 이 비문은 신라시대의 이두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성을 구비하고 있어 당시의 사회상과 문자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두문으로 된 이 비문은 고려 초기에 한림원령(瀚林院令)과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문장가 최언위(崔彦僞)가 지은 것으로 판독됐다. 자적 선사의 속성은 김씨이고 법명은 홍준이다. 선사는 신라 헌강왕 8년(882)에 태어나서 효공왕 3년(899)에 수계하였으며, 고려 태조 22년(939)에 입적하였다. 태조는 대사에게 자적 선사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부도탑은 능운이라 이름하였다. 자적선사능운탑비는 숲 속에 방치돼 오던 것을 예천군이 지난 2001년 사업비 4천만 원을 들여 보호각을 세우고 주변을 정비했다.(마경대 記者 每日新聞 2004.6.4)
명봉사(思悼世子 胎室碑를 망가뜨렸다고? : 醴泉 鳴鳳寺 文宗大王胎室碑와 鳴鳳寺事蹟碑) [記事] : 어제는 경북 예천 남서쪽에 있는 회룡포 마을을, 오늘(2007년 12월 24일)은 하루 동안에 예천 곳곳을 둘러보려고 마음먹었기에 시간을 잘 쪼개어 쓰고, 계획을 알차게 세워야했어요.
가장 먼저 가기로 한 곳이 북쪽에 있는 명봉사와 용문사랍니다. 아침 일찍 여관방을 빠져나와 명봉사까지 가는 버스를 탔어요. 지난번에 산업곤충연구소로 가던 길인 하리를 지나 손님이라고는 우리밖에 없는 시골버스를 타고 갑니다. 아스팔트로 길이 잘 깔려있었지만 땅 모양을 그대로 살린 길이라 꼬불꼬불한 게 버스 타는 재미도 꽤 남달랐어요. 게다가 둘레 풍경은 시골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마음 같아서는 버스에서 내려 자전거를 타고 가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오늘은 다녀볼 곳이 저마다 거리가 뚝뚝 떨어진 곳이라 시간이 빠듯하니 어쩔 수 없지요. 우리가 예천에 이렇게 자전거로 길을 터놨으니,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다시 올 수 있는 곳이라 여기고 아쉬운 마음 달래면서 차창 밖 풍경을 즐기면서 갑니다. 버스는 명봉사가 종점이었는데, 민박집 둘과 가게 하나가 서로 마주보며 어렴풋이 여기가 관광지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이른 아침인데다가 아직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조금은 썰렁했지만, 순하게 생긴 개 한 마리가 겅중겅중 뛰면서 개 임자인 듯 보이는 이와 산책을 하고 있어요. 차에서 내려 자전거를 새로 끼워 맞추고 첫 들머리부터 오르막인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어요. 낯선 곳에서 만날 여러 가지 즐거운 일들을 기다리면서…. 명봉사 가는 길은 겨울철인데도 숲길이 퍽 아늑하고 아름다웠어요. 소나무와 전나무, 느티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곳이라 여름철이면 더위를 피하여 이곳 숲에서 쉬었다가 가는 사람도 많다고 하네요. 숲길을 벗어나자 작은 연못이 나오고 그 가운데에 보살님(문수보살님인가? 그건 잘 모르겠음)이 고운 모습으로 서있는데, 퍽 정겹고 낯설지가 않았어요. 절집에 들어서자마자 온통 조용하던 세상을 큰 개 짖는 소리로 흔들어 깨웁니다. 여기도 어김없이 개가 우리를 먼저 반기네요. 괜찮아. 우리 나쁜 사람 아니거든? 가만히 둘러보고 갈 테니까 너무 그러지마. 언젠가 절집에서 사나운 개를 만나 혼쭐이 난 뒤로 개 소리만 들어도 덜컥 겁부터 나는데, 누군가가 그때 내가 쓴 글을 읽고 개랑 대화를 하라!고 했던가요? 세상에서 가장 착한 말투와 웃는 얼굴로 얘기를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짖어대기만 했어요. 쩝!
[성주 세종대왕 왕자태실에는 없었던 걸 여기서 보네!] : 명봉사 마당 위, 조금 높은 자리에 있는 무량수전 곁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빗돌 두 개가 나란히 서있어요. 아하! 이거구나. 자기야! 빨리 와봐! 이게 문종대왕 태실비야. 무량수전 화려한 단청 문양과 공포를 부지런히 찍고 있는 남편을 불렀어요. 앞에는 문종대왕태실비라고 적혀있고, 뒤에는 숭정기원후일백팔십을묘라 새겨져있어요. 사실 나는 이 비문에 새긴 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나, 조선 5대 임금인 문종대왕의 태실비를 1735년(영조 11년)에 세웠다는 거라고 안내판이 따로 있어 알았어요. 얼마 앞서 성주에 있는 세종대왕 왕자태실에 갔을 때, 세종대왕의 아들인 왕자들의 태실이 그곳에 모셔져 있어 모두 봤는데, 문종대왕의 태실은 없었거든요. 그랬는데, 이곳 예천까지 와서 만났네요. 이 태실비는 일제강점기 때에 명봉사 법당 뒤 산봉우리에 묻혀있던 걸 찾아내어 여기에 다시 세웠다고 해요.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태실은 없고 태실비만 남아있었어요. 지난번에 성주 태실에 갔을 때, 세종대왕의 왕자들이 잘 되기를 바라며 좋은 터에다가 따로 모셔두었다는 걸 보고난 뒤라 그런지 한낱 빗돌이지만 퍽 반갑고 정겨웠답니다. [사도세자 태실 비문을 깎아내고 절집 사적비문을 새겼다고?] : 문종대왕 태실비(경북유형문화재 187호)와 나란히 있는 빗돌, 바로 명봉사사적비예요. 그런데 희한하게 태실비와도 모양이 매우 비슷하게 생겼어요. 아니, 어찌 보면 이 사적비가 더 오래된 듯 보였어요. 처음엔 그저 이 절집을 세운 이야기와 역사가 담겨 있겠거니 하면서 봤답니다. 하기야 앞뒤로 빼곡하게 적혀있는 글자를 모조리 한문으로만 적어두었으니, 나 같은 사람은 알아보려고 해도 알 수 없지요. 또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아요. 나중에 예천에 다녀와서 자료를 찾아보고 알았는데, 이 명봉사사적비에는 아주 남다른 얘깃거리가 있었답니다. 바로 이 사적비는 그 옛날 조선 후기 영조 임금의 아들, 그러니까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죽은 사도세자의 태실비였다고 해요. 어쩐지 문종대왕태실비와 그 모양과 생김새가 매우 닮았다했더니, 이것도 바로 태실비였구나! 이 얘기도 일제강점기 때 일인데요. 그때 명봉사에 주지로 있던 스님이 사도세자의 태실비 비면을 깎아내고 거기다가 명봉사 사적을 기념하는 비문을 새겨 넣었다고 하네요. 이때, 이 일 때문에 크게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답니다. 나라 잃은 설움도 크고 깊은데, 왕실과 관련된 유적을 망가뜨리다니요? 어쩌면 일제가 저지른 몹쓸 짓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어요.
우리가 절집에 자주 찾다보니, 처음 절집을 세우고 그 뒤 이런저런 모진 일을 겪으면서 불타버리고 무너진 걸 또 다시 짓거나 새로 고쳐 세웠다는 기록을 참 많이 봐왔어요. 그 때마다 그 끄트머리에는 늘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 때 망가진 것들이 많았어요. 글쎄, 내가 일제강점기를 겪어보지 않았으니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우리나라 소중한 문화재마다 흠집을 낸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는 기록을 보면, 참 화가 많이 났지요. 그때 명봉사 주지스님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니면 어떤 지시를 받아 이와 같은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중한 문화유적을 망가뜨렸다는 건 매우 안타깝고 딱한 일이랍니다. 우리가 명봉사에 갔을 때에는 이런 사실을 알지도 못했고 그저 문종대왕태실비를 본 것만으로도 반갑고 기쁜 마음이었는데, 이런저런 사실을 알고 나니 매우 씁쓸했답니다. 명봉사를 벗어나와 이제는 그 곁으로 난 산길(임도)을 따라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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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