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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1,265 : 명봉사...명봉사경청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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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3대 지장보궁 제2소백산 지장성지 내원암(內院庵)=예천군 효자면 명봉사길 139,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명봉사의 부속암자인 내원암은 고려태조 5년(922년)에 도선국사가 창건(創建)했으며, 명봉사 입구에서 좌측(左側)으로 0.6km 지점 해발 600m에 있다. 국내지장 3대보궁중 제2의 지장보궁(地藏寶宮)인 내원암은 명봉사와 함께 6·25전쟁 때 전소되었다가 1988년에 명봉사 주지 성면(性面)스님이 중건했다.
기록에 의하면 내원암은 도선국사가 미래세(未來世)의 현세고뇌중생(現世苦惱衆生)들을 위해 참회(懺悔)와 복전(福田)의 길지(吉地)로 여기시고 당대(當代)의 9승지(九勝地)로 꼽고, 원각산(圓覺山) 비연봉(飛燕峰) 아래에 현세(現世)의 부처님이신 지장보살진신(地藏菩薩眞身)이 상주현신(常住現身)하는 기도도량(祈禱道場)인 내원암(內院庵)을 천상(天上)의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을 비유(比喩)하여 내원암지장보궁(內院庵地藏寶宮)으로 명칭(名稱)하여 대명(代名)하여 왔다고 전해진다. 1687년 조선 숙종 13년에 금계(錦溪)스님이 중수(重修)했고, 1862년 조선 철종 13년에 덕산(德山)스님이 보수(補修)하였으나, 1950년 6, 25 동란(動亂) 때 법당(法堂) 1동(棟)을 비롯하여 10여 동이 전소(全燒)했다. 이후 1988년 명봉사 주지스님인 봉명당 성면선사(鳳鳴堂 性面禪師)가 중창(重創)하여 현재(現在) 국내 제2지장 보궁(寶宮)으로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적으로 이름 있는 지장보궁(地藏寶宮)으로 제1보궁 철원 심원사, 제2보궁 예천 소백산 내원암, 제3보궁 선운사 도솔암이 있다. 내원암에는 국보급 유물로 범종(500관)과 법당 용마루에 청기와 2점, 법당이 내9포, 외 13포로 된 문화가치가 풍부한 건축물이 존재해 있었던 곳으로, 6, 25 사변으로 인하여 값진 유물들이 모두 소실(消失)되었다. 소실 원인은 북한(北韓) 군인이 이곳 소백산(小白山)으로 집중(集中) 퇴각(退却)하는 길목으로써 아군(我軍)에 의해 작전상(作戰上) 방화(放火)로 모두 전소(全燒)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원암은 명봉사 입구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태고적 원시림이 하늘을 가린체 울창하게 우거지며 계곡 깊숙한 곳에 위치했는데 어찌 적군이 이곳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불타기 전 내원암은 법당1동, 동요사채, 서요사채, 조양루, 오백나한전, 조사전, 독성각, 산신각, 종각, 큰 대중방사동 등의 10동이 있었다고 하는데 절앞의 복원 조감도를 살펴보면 그 규모가 어떠한지 상상이 간다. 현재 내원암은 중창 불사중으로 모두 완공되면 명봉사보다 더 큰 사찰이 되지 싶다. 내원암은 예천을 지장 성지로 크게 발전시키고 지역불교를 문화자원화하고 역사적 가치성을 재발굴하여 지역 관광자원의 토대로 삼고자 성지 복원에 불심으로 전력하고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 불교의 성지(聖地)로 우뚝 서있을 예천 내원암을 그려보며 내 마음의 욕심을 다 비우고 내려오는 길가로 소백산 깊은 산자락의 단풍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물이 명봉계곡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명봉산 자락에 봉안된 2개의 태실터는 우리 예천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봉황이 크게 울었다는 명봉사는 예사로운 곳이 아니라 천하명당 길지에 있는 사찰이다. 그리고 새롭게 복원된 문종대왕, 사도세자 태실터 이야기를 잘 조명하여 관광자원으로 재탄생할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예천은 봉황이 먹고 마신다는 샘물이 있을 정도로 사람이 살기 좋은 이상향의 땅 상서로운 고장이다. 장자(莊子)에서 말하는 예천(醴川:甘泉)이 바로 우리 예천(醴泉)이다. 봉황(鳳凰)과 관련된 우리 지역 문화유산 답사로 명봉사(鳴鳳寺)를 다녀오면서 단물이 솟아나는 샘물의 고장,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鳳凰)이 사는 예천(醴泉)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오랜 세월 잠에서 깨어나 ‘세계를 향한 봉황의 힘찬 날갯짓’을 표현하는 조형물이라도 하나쯤 세웠으면 어떨까 싶은 바램을 가져본다. 아울러 멀지않은 미래에 명나라 장수 양호가 탄복한 주천(酒泉)의 물맛을 보고 금강산(金剛山) 온천수와 수질이 같은 예천온천(醴泉溫泉)에서 온천욕을 하고 봉황(鳳凰)이 크게 울었다는 명봉사(鳴鳳寺) 태실터에 올라 하늘의 기운을 받아보고자 전국에서 예천(醴泉)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상상해 보았다. [예천읍행정복지센터 장광현씨](정차모 기자 예천인터넷뉴스 2018-11-13 오전 9:18:42)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鳴鳳寺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 [記事] : 상리면 명봉리 명봉사 경내에 있는 비에 대한 기록과 사진으로, 경상북도(道知事 金武然)가 1980년 2월 22일에 발행한 <지방문화재대관(地方文化財大觀)> 20-21쪽(2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鳴鳳寺 鏡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鏡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 [碑] : 상리면 명봉리 산 1-1번지 명봉사 경내 법당(法堂) 동쪽 능선에 있는 고려 태조 때 세운 비로, 경북 유형문화재 제3호(1972.12.29 指定)이다. 전체 높이 2.91m, 비신 높이 1.9m, 비신 폭 0.96m, 비신 두깨 0.2m, 좌대(座臺) 높이 0.52m, 이수 높이 0.49m, 너비 1.25m, 두께 0.44m이다.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의하면, 이 비는 자적 선사의 고매한 인격과 공적을 길이 전하고자 941년(고려 태조 24)에 세운 것인데, 비문 중에 이두문(吏讀文)이 있어 국어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고, 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화강석으로 만든 이 비는 이수는 네 마리의 용(龍)이 서리게 조각되었고, 구부(龜趺)를 좌대(座臺)로 하여 비신(碑身) 위에 이수를 얹은 규모가 큰 비석이다. 현재 구부의 머리는 떨어져 없으나 용수형(龍首形)으로 모각(模刻)된 듯하고, 앞뒤의 발은 오지(五脂)를 만들었고, 꼬리 부분은 우회하여 비교적 작은 모양으로 표현했다. 비문(碑文)은 풍화로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웠는데, 일제 때인 1935년에 조선총독부가 해독을 하였고, 1976년에 남풍현(南豊鉉) 교수의 재확인으로 최언위(崔彦僞)가 글을 짓고, 연훈(然訓), 법오(法悟), 심장(心藏) 등이 글씨를 새긴 것으로 확인되었다. 자적 선사(慈寂禪師)는 법휘(法諱)가 홍준(洪俊), 속성은 김씨인데, 882년(신라 헌강왕 8) 생으로 일찍 불가에 입문했다. 고려 태조는 그의 선덕(禪德)을 받들어 귀산선원(龜山禪院)에 거처하도록 하고, 5년 뒤인 939년(태조 22) 58세로 입적(入寂)한 고승(高僧)인데, 자적(慈寂)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을 능운(凌雲)으로 명명(命名)하여 선원(禪院) 안에 비를 세웠다. 비문(碑文)의 내용은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로 접어드는 과도기의 이두(吏讀)가 많은데, 중앙 관서인 광평성(廣評省)에서 승도들에게 내린 공문서 양식이다. 이런 양식의 글은 경주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591)와 일본 나라(奈良)의 동대사 정창원(東大寺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 민정문서(民政文書, 775)가 있으나, 뒤의 것은 지방의 호구 조사를 위한 것이다. 이 비에 쓰인 이두(吏讀)는 표기법(表記法), 어법(語法)에 있어서 신라 시대의 이두문(吏讀文)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이두(吏讀) 발달사의 측면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郡誌] : 상리면 명봉리 명봉사 경내에 있는 비로, 이 비의 주인공인 자적 선사는 882년(헌강왕 8)에 태어났다. 속성은 김, 법휘(法諱)는 홍준(洪俊), 태어나면서부터 유별난 점이 많아 고을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한다. 출가를 하기 위해 태령(太嶺)을 지나 흑암선원(黑巖禪院)에 이르러 진경 대사(眞鏡大師)를 뵙고 공부를 하였다.
진경 대사는 홍준을 통해 불교를 현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고 그를 독려하였다. 그는 진경 대사를 떠나 899년(효공왕 3)에 명주(溟州)에 머물러 있던 양율 대사(良律大師)를 통해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된다. 이 당시 고려 태조 왕건은 그의 선덕(禪德)을 듣고 귀산선원(龜山禪院)에 머물게 하자, 이 소식을 들은 학자들이 운집하여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여기서 제자를 통해 불교를 널리 선포하던 그는 939년(태조 22)에 입적하게 된다. 태조는 자적 선사(慈寂禪師)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탑의 이름을 능운(凌雲)이라 이름하여 941년(태조 24) 경청선원(鏡淸禪院)에 비를 세웠다. 경청선원은 오늘의 명봉사이다. 비명은, "고려국 상주 명봉산 경청선원 고교 시 자적선사 능운지 탑비(高麗國尙州鳴鳳山鏡淸禪院故敎諡慈寂禪師凌雲之塔碑"이다. 이 비문은 최언위(崔彦위)가 찬(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세에 당(唐) 나라에 유학하여 예부시랑 설정규(禮部侍郞薛廷珪) 아래에서 급제하고 42세 때 귀국하여 집사 시랑(執事侍郞), 서서원 학사(瑞書院學士)가 되고, 왕건이 개국하자 고려시대 한림원 대학사 평장사(翰林院大學士平章事)를 지내기도 하였다. 특히 이 비 건립에 있어서 태조 왕건은 물론이고, 당시 국통(國統)을 비롯한 도당(道堂), 함혜(含惠), 혜윤(惠允) 등의 승려와 재가 제자(在家弟子)인 수문(秀文), 영회(英會) 등 13명의 신자, 보주 관반(甫州官班)인 원길(元吉), 순보(純保), 영희(英希), 사향 촌주(寺鄕村主) 길훤(吉萱), 그 외에도 촌주(村主), 철장(鐵匠), 석장(石匠) 등이 관련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명봉사가 갖는 당시의 비중을 짐작케 한다. 이 비의 중요성은 이두(吏讀)의 내용에 있다는 사실도 또한 밝혀져 있다. 현재 이두문이 591년으로 추정되는 경주 남산 신성비명(南山新城碑銘)과 755년으로 추정되는 신라민정문서(民政文書)가 남아있지만, 명봉사의 자적선사비명에 남아있는 이두는 중앙관서인 도평성(都評省)에서 승도(僧徒)에게 내린 것으로, 그 양식이 근대적인 체제를 갖춘 것이란 점과, 당시 이두 사용의 표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의 대상이 된다. 또 이 비에 쓰인 표기법이나 어법은 신라 시대의 이두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醴泉郡誌 1988)
명봉사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鳴鳳寺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 [碑] : 상리면 명봉리 명봉사 경내에 있는 비로, 그 비명(碑銘)은 다음과 같다. 고려국 상주 명봉산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 비명과 서문/ 대상(大相) 검교상서(檢校尙書) ㅁㅁㅁㅁㅁㅁㅁㅁㅁ 상주국(上柱國) 최언위(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문하승 ㅁ유(ㅁ裕)는 교지에 의하여 고서(古書) 가운데에서 집자(集字 : 歐陽詢體)하고, 문하승(門下僧) 연훈(然訓), 법오(法悟), 심장(心藏) 등이 글자를 새긴다.
허공(虛空)은 형상(形相)이 없고, 불성(佛性)은 생멸(生滅)이 없다. <缺落> 心 <缺落> 이러한 진여(眞如)를 생각하여 모든 실성(實性)을 터득할 수 없으니, 마치 색(色)이 곧 색이 아니고, 공(空) 또한 공이 아닌 것과 같다고 하겠다. 중생이 망녕된 생각이 마치 아지랑이를 보고 물인 줄 오인하는 것이고, 명(名)이란 오직 거짓된 이름일 뿐이니, 흡사 신기루와 같다. 심식(心識)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현상은 모두 말장난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缺落> 聖 <缺落> 先覺 <缺落> 之者, 구하는 자는 구할 것이 없음을 구하며, 배우는 사람은 배울 것이 없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유(有)인 물질과 무(無)인 공(空) 속에 진실이 함재(含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령스러운 지혜로 마음을 간직하고 그윽히 마니(摩尼)의 보배를 잘 지켜서 영성반야(靈性般若)에서 <缺落> 묘용(妙用)의 심기(心機)는 <缺落> 法 <缺落> 한 이는 우리 선사뿐이라 하겠다. 선사의 법휘(法諱)는 홍준(洪俊)이요, 속성은 김씨니, 그 선조는 진한(辰韓)의 무족(茂族)이며 토군(兎郡)의 유명한 집안이었다. 혹은 자궐(紫闕)에서 널리 선행을 하며, 혹은 황문(黃門)에서 보국(輔國)하였다고도 한다. 본래는 <缺落> 요원(瑤源)으로부터 내려오는 별파(別派)이며, 옥수(玉樹)의 분지(分枝)였다. <缺落> 名配在 <缺落> 그 후 오랫동안 번복(藩服)의 귀호(貴豪)이었는데, 지금은 경주 사람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육정(陸正)이고, 아버지는 지유(志儒)이니, 혹은 오천중(五千中)에서 도를 배우고, 혹은 300의 시편을 연구하되, 항상 뜻을 물으면서 토론하였으니 문학을 좋아하며 소중히 여겼다. <缺落> 抄 <缺落> 戒, 어느 날 어머니는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에 그윽한 영감을 받은 태몽(胎夢)을 꾸었고, 그로부터 지혜롭고 복덕있는 아들을 낳기 위하여 오신채(五辛菜)와 고기 등은 모두 끊고, 날이 갈수록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였다. 822년 3월 13일에 탄생하였다. 선사는 날 때부터 특이한 자태를 지녔으며, 어려서도 어린아이답지 않았으니 유학(幼學)의 나이에 이르러 책 상자를 짊어지고 학당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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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