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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1,266 : 명봉사경청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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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온순하고 공손하여 가풍(家風)을 잘 이었고, 항상 자신의 내면을 잘 극기하여 조덕(祖德)을 닦았다. 뿐 아니라 재주가 뛰어나 글을 읽음에 다섯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갔으니, 천재라는 소문이 이려(里閭)에 떨쳤다. 일찍부터 불경을 열람하였고, 유교 또한 정통하였다. <缺落> 하늘을 날고, 바다의 넓음을 뛰어넘을 큰 포부를 가졌으니, 숲 속을 기어 다니는 개미가 어찌 이 웅지(雄志)를 짐작할 수 있겠는가. 爭 <缺落> 於<缺落> 章之 <缺落> 其大小 <缺落> 이러한 뜻을 가졌기에 <缺落> 출가하여 입산하려는 생각뿐이었다. 부모는 아들의 출가하려는 뜻을 듣고는 애정을 억누르며 허락하였다. 출가의 길을 떠나 동쪽으로 가는 도중 태령(太嶺)을 지나 흑암선원(黑巖禪院)에 이르러 진경 대사(眞鏡大師)를 친히 뵙게 되니, 스님은 마치 빙자(氷恣)처럼 아름답고, 옥체(玉體)처럼 맑았다. 예배를 드리고, 마음에 뜻한 바를 아뢰었다. “스님은 사계(沙界)의 제항(梯航)이며, 법문(法門)의 영수(領袖)이시니 저를 받아들여 득도(得道)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도수(道樹)의 밑에 서게 되었고, 마침내 선림(禪林)의 보배를 얻게 되었다. 어느 날 진경 대사가 스님에게 이르기를, “인도(天竺)에서 심법(心法)을 전수한 조사(祖師)가 많았으니 제27대 반야다라(般若多羅)의 법을 전해 받은 달마 대사는 중국으로 와서 <缺落> 선종의 초조(初祖)가 되었으며, 그 후 곧 동토 선종의 제6조인 조계(曹溪) 혜능에 이르렀다. 이어 조사(祖師)와 조사(祖師)가 서로 전수하여 백암(百巖)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대사가 당나라로 유학 가서 백암의 법을 받아 귀국하여 봉림사(鳳林寺, 경남 창원군 선남면 봉림리)를 창건하고 선풍을 크게 진작하였는데, 지금은 비록 그 법통이 단절되었지만, 그 도는 더욱 훌륭하였다. 이제 내가 지금 너희들과 함께 혜목(慧目)의 종지(宗旨)를 천양하여 봉림가풍(鳳林家風)을 영원히 무성하게 하며 장래의 후생들에게 보여 주고자 한0다.”라고 하였다.
878년 명주(溟州) 입량 율사(入良律師)에게서 비악계를 받고, 그 후 각 사찰을 참배하면서 두루 명산과 승지(勝地)를 탐사하고 마하연(摩詞衍)을 탐구하고 많은 선지석을 친견하였다. 그 후 <缺落> 경명왕(景明王)이 봉림 대사는 법덕(法德)과 교덕(敎德)이 높을 뿐 아니라 현기(玄機)가 넓고 깊다 하여 특별히 단조(丹詔)를 보내서 경화(京華)로 초빙하였다. 선사는 서울로 가는 길에 여러 사찰을 거쳐 동천사(東泉寺)에서 잠깐 주석하다가 북궐(北闕)로 나아갔다. 此 <缺落> 山築 <缺落> 왕은 국사(國師)를 맞이하는 예로써 정성껏 낭열(囊列)을 행하였으니, 어찌 신하를 대하는 태도를 가졌겠는가. 그 후 예천에 이르러 한 단월(檀越)을 만나니 그는 정광(正匡)이란 사람이다. <缺落> 東瞻 <缺落> 반드시 신인(神人)이 있어 나의 도성(都城)에 들어올 것이므로 먼저 아름다운 상서를 나타냈다 하고, 교외(郊外)에서 영접할 때 선사에게 경례하며 현궐(玄闕)에 머물게 하고, 자신의 공을 치하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선사가 몇 년 간 영헌(靈軒)에 주석(住錫)할 때에는 마치 용이 앉아 비늘을 감추는 듯하며, 산중으로 돌아와 연오(蓮塢)에서 연좌(宴坐)함에는 흡사 학이 울 때 날개를 아래로 드리우는 것과 같았다. 바야흐로 하늘에까지 들렸으니, 어찌 상께서 선사가 선교(宣敎)의 7세손이요, 법응(法膺)의 제자임을 등지 아니했겠는가. 높이 선유 방편(善誘方便)을 열고 널리 미묘법문(微妙法門)을 설하니 불교를 배우려는 무리가 시시로 운집하여 큰 회상을 이루었다. 이 때 왕이 보소(寶所)로 특사를 보내어 선중(禪衆)을 반산(頒散)하고 봉성(鳳城)으로 옮겨 오시라고 초빙하였다. 선사는 앞을 내다보는 고견으로 피차(彼此)를 생각하고, 조사의 덕을 지키면서 앙례(仰禮)의 청에 감사하며 서울을 향해 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 등(燈)을 보면서 탑(塔)을 참배하고 마음으로 그윽히 부촉(付囑)을 생각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경화(京華)에 도착하였다. <缺落> 임금이 스님의 봉의(鳳儀)를 바라보고는 귀의(歸依)할 원심(願心)이 더욱 간절하였으며, 스님의 용보(龍步)를 보고는 기꺼이 위로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다음 날 옥당(玉堂)으로 맞아 들여 법회를 열고 법상(法床)에 올라앉으시니, 임금이 스님의 선덕(禪德)을 흠양하여 다른 위인들보다 10배나 더 영특함을 깨닫고 도풍(道風)을 이어 받들었으며, 친히 삼귀의(三歸依)의 예를 폈으며, 왕은 스님의 법문으로 듣고 이제야 마음이 열리게 된 것을 한탄하면서 인연이 소중함을 절감하였다.
그 후 <缺落> 궁사(宮使)를 보내어 스님을 초빙하여 귀산선원(龜山禪院)에 주지하도록 청하였다. 이때 그곳으로 가서 악개(咢盖)를 멈추고 회상(會上)을 개설(開設)하니, 배우려는 사람이 사방으로부터 모여들어 촘촘하기가 도마(稻麻)와 같고, 찾아오는 사람이 신선처럼 달려와서 줄을 서서 오고가니 도리성혜(桃李成蹊)와 같았다. 그리하여 미혹한 것으로부터 반성하게 하며, 빈손으로 가서는 가득히 얻어서 돌아가게 하였다. 칭송하는 소리는 십방(十方)을 떨쳤으며, 고명한 이름은 천 년에 빛난다. 이는 당 나라의 장ㅁ(章ㅁ)으로 더불어 <缺落> 가히 동년(同年)으로 비교하여 말할 수 없다. 이 곳에서 연좌(宴坐)하는 동안 5년이 지났다. 이후 유종(遊宗)할 때가 임박하였으니, 왕의 <缺落> 911년 10월 1일 귀산선원 법당에서 입적(入寂)하였다. 돌아가신 모습은 살아있는 것 같았고, 과일 같은 입술은 마치 말을 하고 있는 듯 하였다. 육신을 던져 버리는 이치가 어찌 한결 같으랴. 어떤 스님은 나무 가지를 휘어잡고 열반하였고, 혹은 수도 중 그대로 입정(入定)한 듯 입적하기도 하고, 혹은 매미가 허물을 벗 듯 좌탈입망(坐脫立亡)하기도 하며, 혹은 섶을 쌓아 놓고 스스로 화장(火葬)을 하는 선사도 있었다. 선사의 세속 나이는 58세요, 승랍(僧臘)은 46이었다. 그 달 6일에 문인(門人) 등이 영구를 메고 명봉사(鳴鳳寺)의 북쪽 산기슭에 임시로 가장하였다. 장사하는 날 조객인 사서(士庶)는 개울을 가득히 메웠고, 열반의 향내는 산골짜기에 넘쳐흘렀다. 하천은 슬피 울었고, 구름과 해는 수심에 잠겼으며, 임금도 항상 스님의 현종(玄宗)을 앙모하다가 갑작스런 열반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애통해 마지아니하였으며, 시호(諡號)를 자적선사(慈寂禪師), 탑명(塔名)을 능운지탑(凌雲之塔)이라고 추증하였다. 선사의 공은 억겁을 열고 그 운(運)은 천 년으로 흘러가서 순정(淳精)에 응하여 구슬을 꿰어놓은 것과 같으니 함령(含靈)을 깨우쳐서 승경(勝境)에 출생하게 하며, 유진(遺塵)의 과일은 그 법을 베풀지 아니함이 없고, 망념(妄念)의 꽃은 같은 중생에게 그 색을 나타내지 않음이 없게 하였다. 움직이는 곳에 있으나 항상 고요하며, 또한 고요한 곳에 있으나 항상 움직여 그 묘용(妙用)은 가만히 쉬지 않았다.
그 법문을 듣는 자는 바람에 먼지를 말끔히 날려 버리는 것과 같았고, 깨달음을 얻는 사람은 마치 혁혁한 햇빛이 캄캄한 어두움을 쫓아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선림(禪林)의 기재(杞梓)이며 법역(法域)의 동량(棟樑)이요, 奈 <缺落> 등(等)은 화성(華誠)과 자종(慈宗)의 장참(墻塹)이 되었고, 군생(群生)들의 자부(慈父)이어서 병을 치료하는 의왕(醫王)과 같다 하겠다. <缺落> 법을 전해 받은 제자인 작린(綽麟), 승담(承湛) 등 100여 인은 모두 마음이 찢어지는 듯 생전에 스님과 대하여 말씀드리던 일을 생각하였으며, 선덕을 추모하여 법은을 갚고자 하였다. 其親 <缺落> 丞歆魯 官居宰輔 職관宮闈 <缺落> 왕씨(王氏)의 운기(雲氣)이며 奉竺 <缺落>의 별파(別派)인 재가(在家) 제자 상부(尙父) 김공선소(金公善紹)와 대상홍공(大相洪公)이 있었으니 인자(仁慈) <缺落> 함이 구슬과 같이 맑고, 정열은 쇠를 끊을 정도로 강직하였다. 이러한 재가(在家) 제자들이 함께 스님의 선화(禪化)에 힘입어 각각 불후(不朽)의 인연을 가졌고, 모두 도풍의 감화를 받아 한량없는 공덕을 닦았으니 법역의 주석이며, 겸하여 국가의 금탕(金湯)과 같이 튼튼한 국가의 아성(牙城)들이라 할 수 있었다. 하신(下臣) 언위(彦撝)는 학해의 미파(微派)이며 사림의 말품(末品)이면서 외람되게 봉조(鳳詔)를 받들어 비문을 짓게 되었다. 명(銘)하여 가로되/ 축건(竺乾)에서 발상(發祥)한 우리의 불교가/ 제일조인 가섭의 법통을 이어받았네!/ 멀고도 먼 서역 땅인 고향을 떠나/ 구법승(求法僧)의 원으로 동토(東土)에 전했네./ 빛나는 정법복장(正法服藏) 법통을 이어받고/ 서건(西乾)의 불심(佛心)과 동토(東土)의 제자(弟子)들이/ 이심전심 그 마음 가을 못 달빛처럼/ 청명한 여름날 구름 흘러간 산정(山頂)에/ 우뚝한 큰 나무 하늘을 찌르는 듯/ 봉림(鳳林)의 뼈통을 현궐(玄闕)에 걸어놓고/ 한수의 남상(濫觴)처럼 흐르고 또 흘러/ 도도하게 흐르는 청정한 그 법수(法水)/ 애애(靄靄)하고 무성한 선림(禪林)의 정간(貞幹)들/ 자재(自在)히 흐르고 깊고 넓은 선하(禪河)여!/ 굳건한 의지로 심원을 조복받고/ 자비는 깊고 넓어 미물도 구제했네!/ 선사의 간곡한 부촉을 이어받아/ 위법망구(爲法忘軀) 대원(大願)으로 정진하였네!/ 수행(修行)은 높고 깊어 헤아릴 수 없어/ 현성(賢聖)을 초월한 독보적인 큰 스님!/ 자비사신 그 원력(願力)은 바다와 같도/ 천진(天眞)으로 잃지 않고 잘 보호하였네!/ 이 세상 어느 것을 견고하다 말하리!/ 공자도 인생을 서천(逝川) 같다고 했거늘!/ 941년 10월 27일 세움.
명봉사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近代的 吏讀 公文書의 標本인 鳴鳳寺 鏡淸禪院 慈寂禪師 凌雲塔碑文) [放送原稿] :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명봉사 경내에 있는 비입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이 비는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 머물고 있던 자적 선사가 입적하게 되자, 태조 24년 즉 서기 941년에 세우도록 한 것입니다./ 비문에 의하면, 이 비를 세우는데 힘쓴 이는 태조 왕건은 물론, 혜윤 등의 국통 승려, 수문 등의 제자 승려, 신자들, 원길 등의 예천군청 관리, 길훤 등의 그 곳과 그 주변의 면장들, 그리고 기술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당시 정계와 종교계의 인물들을 알 수 있고, 경북 북부 지역에서는 제일 오래된 비이기도 하지만, 이 비의 중요성은 비문 중에 이두가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경주 남산 신성비문(591), 신라 민정문서(755)에도 이두가 남아있지만, 이비의 이두는 신라의 이두와는 달리 고려 초 중앙 관서인 도평성에서 신자들에게 내린 공문서였다는 것입니다. 그 양식이 이조 말까지 우리나라 관공서 공문서에서 사용한 근대적 이두체제를 갖춘 최초의 것이라는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또 고려 초의 이두 사용의 표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즉 이 비에 쓰인 표기법이나 어법은 신라시대의 이두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비문은 국어학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고, 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입니다./ 40초 간 안동 MBC Radio에서 노은규 아나운서의 소개로 방송된다고 하여 이상의 글을 다시 다음과 같이 고쳤다./ 예천군 상리면 명봉사 경내에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가 있습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이 비는 고려 태조 왕건이 서기 941년에 세우도록 한 것입니다./ 비문에 의하면, 이 비를 세우는데 힘쓴 당시 인물들을 알 수 있고, 경북 북부 지역에서는 오래된 비 중의 하나이지만, 이 비의 중요성은 비문 중에 이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의 이두는 신라의 이두와는 달리 이조 말까지 우리나라 관공서 공문서에서 사용한 이두체제를 갖춘 최초의 표본이라는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이상의 개심사지오층석탑,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 등 두 원고는 2001년 6월 15일부터 동년 8월까지 안동MBC-Radio에서 매일 몇 차례씩 방송되었다.(張炳昌 2001.6.11 作成 放送原稿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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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