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제목예천1,278:명봉사용문사연합포교소...명봉사자적선사능운탑비...
작성자장병창 @ 2021.02.22 06:13:52

  도청신도시 예천 1,278 : 명봉사용문사연합포교소...명봉사자적선사능운탑비...

---

 

  명봉사용문사연합포교소 : 布敎所設置屆 / 彙報-調査及報告-社寺/ 관보명 조선총독부 관보 제546호(昭和)/ 발행일 1928-10-22/ 분류 연속간행물 > 관보 > 조선총독부관보/ 1928년 10월 22일 정규호(546호) 기사/ 彙報 001546호(5~5면)/ 색인어 : 東洋宣敎會 洪城學潔敎會 洪城郡, 南監理敎會 長浦里禮拜堂 鐵原郡, ... 第七日安息日耶蘇再臨敎 巨里禮拜堂 德源郡, 大社敎 大邱敎會所 大邱府, 朝鮮寺刹 鳴鳳寺龍門寺聯合布敎所 醴泉郡, 神理敎 大新布敎所 釜山府, 神理敎 釜山分敎會 釜山府, 南監理敎會 碧山禮拜堂 通川郡/ 제공 조선총독부관보활용시스템(http://www.history.go.kr/2014)

 

  명봉사의 음영(鳴鳳寺의 陰影) [記事] : 윤봉률(殷豊中 敎師)의 상리면 명봉리 소재 명봉사에 대한 기사로, 예천군교육청에서 1980년에 발행한 <예천교육(醴泉敎育)> 11호 230-236쪽(7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명봉사자적선사능운탑비 : 한국사연구휘보 제86호/ 제목 高麗 初期의 帖文과 그 吏讀에 대하여; 醴泉鳴鳳寺 慈寂禪師碑의 陰記의 解讀/ 저자/편자 南豊鉉 역자 시대 기타/ 게재지 古文書硏究 5 페이지 1-19 구분 논문/ 발행처 한국고문서학회 발행지역 성남 발행일 1994/ 목차 ; Ⅰ. 序言, Ⅱ. 判讀, Ⅲ. 吏讀文의 解讀, Ⅳ. 結語(http://db.history.go.kr/1 2014)

 

  명봉사자적선사능운탑비 : 신편 한국사 9 통일신라 > Ⅴ. 문화 > 4. 언어와 문학 > 1) 이두와 언어 > (2) 차용어 : 借用語는 한 언어가 다른 언어와 접촉하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한 문화가 다른 문화로 확산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唐과의 연합에 의한 것이었다. 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당과의 접촉을 지속하여 신라는 세계의 문화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신라인의 언어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문물의 수입에 따라 한문과 한자가 받아들여지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한자어가 대량으로 국어에 수용되었다. 한자어의 증가 양상은 우선 인명의 한자어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금석문에는 姓이 나타나지 않는다. 성 대신 그 출신지가 표시되어 있다.<丹陽新羅赤城碑>(540년대)에는 大衆等(직책명)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喙部 伊史夫智 伊干□/ 喙部 西夫叱智 大阿干□/ 沙喙部 武力智 □□□/ 즉 앞에는 출신지인 6部의 명칭 탁부·사탁부 등을 쓰고 다음에는 인명과 관등명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이는 출신지가 성과 같은 구실을 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기록인 화엄경사경의 참여인 명단도 역시 성이 없이 출신지만 표시되어 있다./ 紙作人 仇叱珍兮縣 黃珍知 奈麻/ 經筆師 武珍伊州  阿干 奈麻 異純 韓舍 今毛 大舍 義七 大舍/ 南原京   文英 沙彌 卽曉 大舍/ 高沙夫里郡 陽純 奈麻 仁年 大舍 屎烏 大舍 仁節 大舍/ 이는 이 시대에도 삼국시대의 관습이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신라가 중국식 성을 쓴 것은 왕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新·舊唐書≫에는 왕이 金眞平이라는 기록과 왕의 성은 金氏, 귀인의 성은 朴氏이며 백성은 氏는 없고 이름만 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중국과의 외교를 위해서 삼국시대에도 왕의 성을 표시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화된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와서의 일이다. 성을 보여주는 최초의 신라시대 금석문은<감산사불상조성기>로 여기에 金志誠(金志全)의 이름이 보인다.<성덕대왕신종명>에는 大奈麻 金□□, 級? 金弼奚, 大角干 金邕, 角干 金良相, 阿? 金敬信, 奈麻 朴韓味 등 김씨와 박씨의 성씨가 보인다. 이 신종명의 인명은 모두 성을 가지고 있다. 비문의 형식이나 표현이 정통적인 한문인데다 왕실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듯 갖추어야 할 격식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러한 격식이 이 명문으로 하여금 참여인들의 성을 모두 기록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이후에 이루어진 이두문으로 된 조성기들이 출신지와 이름만을 기록하였고 고려의 건국에 참여하였던 공신들의 이름에 성씨가 없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신라말까지도 성을 사용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였고 그 사용도 한정된 범위였을 것이다. 신라 통일 이후 한자어화된 인명을 흔히 볼 수 있다. 위의 불상조성기와 신종명에 나오는 인명들이 그를 직접 보여주는 예들이다. 인명의 한자어화는 불교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시대의 기록인<黃草嶺眞興王巡狩碑>(6세기 중엽)에 나오는 隨駕沙門의 이름은 法藏·慧忍으로 이는 한자어로 된 法名이다. 중신들의 이름인 伊史夫智·居七夫智 등이 고유어 이름임을 생각하면 이른 시기부터 불가에서는 이미 한자어식 법명을 사용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이후의 자료에 나타나는 승려들의 법명은 모두 한자어여서 이것이 한국인들의 이름을 한자어화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말하여 준다. 신라의 상류사회에서 한자이름을 쓴 것은 왕의 시호를 처음으로 올린 것이 法興王이니 그 이후가 아닐까 한다. 眞興王의 이름은 ?麥(深麥)인데 그의<황초령순수비>와<北漢山巡狩碑>에는 眞興大王으로 기록되었으니 이 한자어 이름은 왕의 생존시에 이미 사용하였던 것이다.

 

  眞平王의 이름 白淨, 太宗武烈王의 春秋, 文武王의 法敏이 모두 한자어 이름인데 삼국통일 후의 왕명도 모두 한자어 이름으로 보아 틀림없을 것이다. 왕의 이름에 비하여 신하들의 이름이 한자어화한 것은 이보다 뒤의 일이다. 金庾信·金仁問·金歆運·薛聰 등이 한자어 이름이고 위에 든<성덕대왕신종명>에 나오는 이름들도 한자어 이름임을 보면 신라 통일 후에는 중신들 사이에서 한자어 이름이 널리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새 지명은 종래의 지명과 어떤 有緣性을 가지고 지었지만 그 성격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즉 종래의 지명은 한자어도 약간은 있었지만 대부분은 고유어였고 지명표기자의 독법도 音讀과 訓讀이 혼용되었다. 그러나 새 지명은 음독을 하는 한자어라는 점에서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일례로 종래의 지명인 推火(郡)은 ‘밀블’로 훈독하였지만 密城郡은 ‘밀성군’으로 음독만하였던 것이다.(註 1207 李基文,≪國語史 槪說≫(塔出版社, 1972), 60쪽 참조.)

 

  이것은 매우 큰 개혁이어서 고유어 지명에 익숙해진 백성들에게는 상당히 불편한 부담이었다. 그리하여 경덕왕 이후에도 새로 개정한 한자어 지명으로 통일되지 못하고 종래의 고유어 지명이 그대로 사용되었다.≪삼국사기≫의 기록들을 보면 경덕왕 16년 이후의 기록에 屈自郡·居老縣·推火郡 등의 郡縣名과 武珍州·漢山州·揷良州·沙伐州 등 개명 이전의 州名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이는 당시 행정상으로도 개명한 새 한자어 지명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고려초까지도 이어져 醴泉 鳴鳳寺의<慈寂禪師碑陰記>(941)에는 고려 초의 비석인데도 그 속현의 이름을 赤牙縣으로 쓰고 있다. 이는 ‘븕엄(縣)’으로 읽히는 고유어 지명인데 경덕왕 때는 이를 殷正縣으로 개명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경덕왕의 지명 개정 후에도 새 지명이 획일적으로 사용되지는 못하였지만 그 영향은 컸던 것으로 믿어진다. 고려시대의 지명에서 경덕왕 때 지은 새 지명을 그대로 따른 예들이 많은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신라의 官等名과 官職名은 고유어와 한자어가 섞여 쓰였다. 삼국시대부터 17관등명은 고유어로 정해져 그것이 신라말까지 이어졌으나 관직명은 한자어와 고유어가 혼용되었다. 上大等·大角干·太大角干 등은 한자어와 고유어를 혼용한 것이다. 上·大·太는 한자어로 보이고 大等·角干은 고유어이다.≪삼국사기≫직관지의 한 예를 들어 이 시대 관직명의 변화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執事省은 본명이 稟主(혹은 祖主)이었는데 진덕왕 때 執事部로 바꾸었고 흥덕왕 때 집사성으로 바꾸었다. 여기에 中侍가 1인인데 진덕왕 때 두었고 경덕왕 6년(747)에 侍中으로 고쳤다. 典大等은 2인인데 진흥왕 때 두었던 것을 경덕왕 6년에 侍郞으로 바꾸었다. 大舍는 2인인데 진평왕 때 둔 것을 경덕왕 18년에 郞中으로 바꾸었다. 舍知는 2인인데 신문왕 때 둔 것을 경덕왕 18년에 員外郞으로 바꾸었다가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사지라 했다. 史는 14인인데 문무왕 때 6인을 늘렸고 경덕왕이 郞으로 고쳤던 것을 혜공왕이 다시 史라고 하였다.(註 1208 ≪三國史記≫권 38, 志 4, 職官 上 참조.) 이들 관직명도 종래에는 고유어와 한자어가 섞여 쓰였는데 경덕왕 때 한자어로 고쳤음을 알 수 있다. 경덕왕 이후에도 사지와 같은 고유어 명칭과 시중·시랑과 같은 한자어 명칭이 섞여 쓰였으나 시대가 흐를수록 한자어화되어 가는 경향이 강한 추세였다. ....(http://db.history.go.kr/ 2014)

 

  명봉사 자적선사능운탑비 : 신편 한국사 17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Ⅱ. 문화 > 2. 문자와 언어 > 1) 문자 : 고려시대에 사용된 문자는 漢字뿐이다. 그러나 문자를 어떻게 사용했느냐 하는 운용면에서 구분한다면 크게 두 가지 문자를 사용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정통 한자이고 다른 하나는 借用 한자이다. 물론 이러한 문자사용의 전통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자리잡은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긴 하지만, 앞선 시기보다 훨씬 활용의 진폭이 넓고 깊었다.

 

  첫 번째 정통 한자는 한자를 중국 사람들과 똑같이 한문을 짓는데 사용하는 것이고, 두 번째 차용 한자는 한자를 이용하여 우리말을 적는 표기체계이다. 이 나중 문자를 흔히 漢字借用表記體系라고 한다. 우리나라 문자체계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 는 것은 이 한자차용표기이다(간단히 줄여 ‘차자표기’라고도 한다). 한자차용 표기체계는 다시 크게 문장표기와 어휘표기로 나된다. 어휘표기 는「借名」이라는 한 가지 뿐인데 차자표기의 초기단계에서 사람 이름, 땅 이름, 나라 이름, 벼슬 이름 등 여러 가지 고유명사를 적었던 표기자료를 가리킨다. 이 차명은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한문으로 적을 때에도 사용되었다. 문장표기는 중국의 책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적은 글 즉 번역문과 순수한 우리말을 글로 지은 것 즉 창작문의 두 가지로 나뉜다. 번역문은 중국식 한문에 우리말 吐를 붙여서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하는 방안이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개발되어 고려시대에도 그 맥을 이었다. “신라의 薛聰이 우리말로 아홉 가지 경서를 해독하여 후생을 가르쳤으므로 오늘날까지 학자들이 그 방법을 으뜸으로 삼고 있다”는≪三國史記≫의 기록이 바로 그것인데 이 때에 우리말 토를 흔히 口訣이라 하고 이 구결이 들어있는 번역문을 구결문이라 한다. 註 368 368 ≪三國史記≫권 46, 列傳 6, 薛聰. 口訣文에 관하여는 곧 간행될≪한국사≫21,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의 Ⅱ-2. 문화와 언어항목에서 언급될 것이다. 닫기 한편 창작문은 다시 크게 둘로 나뉘는데 그 하나는 詩歌를 중심으로 한 문예창작문이요, 또 하나는 공문서를 중심으로 한 각종 글, 즉 실용문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초기 노래인 鄕歌를 적은 표기체계를 鄕札이라 하고, 鐘·塔·碑 같은 것에 주조하거나 새겨 쓴 금석문이나 공문서 에 쓰인 다소 불완전한 우리말 표기체계를 吏讀라고 한다. 이두가 향찰에 비하여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에 다소 불완전한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까닭은 문맥이 통하면 되었기 때문에 향가에서와 같은 정밀한 표기 를 하고자 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한자의 訓과 音을 빌어 우리말을 나타내고자 한 차자표기의 원칙은 향찰이나 이두나 구결이 한결같은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위의 네 가지 가운데 차명은 신라시대에 활발했던 것이었으나 고려시대에 오면 대부분의 고유명사가 한자화하여 쇠퇴하였다. 구결은 불교와 유교의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 매우 활발하게 이용되었으나 고려 전기에 속하는 자료가 변변치 못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향찰과 이두의 사용 실태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고려 시대의 향찰 자료는 均如大師(태조 6년∼광종 24년;923∼973)의<普賢十願歌>11수와 예종(문종 33년∼예종 17년;1079∼1122)의<悼二將歌>1수 도합 12수이다. 이들 향가의 해독은 1920년대부터 시작하여 어느덧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향가의 완벽한 해독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상당한 부분이 만족할 만한 풀이에 도달하였다. 향가 해독에 활용되는 기본 원칙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註 369 金完鎭,≪鄕歌解讀法硏究≫(서울大出版部, 1980) 참조.) ... 한편 이두(또는 이두문)는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작성되었다. 향찰표기는 표기상의 완벽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서 까다로운 점이 있으나, 이두는 문맥이 통하는 정도에서 얼마간의 불완전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서 향찰보다는 부담이 적을 뿐아니라 실용문이었다는 점에서도 이두의 발전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또 향가의 경우, 그 시가 장르가 점차 새로운 형태로 변모하여 한편으로는 景幾體歌 같은 것으로 흡수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본격적인 한문시가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향찰표기는 자연스럽게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전기에 활발했던 이두문은 상당량이 유실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慈寂禪師凌雲塔碑陰銘(941년)/ 2. 星州石佛坐像背銘(967년)/ 3. 校里磨崖石佛(977년)/ 4. 開心寺石塔記(1010년)/ 5. 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1031년)/ 6. 普賢寺石塔記(1044년?)/ 7. 通度寺國長生石標(1085년)/ 8. 密陽國長生石標(1085년)/ 9. 蔚州國長生石標(1085년)/ 10. 羅州西門內石燈記(1093년)/ 11. 僧正景廉石棺銘(1102년)/ 12. 川北觀世音寺鍾銘(1107년)/ 13. 密陽五層石塔造成記(1109년)/ 14. 楊等寺半子(1161년)/ 이들 이두자료 가운데 언어문자사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첫번째 자료인<자적선사능운탑비음명>이다. 이 탑비는 경상북도 醴泉郡 上里面 鳴鳳里 鳴鳳寺에 있는데, 중앙관서인 都評省에서 절에 있는 승도들에게 내린 帖文을 그대로 비석에 새겨 넣은 것으로 그 당시 고문서 양식 및 이두의 발달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되고 있다.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페이지만족도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성에 만족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