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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1,355:묵은재...묵재일기...
작성자장병창 @ 2021.04.22 06:05:26

  도청신도시 예천 1,355 : 묵은재...묵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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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은재 : ㅇ 위치 : 감천면 포1리와 현내리 경계지점, ㅇ 내용 : 감천면 포1리 할미성을 지나 현내(縣內)로 넘어 가는 고개를 묵은재라 한다. 1) 약 200년 전에는 산이 가로 막혀 있었으나 동민들이 들로 나가기 위하여 산을 뚫어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다른 동네의 가마가 무척 급한 일로 이 재를 넘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마침 그 때는 해가 질 무렵이어서 서둘러 이 재를 넘어 가는데, 갑자기 교꾼의 발이 땅에 붙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서 하는 수 없이 다시 내려와 산 아래 동네에서 하룻밤을 묵고 날이 밝은 후 그 다음 날 아침 다시 이 재를 넘어 가니 쉽게 넘을 수 있었다 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는 동네 사람들은 해가 지고 난 뒤에는 이 재를 넘을 경우에는 하루를 묵고 난 뒤에 넘어야 한다고 하여 “묵은재”라 부르게 되었다. 2) 또한 이곳을 오기 전 할미성에는 옛날 어느 풍수(風水)가 여기를 지나다가 지형이, “할머니가 손자(孫子)를 안고 있는 형(老姑抱孫形)이니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자손(子孫)이 번창할 것이다”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후 1921년 감천면사무소를 현내리에서 이곳 할미성(現 浦1里)으로 옮김에 따라 마을이 번창(繁昌)하게 되었다 한다.(甘泉面홈페이지 2013)

 

  묵은재 : 감천면 전설설화/ 2011.12.22./ 경우에는 하루를 묵고 난 뒤에 넘어야 한다고 하여 “묵은재”라 부르게 되었다. 2) 또한 이곳을 오기 전 할미성에는... 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후 1921년 감천면사무소를 현내리에서 이곳 할미성(現 浦1里)으로.../ blog.daum.net/ibjc115/ 새천년 희망의 땅 웅..(daum 2017)

 

  묵은재 : 묵은재(예천의 전설)/ 2005.10.10./ 1리} 감천면 포1리 할미성을 지나 현내로 넘어가는 고개를 묵은재라 한다. 약 2백 년 전에는 산이 가로 막혀 있었으나 동민들이 들로 나가기 위해 산을 뚫어 길을 만들었다.../ cafe.daum.net/gaepo30/HnN/ 개포30회동기회 | 댓글 2(daum 2017)

 

  묵은재골 : →무근재골

  묵재선생일고(黙齋先生逸稿) : [한국국학진흥원-고도서]/ ...商)이고 아버지는 장수훈도(長水訓導) 형(馨)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판서(判書)를 지낸 구령(龜齡)의 손자인 돈용교위(敦勇校尉) 양명(揚名)의 따님이다. 예천(醴泉) 다인현(多仁縣) 반용리(蟠龍里)에서 태어난 그는 8세에 가정에서 소학을 익혔.../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역사자료󰡑이다.//

 

  묵재일고(黙齋逸稿) [冊] : 예천군 다인현 반룡리 출신인 박사희(朴士熹, 1508˜1588)의 시문집으로, 2권 1책, 도(圖), 석인본(石印本), 32×21.1㎝. 박세기(朴世基)가 편집하여 1935년 간행하였다.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은 20.2×17㎝, 유계(有界), 반엽(半葉)은 10행 18자, 주쌍행(註雙行), 내향 이엽 화문 어미(內向二葉花紋魚尾), 선장(線裝), 표제(表題)는 묵재일고(黙齋逸稿), 서(序)는 1908년 중양절(重陽節)에 후학(後學) 완산(完山) 유필영(柳必永, 1841˜1924)이 썼고, 발(跋)은 1934년 중양절(重陽節)에 후학(後學) 진성(眞城) 이화성(李和聖)이 썼고, 지(識)는 13대손 세기(世基)가 썼다.

 

  1935년 7월 15일에 경북 안동에서 발행하였다. 지질(紙質)은 저지(楮紙)이다. 저자의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덕명(德明), 호는 묵재(黙齋) 또는 반계(蟠溪), 할아버지는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효상(孝商)이고, 아버지는 장수훈도(長水訓導) 형(馨)이며,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판서(判書)를 지낸 구령(龜齡)의 손자인 돈용교위(敦勇校尉) 양명(揚名)의 따님이다. 예천(醴泉) 다인현(多仁縣) 반용리(蟠龍里)에서 태어난 그는 8세에 가정에서 소학을 익혔고, 아버지가 따로 별장을 한 구역 내주어 공부하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성장해서는 향시에 여러 차례 합격했으나 예시(禮試)에 낙방을 거듭하게 되자 과거를 단념하였다. 1538년 이황을 찾아뵙고 제자의 예를 올렸다. 성리서 연구에 몰두하였고, 학행이 인정되어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문집은 권두에는 1908년 류필영(柳必永)이 쓴 서문과 <세계도(世系圖)>가 보인다. 권1에는 부 2편, 시 3, 제 15수, 책 1편, 편지 2편, 잡저 4편, 그리고 제문 1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2는 부록으로 저자의 생애와 교유를 알려주는 많은 문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권말에는 이화성(李和聖)과 13대손 박세기(朴世基)의 발문이 붙어 있다. 저자는 일찍이 산림에 은거하여 이황을 찾아뵙고 줄곧 성리서에 침잠하여 남다른 열정을 보이며, 현실에도 관심을 보였다. <독춘추대수무맥묘(讀春秋大水無麥苗)>에서는 자연의 재앙으로 인한 민생의 질곡을 근심하였고, <대용인책(對用人策)>에서는 용인(用人), 탁인(擢人)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같은 글에서 당시 인재 선발 방식의 부패를 고발하고 그 대응책으로 공명한 인사 정책을 주장하고, 경술하는 선비를 우대하여 공경의 반열에 참여시켜야만 산림에 은거하는 선비들도 정계에 진출할 것이라고 했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 본 문집은 규모나 구성 그리고 내용면에서 매우 소략한 것이 흠이다. 그러나 부족한 가운데에서 저자의 학문적 지향을 엿볼 수 있고, 더구나 이황과 관련한 부록 문자들은 퇴계학 연구의 총체적 전망에 도움을 준다. 또한 저자의 시로 남아 있는 것은 대체로 자연경물을 통한 고결하고 한적한 성정의 표출을 위주로 한 것이 특징이다. 송대(宋代) 소옹(蘇雍)의 격양시(擊壤詩)에서 풍기는 관물(觀物)의 정서가 저자의 시에서도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韓國國學振興院 嶺南士林文集 2004)

 

  묵재일고(黙齋逸稿) [冊] : 예천군 다인현 출신인 박사희(朴士熹 ; 1508~1588)의 시문집이다. 박사희의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덕명(德明), 호는 묵재(黙齋) 또는 반계(蟠溪)이다. 이 책은 1935년에 간행되었다. 문집은 2권 1책으로, 권두에는 1908년 유필영(柳必永)이 쓴 서문과「세계도(世系圖)」가 보인다. 권1에는 부 2편․시 3제 15수․책 1편․편지 2편․잡저 4편 그리고 제문 1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2는 부록으로 저자의 생애와 교유를 알려주는 많은 문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권말에는 이화성(李和聖)과 13대손 박세기(朴世基)의 발문이 붙어 있다. 박사희는 일찍이 산림에 은거하여 이황을 찾아뵙고 줄곧 성리서에 침잠하여 남다른 열정을 보이며, 현실에도 관심을 보였다.「독춘추대수무맥묘(讀春秋大水無麥苗)」에서는 자연의 재앙으로 인한 민생의 질곡을 근심하였고,「대용인책(對用人策)」에서는 용인(用人), 탁인(擢人)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같은 글에서 당시 인재 선발 방식의 부패를 고발하고 그 대응책으로 공명한 인사 정책을 주장하고, 경술하는 선비를 우대하여 공경의 반열에 참여시켜야만 산림에 은거하는 선비들도 정계에 진출할 것이라고 했다. 본 문집은 규모나 구성 그리고 내용면에서 매우 소략한 것이 흠이다. 그러나 부족한 가운데에서 저자의 학문적 지향을 엿볼 수 있고, 더구나 이황과 관련한 부록 문자들은 퇴계학 연구의 총체적 전망에 도움을 준다. 또한 저자의 시로 남아 있는 것은 대체로 자연경물을 통한 고결하고 한적한 성정의 표출을 위주로 한 것이 특징이다. 송대(宋代) 소옹(蘇雍)의 격양시(擊壤詩)에서 풍기는 관물(觀物)의 정서가 저자의 시에서도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박사희의 할아버지는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 효상(孝商)이고 아버지는 장수 훈도(長水訓導) 형(馨)이며,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판서(判書)를 지낸 구령(龜齡)의 손자인 돈용교위(敦勇校尉) 양명(揚名)의 따님이다. 예천(醴泉) 다인현(多仁縣) 반용리(蟠龍里)에서 태어난 그는 8세에 가정에서 소학을 익혔고, 아버지가 따로 별장을 한 구역 내주어 공부하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성장해서는 향시에 여러 차례 합격했으나 예시(禮試)에 낙방을 거듭하게 되자 과거를 단념하였다. 1538년 이황을 찾아뵙고 제자의 예를 올렸다. 성리서 연구에 몰두하였고, 학행이 인정되어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목차는, 권지일(卷之一)의 부(賦)에 태간부(笞諫賦), 재단부(在袒賦)이고, 시(詩)에 격양정팔영(擊壤亭八詠), 등암춘폭(燈巖春瀑), 흥림하운(興林夏雲), 사제추월(沙堤秋月), 송대동설(松臺冬雪), 동암조욱(東巖朝旭), 남포만우(南浦?雨), 서봉석조(西峰夕照), 북촌야화(北村夜火), 류미숙고산유거(柳美叔孤山幽居), 사천륙경(斜川六景), 문암동천(門巖洞天), 건지송(乾支松), 룡수청람(龍峀晴嵐), 운봉호월(雲峰皓月), 호탄모범(號灘暮帆)이고, 책(策)에 대용인책(對用人策)이고, 서(書)에 여김돈서(與金惇?), 답수남량손(答守男兩孫)이고, 잡저(雜箸)에 의당중서사인고계보사사종유(擬唐中書舍人高季甫謝賜鍾乳)이고, 표(表)에 독춘추추대수무맥묘(讀春秋秋大水無麥苗), 송감종편서(宋鑑終編序), 대광분회소식(大廣盆會小識)이고, 제문(祭文)에 제퇴도선생문(祭退陶先生文)이다.

 

  권지이(卷之二)는 부록(附錄)으로 기증(寄贈), 만사(輓詞), 마곡정사봉안문(磨谷精舍奉安文), 상향축문(常享祝文), 승원시고유문(陞院時告由文), 가전실적(家傳實蹟), 도산문현록(陶山門賢錄), 선성읍지(宣城邑誌), 가장(家狀), 묘지(墓誌), 묘갈명(墓碣銘), 행장(行狀), 서계유허비명(書溪遺墟碑銘), 반룡동기(蟠龍洞記), 격양정기(擊壤亭記), 발(跋)이다.(韓國國學振興院 嶺南士林文集 2004)

 

  묵재일고(黙齋逸稿) [冊] : 예천군 다인현 출신인 박사희(朴士熹 ; 1508~1588)의 시문집이다. 박사희의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덕명(德明), 호는 묵재(黙齋) 또는 반계(蟠溪)이다.

 

  이 책은 1935년 간행되었다. 문집은 2권 1책으로, 권두에는 1908년 유필영(柳必永)이 쓴 서문과 「세계도(世系圖)」가 보인다. 권1에는 부 2편․시 3제 15수․책 1편․편지 2편․잡저 4편 그리고 제문 1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2는 부록으로 저자의 생애와 교유를 알려주는 많은 문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권말에는 이화성(李和聖)과 13대손 박세기(朴世基)의 발문이 붙어 있다. 박사희는 일찍이 산림에 은거하여 이황을 찾아뵙고 줄곧 성리서에 침잠하여 남다른 열정을 보이며, 현실에도 관심을 보였다. 「독춘추대수무맥묘(讀春秋大水無麥苗)」에서는 자연의 재앙으로 인한 민생의 질곡을 근심하였고, 「대용인책(對用人策)」에서는 용인(用人), 탁인(擢人)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같은 글에서 당시 인재 선발 방식의 부패를 고발하고 그 대응책으로 공명한 인사정책을 주장하고, 경술하는 선비를 우대하여 공경의 반열에 참여시켜야만 산림에 은거하는 선비들도 정계에 진출할 것이라고 했다. 본 문집는 규모나 구성 그리고 내용면에서 매우 소략한 것이 흠이다. 그러나 부족한 가운데에서 저자의 학문적 지향을 엿볼 수 있고, 더구나 이황과 관련한 부록 문자들은 퇴계학 연구의 총체적 전망에 도움을 준다. 또한 저자의 시로 남아 있는 것은 대체로 자연경물을 통한 고결하고 한적한 성정의 표출을 위주로 한 것이 특징이다. 송대(宋代) 소옹(蘇雍)의 격양시(擊壤詩)에서 풍기는 관물(觀物)의 정서가 저자의 시에서도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박사희의 할아버지는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 효상(孝商)이고 아버지는 장수 훈도(長水訓導) 형(馨)이며,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판서(判書)를 지낸 구령(龜齡)의 손자인 돈용교위(敦勇校尉) 양명(揚名)의 따님이다. 예천(醴泉) 다인현(多仁縣) 반용리(蟠龍里)에서 태어난 그는 8세에 가정에서 소학을 익혔고, 아버지가 따로 별장을 한 구역 내주어 공부하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성장해서는 향시에 여러 차례 합격했으나 예시(禮試)에 낙방을 거듭하게 되자 과거를 단념하였다. 1538년 이황을 찾아뵙고 제자의 예를 올렸다. 성리서 연구에 몰두하였고, 학행이 인정되어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http://www.koreastudy.or.kr 2005)

 

  묵재일기 : 季夏六月 小 乙未/ 상위서지: 묵재일기 상(黙齋日記 上) > 3冊 > 嘉靖二十五年 丙午/ 저자: 李文楗/ 분류: 고도서 > 사부(史部) > 잡사류(雜史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 총서/ 묵재일기 상/ 3冊/ 嘉靖二十五年 丙午/ 季夏六月 小 乙未/ 初九日甲午 : 陰夕晴. ○居純家. ○服膏, 下血. ○政院 安孫伊辭歸, 給米太各一斗․扇帽各一․藿五片以送, 連日留此饋之, 爲其持冊來也, 又於醴泉?前簡, 請給粮. ○京妓卓文兒來受咸安․晋州牧了簡, 求上京粮也. ○二道上南亭邀之, 上與着碁, 暮牧令公巡郊來會, 與着一局, 夜話而罷. ○宋百祥來見, 安?․安寅亦來見, 共上赤山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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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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