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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1,530 : 밀밭골...밀양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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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골 : 자구산 옥녀봉 묘적봉 도솔봉!/ 2010.01.14./ 동서울를 출발하여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벌방교를... 많이 소요될 것이 염려되어 산행코스를 약간 줄이기 위해 밀밭골에서 시작하는 코스로 변경하여 벌방교를 향한 .../ cafe.daum.net/OGmountain/QnaP/ 오지산행(daum 2017)
밀성 박(密城朴) [姓] : 득관조(得貫祖)는 언침(彦침 : 朴赫居世의 30世孫, 密城大君), 중시조는 언부(彦孚 : 太師, 密城府院君)이다. 예천 입향조는 치온(致溫 : 天卿의 曾孫, 文科, 佐命功臣, 郡守)인데, 치온의 맏아들 유원(由元)이 개령 현감(開寧縣監) 때에 단종의 손위를 듣고 벼슬을 버리고 가족을 거느리고 야간만 걸어서 9일 만에 상리면 도촌리 가재봉(佳哉峰) 아래에 도착하여 은거를 정하고 종로(終老)하였는데, 그 후손에는 대소과(大小科)에 급제한 이가 많았고, 문학이 저세(著世)한 이가 많았고, 그 자손은 현재 상리면 도촌리와 호명면 형호리, 인근 안동, 문경, 상주, 영주 등지에서 천여 호가 살고 있다. 호명면 형호리에는 문도(文道)의 양한당(養閒堂)이 있다.(禮鄕醴泉 1994, 譜學事典 1994)
밀성현 : 사직 신기경이 여러 가지 시무책에 대해 상소하다/ 서명 정조실록 (정조 15년)/조선왕조실실록 태백산본/ 날짜 1791-09-19(음)/ 분류 고전국역서 > 역사 > 사서류(史書類)/ 정조 33권, 15년(1791 신해 / 청 건륭(乾隆) 56년) 9월 19일(신묘) 3번째 기사/ 사직 신기경(愼基慶)이 상소하기를, “황정(荒政)5243) 가운데 큰 것은 용도를 줄이고 낭비를 없애며 위를 덜어서 아래를 보태는 것 이상이 없으니, 금주법(禁?法)을 시행하여 술도가를 없애 백성들의 식량을 넉넉하게 하고 표재(俵災)를 하되 중앙의 것을 나누어줌으로써 실다운 혜택을 받도록 하소서. 수원(水原)의 민가를 보살펴주는 정사로서는 본부에 보관중인 전세(田稅)를 적절히 헤아려 발매하되 기근 구제법처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전에 과거 시험의 폐단은 이루다 셀 수 없을 정도이고 향교와 서원의 분쟁은 보는 사람이 대신 부끄러운 정도였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소학(小學)》을 강구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서울은 사학(四學)에서, 시골은 단체의 모임에서 이 책을 외우는 것으로 예비 시험의 합격을 주는 법으로 삼았으니, 참으로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그것을 가르치고 익히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백성의 풍속이 아름다워질 수 있겠습니까. 이번 과거 시험에서 《소학》을 강받도록 신칙하였으나 혹 곡례(曲禮)를 전례(典禮)로, 친지(親指)를 시지(視指)로 읽는 자가 있었으니, 이 어찌 관리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안으로는 사학(四學)에서, 밖으로는 각 고을에 이르기까지 각별히 《소학》을 공부시키고 평가를 엄격히 하게 하며 그 공부한 것을 시험보아 꼴찌에 해당하는 자는 서울의 경우는 승학시(陞學試)를 보지 못하게 하고 시골의 경우는 유안(儒案)에 끼이지 못하게 하면, 서울의 방탕한 젊은이들과 시골의 신역을 겁내는 자들이 반드시 장차 마음을 가다듬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군현에 관한 제도는 혹은 지형에 따르기도 하고 혹은 요충지에 따르기도 하여 개의 이빨처럼 서로 맞물리는 형세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리가 멀리 떨어져 폐단이 매우 심한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의 소망에 따라서 바로잡았으니, 영양(英陽)과 순흥(順興) 등의 고을이 그런 경우입니다. 옛 영풍현(永豊縣)은 안변(安邊)의 한쪽 구석에 위치하여 안변과의 거리가 수백 리인데, 높은 산이 빙 둘러 있고 중앙에는 큰 들판이 열려 있어 수천 호의 주민들이 매우 부유하게 살지만 관부(官府)가 너무 멀리 떨어져 원통한 일이 있어도 하소연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대책을 묘당에 물어 선처하소서. 옛날의 밀성현(密城縣)은 상주(尙州)와 예천(醴泉) 사이에 있었는데, 어느 때 혁파해서 상주에 속하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중간에 또 단밀(丹密) 등 네 면(面)을 나누어 상주에 붙이고, 다인(多仁) 등 네 면은 예천에 소속시킴으로써 두 고을의 소재지까지는 거리는 다 백여 리나 되는데, 그 여덟 면에 사는 사람들은 7천 호로 토양이 비옥하고 마을이 흥성하며 고을 소재지였던 옛터와 관리의 자손들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지형으로 말하면 예천이 다인과는 용궁현(龍宮縣)을 넘어서 삼강(三江)이 그 사이를 갈라 놓고 있으며, 단밀이 상주와는 거리가 매우 떨어져 있고 두 강이 그 사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요충지로 말한다면 동래부(東萊府)로 통하는 직로(直路)가 전부 이 두 경계 사이에서 모이니, 진정 한 지역의 요충지입니다. 비안(比安)·함창(咸昌)·상주·예천과의 거리는 거의 2백 리에 가까운데, 공연히 텅 비어 있습니다. 과거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이 승승장구한 것도 이 길에 가로막고 지키는 시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당시 미리 한 군을 설치하여 견고한 만경(萬景)과 비봉(飛鳳) 두 산으로 차단하고 험난한 위수(渭水)와 낙동강의 세 나루를 끼고서 높이 성을 쌓아 죽음으로써 굳게 지켰더라면 그들이 어찌 감히 이처럼 처참하게 돌파하여 유린할 수 있었겠습니까.
밀성현의 읍을 복구하고픈 소망은 모든 백성들이 한 입처럼 말합니다. 백성들의 심정이 이와 같으니, 비록 약간의 어려운 점이 있더라도 어찌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 경은 극노인으로서 한번 경연에서 만난 뒤로 자주 숨김없는 말을 올리니, 그 정성이 가상하다. 즉시 도백으로 하여금 음식물을 넉넉히 내리도록 하겠다. 앞으로도 만약 말할 만한 것이 있으면 부디 종전처럼 하고 게을리하지 말라.” 하였다./【태백산사고본】 33책 33권 26장 B면 /【영인본】 46책 243면 /【분류】 *정론(政論) / *사법-법제(法制) / *인사-선발(選拔) / *군사(軍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농업(農業) / [註 5243]황정(荒政) : 기근을 구제하는 정사. ☞ / ... 제공 조선왕조실록(http://www.history.go.kr/2014)
밀양골 [골] : 용문면 대제리(大渚里)에 있는 골짜기이다.
밀양 박(密陽朴) [姓] : 시조는 박혁거세(朴赫居世), 중시조는 언침(彦침 : 景明王의 長者, 密城大君, 密城 朴氏와 함께 1985年 人口 2,704,819名)이다. 1) 용궁면 원당리(元唐里) 입향조는 갑손(甲遜, 13世孫, 戶參), 유천면 매산리 퇴치리(退致里) 입향조는 몽성(夢聖, 1623-1708, 甲遜의 曾孫子, 戶曹正郞)이다. 유천면 가리 중앙산(中央山)에 몽성의 농암정(農巖亭)이 있다. 2) 개포면 우감리 도장리(道庄里) 입향조는 원(源, 1550-1633, 甲遜의 孫子)이다.(禮鄕醴泉 1994, 譜學事典 1994)
밀양 박 [記事] : <학서선생문집[鶴棲先生文集, 19세기]>에 실린 류태좌[柳台佐]의 기사로, 그 내용은, “密陽朴氏族譜序/ 酒泉、吾接壤也。衡湖朴氏、世德之懿、文學之盛、一方士/ 友之所推重、而特恨十二世以上譜牒、靡有所稽、以爲/ 殷山君後裔、貫稱殷山者累世、蓋緣中世孤寡單孑、且/ 經兵?、家乘帳籍蕩佚不傳、朴氏嘗以是傷慟焉。幸於/ 去年辛卯秋、朴斯文在圭甫、偶接陟州士人朴周錫、得/ 見密陽朴氏、去辛酉所刊舊譜、其十一代祖郡守公、十/ 二代祖縣監公、名諱、官銜、配、位昭然載錄、而郡守公之/ 高祖、卽?山府院君/ 銀山乃密陽舊號、而襲貫封爵者/ ▶ Page 050/ 也。夫以朴氏之譜、而彼此兩本之中、兩世之名諱相符、/ 官銜相符、配位亦相符、銀之爲殷、不過喪難後字音傳/ 訛之致也。其爲祖銀山而貫、密陽十分明白、無可疑者、/ 顧以愼重之義、更攷於密朴、他譜廣詢於遠近、知舊又/ 千里入都、呈?於掌版籍之京兆衙門、祇受題判然、後/ 改修譜牒、以復其貫、鄕曰。密陽朴氏、族譜其呈?文中、/ 狄武襄之不祖梁公、無所徵也。司馬公之自稱程某、不/ 忘本也。不詳則不冒、旣知則還本、均是天理人情之。不/ 容已云爾者、誠眞正語也。氏系旣明、譜牒重新、朴友宗/ 喆明甫來、請弁卷之文於台佐、顧惟陋拙、何敢當是役/ ▶ Page 051/ 事契之重、終有所不得辭者、遂再拜斂?、而仰復曰。於/ 乎碩果之理、陽道之所以復也。追遠之誠、民德之所以/ 厚也。朴氏之龍蛇遭難、基州竄寓、至於遺譜牒而失貫/ 鄕、則山地之消剝、可謂極矣。而今其一門諸族、式蕃以/ 昌世德文學、蔚有可觀靈芝之根、醴泉/ 之源、闡發著明/ 於世、玆豈非七日來、復萬化方暢之幾乎。遠者人之所/ 易忽也。而能追之合謀密城之宗、瓣香銀山之墓、其誠/ 意之流通、不但已德之厚、而亦將有以厚民德矣。舊譜/ 原敍、引朱子之訓曰。譜系明、然後孝悌之道、生忠厚之/ 風行。凡所以趾先啓後、敦宗處鄕之眞詮、果不外於存/ ▶ Page 052/ 悌忠厚四字而已。今修是譜之、朴氏諸賢其各於此益/ 勉以慰、姻黨士友之望、是所拱以?也。”이다.(www.koreastudy.or.kr 2006)
밀양 박 [記事] : 봉화군사/ 간행년 : 2002/ 저자 : 봉화군/ 발행처 : 봉화군/ 第2章 門中小史/ 밀양박씨(密陽朴氏) : 밀성박씨(密城朴氏)라고도 한다. 박씨의 대종인 밀양박씨는 신라 경명왕의 제일 왕자인 밀성대군 언침(彦沈)을 시조로 하고 있는데 봉성면 봉양리와 물야면 북지리에 문목공 송당 박영(朴英)의 후예가 살고 있으며, 문경공 정제 박의중(朴宜中)의 13세손인 동포 진영(震英)이 조선 선조 22년에 당화를 피하여 상운면 설매리에 은거하여 살았다. 후손이 설매와 그 외 각처에 살고 있다. 그리고 문단서원 마을에 입향조는 통정대부 壽違이다. 25대조인 駱村 忠元(우찬성)은 영월부사시 현몽으로 단종 능을 찾아 복원한 충신이고 고조부 啓賢은 병조판서였고 조부인 承宗은 영의정 父는 自興인데 대사헌으로 명문가이다. 입향 후 자손이 100호였으나 각처로 떠나고 현재는 약 30여 호가 살고 있다. 예천군내에는 상리면 도촌, 호명면 형호, 용궁면 회룡 등지에 살고 있다.(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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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